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Girlfriend Is Very Good to Me RAW novel - Chapter (25)
여자친구님이 너무 잘해줌-24화(25/213)
Ep. 24
평화로운 일요일. 어제 막바지에 있었던 희나와의 분주함과는 다르게 우리 집은 평온 그 자체였다. 일 특성상 주말에도 간간이 일을 나가시는 아빠가 오늘도 출근하시면서 상당히 아쉬운 얼굴을 하시긴 했지만.
엄마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느긋하게 집안일을 하면서 희나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어제 내가 희나가 선물 고른다고 엄청 고민했다, 는 등의 에피소드를 옆에서 은근슬쩍 사바사바 했더니 옷차림에 좀 더 신경 쓴 느낌은 있었다.
“아들”
“응?”
희나 기다릴 겸 둘이서 쇼파에 앉아 티비를 보던 중에 엄마가 나를 부른다.
“바다 갈 돈은 충분하고?”
“용돈 모아둔 것도 있고, 저번에 알바비도 꽤 많이 받아서. 아마 괜찮을 걸?”
“잘 곳은 구했어?”
“아니? 벌써부터 그럴 필요가 있나. 아직 일정도 못 짰는데.”
“방학 하자마자 갈 거라며? 지금도 좀 늦었을 텐데.”
“에이 바닷가에 숙소가 몇 갠데…”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내 말에 엄마가 코웃음을 친다.
“여자친구 바퀴벌레 기어다니는 곳에서 재우고 싶으면 맘대로 하던가.”
“….진짜?”
솔직히 어른들 끼고 여행가는 거 외엔 어디서 따로 숙박해 본 적이 없어서 별 생각 없었는데, 저리 말하니 갑자기 걱정이 됐다. 우리 엄마는 나 놀리겠다고 허튼 소리 할 성격이 아니었다.
아니, 암만 여름에 바닷가 사람 많다고 해도 벌써부터 그렇게 예약이 꽉꽉 찬다고?
“지금이라도 예약할까?”
“됐다. 엄마가 어제 속초 쪽에 호텔 잡아놨으니까, 거기로 가.”
헉, 어머니?!
“저, 정말이십니까, 어머니?”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말고.”
“아닙니다! 어찌 소자가 어머니께 함부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취소해버리기 전에.”
“죄송…”
쿨하게 말하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티비에 집중한다.
나는 옆에서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그런 엄마를 잠시 바라보다가, 폰이 울리는 걸 보고 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분명 희나가 전화를 했을테니까.
—
희나를 데리고 왔다. 우리 집에.
현관부터 맞이하러 온 엄마에게, 희나는 신을 채 벗기도 전에 허리를 90도 가까이 숙이며 정중히 인사를 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님. 이희나라고 합니다.”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그리 인사하는 희나의 모습을, 엄마가 발에 못 박힌 듯 꿈쩍도 않고 지켜보았다.
평소에 데이트를 할 때에는 스커트를 많이 입었는데, 오늘은 역으로 주름 한 점 없는 검은색 슬랙스에 연한 베이지색 린넨티로 분명 별 거 아니면서도 굉장히 단정해 보이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머리 역시 아침부터 손질을 했는지 비단결처럼 내려앉아 있고 얼굴에는 아주아주 미약한 화장기가 보였다.
보는 순간 컨셉을 알 수 있었다. 꾸민 듯 꾸미지 않은, 그러면서도 깔끔한. 어르신 대비용 꾸안꾸 패션.
다만 오늘의 희나는, 그런 옷차림은 다 제쳐 두고서라도 무언가 어른스러운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었다.
평소에도 연상의 분위기가 풀풀 나긴 했었지만, 오늘은 아예 결이 다른 듯한. 만약 희나와 아는 사이가 아닌 상태로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갔으면 분명 대학생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올리고서도 몸짓,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옅은 웃음을 띠며 엄마를 바라본다.
그제서야 희나에게 화답하는 엄마는.
“어서와요. 요새 많이 더워졌는데 오는데 힘들지는 않았고?”
내 평생 본 적 없는 밝은 미소로 반존대까지 써가며 희나를 맞이하며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그 모습에 내가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우며 이게 무슨 일이지, 하는 마음으로 얼이 빠진 채 엄마를 바라보는데.
“네, 오늘은 날씨가 선선해서 괜찮았어요. 어머님, 이거 받아주시겠어요?”
희나 역시 아무렇지 않게 그에 답하며 어제 몇 시간을 고심하며 구매했던 선물을 내민다.
솔직히 난 애초에 선물 자체를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희나는 그게 아니었는지 뭐라도 고르려고 했기에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디퓨저 세트를 샀었다.
엄마가 이런 걸 무척 좋아했고, 아빠도 차에 하나씩 둘 정도로 나름 관심 있어 했으며, 무엇보다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살 수 있기 때문에 딱이었다.
“뭐 이런 걸 다.. 고마워요.”
“아니에요.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그럴까?”
“네, 어머님.”
자연스럽게 거실로 향하면서도 대화를 나누는 둘의 모습에, 난 한마디도 끼어들 수 없었다. 그저 병풍처럼 희나의 뒤를 따랐다.
둘이 쇼파와 의자에 각자 앉고 나서도 말문이 닫히는 일이 없었고, 덕분에 나는 엄마가 미리 준비해 둔 음료와 과일을 상으로 나르고만 있었다.
“어머, 정말로 네가 먼저?”
“네.. 연후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만..”
“난 쟤가 먼저 고백해놓고 창피해서 꾸민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 믿는 척 하면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단 말야?”
이거 좀 배신감 느껴지는데.
그런데 내가 무슨 반응을 하던 나에게 시선을 주는 일이 없었다. 독대라도 하는 것처럼 둘이서 티키타카가 오갔다.
엄마가 저렇게 밝게 웃으며 누군가를 응대하는 것도 처음 보고, 희나가 지금 우리 엄마를 대하는 태도도 너무나 정중해서 낯설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그냥 내가 모르는 두 사람이 내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그렇게 한동안은,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의 일부터 시작해서 데이트 썰이나 내가 알바하는 곳에 희나가 매일같이 찾아왔던 것 등 한 달 남짓한 우리의 연애사를 요약해서 들이붓고 있었다.
서서히 진행되던 이야기는, 어느덧 여름방학 첫째 주에 갈 예정인 바다 여행 이야기까지 도달했다.
“아까 오면서 연후한테 들었는데, 어머님께서 호텔 예약을 해주셨다고..”
“내가 연후가 걱정돼서 그런 거니까 그건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감사합니다, 어머님. 연후랑 즐겁게 시간 보내고 올게요.”
여기서 희나가 한 번쯤 사양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의외로 별 다른 말 없이 살짝 고개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엄마는 또 한번 놀란 얼굴을 한다.
“정말.. 어쩜 이렇게 예의가 바르지?”
“아니에요~”
“아니긴. 둘이서 간다고 해서 걱정했었는데, 너 보니 그럴 필요가 없겠어.”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다행이에요. 아, 잠시 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
“그래, 저쪽 문 옆에 있으니 편하게 사용하고.”
희나가 화장실을 가면서 잠시 중단된 틈을 타, 간신배마냥 엄마의 옆 쪽으로 자리를 옮겨 찰싹 붙어 앉았다.
“엄마, 희나 어때?”
“연후야.”
“응?”
그러나 내 물음에 답하기 전에, 굳은 얼굴을 한 엄마가 어울리지 않게 이름으로 날 부르면서 짐짓 심각한 어조로 말을 잇는다.
“쟤 고등학생 맞니?”
“음…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까 아닌 것 같기도 해….”
엄마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주 쌩뚱맞은 건 아닌 것이, 오늘의 희나는 진짜 나랑 동갑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을 정도다. 엄마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 연륜마저 느껴졌다.
둘이서 놀 때에는 조금 어른스럽긴 해도 비슷한 나이대라는 게 느껴졌는데, 오늘은 그런 모습이 편린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한 4년 정도 꿇은 게 아닐까?
“애가 똑 부러지기도 하고, 예의도 바르고. 왜 우리 아들내미를…”
“이해는 가지만 내 앞에서 그러는 건 좀 너무한데?”
“아들.”
“엉?”
“꽉 잡고 있어. 쟤랑 살면 아들 걱정은 앞으로 평생 안 해도 되겠다.”
“노력해보겠습니다…”
희나가 나한테 정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긴 해야지.
나도 바보는 아니라서 희나같은 여자친구는 전 세계를 뒤지더라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잠시 후, 희나가 돌아오자 드디어 나까지 껴서 셋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개인적인 스토리들은 차마 엄마 앞에서 할 수 없었으니 학교 생활 같은 일상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지만.
“덕분에 연후가 수학 점수도 많이 올랐다며?”
“연후가 열심히 해서 오른 거에요.”
“공부한다고 하고 둘이서 데이트 할 줄 알았더니.”
“데이트도 하긴 했지…”
어찌됐든 엄마가 엄청 마음에 들어하니 다행이었다. 하긴, 마음에 안 들 수가 없었다.
예쁘지, 공부 잘하지, 착하지, 예의 바르지.
그야말로 완벽 그자체.
새삼스러운 그 사실에 다시금 행복함을 되새기는데, 갑작스레 불온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부모님께선 너희 둘이서 바다 가는 거 알고 계시고?”
“네. 사실 저희 어머니께서도 방을 하나 알아봐 주신다고 하셨어요.”
“그래? …..하나?”
“네, 하나.”
“흐음..”
“잠깐, 난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방을 하나만 잡는다고?”
생각지도 않았던 말에 화들짝 놀라 내가 그리 외쳤으나, 희나의 얼굴에는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 상반된 반응에, 엄마가 눈을 가늘게 뜨며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희나에게 고정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1인실을 두 개 잡았는데… 바꿔줄까?”
“2인실을 하나 잡는 편이 어머님께서도 부담이 덜 하실 테니 혹시 변경이 가능하다면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직 가능은 할 텐데..”
“물론 어머님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거에요. 저희는 아직 학생이기도 하고.”
“나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지만.. 이건 아들이 말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러게 말이야…….”
급격히 진행되는 전개에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엄마가 방을 예약해줬다는 말에 나는 당연히 1인실 두 개일 거라고 생각했고, 오히려 희나네 어머니께서 방을 하나만 잡아주려고 하셨다는 거에 충격을 받았다.
나를 믿으시는 건지, 아니면 불상사(?)가 일어나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지.
더욱이 아무렇지 않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희나가 대단해 보였다.
나는 듣고만 있어도 얼굴이 다 화끈거리는데.
에라, 모르겠다. 방은 하나라도 침대는 두 개일 테니 수학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다만 내 앞의 두 사람은, 속으로나마 합리화를 시작하고 있는 나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서서히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럼 방은 바꾸는 걸로 하고. 이제 오늘은 뭐 할 거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버님까지 뵙고 가도 괜찮을까요?”
“오늘 늦게 올 거라 그건 힘들겠네.”
“그렇군요..”
부담되는 상황이 덜어져서 다행이다,같은 게 아니라 진심으로 우리 아빠까지 못 보고 가서 아쉽다는 표정이다.
“그럼 나도 잠시 나갔다 올 테니 둘이서 놀다가 가.”
“엥? 어디 가게?”
“이모 보러.”
아, 방 변경 때문에 그 김에 또 보러 가는 건가. 작은 이모가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으니. 이모부가 그 쪽 호텔 리셉션 쪽에 연이 좀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희나도 편하게 있다 가고.”
“네, 어머님.”
그 말을 끝으로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바로 옷을 챙겨 입은 후 나가는 걸 보아하니 분명 이모랑 희나 만난 썰을 한껏 풀다 오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내 방에서 앨범을 조금 구경하다가, 저번에 이야기 했던 교환건을 성사시켰다.
무려 중학생 시절 사진 맞교환. 쌉이득 혜자 거래에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바로 지갑에 넣었다. 생각날 때마다 봐야지.
그 후로도 한 시간 정도 내 방과 앨범 구경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우리도 집에서 나왔다.
아무래도 형이 언제 돌아올 지 모르니 집에서만 있기도 뭐하고. 희나는 우리 형 얼굴까지도 한 번 보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윤정이 누나 데려올 확률이 높은 만큼 아직은 서로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해야 하나.
형한테 여자친구 소개하는 것도 좀 그렇고.
오늘은 돌아다니기보다 카페에 들어가서 대략적인 여행 일정을 짰다. 1박 가는 거에 거창하게 일정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민망했지만.
그래도 나에게 있어서 또래와 둘이서 여행을 가는 것도, 그 또래가 여자친구인 것도 모든 게 처음이었으니까.
여러모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건 희나 또한 마찬가지인지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눴다.
기말 시험도 끝났고, 방학은 코앞이었으니.
우리 둘의 첫 여행도, 이제 곧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