My Diary is an SSS-class reward RAW novel - Chapter 211
211화. 붉은 두건 (1)
다음 날 새벽, 나는 도나리가 쪽지로 적어준 위치에 도착했다.
인천항 어느 구역에 도달하자, 백제 그룹의 로고가 박힌 커다란 선박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내가 거대한 배를 올려다보고 있던 때, 은색 안경에 가르마를 깔끔하게 넘긴 처음 보는 남자가 아는 척을 해왔다.
“이유영 길드장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협회장님의 명령으로 왔다면서 나를 배 안으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익숙하게 배에 올라탄 남자는 작은 선실로 향했다.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며 선실 내부를 보여줬는데, 방 안에는 바다가 보이는 창과 이불 깔린 침대까지 놓여 있었다.
그는 이곳을 쓰면 된다고 친절하게 알려줬다.
“도착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남자는 내게 정중히 인사한 뒤 문을 닫고 나갔다.
이건 뭐, 밀항이 아니라 여객선을 탄 수준이었다.
곧 뱃고동이 울리며 배가 출발했다.
선실 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더니, 웅웅대는 모터 소리와 철썩이는 파도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익숙해질 때쯤 서서히 잠이 밀려왔다.
그런데 문득, 선실 문고리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달칵
날 안내해준 남자가 다시 온 것 같지는 않고, 누군가 찾아올 거라는 말도 없었으니. 불청객이 찾아온 듯했다.
방금까지 밀려오던 졸음이 단번에 사라졌다. 나는 만성의 스파이 놈들한테 시달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 뒤에 몸을 숨기며 습격당하기 전에 먼저 습격할 생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때, 문고리가 돌아가며 서서히 선실 문이 열렸다.
끼익
나는 긴장하며 열리는 문을 지켜봤다.
불청객은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열며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살금살금 내부로 들어온 녀석은 어리숙하게 객실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녀석은 선원이 입는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이 배의 선원은 아니었다. 얄쌍한 체격과 모자를 눌러썼음에도 숨길 수 없는 흰 얼굴, 샌님 같은 분위기가, 녀석이 뱃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어, 길드장님…?”
녀석은 비어있는 선실을 보고 당황한 듯 목소리를 냈다.
그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저건 날 죽이러 온 만성의 스파이도 아니고, 이 배의 선원도 아닌, 내 길드원, 진준성이었다.
“아, 여기 계셨구나! 안 계신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요.”
진준성은 침대 뒤에 숨어있던 나를 발견하며 헤헤거렸다.
나는 황당함과 안도, 기가 막혀서 생겨나는 분노가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며 녀석을 쳐다봤다.
“네가 왜 여깄어?”
“어제 협회장님이랑 대화하시는 거 다 들었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길드장님 혼자 가시는 건 너무 위험할 것 같아서요.”
위험할 걸 알면서도 따라왔다는 얘기로 들렸다.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이 녀석을 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이 영리한 녀석은 어차피 본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혼내봤자 진심으로 뉘우칠 리도 없고, 이미 배가 떠난 이상 당장 이 녀석을 돌려보낼 방안도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일 걱정되는 것부터 물었다.
“어머니께 뭐라고 말씀드렸어?”
“…부협회장님이 시킨 일이 있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뭐라고 하셔?”
“엄마는 이참에 협회원 되면 안 되냐고 할 정도로 부협회장님을 신뢰하셔서, 이번에도 잘하고 오라고… 하셨죠.”
진준성은 말하다가 죄책감이 들었는지 쭈뼛거렸다.
부협회장이라면 진준성의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도록 도와주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진준성의 어머니께 아드님이 저랑 같이 중국으로 밀항할 거라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보단, 차라리 거짓 정보로 안심시켜 드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진준성에게 핸드폰을 내놓으라고 강요한 뒤, 녀석의 핸드폰으로 윤지석과 고주연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이유영입니다. 사정이 생겨 진준성과 같이 출국하게 되었습니다. 고주연 씨는 김신욱과 같이 예정대로 비행기를 타주세요. 걱정하실까 봐 문자 남깁니다.」
진준성은 내가 남긴 메시지를 보며 알아서 반성하는 듯했다.
당장 이 녀석을 돌려보낼 방법이 없으니, 데려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밀려오는 피로에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진준성은 침대 옆에 앉으며 말했다.
“저는 길드장님 도와드리러 온 건데, 길드장님은 제가 반갑지 않으신가 보네요.”
“내가 반겨주길 바랐으면 비행기를 타고 왔어야지.”
“……길드장님이 핸드폰도 안 맞추고 그냥 옷이랑 돈만 챙겨서 중국 갈 게 뻔한데 어떻게 내버려 둬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핸드폰도 안 맞췄고 내 짐가방 속에는 옷이랑 돈, 화신만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지구에 혼자 남아서 몇 년을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는 법이다.
나는 돌아누우며 말했다.
“뭔 일 생기면 깨워라.”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 지금이라도 잠을 자둬야 했다.
진준성이 나한테 아저씨 같다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이 들었다.
***
오후 6시.
배는 별다른 사고 없이 칭다오에 정박했다.
나는 진준성과 함께 나를 안내해줬던 사람을 따라, 차를 타고 부둣가에서 벗어났다.
그는 내 옆에 있던 진준성을 보고 잠시 당황했지만, 별다른 질문 없이 우리를 안내해줬다.
목적지에 도달한 그는 명함 하나를 건네며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갔다.
나는 명함을 집어넣으며 도나리가 말한 대로, 항구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술집을 찾으러 갔다.
“협회장님 말인데요, 백제 그룹 오너의 딸이라는 소문 있잖아요. 그거 사실인가 봐요.”
진준성은 조금 전 내가 받은 명함에 적힌 ‘비서실장’이라는 직함을 보고, 아까부터 음모론을 내세우고 있었다.
비서실장이나 되는 사람을 밀항 도우미로 만든 걸 보면 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나리는 원래 평범한 녀석은 아니었고,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나는 잠시 진준성을 쳐다봤다.
지금부터 주점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 녀석의 겉모습이 어딜 봐도 미성년자였다.
만약 신분증을 요구하기라도 하면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나는 항구 근처 랜드마크처럼 보이는 곳에 멈춰 서며 말했다.
“잠깐 이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어.”
“네? 왜요?”
“주점에 미성년자를 데리고 갈 수는 없잖아.”
진준성은 잔뜩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나 혼자 다녀오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걸 나도 알고, 진준성도 알 텐데, 진준성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저 혼자 있어요…? 여기선 핸드폰도 못 쓰는데.”
“심심하면 1000까지 숫자 세고 있어. 금방 다녀올 테니까.”
“……길드장님 이러실 때마다 진짜 스무 살은 차이 나는 것 같아요.”
실제로 그 정도 차이가 나긴 할 것이다.
진준성은 불쌍한 척하는 전략으로는 나를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앞장서서 걸어가며 얘기했다.
“길드장님, 일을 해결하고 오는 사이에 잠깐 두고 간 동료가 납치당해서 나중에 사건이 더 커지는 클리셰 모르세요? 제가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요.”
“누가 습격하면 일단 붙잡아놔. 나중에 인질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대뜸 총 쏘진 말고.”
“납치될 저를 걱정해주셔야죠, 납치한 놈이 총 맞을까 봐 걱정하시면 어떡해요?”
진준성과 티격태격하는 사이, 도나리가 얘기한 곳으로 추정되는 술집에 도달하고 말았다.
‘청해객잔’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오래된 가게로, 다른 곳에 비해 손님이 적어 보였다. 이곳만 묘하게 주변 상가와 어울리지 못하고 동떨어진 분위기를 풍겼다.
여기가 확실한 것 같은데. 막상 들어가려고 하니, 진준성이 납치 클리셰 같은 쓸데없는 말을 하는 탓에 혼자 두고 가는 것도 거슬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입고 있던 녹색 점퍼를 벗어서 녀석에게 걸쳐줬다. 그리고 아이템창에서 ‘도깨비 가면’을 소환해서 건넸다.
이 가면을 쓰면 모르는 아저씨처럼 얼굴이 변하기 때문에, 적어도 미성년자로 의심 살 일은 없을 것이다.
“일단 같이 가는데, 들어가선 얌전히 있어.”
내 말에 진준성은 히죽거리며 주는 대로 덥썩덥썩 받았다.
내 옷을 입고 도깨비 가면까지 쓰니, 진준성은 이 동네에서 20년은 살았을 법한 아저씨처럼 변해 있었다.
진준성은 핸드폰 화면으로 자신을 비춰보며 말했다.
“이런 게 있으면서 절 두고 가려고 하셨다니.”
“들어가면 목소리는 내지 마. 어린애인 거 들킨다.”
“열아홉이 어떻게 어린애예요? 내년이면 성인인데.”
이렇게 어린애나 할 수 있는 말만 골라서 하는 것도 재주였다.
진준성은 신난 발걸음으로 나보다 먼저 청해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말 안 듣는 아들을 둔 아버지의 기분이 되어 녀석을 따라갔다.
***
청해객잔 내부는 지극히 평범했다.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술집으로, 해산물 요리와 만두, 술을 파는 것 같았다.
가게가 낡아서인지 북적거리는 바깥 상가들과 다르게 이곳엔 손님이 없었다. 진준성과 내가 앉은 테이블을 제외하면, 죽치고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아저씨들이 전부였다.
나는 진준성이 먹을 수 있게 만두와 해산물 요리를 시켰다.
주인장이 음식을 내오는 사이, 나는 언어 변환 패치를 붙이며 가게에 있던 아저씨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이 ‘창랑교’라는 처음 듣는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말세긴 해, 창랑교 같은 게 기승을 부리는 걸 보면.”
“내 말이 그 말이야. 우리 와이프 친구도 거기에 빠져서 제정신이 아니라잖아.”
“교주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들 믿는지 몰라. 나 참….”
들을수록 수상한 사이비 종교처럼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진준성에게 창랑교에 대해 아냐고 물었다. 진준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속닥거렸다.
“한국에서도 포교 활동 열심히 하는 사교예요. 신자가 되면 내세에 더 편한 세상에 갈 수 있다고 하면서 포교하는데, 걔네가 받드는 ‘창랑신’이 뭔지는 아무도 몰라요. 신자가 되어야 알 수 있대요.”
전부터 조금씩 세력을 키우던 집단인데, 에덴 사건 이후로 급격히 신자가 많아졌다고 한다.
다단계라는 소문도 있고, 다른 종교에서 파생된 사교라는 소문도 있고, 음모론자 집단이라는 소문도 있다고 한다.
어떤 집단인지 제대로 알려면 무조건 신자가 되어야 하는데, 한 번 신자가 되면 빠져나올 수 없는 이상한 종교였다.
나는 그 종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회귀 전에는 없었던 현상이라 에덴에서 벌어진 일이 불러온 나비효과인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다만 세상이 순리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는 보통 몬스터가 개입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 창랑교도 만성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선은 그 만성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붉은 두건’과 만나는 게 먼저다.
나는 주인장이 음식을 내오는 것을 보며, 도나리가 준 은화를 꺼내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분명 주머니에 넣어뒀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잡히는 게 없었다.
‘가방에 넣었나?’
나는 가방도 열어서 안을 뒤져봤다.
그런데 그때, 가게 문이 쾅 소리를 내면서 요란하게 열렸다.
폭력적으로 가게 문을 차고 들어온 놈의 뒤로 몇 명이 줄지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야, 여기는 뭐 올 때마다 이렇게 똥파리만 날려?”
놈들이 위협적으로 가게 내부를 장악하는 탓에, 방금까지 술을 마시고 있던 아저씨들은 놀라서 테이블 밑에 숨었다. 놈들은 그걸 보며 낄낄대고 웃다가, 자연스럽게 가게 카운터에서 돈을 챙겼다.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은 나랑 진준성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주인장이 손수 차려준 음식들을 흘긋 내려보던 녀석은 돌연 테이블을 엎어버렸다.
나는 지갑을 찾다 말고 내가 시킨 음식들이 바닥에 엎어지는 걸 쳐다봤다.
“요 앞에 좋은 가게들 놔두고 왜 그지 같은 걸 처먹고 있어?”
“…….”
“어이, 주인장! 손님한테 이런 쓰레기를 파는 거야? 응?”
녀석은 구둣발로 음식을 짓밟았다.
주인장은 주방에 있던 부인 앞을 막아서며,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오? 분명 이번 달 월세는 제대로 냈을 텐데.”
“무슨 일인지는 거, 뒤에 숨어 계신 아줌마가 잘 알 것 같은데?”
주인장은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지, 녀석들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녀석들은 단순한 깡패가 아닌 듯했다. 손에 헌터 장비를 끼고 있었고, 차림새도 류차오의 옆에 있던 녀석들과 비슷한 걸 보면 만성의 헌터들인 것 같았다.
녀석은 발에 채는 그릇을 발로 밟아 깨트리며 말했다.
“우리가 여관들 싹 다 막은 거 알면서 굳이 사람들 데려와서 여기다 재웠다며? 다 알고 왔어.”
“여긴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오. 그렇게 일방적으로 사람들 잠잘 곳을 막아버리면 길거리에 나앉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란 말이오.”
“아주 그냥 성인군자시네.”
녀석은 눈을 희번뜩하게 뜨며 우리 테이블을 발로 찼다. 그래도 화가 안 풀리는지, 녀석은 갑자기 내 머리채를 잡으며 내 목가에 칼을 들이밀었다. 나를 가게 주인장을 협박하기 위한 인질로 삼는 것 같았다.
“가게에 피 냄새 좀 나게 해줘? 당장 무릎 꿇고 빌빌 기어도 모자랄 판에 어디서 변명이야, 변명은!”
놈의 협박에 주인장 부부는 안색이 파리해졌다.
“소, 손님은 죄가 없소…! 당장 놔주시오, 내, 내가 잘못했소…!”
“진작에 그렇게 나오면 얼마나 좋아? 꼭 내가 이렇게 나쁜 짓을 해야 말을 들어, 그치?”
“야.”
나는 내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 녀석을 불렀다.
녀석은 갑자기 흐름을 끊고 자신을 불러세운 이가 인질로 잡고 있던 나였다는 게 당혹스러운 듯 눈을 꿈뻑거렸다.
“네가 지금 나한테 야라고 했냐?”
“그래. 좋은 말로 할 때 이거 좀 놓으라고.”
“이 새끼가 돌았나, 상황 파악이 안 돼?”
나는 자기소개를 하고 있는 녀석을 위해, 내 목을 향해 들이미는 칼날을 잡아 맨손으로 두 동강을 냈다.
C급 정도 되는 아이템이었는지, 힘주어 부수자 쉽게 동강 나며 부러져버렸다.
챙강!
녀석은 순식간에 부서진 칼날과 덩그러니 남은 칼자루를 번갈아 보며, 눈을 꿈뻑거렸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여전히 내 머리채를 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손목을 잡아 분지르며 말했다.
“꼭 나쁜 짓을 해야 말을 알아듣지?”
“아아아악!! 악!!”
왠지 배에 탈 때부터 일이 꼬이는 것 같더니.
칭다오에 도착한 첫날부터 만성 길드원의 손목을 부르트려 버렸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