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Girlfriend Is Very Good to Me RAW novel - Chapter (85)
여자친구님이 너무 잘해줌-84화(85/213)
Ep. 84
말없이 희나가 들고 있는 베개를 손에 쥐었다. 희나는 내가 베개를 가져가려 하자, 순순히 건네주고는 침대 위에 걸터 앉았다. 이번에 새로 샀는지, 낯설면서도 푹신푹신한 베개의 촉감을 느끼며 나도 희나 옆에 살며시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고 보면 이런 베개 하나도 새 건지 아닌 지를 구분할 수 있을 만큼, 희나네 집에 많이도 들락날락했구나 싶다. 다른 방에 있던 걸 이사하면서 가져온 걸 수도 있지만. 어쨌든 사귄 지 어느새 1년 반이 넘었다.
내가 지금까지 처음부터 지켜볼 수 있었던 연애라고는 정후 형의 연애뿐이었고, 그마저도 어떤 식으로 사귀었는지, 둘만 있을 때는 어떤 느낌으로 서로를 대하는지는 전혀 모른다. 내 친구들도 아직까지 연애 이야기를 꺼낸 놈은 없었고.
그러다 보니, 희나와 만나면서 이런 식으로 사귀는 게 맞는지,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그럭저럭 할 것들을 다 하면서 지내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인터넷에서는 보통 사귀고 세 달이면 진도를 끝까지 뺀다고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대부분 스물이 넘은 사람들의 연애였다. 물론 우리 또래에도 나처럼 2년이 다 되어가도록 끝까지 가지 않은 것은 드물겠지만.
물론 이렇게 인내함으로써 희나의 가족에게도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고, 그게 계기가 되어서 가족들끼리도 무척 친해졌다. 그것은 분명 좋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남자친구로써, 그토록 바라고 있는 여자친구를 기다리게 한 것이 잘 한 일은 아니겠지. 나도 언제부턴가 결심보다는 반쯤 자존심과 고집으로 손을 대지 않은 것이고.
그럼에도, 가끔 도를 넘게 유혹하는 듯 하면서도, 결국은 내 의지를 존중해서 억지로 하려고 하지는 않은 내 여자친구가.
정말로 고마웠다.
그렇기에, 조금은 뒤늦었을지 모르지만.
“희나야.”
“으응~?”
여전히 말 꼬리를 늘리며 웃음을 흘리는 내 여자친구에게.
“13일에, 전철역 앞에서 만나자.”
“어?”
“우리 첫 데이트했을 때 만난 곳에서.”
일정을 확실히 말해주었다.
“그날의 데이트는, 14일까지 인걸로.”
쑥스러움 조금에, 고마움 많이. 그 외엔 기대감으로 가득한.
“괜찮아?”
“…응!”
벌써부터 심장이 터져버릴 만큼 두근대며, 긴장이 넘칠 수 밖에 없는 데이트 일정을.
—
이날, 나 나름대로 폼을 잡으며 그렇게 말은 했지만, 솔직히 속은 엉망진창이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방에서 나온 후, 다같이 대화를 나누다가 아주머니께서 해주신 저녁을 먹은 뒤 형과 나는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아주머니만 혹시 집에 문제가 있을지 봐줄 겸 하루 이틀 같이 지내기로 하셨고.
그렇게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작별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나는 곧바로 컴퓨터 앞에 앉은 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이런저런 영상이나 글들을 보면서 그날을 위한 공부를 하긴 했었으나, 막상 간접적으로나마 ‘그때 하자!’고 확실히 말하고 나니, 토할 정도로 긴장감이 치솟았다.
희나가 아무리 평소에 많이 리드해 주고, 연상 같은 모습을 보여주긴 했었어도, 그런 일을 할 때 정도는 남자로써 여자친구가 불안하지 않게 이끌어 주고 싶었으니까.
솔직히 누군가에게 상담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이런 걸 어떻게 직접 물어보겠어? 친구들한테 물어보는 것도 싫고. 애초에 내 친구들 중에 제대로 답변을 해 줄 경험이 있는 놈이 있을까.
역시 믿을 건 인터넷 뿐인가.
[ 제목: (상담) 여친이랑 처음 할 때 주의해야 할 거 있음? ] [ 내용 : 둘 다 처음인데 알아둬야 할 거 있을까? ]적당한 커뮤니티에 들어가 글을 올려봤다. 이거 외에도 지식인이라던가, 그냥 검색을 하면서 배운 것도 있었지만, 뭔가 사소하면서도 생생한 조언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규모가 좀 있는 곳인 만큼, 금세 밑으로 댓글이 주르륵 달리기 시작했다.
[ ㅇㅇ(19.53) : 맨손으로 여기저기 만지면 감염될 수도 있으니 손에도 콘돔 껴야 함. 안 끼면 성병 걸림 ]ㄴ[ ㅇㅇ(293.14) : 꿀팁 ㄷㄷ; ] [ ㅅㅅ는안해봤지만후다임 : 몰라씨발련아 저녁먹고 기분좋게 겜 땡기려고 했는데 좆같은 거 올리네 씨발련이 ]
ㄴ[ ㅇㅇ(59.39) : 왜케 풀발함 ㅋㅋㅋㅋㅋㅋ ]
ㄴ[ 설마(210.43) : 님혹아? ]
ㄴ[ ㅅㅅ는안해봤지만후다임 : 21043 너 어디사냐 ]
대부분은 뻘댓글이긴 했지만, 이 정도야 감안했으니까. 그보다 다들 왜 이렇게 화가 많은 걸까? 순수한 질문이었거늘.
다행히 그중에서도 건질 게 한두 개쯤은 있었다.
ㄴ[ ㅇㅇ(210.43) : 근데 혹시 45살까지 못해본 거임? 설마 미연시 같은 거 하고 조언해주는거? ]
ㄴ[ 45대마법사 : 닥쳐씨발아 ]
ㄴ[ ㅇㅇ(210.43) : ㅇㅇㅋㅋ;;ㅈㅅ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ㄴ[ ㅇㅇ (59.39)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ㄴ[ 45대마법사 : 댓글 추첨에 당첨되셨습니다. 수령을 위해 주소 보내개새끼야 ]
얼추 아는 내용들이긴 했지만.
[ ㅇㅇ(23.99) : 대화 많이 해서 긴장 풀어줘라. 긴장한 상태로 하면 몸 반응도 잘 안 오고 존나 더 아파하니까. 그리고 윤활제 꼭 쓰고. 마지막으로 만화 같은 건 믿지 마라. 중요하니까 두 번 말한다. 만화 믿지 마라. ]ㄴ[ ㅇㅇ(124.13) : ㄳㄳ ]
ㄴ[ ㅁㄹㅅㄱㄱㄴㅇㄷ : 기만자 하나랑 기만자(진) 이새끼들 전부 차단 안되냐? ]
그래도 다시 한번 되새길 겸 나쁘지 않았다. 딱 이 정도만 보면 되겠지, 이런 곳에서는. 그리고 대화를 많이 해주는 게 좋다는 건 굉장히 좋은 조언인 것 같았다. 메모, 메모.
질문글 외에도 내가 준비해야 할 것이나 신경 써야 할 것 등을 두어시간 더 검색해봤다. 거의 비슷한 내용들이기는 하지만, 이런 거라도 보고 있지 않으면 진정이 안돼서. 아직 며칠이나 남았는데도, 아까부터 계속 기대와 긴장으로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는 수시로 여름철에 봤던 희나의 새하얀 다리나 목덜미 등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배도 본 적 있었지. 허리가 굉장히 얇고, 배꼽은 자그마해서 무척 귀여웠던.
후, 떠올리지 말자. 생각하면 할수록 몸이 뜨거워지니까. 근데 외박하게 되면 부모님한텐 말씀 드려야겠지? 아, 이거 희나네 집에서 자고 온다고 하면 백퍼 다 알 건데. 말하기 참 낯부끄럽네.
연인 사이에 그런 걸 하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고, 막상 가족들은 아직도 안 했냐는 듯한 분위기였지만.
-드르릉
그러는 중, 폰이 짧게 울리는 것을 보고 확인해 보니, 희나에게 톡이 와 있었다.
[ 희나 : 연후야, 혹시… ] [ 한연후 : 왜? ] [ 희나 : 15일까지 데이트하는 건 안돼? ] [ 한연후 : (고양이가 양 팔로 하트를 그리는 이모티콘) ] [ 희나 : ♡♡♡ 곧 저녁 공부할 거지? 화이팅! 사랑해~ ]오늘의 마지막까지도 요망한, 여자친구님의 카톡을 보고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엄마한텐 그냥 집에 돌아오는 날만 말해주겠다고 해야 할까? 저기 들어가면 못 나올 것 같은데.
진심으로.
—
그 후로 시간이 조금 흘러, D-day가 가까워졌다.
희나네 집에 들렸던 이후로는 데이트도 한 번 밖에 안 했다. 데이트했을 때, 머릿속에 진짜 그 생각밖에 안 나서 제대로 즐길 수가 없던 탓에. 솔직히 희나도 내내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느낌이었다. 이러다가 희나의 자취방에 들어가면 그냥 그대로 일을 치룰 것만 같은.
그래서 그때 헤어지면서 희나에게 제안했다.
“우리, 13일 전까지만 데이트 줄이지 않을래? 그날 이후부터는 평소처럼 만나고.”
그런 내 말에 곧바로 희나가 울상을 지었지만, 본인도 종일 정신이 팔려 있던 것을 알고 있었는지 안 된다고 하지는 않았다.
“으으…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아서 안 된다고 말을 못 하겠어… 대신 톡이랑 전화는 매일 해 줘야 돼. 알았지?”
“공부하는 시간 빼고는 계속 할게. 저녁에는 자기 전에 영통하고.”
“응… 대신 지금 키스 해줘. 며칠치 한꺼번에!”
그렇게 희나와 헤어지고 나서, 3일.
드디어 희나의 생일이 바로 내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방에 앉아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어제까진 시간 맞춰서 나름 공부를 하긴 했지만,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저 내일 있을 일을 수백 번은 더 시뮬레이션 돌려보고 있을 뿐. 희나와 며칠 안 보는 동안 왜 데이트 안 하냐는 말을 정말 온 가족에게서 꾸준히 들었다.
엄마가 희나랑 자주 연락을 하고 있는 만큼, 헤어진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겠지만. 못해도 하루 건너 최소 한 번씩은 얼굴을 보던 우리가, 갑자기 이러니 무슨 일인지 궁금했나 보다.
그렇다고 ‘만나면 너무 불끈불끈 해져서, 13일 전까지만 참기로 했어요.’ 라고 말하는 것도 너무 어처구니 없잖아.
하지만 이제 그런 날도 끝이었다. 오늘 쉽게 잠을 이룰 수는 없겠지만, 저녁 10시도 넘은 터라 슬슬 자야 할 시간이고, 자고 일어나면 드디어 D-day였다. 희나랑 만나기로 한 시간은 점심이지만, 출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것저것 점검하려면 일찍 일어나서 준비해야지.
잠에 들기 전, 잠시 거실로 나가 쇼파에 앉아 있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내일부터 2,3일 정도 안 들어올 거야.”
“어디 놀러 가게?”
“희나랑 데이트 하기로 해서.”
“무슨 데이트를 3일…아.”
뭔 소리를 하냐는 듯 말하다가, 이유를 눈치 챘는지 잠시 말을 멈춘다.
“그래, 알았어.”
“응.”
그리고는 담백하게 알겠다는 말만 해준다. 이럴 땐 우리 엄마의 저 쿨시크한 성격이 참 고맙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다른 가족들한테는 엄마가 잘 이야기해주겠지.
무단 외박이 되지 않도록 보고도 끝났고, 곧바로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이제는 기억 속에 아련히 남아 있는, 첫 데이트 때의 그 긴장된 마음보다 한 100배쯤은 더 떨려오는 것을 느끼며.
이젠 정말, 내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