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Girlfriend Is Very Good to Me RAW novel - Chapter (71)
여자친구님이 너무 잘해줌-70화(71/213)
Ep. 70
쇠고랑을 찬 것 마냥 무거운 발걸음으로 희나의 뒤를 따랐다.
어디서부터 설계된 거였을까. 그냥 우연의 일치였을까. 나는 어째서 또 희나와 그런 쇼핑을 하게 된 것일까.
제발 다른 소원은 안되겠냐고 사정사정 해봤지만.
“응, 안돼. 꼭 골라줬으면 좋겠어.”
반론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그녀의 목소리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음을 깨달았다. 덕분에 한 걸음 한 걸음 목적지에 가까워질 때마다, 내 마음은 두 배로 무거워짐을 느낀다.
이내 희나가 걸음을 멈추자, 고개를 들어 도착한 매장을 바라보았다.
“……”
지나가면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브랜드 여성 속옷 전문 매장이 눈에 들어온다. 한눈에 보기에도 남자는 절대 들어갈 수 없을 것 같고, 안에는 여성 손님들만이 있을 것 같은.
입구 앞에 도착하자 마음이 더 다급해졌다. 이건 진짜 아니라는 느낌이 팍팍 들어, 곧바로 희나의 팔을 붙잡고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잠깐 놀란 듯 싶었으나, 자연스레 호응해 주는 그녀와 잠시간 키스를 나누다가 입을 떼고 말을 꺼냈다.
“사랑해, 희나야. 우리 영화 보러 가지 않을래?”
“나도 사랑해~ 영화는 이따가 보자. 알았지?”
“지금 보면 안될까?”
“안돼.”
이제 고작 이런 스킨쉽에는 희나도 간단히 넘어가 주지 않았다. 좋아는 하지만, 의견을 굽힐 정도는 아니라고 해야 할까.
키스 한 번이면 다 통하던, 예전의 쉬운 희나가 오늘따라 무척 그리웠다.
결국 그녀에게 손을 잡힌 채로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매장 모든 직원과 손님의 시선이 내 쪽으로 꽂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저 희나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갔다.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변태처럼 보일 것 같아서.
희나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매장 한 쪽으로 향하더니, 도중에 하얀 브래지어와 팬티 세트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바로 내 앞에 들이밀며 보여주었다. 어쩐지 많이 본 듯한 광경이었다. 그때는 속옷과 차이를 알 수 없는 수영복이었고, 지금은 진짜 속옷이었지만.
“이런 건 어때?”
“예쁘네. 그게 좋겠다. 그걸로 살래? 내가 사줄까?”
슬쩍 보고는 그냥 다 마음에 든다는 듯이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런 내 태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희나의 말이 이어졌다.
“똑바로 안 봐주면 나 여기서 하루 종일 고를 거야.”
사람이 어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을까.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개를 돌려 희나가 들고 있는 속옷을 바라보았다.
근처에 보이는 속옷들에 비해 화려하지는 않고, 한눈에 보기에도 촉감이 굉장히 부드러울 거 같은 재질로 보였다. 마치 비단 같은.
보면서 머릿속으로 희나가 입었을 때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음…”
동시에 일어나버린 하반신 이슈를 애써 무시하고, 다시금 진심을 담아 말해주었다.
“어울릴 것 같아. 예쁘겠다.”
“그래? 그럼 이거랑~”
옷 처럼 시착해 볼 것을 미리 여러 개 골라두려는 지, 다른 속옷에도 눈을 돌린다. 그런 그녀의 옆에서 뻘쭘하게 서 있던 나는, 눈 둘 곳을 찾으며 슬쩍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여자 뿐.
그런데 그 사이에, 놀랍게도 나 말고 다른 남자 한 명이 나처럼 뻘쭘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기껏해야 나보다 두세 살 많아 보이는.
안쓰러움을 담아 그쪽을 잠시 바라보니, 그 남자도 여기저기로 시선을 돌리다가 나랑 눈이 마주쳤다. 잠시, 그렇게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가.
-끄덕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음에도, 서로에 대한 공감에 고개를 끄덕여준다. 매장이 조금 큰 편이어서, 모든 손님들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아 나 외의 남자는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동지가 있는 것을 알게 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연후야! 이건 어때?”
그렇게 딴 짓을 하던 중에, 희나가 새로운 속옷을 들고 내 앞에 섰다. 이번엔 전체적으로 레이스가 조금 달린 검은색 속옷과, 아까 하얀색이랑 비슷한 느낌의 연보라 색 속옷이었다.
그것들을 양 손에 들고 하나씩 자신의 몸에 대며 나에게 의견을 구한다.
“둘 다 괜찮은 것 같은데”
“그런 거 말고~ 너는 어떤 게 더 좋아?”
“어…검은 쪽?”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구나? 알았어!”
“근데 네가 맘에 드는 걸로 사는 게 좋지 않을까?”
내 취향을 반영해주는 건 기쁘지만, 결국 매일 보면서 갈아입는 건 본인일 텐데. 속옷이 평소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런 내 물음에 희나가 몸을 가까이 했다. 그리고 뒤꿈치를 들어 내 귀에 입을 가까이 한 다음, 조용히 속삭였다.
“너한테 보여줄 거니까, 네가 좋아하는 걸로 사야지.”
“…….”
“52일 남은 거, 알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총총 걸어가 다른 종류의 속옷도 살펴보는 내 여자친구님.
나는 머리와 하반신 양 쪽에 피가 쏠리는 것을 느끼며 양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내가 여기서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걸까. 날이 갈수록 참기 힘들어서 가능한 한 떠올리지 않고 있으려 했는데.
희나의 생일까지 하루하루 날짜를 지워가며 기다리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뱉어 놓고도 매번 후회하는 ‘그때까지만 기다려줘’가 끝나는 날이었으니까.
그래도 희나의 말을 들으니, 그녀가 고르는 속옷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거, 오늘 사는 속옷을 그때 볼 수 있는 거 맞지? 희나가 입고 있는 걸?
이건 어쩔 수 없다. 진심 모드로 간다.
갑자기 차오르는 의욕에 마음을 다잡으며 희나에게 다가가던 중, 문득 조금 전까지 눈을 마주치던 남자가 떠올랐다. 그 분은 먼저 가셨으려나, 싶어서 다시 고개를 돌리니 여전히 그 자리에 계셨다.
다만.
-빠드득
그런 종류의 이 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벌써 죽었을지도 모를 만큼, 엄청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와 희나 쪽을.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그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그의 눈빛에서 부러운 마음과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반반씩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결국 더 이상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희나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자기도 여자친구랑 왔으면서 왜 저렇게 보는 지 모르겠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사이에.
희나가 또 새로운 속옷을 하나 들고 왔다. 뒤쪽으로 손이 비춰 보일 만큼 얇은 타입의 속옷이었다. 원피스처럼 허벅지 부근까지 이어져 있고, 팬티는 따로 있는. 그런데 그 팬티가 분명 비춰 보일.
“이거 봐~ 이건 안에 다 비치겠다. 그치?”
“…….”
“좋아?”
“아니?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래에~?”
하얀색의 원피스 안쪽으로 내부가 비춰져 무척이나 야해 보이는 그 속옷에,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안이 비치는 원피스 타입의 속옷을 뭐라고 하지? 시스루 슬립? 이름이야 어쨌든 굉장히 바람직한 속옷이었다.
좀 더 나이가 있는 분들이 입을 만한 디자인이 아닌가 싶었는데, 희나가 들고 있는 것은 굉장히 귀여웠다. 아니, 귀여울 것 같았다. 희나가 입으면.
아닌 척 계속 시선을 주고 있는 내 모습이 재미있는지, 희나가 쿡쿡 웃으며 몸을 바싹 붙이고는 나에게 물었다.
“이것도 살까?”
“그… 네가 사고 싶으면.”
“그런 거 안 된다고 했지. 확실히 말해.”
“…사자.”
“알았어! 이건 그 다음에 입어봐야지~”
여전히 괜히 주위에서 우릴 보고 있지 않나 피해망상처럼 의식하게 되고, 이 장소에 있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와서 다행이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제발 52일 빨리 지났으면.
—
1시간 가까이를 둘러보며 구경하다가, 드디어 결제를 마쳤다. 정말, 정말 다행히도 이번에는 시착하는 모습까지 보게 하지 않았다. 매장 내부에 피팅룸들이 붙어 있고, 아무래도 속옷 매장인 만큼 다른 여자분들도 시착 해보고 계실 텐데 내가 근처에 있기는 좀 그랬으니까.
물론 나도 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훗날의 기대감도 있고 지금 보면 너무 불끈 불끈해 질 것 같아서.
검은색 레이스의 속옷 하나와 그다음에 본 하얀색의 야한 것 하나. 총 두 개를 산 다음 밖으로 나왔다. 바깥공기가 코를 통해 폐로 들어오자 해방감마저 들었다.
드디어 저기서 빠져나왔다!
“후후, 크리스마스에 쇼핑부터 해버렸네.”
“뭐 어때. 근데 꽤 비싸더라.”
“좋은 건 좀 비싼 편이긴 해. 그래도 보면 싼 것도 많아.”
내가 생각한 것보다 가격이 더 나와서 조금 놀라긴 했다. 내가 옷 살 때랑 비슷하게 가격이 나와버려서.
“밥은 내가 사줄게.”
“응? 이건 내 속옷 산 건데?”
“그렇긴 한데, 우리 둘을 위해서 산 거니까.”
간접적인 19금 발언을 하며, 조금 멋쩍어져 손으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희나는 그 말에 조금 놀란 얼굴을 하다가, 이내 눈웃음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그럼, 연후가 사주는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파스타 먹을래?”
그 후에는.
둘이서 30분의 대기 끝에 파스타를 먹은 후 어디 갈 곳이 없어 영화관에 들렸다. 다만 볼만한 영화들은 전부 자리가 없었고, 그렇다고 아무거나 보는 것은 시간이 아까웠기에 금방 나와버렸다.
그렇게 이곳 저곳을 헤매이다가, 크리스마스에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하고 싶으면 예약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니다 보면 갈만한 곳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딱히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나나 희나나 둘이 같이 있는 것을 중요시 하는 편이니까. 그래도 카페마저 들어가기 힘든 현재 상황에 더 돌아다니기는 힘들었고, 결국 케이크를 하나 사서 희나네 집에 가게 되었다.
“내가 자리 좀 비켜줄까?”
집에 혼자 계시던 아주머니가 우리의 갑작스러운 귀가에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급히 외출 하려고 하시는 것을 말렸다.
굳이 우리 때문에 나가시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고, 아주머니가 나가버리시면 내가 참을 수 없는 분위기가 될 것 같아서.
그렇게 셋이서 케이크를 먹으며 티비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크리스마스라면 당연히 봐줘야 할 나x로 집에 같은 것들을. 몇 번이고 본 것인데 희나와 함께 웃으며 보고 있으니 더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자, 일이 있어서 아침에 나가셨다던 아저씨가 돌아오셨다. 그렇게 저녁 식사는 넷이서 먹게 됐다.
올해엔 희나와 같이 공부를 하다가, 여기서 식사를 하고 집에 돌아가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었다. 덕분에 이젠 아저씨나 아주머니와 같이 밥을 먹는 것도 무척 자연스러웠다.
“다음 주에 우리가 간다는 건 들었지?”
“예. 아빠도 엄청 기대하고 계세요.”
“흠흠, 그래. 형님 말마따나 너희도 어디서 술자리 가지기 전에 자기가 얼마나 마실 수 있나 알아 봐야지. 희성이 때도 그랬어야 했는데.”
아저씨도 희나랑 같이 술 한잔하는 게 무척 기대되셨나 보다. 연신 웃으시며 그 말만 꺼내시는 걸 보면.
저녁 식사까지 마치고 나서,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갈 준비를 했다. 자고 갈 것도 아닌데 크리스마스라고 굳이 더 늦게까지 있을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매일 보고 있으니까.
물론, 헤어지기 직전에 희나가 한마디를 남겼다.
“내년에는, 이브부터 26일까지 무조건 같이 있는 거야. 둘이서만. 알지?”
“넵.”
그렇다고 한다.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이제 내일모레면 방학식이었다. 그리고 그것마저 지나고 나면 새해였다.
나와 희나가, 스무 살이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