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iary is an SSS-class reward RAW novel - Chapter 46
46화. 함께라면 (7)
“대답 안 해?”
정하나의 표정은 말 그대로 ‘쫄리냐?’는 표정이었다.
사실상 무시해도 상관없는 말이었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방어계 헌터인 정하나와는 연을 쌓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강렬한 첫인상을 주는 쪽이 나을 것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도발로 대응했다.
“원하는 대로 하시죠. 어차피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자신감 넘치네?”
내 도발에 정하나는 기가 찬다는 듯이 웃었다.
회귀 전, 지겹도록 정하나의 스킬을 봐왔던 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정하나의 판단보다 내 판단이 더 정확할 거란 자신이 있었다.
내가 정하나의 밑으로 들어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보다 거슬리는 건, 정하나의 주머니 속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나를 보고 있는 화신이었다. 녀석은 무언가를 소중하게 끌어안은 채로 날아와, 히죽 웃으면서 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지금은 이 녀석에게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정하나가 세운 암흑 방벽이 어느새 몬스터가 쏟아붓는 화염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정하나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어디 한 번 지시해봐, 이유영. 내가 뭘 하면 되는데?”
“우선, 제가 신호를 주면 암흑 방벽을 거둬주세요.”
그러자 정하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해제하면 화염이 곧바로 덮칠 텐데? 너희 방어력으로 견딜 수 있어?”
“견딜 순 없지만 잠시나마 화염을 가를 순 있습니다.”
나는 푸르게 빛나고 있는 화왕검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심판의 물을 사용한 화왕검은 물기가 스민 것처럼 푸른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불에 대응할 수 있는 검이란 걸 알아챈 정하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다음은?”
“제가 활로를 열면 박종훈 협회원이 그 사이로 몬스터에게 가서 목을 노릴 겁니다.”
옆에 있던 박종훈은 나를 따라 하는 건지 자신의 검을 들어 보였다. 정하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날 보며 물었다.
“내가 화염을 막아서 길을 여는 편이 더 안전하지 않아?”
회귀 전에 만났던 정하나라면 망설임 없이 부탁했겠지만, 지금 정하나의 역량으로는 무리였다.
회귀 전의 정하나라면 벌써 불곰이 내뿜는 화염을 흔적도 없이 삼켜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정하나가 세운 암흑 방벽은 화염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한 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박종훈한테 길을 열어주려면 순식간에 화염을 없애줘야 한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여기선 차라리 내가 검기를 휘둘러서 길을 여는 편이 나았다.
물론, 그렇다고 정하나가 쓸모없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상황에 딱 맞는 인재가 도착해줬다고 봐야 한다.
“정하나 길드장이 해줄 일은 따로 있습니다.”
나는 화염 불곰이 목에 두르고 있는 불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화염을 가르면, 정하나 길드장은 몬스터가 목에 두르고 있는 불꽃을 막아 주세요. 그럼 박종훈 협회원이 수월하게 목을 노릴 수 있을 겁니다.”
화염 불곰의 목에 있는 불꽃은 화염의 근원지인 만큼, 놈이 내뿜는 화염보다 몇 배는 강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정하나의 역량으로는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하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알았어.”
자존심이 강한 정하나의 성격상, 무조건 승낙할 거라고 생각했다. 정하나의 두 눈에는 반드시 해내겠다는 열의가 담겨 있었다. 보는 사람으로서는 신뢰가 갈 수밖에 없는 눈이었다.
“그럼 갑니다. 두 분 다 준비되셨습니까?”
“이거 은근히 긴장되네. 난 오케이.”
“얼른 하고 끝내자고.”
나는 정하나의 앞에 서서 화왕검에 심판의 물의 검기를 실었다.
두 사람 모두 내 뒤에서 긴장감을 갖고 대비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지금입니다!”
내 외침과 동시에 정하나가 암흑 방벽을 거두었다. 정하나가 틀어막고 있던 화염이 순식간에 밀려 들어왔으나, 나는 침착하게 박종훈이 했던 발도 자세를 따라 하며, 검을 휘둘렀다.
스강!
매끄럽게 퍼져나간 물의 검기가 휘몰아치는 화염을 뚫고 활로를 열었다.
이미 나와 몇 번 합을 맞춰봤던 박종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뛰어들어, ‘검술’을 발동했다.
정하나 역시 곧바로 몬스터의 그림자를 뽑아내, ‘암흑’을 구슬 형태로 만들어냈다. 화염 불곰이 목에 두르고 있던 불꽃에 암흑 구슬을 붙이자, 구슬이 불꽃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챙!
휑하게 드러난 화염 불곰의 목 위로 박종훈의 검이 스쳐 지나갔다. 한 번, 두 번 베는가 싶더니 흐르듯이 이어진 검날은 몬스터의 목을 찌르고 들어갔다.
순식간에 몬스터의 목이 반쯤 절단되었고, 몬스터는 비틀거리며 괴성을 내질렀다.
『쿠어어어어어어어어!!!』
몬스터는 분노에 지배된 것처럼 시뻘겋게 눈을 빛냈다. 저건 정신 나가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미친놈의 눈빛이었다.
그 순간, 마치 내 예감이 적중했다는 듯 정하나의 암흑에 먹히고 있던 불꽃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암흑은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불꽃을 견디지 못해 꿀렁거리기 시작했고,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박종훈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녀석은 박종훈에게 약점을 공격받고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나는 몬스터를 끝장내기 위해 달려들며, 정하나에게 외쳤다.
“길드장님, 폭발에 대비해 가능한 만큼 이곳을 방어해주세요!”
박종훈의 검술에는 마치 개울처럼 시원하고 자연스러운 일련의 흐름이 있다. 그 흐름에 다가갈 때, 화왕검의 검기는 좀 더 유연하고 날카로워진다는 걸 확인했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개울의 이미지를 좀 더 극대화시켰다. 계산하고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 이미지 속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그러자 내가 만들어낸 검기는 비로소 ‘물’처럼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촤아악!!
마치 심판의 물이 검기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날카롭게 뻗어나가는 물이 그대로 녀석의 복부를 파고 들어갔다.
날카로운 검기가 녀석의 복부를 완전히 가르며 진격하며, 녀석의 약점까지 어렵지 않게 도달했다.
서걱!
검기에 웅담이 잘려 나가며, 녀석의 모습은 재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폭발하기 전에 알맞게 쓰러트렸다고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내가 S급에 가까워진 녀석을 지나치게 얕잡아 봤던 모양이었다.
『이, 유영…!!!!! 네 녀석만, 큼은…!!!』
아니면 ‘분노’의 힘을 내가 얕봤던 걸지도 모른다.
순간, 녀석의 목에서 터져 나오던 빛이 강해지며 섬광탄처럼 시야를 강하게 찌르고 들어왔다.
나는 정하나를 향해 외쳤다.
“박종훈 방어 부탁합니다!”
비록 S급에 가까웠던 몬스터의 자폭이지만, 어디까지나 자폭인 만큼 길게 이어지진 않을 것이다. 박종훈 한 명 정도는 정하나의 역량으로 충분히 보호할 수 있을 것이고 나는 생명의 의지가 있으니 어떻게든 될 것이다.
콰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몬스터가 폭탄처럼 터졌다. 도무지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광활한 빛이 터져 나왔고, 그 빛에 닿는 순간 살갗이 타들어 갔다.
[ 메인 스킬, 가 발동됩니다. ]세상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게 불에 타죽는 고통이라고 했던가.
비록 각오하고 있었다고는 해도 고통을 견디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잠깐만 버티면 된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던 순간, 내 주변으로 검은 장막이 펼쳐졌다.
“이유영, 위로 피해!”
정하나의 외침과 함께 장막은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금방 흐트러졌다. 그러나 그 찰나의 시간을 벌어준 덕에, 폭발에서 탈출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 메인 스킬, 을 발동합니다. ] [ 스킬, 을 사용합니다. ]나는 내 발밑에 거대한 물기둥을 불러내 그대로 물줄기를 타고 위로 올라와 폭발에서 벗어났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하나가 만들어낸 거대한 암흑 돔이 몬스터가 폭발하면서 만들어낸 빛을 가두고 모조리 흡수하고 있었다.
‘확실히 정하나도 구지상만큼 말도 안 되긴 해.’
직접 보고 나니, 영웅 구지상과 완전 방어 정하나만 있으면 어떤 몬스터라도 이겨낼 수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싶었다.
정하나의 암흑으로 점점 폭발이 가라앉으며, 주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먼저 박종훈이 무사한지 확인했다. 정하나가 돔을 만들어내기 전에 녀석도 제대로 탈출시킨 모양인지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한숨 돌리려던 찰나, 주머니에서 하얀 털뭉치가 튀어나와 내 시야를 가렸다.
『이유영! 서둘러 일기장을 챙겨야 해요!』
이 녀석은 사람이 안도하고 있는데 튀어나와서 놀라게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녀석의 말대로 한숨 돌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박종훈과 정하나가 한눈 팔린 사이, 나는 서둘러 화염 불곰이 폭발한 곳으로 뛰어내렸다. 다행히 그 폭발 속에서도 종잇조각은 불에 타지 않은 채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재빨리 종이를 주워 주머니 안에 구겨 넣는데, 어째선지 주머니 속에서 종잇조각이 하나 더 잡혔다.
화신은 내 표정을 보고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했다.
『후후, 이유영이 시킨 대로 ‘색욕’의 공략법은 이 화신이 챙겼으니 걱정 말아요! 마음껏 고마워해도 돼요!』
내가 준 임무를 수행해낸 것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고마워해야 할 일은 맞았다.
그러나 지금 한가하게 공치사를 따지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화신을 붙잡아서 주머니 안에 다시 집어넣고 정하나에게 향했다.
정하나는 폭발을 모두 흡수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괜찮습니까?”
“…당연하지.”
나는 정하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하나는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는 박종훈을 힐끔 보다가, 내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이유영, 내 판단이 더 정확하면 우리 길드 온다고 했던 거 기억하지?”
“기억은 합니다만, 제 판단이 틀린 적이 있습니까?”
“나 아니었으면 넌 죽었을 텐데.”
“글쎄요, 적어도 제가 아니었으면 몬스터를 쓰러트리진 못했을 겁니다.”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 건 강한 헌터들의 특징인지, 정하나는 구지상이랑 비슷한 패턴으로 말도 안 되는 걸 우기고 있었다.
마침 달려온 박종훈이 나와 정하나의 상태를 살피며 요란스럽게 말했다.
“이야,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하나 길드장님의 명성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네요.”
“당연한 말을 하네. 그보다, 뒷정리는 부협회장이 하러 온다고 했으니까 너희는 웜홀 타고 가서 치료나 받아. 어디 한두 군데는 부러졌을 거 아냐.”
그 말에 박종훈이 나를 힐끔 쳐다봤다.
부러지긴 했지만 이미 다 나았다. 박종훈도 내가 힐을 해줬기 때문에 멀쩡할 것이다.
박종훈은 내가 힐러라는 사실을 숨겨주고 있으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눈치껏 먼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정하나 길드장도 같이 갈 겁니까?”
“그럼 안 가냐? 가는 김에 여기서 대체 뭔 지랄이 난 건지 좀 들어나 보자.”
정하나는 몬스터가 재가 되어 사라진 것을 한 번 더 확인한 뒤, 앞장서서 웜홀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나는 박종훈에게 가자고 고갯짓을 한 후, 정하나를 따라갔다.
***
김상엽 팀장은 모두를 대피시킨 뒤, 우리를 기다리며 웜홀 앞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팀장과 함께 웜홀로 빠져나와, 수호 길드가 관할하고 있는 병원에 도착했다.
김상엽 팀장은 박종훈의 부축을 받으며 절룩거리는 발로 우리를 따라왔다. 치유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힐을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김상엽 팀장은 그 와중에 내게 상황을 보고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정하나 길드장님이 제시간에 와주신 덕분에 전원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군요. 팀장님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을 전부 지키는 건 무리였을 겁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고생은 이유영 헌터님이 가장 많이 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훈훈하게 덕담을 나누는 걸 지켜보고 있던 정하나는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흘겨보며 대화를 끊었다.
“이봐요, 김 팀장님. 지금 그런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니지 않나?”
“그렇네요. 서둘러 피해자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정보를 정리해야….”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사람? 됐다, 그냥 따라오세요.”
정하나는 그대로 김상엽 팀장을 끌고 진료실로 향했다.
막무가내처럼 보여도, 책임감이 강한 녀석이었다. 아마 자기가 있는 현장에서 못 지켜준 사람이 있다는 게 걸려서 저러는 게 분명했다.
나는 옆에서 멀뚱멀뚱 서 있는 박종훈에게 말했다.
“넌 멀쩡하지?”
“형 덕분에 멀쩡하지.”
“그럼 가서 팀장님 좀 도와 드려라.”
“알겠어. 형은 좀 쉬고 있어.”
박종훈이 뒤따라가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응급실에 누워있는 사람들에게 향했다.
내가 데스스토커에게 당하는 바람에 두고 갔던 협회원이나, 데스스토커의 페로몬에 당했던 사람들이 무사한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병원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실종됐던 민간인들과 이번 작전에 참여했던 협회원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나를 발견한 협회원 하나가 아는 척을 해왔다.
“이유영 헌터님!”
“헌터님! 무사하셨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곧 누워있던 협회원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내게 아는 척을 해오기 시작했다.
걱정했다는 둥, 결국 이겨서 다행이라는 둥,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둥. 몸 곳곳에 부상을 달고 있는 주제에 어딘가 신나 보였다.
이런 분위기가 별로 익숙하지 않다 보니,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다들 잘 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무사하셔서 다행이고요. 사람들을 전부 구해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들으셨구나! 저희가 결국 해냈습니다, 헌터님! 야생의 몬스터 대응팀, 첫 시작이 좋죠?”
“우리 회식 한번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죠! 완전 경사인데!”
“그러고 보니 이유영 헌터님이 한턱내기로 했었죠?”
협회원들은 신나서 떠들다가, 간호사의 저지에 겨우 조용해졌다.
그만큼 첫 임무가 무탈하게 끝났다는 사실이 기쁜 듯했다.
나는 협회원들끼리 떠드는 사이에 민간인들이 격리된 병실로 향했다.
다행히 사람들은 큰 상처 없이 병상에 누워서 링거를 맞고 있었다.
수호 길드 사람들은 그들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 안심시켜주고 있었고, 평안해 보였다.
나는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복도로 빠져나왔다.
모두 무사한 걸 확인했으면, 그다음으로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