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iary is an SSS-class reward RAW novel - Chapter 32
32화. 자업자득 (1)
눈을 깜빡이면 어둠이 걷히고 눈부신 빛이 펼쳐졌다.
처음 눈에 들어온 풍경은 경복궁 너머, 북악산에 싱그럽게 자라난 세계수다. 따사로운 햇살을 머금은 세계수의 잎사귀가 연둣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보도를 뛰어다니는 낯선 짐승들과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들이 유난스럽게 생명의 소리를 냈다.
따뜻한 햇빛이 부드럽게 피부를 덮어온다. 산뜻한 바람이 이름 모를 야생화의 향기를 실어 왔다.
앉은 자리에는 푸르른 풀잎이 소복이 깔려 있었다. 손으로 땅을 그러쥐자 촉촉한 흙이 손톱 새를 적셨다.
인류가 멸망한 세계는 지독할 정도로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오로지 나만이 적응하지 못한 채, 동족을 찾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도착점은 보이지 않았다.
끝없는 여정에 지쳐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찰나, 눈앞에 이정표가 나타났다.
「이 아이템은 일정한 조건 달성 시 개화할 수 있는 아이템입니다.」
(개화 시: B → SSS)
(개화 조건: 십만 장의 일기를 기록한다.)
(아이템 개화 조건을 모두 만족시켰을 경우, 기록자의 염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람의 염원을 이뤄준다는 그 우스꽝스러운 일기장이 이정표처럼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
『언제까지 자고만 있을 거예요? 이젠 슬슬 일어나요!』
앵앵대는 목소리에 꿈에서 깼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눈앞에는 일기장이 아닌 흰털의 여우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화신?”
『이유영! 드디어 일어났군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낯선 곳에 누워있었다.
흰 톤으로 도배된 천장과 벽. 바퀴 달린 프레임 침대. 그리고 내가 입고 있는 환자복까지.
“병원?”
꽤 설비가 좋은 1인 병실이었다.
생명의 의지를 얻고 나선 연이 없던 공간이다 보니, 이 상황 자체가 낯설었다.
『이유영이 쓰러지고 나서 ‘안수연’이 이곳으로 데려왔어요.』
적당히 아무 데나 눕혀 놨으면 금방 일어났을 텐데. 책임감 한 번 강한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너무 좋은 병원에 데려다준 거 아닌가?
『최후의 인류인 이유영이 5일이나 쓰러져 있을 줄이야! 스킬 부작용이 꽤 심했나 봐요.』
“뭐? 5일?”
5일?
5일이나 쓰러져 있었다고?
나는 다급하게 핸드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했다. 핸드폰엔 수많은 부재중 메시지와 전화가 남겨져 있었고, 마지막 기억으로부터 5일이 지난 시간을 띄우고 있었다.
믿기지가 않아서 달력도 들어가 봤지만, 5일 지난 시간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해줄 뿐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마지막 전투에서 무리하긴 했어도 생명의 의지가 있는 내가 회복하는 데 5일이나 걸렸다고?
『스킬 부작용은 신체뿐만이 아니라 정신에도 영향을 줘요. 최후의 인류인 이유영이니까 버틴 거지, 아마 다른 C급 헌터였으면 한 달은 누워있었을걸요?』
강력한 메인 스킬을 지녔는데 등급이 받쳐주지 않을 경우,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헌터가 회귀 전에도 있긴 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대책 없이 쓰러진 게 난생처음이라 혼란스러웠다.
“이거 당장 등급부터 올려야겠는데….”
『그보다 이유영이 알아야 할 것들이 있어요. 쓰러진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시스템이 해줄 얘기도 있고요!』
“많은 일?”
5일이나 누워있었으니 당연히 여러 일이 있었겠지만, 어쩐지 화신이 말하니까 불안이 엄습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나갔는데 갑자기 왜 소리가… 어?”
들어온 것은 뜬금없게도 협회원 박종훈이었다.
박종훈은 깨어난 나를 보며 눈에 띄게 놀란 얼굴로 삿대질을 했다.
나는 방금까지 대화하던 화신을 애써 무시하며, 자연스럽게 반응해봤다.
“너, 너! 이유영 너!”
“어, 그래. 병문안 온 거냐?”
“야, 기다려. 의사 불러올게. 너 인마, 팀장님이랑 안수연 헌터가 엄청나게 걱정했어!”
안수연이야 직접 데려왔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팀장님은 갑자기 왜 나오는 걸까.
박종훈이 사복이 아니라 협회의 근무복을 제대로 착용하고 있는 것도 걸렸다. 시간도 근무하고 있어야 할 시간 아닌가? 한가하게 병문안이나 올 틈은 없을 텐데.
“야 잠깐만, 너 병문안 온 거 맞아?”
나가려던 박종훈이 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으로 멈춰 섰다.
대체 내가 쓰러진 사이에 뭔 일이 있었던 거지?
“일단 의사부터 불러올게. 상황 설명은 그다음에 하자.”
***
“5일 동안 쓰러져 있던 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네요. 아무런 이상도 없고, 건강하신 상태입니다.”
검진 결과를 얘기하던 의사는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당연하다. 생명의 의지는 늘 내 몸 상태를 최고의 컨디션으로 유지해 준다. 덕분에 헌터가 되고 나선 그 흔한 감기 한 번 앓아본 적 없었다.
이번처럼 쓰러진 건 정말 손에 꼽을 만큼 없던 일이었다.
“우선 하루만 더 지켜보고, 내일도 이상 없으면 퇴원하셔도 되겠습니다.”
“하루나 더 있어야 합니까?”
“환자분께서 지금 막 깨어나신 상태라 없던 문제가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럼, 편히 쉬세요.”
의사가 병실에서 나가고, 옆에서 같이 의사 소견을 듣고 있던 박종훈이 한숨을 쉬면서 소파에 앉았다.
나는 내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화신을 애써 무시하며 박종훈에게 물었다.
“그래서 내가 쓰러진 사이에 뭔 일이 있었던 거야?”
“에휴, 팀장님 계실 때 좀 깨어나지. 너 여기에 입원한 거 협회에서 보호차 감시 중이야. 나도 일 때문에 너 병실 지키고 있던 거고.”
“그게 뭔 소리야?”
“지금 너… 완전 유명인이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던 박종훈은 자기 말을 증명하려는 듯, 핸드폰을 꺼내 영상을 하나 보여주었다.
영상에는 까마귀가 저주받은 보석을 이용해 몸집이 커지는 장면부터, 내가 열풍을 사용해 녀석을 쓰러뜨리는 장면까지 찍혀 있었다.
썩 좋은 화질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 이목구비 정도는 흐릿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이거 5일 만에 미튜브 조회 수 8천만 찍었어. 뉴스에도 계속 나와서 완전 일 커졌고.”
“뭐?”
“네 신상도 SNS로 알려져서 협회에서 막아보긴 했는데, 잘 안됐고. 기자들이나 외부인 막는다고 내가 병실 지키던 중이었어.”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게 다 무슨 소리지?
영상 속 인물이 나라는 게 알려졌다면 이미 넷상에서 내 신상 정보는 다 털렸다고 봐야 한다.
대체 일이 몇 개나 틀어진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건 영상에 나오는 내 스킬에 대한 것이었다.
“이거 둘밖에 없으니까 물어보는 건데, 네 스킬 힐 해주는 거 아니었나? 영상에서 나오는 스킬은 완전 공격계 스킬이던데?”
박종훈이 말한 문제는 치명적이었다.
세상에 메인 스킬이 두 개인 사람은 없다. 나를 제외하곤 말이다.
그래서 난 가능성 스킬은 최대한 숨기고, 회귀 전처럼 전투 힐러로 활동할 생각이었다.
던전에서도 가능성 스킬을 사용할 때도 가능한 서브 스킬로 충분히 위장할 수 있도록 사용해왔다. 그런데 이 영상 속의 나는 어딜 봐도 공격계 스킬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하여간에, 회귀하고 내 뜻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중, 박종훈이 말을 덧붙였다.
“대답하기 어려운 거면 안 해도 돼. 요즘 세상에 비밀 없는 사람이 어딨냐?”
박종훈 나름대로 위로하려고 건넨 말 덕분에 나는 다행히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만약 다른 길드장들도 이 영상을 봤다면, 내가 누군지 알아내서 자기 길드에 집어넣으려 할 것이다.
내가 아무리 길드를 세웠다고 한들 고작 C급인 지금은 스카우트 문제로 일이 생길 게 분명했다.
여기서 힐러라는 것도 기정사실이 되면 정말로 피곤해질 것이다.
“내 스킬에 관해서 너 말고 더 아는 사람 있어?”
“힐 스킬? 그건 팀장님한테도 말 안 했어. 헌터한테 스킬은 좀 예민한 부분이잖아.”
“그거 앞으로도 말하지 마. 특히 협회장한테 들키지 마. 협회장이랑 손잡으면 기억 읽히니까 함부로 악수하지 말고. 제발 부탁한다.”
“협회장님 사이코메트리 스킬 말하는 거지? 솔직히 그건 확답은 못 하겠다. 워낙 사람이 좀, 그러시잖냐. 일단 노력은 해볼게.”
박종훈 같은 평사원이 조직 보스를 당해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거기다 도나리 같은 인간 앞에선 어리숙한 박종훈이 내 말을 기억하고만 있어도 만족해야 했다.
나는 계속 빙빙 날아다니고 있던 화신을 애써 무시하며, 박종훈에게 몇 가지 확인해야 할 사항을 물었다.
“몬스터에 관한 건 협회에서 어떻게 설명했어?”
“협회 대응은 아직. 사람들은 협회한테 진실을 밝히라고 난리고, 협회에선 조만간 기자회견을 연다고는 하는데. 글쎄다.”
“아직 기자회견도 안 열었으면 그냥 개판이겠네. 김상엽 팀장님은?”
“안 그래도 팀장님 아까까지 계셨는데 좀만 일찍 일어나지 그랬냐. 일단 깼다고 연락은 해둘게.”
박종훈은 핸드폰을 꺼내 바로 연락을 남기는 것 같았다.
나는 옆에서 날아다니던 화신이 신경 쓰여서 박종훈을 내보내기로 했다.
“일단 좀 쉬어야겠다. 더 자세한 얘기는 내일 하자.”
“그래, 넌 좀 쉬어라. 어차피 밖에 서 있을 거니까 뭔 일 있으면 불러. 아, 밥 먹는 시간에는 없으니까 참고하고.”
“고맙다. 고생해라.”
박종훈을 내보내자, 화신이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내 눈앞에 멈췄다.
아까 시스템이 해줄 말이 있다고 했으니, 뭔가 중요한 걸 알아냈을 것이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말했다.
“너도 할 말 있다고 했었지, 말해봐. 이번에도 좋은 소식이랑 나쁜 소식 중에 골라야 하나?”
『이번에는 전부 좋은 쪽이에요. 우선 이것부터!』
화신은 베개 아래에서 낑낑대며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자신보다 훨씬 큰 베개 아래에서 움직이는 꼴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두통이 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짠! 이유영이 아이템창에 넣기도 전에 기절했길래, 제가 급하게 숨겨 뒀어요!』
화신이 건넨 건 수집가 크로우의 공략법이 적힌 일기장이었다.
나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천천히 읽어내렸다.
「202x. xx. xx 날씨: 비
오늘은 C급 던전, ‘욕심쟁이의 둥지’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이 던전은 히든 던전 중 하나로, 총 9개의 ‘저주받은’ 보석을 전부 모으면 나타난다.
보스 몬스터는 ‘수집가 크로우’이며, C급치고는 제법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던전을 열 때 사용한 9개의 보석은 수집가 크로우의 목걸이로 변하는데, 몬스터는 보석에 광기 어릴 정도의 집착을 보인다.
몬스터의 형상이 까마귀인 점, 그리고 보석에 집착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 몬스터는 7대죄 중, ‘탐욕’으로 분류하고자 한다.
.
.
.
」
일기장을 전부 읽고 나자, 이전처럼 빛이 되어 사라졌다.
“숨겨 두느라 고생했네.”
『잠깐, 이 정도로 놀라긴 일러요.』
화신은 드물게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유영이 수집가 크로우를 상대할 때, 크로우를 찾아다니느라 고생할 뻔했잖아요?』
“안수연이 없었으면 고생 좀 했겠지.”
『그래서 이유영이 자는 동안 시스템도 힘 좀 써봤죠! 잘하면 야생의 몬스터를 다시 던전에 가둘 수 있을 것 같아요!』
“뭐?”
이번 야생의 몬스터 사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몬스터가 던전을 탈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 던전 안에 가둘 수만 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그 무능하던 화신이 드디어 제대로 된 성과를 만들어낸 건가?
『잠깐! 지금 당장 가능한 건 아니에요. 오류에게 주도권을 한 번 뺏겨서 평소보다 더 큰 힘이 들어요. 시행착오도 몇 번 거쳐야 할 거고요.』
“어쨌든 가능하기만 하면 상관없지.”
『그래서! 이유영이 도와줘야 할 게 있어요! 여기에 이유영의 일기장이 필요해요!』
여기서 왜 내 일기장이 나오지.
내 표정을 확인한 화신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벌써 실망하면 안 돼요! 이전에 이유영의 일기장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다고 얘기했었죠?』
“하도 엄청나서 오류가 훔쳐 쓰고 있다는 얘기도 했었지.”
『시스템도 부족한 힘을 이유영의 일기장에서 빌려오려고 해요! 일기장에는 스킬을 얻고 나면 흩어지던 힘이 있었는데, 그걸 모을 방법을 구축했어요.』
화신은 흩어진 힘을 모으는 시스템 원리와 해리 에너지니 뭐니 하는 복잡한 이론을 자세히 설명했지만, 문과인 나는 이해할 수 없어서 대부분 흘려들었다. 어차피 결론은 하나였다.
“그러니까. 일기장을 모아야 한다는 소리지? 던전 공략해서.”
『바로 그거예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요!』
안 그래도 이번 건으로 등급을 올려야 할 필요성을 느낀 참이다.
열풍은 유용한 스킬이긴 하지만, 이번처럼 몸이 못 버텨서 쓰러져버리면 강해도 의미가 없었다.
C급 헌터에서 벗어날 필요도 있고, 구지상처럼 A급이 되면 여러모로 편리해질 것이다.
“그간 야생의 몬스터 찾는다고 던전 공략에 소홀했었지.”
이전엔 상황이 급해서 ‘리플레이’로 경험치를 올렸지만, C급부터는 등급 높은 던전을 제대로 공략하는 게 나았다.
마침 이맘때쯤, A급 던전 하나가 나오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 잠깐 잘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깨워.”
『또 잔다고요?』
“자각몽 스킬 쓸 거야. 지금 시기에 열리는 던전 찾아야 하니까.”
『알겠어요! 그럼 시스템도 열심히 새로운 시스템 구축에 힘을 쏟고 있을게요!』
화신은 내가 입고 있는 환자복 주머니에 기어들어 가서 몸을 숨겼다. 굳이 주머니에 들어가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눈을 감고 자각몽 스킬을 발동했다.
[ 서브 스킬, 이 발동됩니다. ]다시 눈을 뜨자, 이제는 익숙한 흰 세상이 나를 맞이했다.
나는 중앙에 있는 거대한 일기장 앞에 서서 이맘때쯤 나오는 A급 던전에 대해 검색했다.
일기장은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다가, 한 페이지에서 멈춰 섰다.
「A급 던전, 」
일기장이 선별해 낸 던전은 3일 뒤에 강남에서 열리는 던전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3일 동안, 동영상으로 벌어진 지금의 사태를 어느 정도 해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