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iary is an SSS-class reward RAW novel - Chapter 223
223화. 분화 (4)
“그러지 뭐.”
길버트는 흔쾌히 허락했다.
다만 그 승낙의 말 뒤에 한마디가 더 붙었다.
“대신 나도 한 가지 부탁 좀 해볼까?”
“어떤 겁니까?”
“음. 더러운 어른의 부탁이라고나 할까….”
길버트는 습관처럼 담배를 찾아 꺼내 물었다.
잠시 고주연과 진준성, 칠판에 적힌 여러 문자들을 보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략대의 지휘는 이유영 네가 맡아줘. 근데… 공식적으로는 네가 아니었으면 좋겠거든?”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난데없이 나타난 옆 나라 헌터보다… ‘붉은 두건의 수장’이 공략대 지휘관으로서 게이트에 들어가는 게 그림상 보기 좋잖아. 이해하지?”
그 말은 즉, 나 보고 붉은 두건의 수장을 연기해달라는 것이다.
붉은 두건의 완전한 승리를 위해 내 공적을 붉은 두건의 수장에게로 돌리라는 뜻이었다. ‘이유영’이 게이트 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없애서.
옆에서 듣고 있던 진준성은 나를 대신해서 화를 냈다.
“아니, 아저씨. 계속 도와드렸더니 저희가 무슨 호구로 보이세요? 저희는 어디까지나 에덴과 동맹을 맺은 길드로서 만성을 무너트리고 있는 거예요. 저희 길드장님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승낙하실 것 같아요?”
진준성의 말대로였다. 우리가 붉은 두건을 도와주고 있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만성을 완전히 무너트리기 위해서다. 내 공적을 지워가며 붉은 두건을 도와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진준성에게 미안하게도, 내 대답은 이랬다.
“알겠습니다.”
“예? 네?? 길드장님 미치셨어요?!”
“…진정해, 나도 내걸 조건이 있어.”
진준성은 갑자기 진정하며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무서운 눈으로 지켜봤다. 내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조건을 내세우면 물어뜯을 기세였다.
나는 길버트만 보며 말했다.
“붉은 게이트를 공략하고 난 뒤, 길버트 씨가 맡아줬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내겐 이유영이라는 이름에 걸릴 훈장은 필요 없다. 게이트 공략의 공적 같은 건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가도 상관없었다.
그 대신 나도 길버트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다. 오류와의 전투에서 승리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투자였다.
명예는 이 투자를 위해 버려도 괜찮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갈 곳을 잃을 만성의 헌터들을 한데 모아 주시죠. 붉은 두건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거 압니다. 그러나 그들을 모을 사람은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이중스파이인 길버트 씨만큼 적합한 사람은 없습니다.”
나쟈 같은 녀석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만성에게 약점을 잡혀 노예처럼 헌터 생활을 하는 이들. 거기다 ‘만성’의 헌터였다는 불명예까지 얻게 된 이들.
필연적으로 방랑자가 될 수밖에 없는 그들을 모을 사람이 필요했다.
만성이 전쟁에서 패배해도 그 많은 헌터들을 모두 감옥에 넣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을 수용할 길드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들은 시스템이 선택한 헌터이고, 오류와의 전쟁에서 싸워야 할 병사들이다.
세간이 그들을 외면하게 둘 수는 없었다.
붉은 두건이 일으킨 전쟁으로 갈 곳을 잃게 된 이들을 책임지는 건, 두 곳에 모두 발을 걸치고 있던 길버트만큼 적합한 사람이 없다.
그 사실을 저 눈치 빠르고 능구렁이 같은 아저씨가 모를 리 없다.
길버트는 뒷목을 긁적이며 한숨을 쉬다가 끝내 한마디 꺼냈다.
“이거 참, 더러운 요구를 하는 어른한테 너무 가혹하네.”
길버트는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지만, 여전히 양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그에게 내가 내민 제안은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다.
“붉은 두건의 완전한 승리를 원하시는 거 아닙니까? 남겨지는 사람들도 책임질 수 있어야 후에 승리했다고 말하기 편해질 겁니다.”
“그래, 그렇지. 아는데, 너무 갑작스럽다는 것도 이해하지? 난 리더가 될 재목은 아니라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리더란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상대하기 어려운 말만 하는군.”
길버트는 뒤통수를 벅벅 긁더니 또 한 번 늘어지게 한숨을 쉬었다.
진준성은 내 제안이 못마땅한 것 같았지만, 다행히 날 물어뜯지 않았다. 잠자코 길버트의 대답을 기다리기만 했다.
결국 길버트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러자. 나도 어려운 부탁을 했으니 감수할 건… 감수해야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앞으로 잘해보죠.”
나는 길버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길버트는 담뱃불을 끄며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악수를 나누며 서로에게 직접적인 이득 따윈 아무것도 없고 어깨에 짐만 지우는 불편한 협상을 마쳤다.
그럼에도, 후회가 없는 협상이었다.
***
길버트를 공략대원으로 영입한 뒤.
나는 원래 목적대로, 고주연과 함께 정하나를 만나러 갔다.
진준성은 길버트가 지키고 있었고, 어디선가 농땡이 피우고 있을 김신욱도 곧 진준성에게 돌아갈 것이다. 잠시 동안 고주연이 자리를 비워도 될 것 같았다.
나는 고주연에게 정하나의 방패를 화살로 뚫어달라고 부탁했다.
정하나와 고주연, 두 사람의 스킬 위력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자, 고주연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 길로 별말 없이 걸어가던 고주연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 싸울 상대, 강해?”
“강합니다. 여태 만난 어떤 몬스터보다 더 강하다고 봐야 합니다.”
“알겠어.”
이후 고주연은 다시 말이 없었다.
다만 눈빛이 또렷해지며 태도가 결연해진 듯했다.
에덴으로 떠나기 전, 근심거리를 안고 있던 고주연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산속에서 훈련하며 어떤 장애물을 넘어선 모양이다.
거리는 조용했다.
붉은 게이트가 발생하며 시내에 있던 사람들이 대피한 탓이다.
고주연과 나는 말없이 황량한 거리를 걸었다.
침묵이 이어져도 어색하지 않았다.
고주연과는 언제가 되어도 같이 있단 사실이 불편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말없이 걸어서 어느 빈 건물 앞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겨룰 장소는 이 건물의 옥상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옥상까지 올라가자, 구지상과 정하나가 우릴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방금까지 조용했던 거리가 두 사람의 목소리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정하나는 고주연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고주연은 고주연답게 대응했다.
그리고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언니, 미안한데 이거 내 자존심이 걸려 있어서 못 봐줘.”
“그래.”
정하나의 도발적인 말에도 고주연은 담담했다.
정하나는 입술을 비죽이다가 고주연 역시 봐줄 생각이 없다는 걸 금방 알아차린 듯 입꼬리를 올렸다.
두 사람은 거리를 벌리며 마주 보고 섰다.
나는 구지상과 함께 떨어진 곳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결이 시작됐다.
정하나는 스킬을 발동했다.
‘암흑’이 정하나 주위로 잉크가 번지듯이 퍼져나가더니, 정하나의 손짓 한 번에 한 점으로 응축되기 시작했다. 곧 기사의 방패처럼 묵직하고 단단한 암흑의 방패가 만들어지며, 정하나의 손에 들렸다.
정하나는 자기 키만큼 커다란 방패를 내세우며 말했다.
“자, 어디 한 번 뚫어봐!”
탱커답게 상대방을 도발하는 재주가 상당했다.
정하나가 들고 있는 저 방패, 암흑으로 만들어졌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완성도가 높았다. 던전 아이템이라고 속여도 믿을 정도였다.
암흑을 넓게 퍼뜨려 적의 공격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스킬을 사용하던 녀석이 단숨에 방패를 만들어냈다. 정하나의 스킬을 운용하는 능력이 상당히 성장한 것이다.
한편 고주연은 정하나의 도발에도 침착했다.
승부욕이 강해서 도발에 쉽게 넘어가는 게 고주연의 단점인데, 지금의 고주연에게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고주연은 칠성활을 소환하며 천천히 ‘신념의 화살’을 생성해 활시위를 당겼다.
신념의 화살은 다이아몬드를 세공한 것처럼 아름다운 빛을 냈다.
달을 조각한 것처럼 아름다워서 하나의 예술품처럼 보일 정도였다.
회귀 전의 고주연이 만들던 화살은 날카롭고 매서운 사냥꾼의 화살이었다. 저 예술품은 그것과는 느낌이 상당히 달라서 그때와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다만 그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한 발의 화살이 완전히 활시위에 걸렸을 때, 나는 고주연이 왜 이런 화살을 만들어냈는지 알 수 있었다.
칠성활의 시위가 당겨지며 신념의 화살에선 시리도록 흰빛이 반짝였다.
일곱 개의 별을 뜻하는 이름에 걸맞은 별빛이 화살 끝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고주연이 만들어낸 건 칠성활에 어울리는 화살이었다. 활에 어울리는 화살을 연구해, 저런 형태를 만들어낸 것이다.
활과 화살이 먼저 조화를 이뤄야 궁수는 더 먼 곳으로 화살을 쏘아 보낼 수 있다.
고주연이 얻은 해답은 압살이 아니라, ‘조화’인 듯했다.
깨달음을 얻은 이는 이토록 첨예한 힘을 얻게 되는 법이다.
고주연은 분명하게 강해져 있었다.
“결과가 예측되지 않네요. 이유영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옆에 있던 구지상이 내게 속닥거렸다.
구지상도 고주연의 변화를 느낀 모양이다.
나는 잠시 정하나를 쳐다봤다.
정하나는 고주연의 실력이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 단 한 발의 화살로 실감한 듯했다.
하지만 담담했다. 어느 때보다도 차분하고 고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생각엔….”
내가 구지상의 말에 답하던 때,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며 명쾌한 소리가 터졌다.
탕!
유성이 발사된 듯 나아가는 화살은 정확히 암흑의 방패를 노렸다.
뚫느냐, 막아내느냐.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내 생각이 맞다면, 이번 승부는 고주연이 이길 수 없다.
처음부터 고주연이 이길 수 없도록 정하나가 판을 설계해놨기 때문이다.
그를 증명하듯이 정하나의 입꼬리가 조용히 올라가며 방패가 변형되기 시작했다.
슈우욱!
방패가 여러 갈래의 검은 촉수를 뻗어내며 화살을 향해 나아갔다.
화살은 검은 촉수를 꿰뚫고 앞으로 뻗어갔으나, 끊임없이 생성되며 진로를 방해하는 촉수에 점점 기세가 줄어들었다. 마침내 나아가는 힘을 잃은 화살은 검은 촉수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정하나의 ‘암흑’ 스킬은 본질적으로 공격을 흡수하는 스킬이다.
정하나에게 ‘완전 방어’라는 칭호가 붙은 이유이자, 정하나가 방어계 헌터 중에서 최강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던 이유였다.
정하나는 히죽이며 말했다.
“설마 내가 이 방패로 팅! 하고 튕겨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정하나가 방패를 만들었고, 고주연이 그 방패를 향해 단 한 발의 화살만 쏜 시점에서 고주연의 패배였다.
화살의 궤적을 예측할 수만 있다면 암흑을 겹겹이 퍼트려 공격의 위력을 천천히 흡수하면 된다. 나아가는 힘을 잃은 화살은 결국 단순한 화살로 남게 되고, 그때부턴 어떤 위협도 되지 않는다.
정하나의 태도 때문에 약은 짓을 한 것처럼 보였지만, 정하나는 적을 속일 수 있는 영리한 선택을 한 것뿐이다.
고주연은 잠시 당황한 듯했으나,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듯 순순히 활을 내렸다.
화살은 결국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정하나는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정하나가 한 가지 놓친 사실이 있다.
만약 고주연이 서브 스킬 ‘충격파’를 발동해 광범위 공격으로 변질시켰다면 정하나의 계략은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부턴 순수한 위력 승부가 되었을 것이고, 나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게 된다.
‘가능하면 그걸 보고 싶었지만….’
고주연은 정직한 사람이라 순수하게 메인 스킬로 승부를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사람한테 억지로 충격파를 써서 맞부딪혀달라고 한 번 더 부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두 사람은 결과에 승복한 듯 서로 악수를 나눴다.
구지상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
“두 사람 다 성격이 꽤 변한 것 같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번 대결로 정하나와 고주연, 두 사람에게 확연한 변화가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단순한 스킬의 위력보다 더 중요한 것을 두 사람은 깨우친 듯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생각하던 작전 역시 가능할 것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