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iary is an SSS-class reward RAW novel - Chapter 250
250화. 헌책방과 최첨단 기계 (2)
나랑 진준성, 호두는 천혜 길드 응접실에 앉아, 천혜 길드장과 마주하고 있었다.
천혜 길드장은 내게 탄원서를 내밀었다.
던전 아이템과 몬스터, 헌터에 관한 연구 규제를 풀어달라는 내용의 탄원서였다.
자세히 읽어보니 어느 정도 납득되는 내용이었지만, 비윤리적 실험으로 번질 수도 있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천혜 길드장이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건 사실이지만, 협회장 도나리 역시 무서울 정도로 영리한 인간이다.
도나리가 이러한 조항들을 보고도 탄원서를 기껍게 받아들여 줄 리 없다.
나는 다 읽은 탄원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협회장이 이걸 받아들여 줄 거라고 생각하고 쓴 겁니까?”
“그랬다면 당신에게 구태여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겠죠.”
즉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썼다는 말이다.
나랑 거래하게 될 것을 예상하며 썼을 가능성이 높다.
협회와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는, 협회로선 놓칠 수 없는 인재다.
내가 이 탄원서를 들고 가서 생떼라도 부리면, 협회장도 실리를 따져 차라리 연구 규제를 푸는 걸 택할 것이다.
천혜 길드장은 내가 그렇게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천혜 길드장은 똑똑하다. 이건 분명히 장점이다.
하지만 그 똑똑함은 넘쳐흐르는 지적 욕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윤리나 도덕을 과학보다 아래에 두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세상에는 이런 과학자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세상에 이런 과학자가 필요하다면, 그가 엇나가지 않도록 법으로 규제하고 사회에서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이 세상에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규제하고 관심을 쏟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탄원서는 제출해 드리겠습니다. 다만, 제가 당신과 한가지 계약을 맺어야겠습니다.”
“뭘 원하죠?”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기민철, 기민재 형제인 것 같으니 그 두 사람을 예시로 들죠.”
나는 아이템 상점에서 ‘디케의 언약 증명’ 아이템을 구매해, 눈앞에 소환했다.
계약을 어기면 정의의 여신인 디케의 심판을 받아 몸이 구속되는 아이템.
천혜 길드장은 기씨 형제 언급에 여유롭게 올라가 있던 입매가 조금 굳었고, 이어서 등장한 디케의 언약 증명을 보고 내 말을 예측이라도 한 듯 다시 웃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그 두 사람에게 못 할 짓은 다른 사람한테 하지 마세요. 과학적으로 뭔가를 발견하고 발전시킨다고 한들,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당신이 책임지고 기술을 지키란 뜻입니다.”
“그것참 난해하고 어려운 부탁이네요.”
“압니다. 그래서, 이유 길드가 천혜를 도와주는 계약을 맺을 겁니다.”
천혜 길드장은 답지 않게 잠시 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내 말을 전부 예측한 줄 알았더니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이 필요한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사람에게서 심리 변화를 읽어내는 건 어려워서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대답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한참 뒤, 천혜 길드장이 입을 열었다.
“변했네요, 이유영 길드장.”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더니, 천혜 길드장은 계약서 종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계약 내용을 본인이 쓰고 싶다는 뜻인 것 같았다.
내가 종이를 건네주자, 천혜 길드장은 펜을 들며 말했다.
“한 가지 조건을 추가해 줘요. 이 맹약은 헌터와 던전, 몬스터와 시스템이 사라진 세상이 온다고 해도 유효한 것으로요.”
나는 잠시 벙쪄서 할 말을 잃었다.
시스템이 사라진 세상? 그런 조건을 왜 추가하려는 거지?
몬스터와 시스템이 사라진 세상에 이 아이템이 유효할지도 미지수인데 말이다.
그런 세상에서 고작 나 같은 인간이 천혜 길드를 지켜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생각할수록 천혜 길드장이 부탁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시스템이 사라진 세상을 생각해 본 적이 있던가.’
없다.
오류를 없애겠다는 일념만으로 뇌를 꽉 채우고 살았으니까.
그래서인지, 나는 조금 도박을 해보고 싶어졌다.
“그러죠.”
내 옆에 앉아 있던 진준성은 나를 툭툭 치며 ‘괜찮겠냐’라고 속닥거렸다.
진준성도 이상한 조항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천혜 길드장은 웃으면서 계약서를 작성했다.
계약 내용을 등록하자, 계약서가 사라지고 은색 저울이 하나 소환되었다.
천혜 길드장은 손톱으로 손가락을 그어 피를 내, 저울 위에 피를 떨어트렸고, 나는 엄지손가락을 물어뜯어서 반대편 저울에 피를 떨어트렸다.
저울은 이리저리 기울며 수평을 맞추다가, 완전히 수평을 이룬 순간 빛이 터져 나왔다.
파앗!
계약이 인정되며 저울이 사라졌다.
이 계약으로 내 미래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헌책방 같으면서도 최첨단 기계 같은 이 길드의 길드장이, 내게 먼 미래를 떠올리게 했으니까.
그때,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왔네 왔어! 유영스 하이요!”
파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동네 백수 차림, 시원시원한 목소리와 대조되는 나른한 인상의 남자.
기민재.
그리고 그 옆에 반가운 얼굴도 있었다.
“유영스 형. 크흠… 제가 왜 유영스를 ‘형’이라고 부르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악마의 미궁 편 재탕을….”
“어어, 거기까지. 다들 알아.”
기민재가 기민철의 헛소리를 적절하게 끊었다.
이전에 악마의 미궁 던전에서 기민철은 강삼에게 죽을 뻔했고, 나는 녀석에게 힐을 해줬다.
기민철은 그때 이후로 내게 형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했고, 나는 그러라고 했다.
그때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내가 두 사람과 반갑게 인사하자, 진준성은 조금 당황한 듯 나를 쳐다봤다.
***
진준성은 눈앞에 있는 기민철을 쳐다봤다.
천혜 길드장이 건강 검진을 하겠다며 호두를 데리고 가버린 뒤, 응접실에는 기씨 형제와 진준성, 이유영이 남았다.
기민재는 진준성도 이전에 본 적이 있어서 익숙했지만, 기민철은 처음이었다.
진준성은 처음 보는 사람을 보면 갑자기 공기가 무거워지고 답답함을 느끼는, 요컨대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기민철이 불편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보는 사람이 길드장님과 엄청 친해 보여서 질투가 났다.
기민철은 짧게 자른 앞머리에 짧고 굵은 눈썹, 동그란 이목구비를 가진, 순진하고 어리게 생긴 사람이었다.
진준성보다 못해도 1살 이상 많겠지만, 나이와 관계없이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적어도 진준성의 눈에는 그랬다.
‘길드장님이랑 많이 친한가…?’
진준성이 기민철을 뚫어져라 봐도 기민철은 진준성을 보지 않았다.
남과 눈 마주칠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벽이나 천장만 쳐다봤다.
그 사이, 서글서글한 기민재가 분위기를 띄워 보려는 듯 가벼운 투로 말했다.
“아, 민철이가 형이라고 부르는 건 나밖에 없었는데. 유영스한테 질투심 생기네.”
“그런 건 기민철 씨랑 둘이 얘기하시고, 그보다 창랑교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역시 유영스. 딴소리 절단기, 극악무도한 스몰토크 절단마.”
기민재는 큭큭거리며 웃더니 기민철을 툭 쳤다.
“민철이가 유영스 다시 보고 싶어 했어요. 그치?”
그 말에 기민철은 짧은 머리를 쓸며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말이 없는 성격인 건지, 아니면 진준성이 있어서 낯을 가리는 건지 구분되지 않았다.
진준성이 계속 기민철을 쳐다보는 사이, 이유영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안수연 씨랑 강삼을 잡으셨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강삼이 속해 있던 청부 살인 집단은 만성이 뒤를 봐주던 곳입니다. 만성은 이제 무너졌으니, 안심하셔도 될 겁니다.”
“형은 혹시 스몰토크가 뭔지 모르시나요…. 노잼.”
진준성이 보기에도 이유영의 말이 노잼이긴 했지만, 그걸 면전에 대고 말하다니. 너무 예의가 없는 거 아닌가?
그런데 이유영은 기민철의 대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원래 기민철이 예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둘이 던전에서 친해진 걸까?
진준성이 마구 눈동자를 굴리던 중, 기민재와 눈을 마주쳤다.
기민재는 진준성의 낯을 보고 입꼬리를 씰룩 움직이며 말했다.
“준성스? 오늘 점심은 카레야. 먹고 가.”
“저, 저요? 갑자기요? 점심을요? 아니 근데 왜 반말을….”
“카레 맛있잖아. 내가 만들어 줄게. 기민쓰의 카레 생방쇼, 오늘 점심에 시작됩니다!”
진준성은 확신했다.
이 인간들 말이 안 통한다. 소통이라는 게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아무리 허물없는 사이여도 이쪽에서 인천까지 왔는데, 점심은 바깥에서 대접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애초에 점심 먹으러 온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이유영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부탁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옆을 보니, 이유영은 카레 이야기에 슬쩍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민철과 훈훈하게 시선을 마주하며 카레에 대한 공감대를 나누는 듯했다.
아무래도 카레에 둘만의 추억이 있는 것 같았다.
악마의 미궁에서 카레도 먹은 걸까?
어떻게?
진준성은 무리에 끼지 못한 초식 동물이 된 것처럼 위기감을 느꼈다.
“그, 그래서 창랑교 얘기는 언제 하죠? 이쪽은 급하다고요….”
진준성의 날카로운 말에 이유영이 진준성을 쳐다봤다.
너무 애처럼 군 것 같아서 조금 부끄러워졌지만, 급한 것도 사실이었다.
진준성과 이유영은 윤지석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거니까.
다행히 기씨 형제도 슬슬 본론으로 넘어갈 생각인 것 같았다.
기민재는 흠, 소리를 내며 입가를 손으로 툭툭 치더니 얘기를 꺼냈다.
“창랑교 말이죠. 저희 기민쓰가 추적하고 있긴 한데, 알아낸 거라고 해봤자 이유 길드 사무장이 교단 사람이 준 물을 마시고 변했다는 것 정도밖에 없어요.”
“중요한 걸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유영스랑 준성스가 저희랑 같이 사무장님 미행을 해줬으면 하는데, 어떠신지?”
기민재는 난데없이 윙크를 하며 말했다.
그걸 본 기민철이 기민재를 따라 이유영에게 윙크했다.
진준성은 정말이지,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유영이 먼저 말하길 기다렸다.
이유영은 두 사람의 반응을 깡그리 무시하며 담담하게 답했다.
“저희 사무장님을 두 분이 미행하려는 이유는 뭡니까?”
“교단에서 수상한 기도하는 거 찍어보려고요. 당장은 채널에 올릴 수 없겠지만, 언젠가 창랑교가 몰락할 때 화력을 가할 수는 있을 듯해서?”
기민재는 씨익 웃으며 이유영을 쳐다봤다.
이유영이 창랑교를 몰락시켜 주길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물론 진준성 역시 이유영이 이런 수상쩍은 종교를 가만히 내버려 두진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유영은 쉽게 답을 주지 않고 한참 고민하더니, 신중하게 말했다.
“피해자들 신상을 제대로 보호하고, 찍은 영상을 조회수를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고 먼저 약속해 주시면 가담하죠.”
“저 그렇게 속물 아닌데? 아시면서.”
“그럼 약속하실 수 있겠네요.”
“이유 길드 사무장님도 있는데 설마 제가 자극적으로 영상을 만들겠어요?”
“그러니까 약속하시면 되겠네요.”
기민재는 결국 졌다는 듯이 이유영과 미적지근하게 약속했다.
진준성은 솔직히 그가 못 미더웠다.
하지만 수호 길드 사건 때 도와준 의리도 있고, 자극적으로 만들면 영상을 신고해서 채널을 내려버리면 되니 그다지 걱정되진 않았다.
하지만 이유영은 심오하게 고민해 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윤지석 씨가 마셨다는 그 물을 찾아내면, 신윤현 씨가 포션을 만들 때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토요일에 모임을 갖는다고 했으니… 거길 따라가 보죠.”
“오예, 쿨한 대답 좋네요. 준성스도 같이 갈 거지?”
기민재는 돌연 진준성을 쳐다보며 물었다.
진준성은 당황해서 우물쭈물하다가, 이유영을 힐끔 봤다.
솔직히 따라가고 싶었지만, 이유영이 허락해 줄 것 같지 않았다.
넌 아직 미성년자고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라면서 늘 하던 말로 막을 게 뻔했다.
하지만 이유영은 진준성의 예상과는 다른 대답을 했다.
“준성 학생도 같이 가죠. 윤지석 씨가 걱정될 거 아닙니까.”
이유영의 표정은 진준성과 함께 가는 게 그다지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이유영은 천혜에 오기 전부터 진준성과 호두와 함께 오는 걸 달갑지 않아 했다.
천혜 길드장이 진준성을 천혜로 데려오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데려왔다.
이유영도 변한 것이다.
그래서 진준성도 조금은 변하고 싶어졌고, 굳이 용기를 눌러 담아 말해봤다.
“네, 갈래요. 지석이 형 혼쭐을 내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