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Girlfriend Is Very Good to Me RAW novel - Chapter (9)
여자친구님이 너무 잘해줌-8화(9/213)
Ep. 8
토요일 아침.
내 인생 첫 데이트의 날.
기대감에 잠을 못 이루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어제 하루종일 하도 쳐맞아서 그런지 몸이 노곤해서 금새 잠들 수 있었다.
덕분에 새벽같이 일어나서 가능한 한 깔끔하게 씻고 느긋하게 단장을 할 여유도 있었고.
단장이라고 해봐야 두발규정 때문에 크게 건드릴 게 없는 머리에, 옷차림도 딱히 고민할 것은 없었다.
무난하게 슬랙스에 얇은 티, 그 위에 가디건을 걸치는 걸로 마무리. 초여름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꽤나 걸어다닐 것 같으니 도중에 벗어서 들고 다녀도 괜찮도록 코디했다.
희나도 오늘 문제 없이 나올 수 있을 것 같고.
[ 희나 : 시간 맞춰서 갈게~ ] [ 한연후 : 나도 맞춰서 나갈게 ] [ 희나 : 연후야, 너무 서두르지 말고.. 차 조심하면서 와야 해. 알았지? ] [ 한연후 : 전철 탈거라 괜찮아ㅋㅋ ] [ 희나 : 응! 그럼 이따 봐! ]좀 전까지 이어지던 톡을 보고 있자면, 심장이 두근두근 요동쳤다.
이거 출발 전까지 어떻게든 진정시켜야….
“……”
“…뭐, 할 말 있어?”
엄마가 형 방에 넣어놨는지 안보이던 내 슬랙스 찾는다고 들락날락 했던 게 시끄러웠나보다. 나 때문에 잠에서 깬 큰 형이 어느샌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누워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디 가냐?”
“놀러.”
“아침부터 개시끄럽더라”
“쏘리요~”
“그러고 보니 어제 니 친구들이 너 존나 찾던데 뭔 일 있었냐?”
“그 미친놈들이 형한테 귓 했어?”
“어. 니 어제 들어오기 전에 묻던데. 까먹었었다.”
진짜 개미친놈들이네. 아무리 게임 몇 번 같이 해서 친추가 되어 있다지만 우리 형한테 귓말을 날려?
물론 어제 그 단톡방엔 아직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냥 잠깐 친구 만나느라 톡 안보고 늦게 와서 그런 거 같은데.”
“흠…”
“반응이 왜 그래? 오늘 알바 안 감?”
“간다.”
우리 형이지만 참 담백한 반응이다.
“어, 수고.”
“야 넌 언제 올 건데.”
“몰라? 아마 저녁?”
“이따 6시 넘어서 밥 안 먹었으면 연락해라.”
“왜?”
“윤정이가 같이 밥 함 먹자더라.”
“누나가? 아니 둘이 데이트 하는데 자꾸 나 부르지 말라고.”
“밥 먹을 때만 부르는데.”
“둘이 좀 먹어라.. 아무튼 일단 알겠어.”
이윤정. 큰 형의 여자친구고, 벌써 4년째 연애 중인 나와 6살 차이 나는 누나다. 형과는 스무 살부터 사귀어서 군대도 다 기다려주고 지금까지도 사이가 좋은 게 내가 보기엔 둘이 참 찐사랑이다 싶었다.
나랑은 나이 차이가 좀 있어서 그런지 나를 많이 귀여워하는 편인데 데이트 할 때 뜬금없이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같이 만나도 셋이서 피시방 가거나 밥 먹거나 둘 중 하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니 꽤 괜찮은 상담 상대 인 것 같기도 했다. 시간 나면 누나한테 연애 상담 좀 해볼까.
“그럼 난 잔다, 여자친구 잘 만나고”
“어? 알고 있었어?”
“몰랐는데 어제 윤정이가 그러더라. 니 여친 생긴 거 아니냐고.”
하긴 우리끼리 톡은 잘 안 하니까, 프사 바뀌어도 모를 법 하지. 근데 어째 가족보다 윤정이 누나가 먼저 눈치 채냐. 엄마 아빠는 알고 계실 것 같긴 한데 별 말씀 없으시고.
“사진 봤어?”
“어, 이쁘던데. 노파심에 말하는데 혹시 속고 있는 건 아니지? 신천지 조심해라.”
“아니, 그놈의 신천지…”
“나갈 때 불 끄고.”
“잘 자…”
솔직히 나도 처음엔 그거 아닌가 했으니 할 말은 없다만. 마음이 조금 복잡하긴 하네.
모르겠다, 일단 가서 생각하자.
희나보단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어야지.
—
현재 시각 10시 30분.
만나기로 한 시간이 11시였으니 이 정도면 희나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희나를 서서 기다리게 하는 것도 신경 쓰이고, 조금이나마 먼저 가서 긴장감을 죽일 필요가 있었다.
우황청심환이라도 챙겨 먹고 왔어야 했나 후회가 된다.
점점 심장 뿐만 아니라 손 끝까지 떨려오는 걸 느끼면서 전철역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패스트푸드점 앞에서 보기로 했으니, 올라가자마자 왼편으로 꺾으면 바로 약속 장소가 보일 것이다.
그런데 계단 위 끝자락부터 굉장히 지나가기가 힘들었다. 물론 번화가 근처이기도 하고 주말엔 항상 사람이 많은 곳이긴 했는데 평소보다 약간 더 정체된 느낌.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어떻게든 낑겨 올라가서 주위 사람들이 은근슬쩍 시선을 주는 방향을 보았다.
보고 나니까, 사람들이 어물쩡 느긋하게 걸어가면서 눈길을 줄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이 한 번씩 닿는 그 곳에는. 가로수 옆에 비스듬이 서서, 어쩐지 조금은 불안한 듯 고운 눈썹을 약간 찡그리며 폰을 바라보고 있는.
너무나 예쁜 여자 아이가 있었다.
비대칭으로 살짝 가르마 진, 눈썹까지 닿는 앞머리와 비단결처럼 길게 내려앉은 검은 생머리.
가느다란 얼굴 선에 뚜렷하면서도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그를 꾸며주는 옅은 화장과, 과하지 않게 살짝 빛나고 있는 작은 귀걸이.
누가 봐도 데이트 하러 왔구나? 싶은 연한 베이지 색의 랩 니트에 무릎보다 위에 있는 연갈색 울 스커트, 새하얀 양말과 짙은 와인색 플랫 슈즈, 숄더 백을 곁들인 코디까지.
나 역시 그쪽을 바라보며 지나쳐가는 사람들처럼 순간 시선을 떼지 못하고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아무리봐도 데이트를 하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말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바로 나였다.
-부비적, 부비적
그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잠시 멍 때리다가, 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금 바라보았다.
희나가 예쁜 건 그 두 번의 만남 만으로도 충분히 깨닫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정하고 꾸미고 나온 희나는 그야말로 차원이 달랐다.
압도적인 비주얼이 이 장소를 지배하고 있었다.
때문에 바로 다가가서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하고 웃으며 데이트를 시작해야 하는데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하지만 ‘내 여자친구’를 향한 몇몇 시선들이, 얼떨떨하게 기분 좋으면서도 굉장히 불편해졌다. 그렇기에 멍청하게 이러고만 있을 수도 없어 홀린 듯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한걸음.
두걸음.
사람들을 헤치며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자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그 누가 내가 희나의 남친이라고 생각할까? 아마 주제도 모르고 번호를 따기 위해 달라붙는 놈팡이로 보이겠지.
달라진 주위의 낌새에 그녀가 슬쩍 고개를 들자 나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은근히 그녀에게 시선을 주는 이들의 기대를 배반하듯 너무나 환한 웃음으로 나를 반겨준다.
“연후야!”
한달음에 내게 달려온 희나는 곧바로 내 손을 그녀의 양 손으로 감싸 붙잡았다. 무척이나 부드러운 그 감촉에,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조금 전 혼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희나의 얼굴이, 표정이 확연히 느껴졌다.
“일찍 왔네?”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너보다 늦어서 미안해.”
“아니야~ 네가 이럴 것 같아서 나도 일부러 조금 서두른거야.”
“많이 기다렸어?”
“음~ 별로?”
무엇이 그리 기쁜 지 웃음을 흘리며 말을 잇는 그녀.
“연락하지. 그럼 조금 더 서둘렀을텐데.”
“으응, 아니야. 내가, 내가 너를 기다리고 싶었어.”
“기다리고 싶었다니… 왜?”
내 물음에 아주 잠시간 그녀의 웃는 얼굴이 흔들린 것 같았다.
“꼭, 와줄 거라고 믿었으니까. 이번엔, 너무 늦지 않게.”
“…어, 너보다 늦어서 은근히 돌려까는 거 아니지?”
“아니라니까~ 기다리는 시간도 데이트의 일부라고 하잖아? 후후, 데이트 시간이 길어져서 득봤어.”
“후, 안되겠다. 다음 데이트 땐 3시간 일찍 온다”
“그건 반칙이야 반칙! 앞으로 이러기 없기로!”
손을 마주 잡은 채 역 앞에서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뭔가 조금 창피해졌다.
물론 사람들이 죄다 이쪽을 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희나 때문에 약간 도끼병이 생길 것도 같았다.
게다가 이러다가는 여기서 서로 얼굴만 보다가 시간 다 보낼 것 같아서 한 손으로 희나를 잡고 이끌었다.
원래 여기서 점심을 해결 할 생각이었지만, 지금 저 안으로 들어가긴 눈치도 보이고 하니 그냥 다른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걷는 상태가 되니 또다시 두근거림에 손에 땀이 찰 것만 같았다.
이끌듯이 앞서 걷는 나를, 희나가 잠자코 따라오는 듯 하다가 이내 손을 한 번 놓고는 다시 잡는다.
손가락이 전부 겹쳐지는 손깍지 형태로.
그에 내가 물음표를 띄우며 희나를 바라보자.
“이렇게 잡는 게 좋아. 사귀는 사이니까.”
라며 단호하게 말하니 나로썬 더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나도 이게 더 좋았으니까.
멈춰, 입꼬리! 그만 올라가!
바보같이 웃지마!
시크고 나발이고 그런 것 까진 바라지 않을테니 멍청한 표정 짓지 마, 한연후!!
속으로 스스로를 강하게 다그쳐본다.
첫 데이트, 완벽한 여자친구, 손깍지.
그 모든 것에 이미 과부하 걸린 정신머리를 어떻게든 붙잡았다. 그리고 조금 부끄럽지만, 그럼에도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을 꺼낸다.
오늘을 위해 이렇게까지 꾸며주었는데 남자친구로써 꼭 해줘야만 하는 말을.
“참, 말하는 거 깜빡했는데.”
“응?”
“오늘, 진짜 예뻐. 아까 전철역에서 올라오자마자 깜짝 놀랐어.”
“그렇게 예뻐? 내가?”
“어, 무진장.”
“흐후흫… 다행이다. 아침에 고민 많이 했거든.”
분명 내가 칭찬해주고 있었는데 왜 내가 더 부끄러운 거지?
내 칭찬에 약간 푼수 같은 웃음을 흘리는 희나. 그 모습마저 귀여웠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하며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내 옆에서 나를 살짝 올려다보는 희나의 얼굴을 보면, 농담 아니고 진짜 바보처럼 헤헤 웃을 것만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