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iary is an SSS-class reward RAW novel - Chapter 255
255화. 부탁 (3)
구지상과 고주연, 김신욱에게 부탁을 남긴 이후.
거짓말처럼 빠르게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길드장으로서 처리해야 하는 일을 하나씩 해치우며, 일본으로 갈 준비를 했다.
먼저, 에덴에 연락을 넣었다.
미카엘이랑 직접 대화하고 싶진 않았기에 사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빈은 의외로 씹지 않고 내 연락을 받아줬다.
나는 녀석에게 동맹 길드로서, 길드원 구지상의 강화 훈련을 도와줬으면 한다고 전했다.
혹시 거절할까 봐 넌지시 은혜 한 번 갚아야 하지 않겠냐는 말까지 흘렸다.
그러자 사빈은 말했다.
『데리러 가진 않을 거니까 걔 보고 알아서 오라고 해.』
구지상이 애도 아니고, 혼자 에덴에 찾아가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나는 알겠다고 답한 뒤 늦지 않게 찾아갈 거라고 얘기했다.
구지상은 에덴에 가기 전에 미리 정신 수련부터 하겠다며 방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그 수련이 길어질 것 같진 않았다.
그런데 사빈과 통화하던 도중, 핸드폰 너머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린의 목소리였다.
카린은 사빈의 핸드폰을 빌려 영상통화 모드로 바꾸더니, 얼굴을 보여주며 내게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유영 씨. 카린입니다. 잘 지내셨나요?』
“오랜만입니다, 카린 양. 잘 지냈습니다. 이렇게 보니 반갑네요.”
『얼굴을 보고 싶어서 영상통화로 바꾸었어요. 안색이 좋아지신 것 같네요. 당신에게 큰 변화가 있었나요?』
누가 예지자 아니랄까 봐, 얼굴만 보고 변화를 읽어내고 있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A babe in the woods라는 말 알죠, 거기서 탈출했다고 하고 싶네요.”
한국어로는 ‘우물 안 개구리’.
나는 이제야 우물 밖으로 나와 바다를 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동료들이 내 시야를 넓혀줬고, 이제는 그 바다를 건널 차례였다.
카린은 내 말에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보기엔 저 작은 표정의 변화 역시 카린에게 찾아온 변화였다.
『당신께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카린은 카메라 모드를 바꾸어 얼굴 대신 바깥쪽을 촬영해 줬다.
핸드폰 화면에 비친 곳은 카린의 방으로 가는 비밀 통로에 있던 아기자기한 정원이었다.
이전에는 올리브 나무가 세워진 귀여운 정원이었는데, 상당히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온실로 개조한 것처럼 여러 채소들을 심은 작은 텃밭이 가꿔져 있었다.
카린이 직접 한 건지, 걸어가는 카린의 발이 비칠 때마다 흙에 물든 운동화가 언뜻 보였다.
텃밭 바로 앞에는 요한이 흙투성이가 된 채로 물을 주고 있었다.
『다음에 에덴에 오시면 이유영 씨께 직접 키운 채소로 요리를 해드리고 싶어요.』
이 순수한 목표는 몬스터가 사는 세계에서 나올 만한 목표가 아니다.
카린은 제대로 ‘이후’를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스킬을 봉인 당해서 울적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제대로 앞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카린에게 말했다.
“좋은 목표네요. 제가 꼭 이뤄드리러 가겠습니다.”
카린은 살짝 웃으며 무언가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화면이 흔들리며 대뜸 사빈의 얼굴이 비쳤다.
사빈은 불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영상통화 모드를 종료하고 음성 통화 모드로 바꾸며 말했다.
『요금 많이 나와. 끊어.』
에덴 길드장의 오른팔이라는 녀석이 고작 통화 요금 많이 나온다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있었다.
질투라도 한 모양이다.
못난 놈.
나는 다음으로 기민재에게 연락을 넣었다.
기민재는 그날 떡볶이집에서 진준성을 잘 꼬드긴 듯했다.
떡볶이를 먹고 길드로 돌아온 진준성은 내게 천혜에 가서 창랑교 조사를 돕고 싶다고 말했다. 붉은 두건 참모로서 쌓았던 경험을 대한민국을 위해 써보고 싶다고 또박또박 말하는데, 내게 녀석을 말릴 재간은 없었다.
그러니 기민재에게 잘 부탁한다는 한마디 정도는 해둬야 했다.
기민재는 신호음이 완전히 끊겨버릴 때쯤 내 전화를 받았다.
느긋하게 ‘여보세요’를 말하는 녀석에게, 나는 본론부터 꺼냈다.
「일본으로 출국할 날짜가 잡혔습니다. 일본에 가 있는 동안은 한국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간 준성이 잘 부탁드립니다.」
곧 한국을 뜰 거고 바빠질 예정이라 한국의 상황을 잘 모르겠지만, 진준성한테 무슨 일 생기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기민재는 눈치가 빨라서 금방 내 의도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돈워리, 준성스도 제 브라더임다. 가서 파이팅하고 오십셔. 유영스만 믿어요.」
형제 같다는 말이 내게 가장 안심을 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협회에 천혜 탄원서도 무사히 넘겼으니 진준성에게 나쁜 짓을 하진 않을 것이다.
불안해서 호두를 같이 보내기도 했고, 진준성도 이전의 진준성은 아니다.
다음으로 신윤현이 만들어 준 포션.
창랑교의 세뇌에 대항하는 포션을 만들던 신윤현은 며칠을 포션 제조에만 몰두했다.
그 덕에 나는 출국하기 전에 시험작이라는 포션 하나를 받을 수 있었다.
신윤현은 이렇게 말했다.
‘아직 비율에 확신이 없어서… 민간인인 윤지석 씨께는 권하기가 어렵습니다만…, 헌터라면 다소 내상을 입어도, 상태이상만큼은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이유영 씨께 필요한 물건이 될 것 같아 만들자마자 서둘러 가져왔습니다….’
하나 만드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려서, 신윤현의 스킬을 과하게 사용해야 하는 포션이었다.
거의 생명력을 빼앗기는 수준이라 대량 생산을 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다고 한다.
그러니 이 한 개의 포션은 굉장히 귀중한 물건이었다.
반드시 필요한 인물에게 이걸 사용해야 한다.
창랑교를 무너트릴 수 있는, 핵심이 되는 사람에게.
***
출국 전날.
나는 오랜만에 윤지석과 단둘이서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믹스 커피를 나눠 마셨다.
진준성이 호두와 함께 당분간 천혜 길드 사람들과 공부할 것 같다는 얘기.
신윤현이 스킬 개발로 바빠질 것 같다는 얘기.
고주연과 김신욱에게 한국의 던전 공략을 대부분 맡겨놨다는 얘기.
구지상이 곧 에덴으로 훈련하러 가게 될 거라는 얘기….
윤지석은 잠자코 내 얘기를 듣다가 웃으며 한마디 했다.
“다들 바쁘네요.”
나는 윤지석을 쳐다봤다.
윤지석은 웃고 있었음에도 평소보다 적적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이 시대를 살면서 ‘각성’을 꿈꾸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도 윤지석은 단 한 번도 각성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다.
길드원 모두가 헌터인데 윤지석처럼 당당하게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윤지석은 늘 당당했고, 그래서 나는 윤지석이 강인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점점 무언가를 향해 달려 나가는 길드원들을 보며, 윤지석도 여전하게 구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학창 시절, 나는 친구들이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항상 겉돌았다.
내겐 없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했다.
지금의 윤지석도 그때의 나랑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이라서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이 있다.
윤지석이 저 멀리까지 나가서 운동하는 것도, 새로운 자기만의 일상을 만들어 보려던 게 아니었을까.
윤지석답게 건강하게 해소하려 했을 것이다.
며칠간 윤지석이 왜 창랑교에 감화되었는지를 생각하다가 내린 결론이었다.
사이비는 사람의 약한 마음을 교묘하게 건드려 파고든다.
창랑교라는 사이비를 없애버리기 전에, 나는 윤지석의 결핍이 채워지길 바랐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윤지석 씨. 만약 헌터와 시스템이 사라진 세상이 온다면, 그때도 제가 차린 회사의 사무장이 되어주실 수 있습니까?”
내가 천혜 길드장과 유대감이 생긴 이유는, 막연한 미래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막연한 미래’에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힘이 있다.
헌터가 비각성자로 돌아가는 세상이 온다면, 윤지석과 나는 어느 정도 공감할 만한 사이가 되지 않을까.
그런 세상이 올 거라는 기대가 어쩌면 윤지석을 덜 방황하게 만들지 않을까 싶었다.
내 말에 윤지석은 커피를 마시다 말고 나를 쳐다봤다.
윤지석은 내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가벼운 한숨을 내쉬던 윤지석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얘기했다.
“좀 웃기는 일이지만요, 저는 돈 계산하는 게 천직인 것 같아요. 살짝 현타가 와요, 이 중요한 걸 서른 넘어서 알았나 싶고….”
“사무장 일이 재밌으시다면 다행인 것 같은데요.”
“네에, 재미없으면 어떻게 이유영 씨 같은 외근쟁이 사장님 밑에서 일했겠어요. 다행이죠. 하지만 평생을 운동하면서 살아온 사람한테는 현타가 오는 법이에요.”
그래서 윤지석은 내 제안에 선뜻 답하기 어려운 것 같았다.
만약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젠 정말로 운동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갈등하는 윤지석을 기다려 주다가, 넌지시 물었다.
“길드에 사람을 좀 더 고용할 수 있도록 자금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윤지석 씨의 업무량을 줄여 드릴 테니, 빈 시간에 공부를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공부요?”
“회계 학원 같은 곳 있잖습니까. 공부 비용은 제가 길드장으로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윤지석은 눈을 크게 뜨고 끔뻑거렸다.
그러더니 입을 일자로 다물고 미간을 좁히며, 다 마신 커피잔을 들여다봤다.
한참 빈 컵을 손에서 굴리던 윤지석을 보며 나는 괜히 긴장됐다. 충동적으로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윤지석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요즘… 왠지 모르게 자꾸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세계요?”
“굉장히 그립고 아늑한 어느 곳으로 가고 싶었는데, 제가 그렇게 나약한 놈은 아니거든요? 근데 왠지 모르게 거기에서 저를 부르는 것 같달까…. 하하, 이런 말 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죠.”
나는 윤지석이 한 말과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에덴 길드에서 사빈과 요한이 푸른 머리의 남자한테 정신 공격을 당했을 때.
카린 덕분에 깨어난 요한은 내게 정신 공격에 당해 쓰러져 있던 중, 그리워하던 것을 만난 것 같다고 얘기했다.
윤지석이 말하는 그리운 곳도, 어쩌면 그것과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윤지석은 내 표정을 보고 멋쩍게 뒷머리를 쓸며, 했던 말을 무마하려는 듯이 얘기했다.
“아무튼! 그랬는데, 이유영 씨 말을 들으니까 역시 현실이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요. 너무 낯간지럽나?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할게요. 어디 좋은 학원 있나 알아봐야겠네.”
윤지석은 바보 같이 웃으면서 나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이것으로 윤지석이 달라질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지금 윤지석의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조금 웃었다.
이제 마음 편히 일본에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