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who is being prudent! RAW novel - Chapter (322)
현질하는 영주님!-322화(322/322)
322화 – 보이지 않는 세계(完)
“이사벨은 황궁으로 호송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청초함을 빼다 박은 듯한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정화되는 듯한 목소리가 방 안에 잔잔히 울려펴졌다.
“그리고 황가는 이사벨의 모든 죄목들을 낱낱히 밝혔고, 반역자로서 이사벨의 최후는 정해져있었죠.”
이사벨의 처형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대륙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고, 그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처형을 지켜봤습니다.
지켜봤다. 라는 말은 조금 맞지 않는 표현이겠네요.
처형식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거든요.
“뭐··· 그때 진짜 난리도 아니긴 했었지.”
시도 때도 없이 돌멩이가 날아오는 한편.
토마토, 달걀, 메론, 참외, 수박, 딸기 등.
제국에 자생하지 않는 수많은 과일들이 쏟아져내렸습니다.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과일들이 모였다고 말하면 과장이려나요?
“과장이 아니라 진짜 그러긴 했었으니까.”
오죽하면 빈민가의 거지들이 그 날만큼은 배불리 먹었을까요.
아무튼 이사벨의 처형식은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이사벨은 모두의 조롱과 힐난 속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역시나.
그 어떤 누구도 이사벨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죠.
오직 배를 채운 빈민가의 거지들.
그들만이 그녀의 죽음에 약간의 감사를 표할 뿐이었습니다.
“실로 악(惡)이 맞이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죽음이었어요.”
사락.
그렇게 이사벨의 처형식을 끝으로 기나긴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대륙에는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죠.
그리고 그 평화를 되찾아 준 새로운 영웅들.
사람들은 새로운 아르나이즈의 탄생을 축복했습니다.
새로운 영웅들은 모든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찬란한 삶을 누릴 수 있었죠.
그들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가장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명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영웅 성녀, 아리아.
아리아는 다른 영웅들과는 달리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신성 제국의 성녀였거든요.
물론 아리아는 파면이라는 형벌을 받기는 했었습니다.
하지만 밝혀진 진실은 모두 악마들의 소행이었죠.
그녀는 악마들에 의해 성녀라는 직위가 박탈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녀는 성녀이기에 성녀인 것일까요.
신성 제국의 신민들에게 아리아는 영원한 성녀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파면을 인정하지 않았죠.
그들은 목소리를 모아 소리쳤습니다.
아리아님은 새로운 시대의 영웅이시다!
아리아님이 성녀가 아니면 대체 누가 성녀냐!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성녀가 아니면 누가 성녀냐!
우리는 아리아님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몸 바칠 수 있다!
그래! 우리는 진짜 우리 몸을 바칠 수 있다!
우리 몸을 가져가달라!
가져가달라!
어째 목소리가 점점 이상하게 변질되었지만.
그들은 아리아의 복귀를 계속해서 바랐습니다.
아리아님을 교황으로!
더 나아가 그들을 아리아를 교황으로 추대했어요.
그녀는 새 시대의 영웅이자 가장 고결한 사제.
그녀보다 신성 제국을 이끌어줄 수 있는 이가 누가 있을까요.
신민들은 끊임없이 요구했고.
신성 제국 또한 신민들과 같은 생각이었죠.
비록 악마에게 먹혔다고는 하나.
신성 제국은 대륙에 씻을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로써 신성 제국은 멸망 직전의 타격을 입었죠.
그런 신성 제국을 이끌 수 있는 건 오직 아리아 뿐이었습니다.
아리아는 새로운 시대의 영웅.
새로운 교황으로도 더없이 충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아리아의 운명이기도 했습니다.
성녀로서 태어나 성녀로서 맞이할 운명 말이죠.
그건 아리아에게 주어진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리아는 돌아가지 않았어요.
그녀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말았답니다.
저는 신성 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사람들은 의아해했습니다.
신민들 또한 당황하며 이유를 물었죠.
우리들의 고결한 영웅, 아리아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시안 백작을 사랑하니까요!
“······ 내가 언제 이런 말을 했어?”
저는 시안 백작이 없으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어요!
저는··· 저는 시안 백작을 가슴 깊이 사랑하고 있어요!
“내가 대체 언제 이런 말을 했다고?”
아···! 나의 시안!
그대가 없는 세상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대가 없는 세상을 상상 할 수가 없어요.
그대가 없는 신성 제국은 제게 지옥이나 다름 없어요!
“지랄!”
결국 아리아는 신성 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신성 제국의 교황이 아니라.
가장 고결한 영웅이 아니라.
한 명의 여인으로서 시안의 곁에 남기로 했죠.
시안의 여자가 되어 남은 생을 살기로 그녀는 결심했어요.
그렇게 아리아는 스스로의 운명을 거부했어요.
하지만 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입니까!
운명은 아리아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어요.
고결하고 순결한 성녀는 자신의 운명에 통감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리아가 교황의 자리를 거부하고 돌아왔을 때.
순결한 성녀가 아니라 시안의 여자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시안에게는 이미 혼인을 약속한 여인이 있었거든요.
제국의 황녀, 엘레나.
운명마저 거부하고 찾아온 사랑은 이미 다른 운명과 이어져있었죠.
아아! 정말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입니까.
아리아는 운명의 야속함에 슬퍼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건··· 맞는 말이긴 해.”
기분이 마치 시궁창을 핥는 것만 같았겠죠.
아니, 오우거의 겨드랑이 땀을 할짝이는 기분이었을려나요.
“······ 그 정도까진 아니었어.”
엘레나는 너무도 완벽한 여인이었어요.
시안의 짝으로 그 어느 하나 부족한 부분이 없었어요.
그런 엘레나와 비교하여 아리아는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답니다.
사람들은 고결한 영웅이니.
순결한 성녀이니.
초월적인 미모의 여인이니.
그렇게 떠받들었지만 실상은 아니었거든요.
얼굴만 예쁜 성격 파탄자.
입에 걸레를 머금은 추악함의 표본.
“뭐라고? 이 잡놈의 새끼가!”
겉과 속이 전혀 다른 표리부동의 여자!
못 되먹은 여인!
“이거 대체 어떤 호로 새끼가 쓴 거야!”
아리아는 말했어요.
아··· 가냘픈 나의 사랑이여.
나의 잔혹한 운명이여.
이것은 너무 거칠고 잔인하여 내 가슴을 바늘로 찌르고 있어요.
시안, 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이 너무도 가혹해요.
“나 그런 말 안 했다고!”
그대에겐 이미 운명을 약속한 여인이 있으나.
나의 이 비루한 욕심은 그대의 곁에 남기를 희망해요.
이 추악한 욕망이 그대를 더럽힐지라도.
성녀로서 가져서는 안되는 더러운 욕망일지라도.
순례자로서 차디찬 입술을 들어 시안, 그대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어요···!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당신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아요.
당신의 사랑도 없이 비참하게 사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음을 맞이하겠어요!
그렇게 아리아는 스스로 죽음을─.
쾅!
이 뒤는 볼 필요도 없었다.
아니, 더 이상 볼 가치가 전혀 없었다.
“뭐, 이딴 이야기를 동화랍시고 출판을 해?”
동화 이야기는 마땅한 형식이 있는 법이었다.
으레 그러하듯 주로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으니까.
그만큼 읽기 쉬워야하고 재미와 더불어 교훈까지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이야기의 각색이 들어가곤 한다.
실제 일어난 일과 다르게 과장되고 미화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이야기는 무슨···!
“대체 어떤 새끼야? 이거 대체 어떤 새끼가···!”
“엄마아···.”
그 순간 들려온 가녀린 목소리.
아리아는 뚝, 하니 그 움직임을 멈춰보였다.
천천히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바라본 곳.
그곳엔 5살 배기의 작은 소녀가 앉아있었다.
소녀는 아리아를 그대로 빼다박은 듯 외모였다.
마치 아리아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한 외모의 소녀였다.
다만, 한 가지 아리아와는 달리 머리의 색이 좀 더 금발에 가까웠다.
백금발을 기본으로 금빛이 색이 조금 더 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되려 소녀의 미모를 한층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어머. 우리 사피에르 많이 놀랐어?”
아리아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떨고 있는 소녀, 사피에르에게 다가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 상냥한 미소로 사피에르를 안아주었다.
“방금은 엄마가 혼잣말 한 거야. 절대로. 절대로 화낸 거 아니야. 알겠지?”
“으, 응···.”
사피에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아리아는 그런 사피에르를 꼭, 안아주었다.
“그래서 그 둘은 아주 예쁜 딸과 함께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그와 동시에 화아악!
환한 빛이 터져나와 사피에르를 감싸안았다.
그 따스하고 포근한 신성의 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마땅한 동화의 마지막 구절 때문일까.
사피에르의 몸이 더 이상 떨지 않았다.
아리아는 그때서야 안아주었던 사피에르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똑똑.
-어머니. 저 카르제입니다.
방문 밖에서 의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르제라 밝힌 이름.
“들어오렴.”
아리아는 별 다른 의문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윽고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9살 정도 되는 소년.
소년은 태양빛을 닮은 금발을 하고 있었고.
머리색을 제외한 전반적은 모습은 시안을 빼다박아있었다.
마치 시안의 어린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오빠아!”
사피에르가 카르제를 향해 후다닥, 달려갔다.
카르제는 미소를 지으며 사피에르를 번쩍, 안아들어보였다.
“우리 사피에르. 어머니랑 놀고 있었어?”
“응! 엄마가 동화책 읽어주고 있었어. 그런데···.”
사피에르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이었다.
“동화책이··· 무서운 이야기였나봐.”
“응?”
사피에르의 말에 카르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화책에 무서운 이야기가 있다니?
카르제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책의 표지를 바라보더니.
“이거···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야화 아닙니까?”
“야화?”
아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고.
카르제는 사피에르를 잠시 내려놓고는 걸음을 옮겨 널브러진 책을 확인했다.
“맞네요. 야화.”
야화란 문학적 용어로서 밤에 모여서 하는 가벼운 이야기.
혹은 그것을 기록한 책을 야화(夜話)라 하였다.
“그런데 이게 왜 아리아 어머니 방에 있는 겁니까? 이거··· 루벤 출판사에서 발행한 건데, 이야기가 너무 거짓되어 결국 폐기된 이야기인데···.”
“응? 그래?”
“네. 그 때문에 엘레나 어머니께서 예산만 날렸다고 한숨을 내쉬던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 어쩐지.”
이야기가 뭐 저 따위인가 싶었다.
아리아는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리고 루벤 출판사에서 발행했다는 사실.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잡아 족쳐야 겠다는 생각을 해보였다.
“그건 그렇고. 여긴 어쩐 일이니 카르제?”
“다름 아니라, 엘레나 어머니께서 아리아 어머니를 뵙고자 하십니다.”
“나를?”
“예.”
“음···.”
아리아는 생각에 잠긴 듯 곧장 답을 해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아리아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는 것일까.
“사피에르는 제가 돌보고 있겠습니다. 편히 다녀오시지요.”
카르제가 사피에르를 다시금 번쩍, 들어올리며 말했다.
9살 카르제와 5살 사피에르.
고작 4살 밖에 나지 않건만, 카르제는 누굴 닮았는지 늠름했다.
“우리 사피에르. 이제 오빠랑 놀까?”
“응! 오빠랑 노는 거 좋아! 오빠랑 놀래!”
사피에르가 배시시, 웃으며 소리쳤다.
청순함과 귀여움의 화신과도 같은 사피에르.
사피에르의 미소에 카르제는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째, 사피에르는 나보다 카르제. 널 더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지.”
그 모습에 아리아가 섭섭한 듯 고개를 흔들어보였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피에르가 아리아 어머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그렇지?”
“응!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꺄르르, 거리며 답하는 사피에르의 미소.
아리아는 섭섭한 마음이 한순간에 사르르, 녹아버렸다.
“예쁜 우리 딸. 그럼 엄마 잠깐 다녀올게. 오빠랑 잘 놀고있어.”
“응! 엄마 다녀와!”
아리아는 사피에르의 배웅을 받으며 방문 밖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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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에 위치한 영주성.
그 영주성에 위치한 엘레나의 집무실.
“여기, 이번 달 예산 내역서입니다.”
엘레나는 한스가 내미는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수 십장에 달하는 보고서의 두께.
엘레나는 한 장 한 장 보고서의 내용을 확인했다.
“농업 지구에 필요한 비료와 씨앗에 소모된 비용이 3,200만 골드··· 목축업 지구에서 들어간 사료값이 2,300만 골드···.”
엘레나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지출이 도무지 말이 안 되었으니까.
심지어 영지 전체가 아니라 구역 하나였다.
구역 하나에서 지출되는 비용이 웬만한 영지의 1년 예산과 맞먹었다.
그 1년 예산이 하물며 한 달 지출 비용으로 소모되고 있었다.
1년으로 따지면 보고서에 적힌 것의 12배.
가히 하나의 왕국 예산과 맞먹고 있었다.
루벤 전체로 따지면 장담하는데, 황궁의 예산도 감히 따라오지 못할 터였다.
이게 어딜봐서 일개 백작령에서 나올 수 있는 규모인지 원.
“음··· 크게 이상은 없네요.”
하지만 엘레나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이제는 익숙했으니까.
루벤의 안주인으로서 내정을 도맡은 세월이 어언 10년.
어느 정도 무감각해질 세월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루벤 브라헤 상단에서 연 수익이 11억 골드를 넘었네요?”
“대륙 전역으로 루벤 특산품이 인기가 좋기도 하고··· 전아멜리아 상단주님이 고생을 많이하셨습니다.”
루벤은 지출을 아득히 상회하는 수익이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래서일까.
“매번 느끼지만··· 정말 어마어마하네요.”
10년이 지나도 엘레나는 완벽한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예산은 문제없고··· 영지민들은요? 지내는 데 불편한 건 없다던가요?”
“불편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한스의 답에 엘레나는 가볍게 웃음을 흘려보였다.
하기사, 루벤이 어떤 영지인데 불편이라는
천상의 낙원. 지상에 존재하는 유토피아.
루벤은 그야말로 완벽한 영지였다.
당연히 루벤으로 이민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오죽하면 귀족가의 자제들이 평민이 되어도 좋으니 영지민으로 받아달라고 할까.
이러한 경향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현재까지도 제국의 크나큰 사회적인 문제로 자리잡고 있었다.
“마수들은 요즘 어떠하죠?”
“평소와 같습니다. 여전히 매일같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특별한 이상은 없나요?”
“가끔 오우거가 들이닥칠 때 빼고는 큰 이상은 없습니다.”
악마는 사라졌고 그들은 끝내 죽어 사라졌다.
그러나 어둠의 숲에 드리운 마기(魔氣)는 여전했다.
역시나 악마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잔재는 남아있었다.
그리고 어둠의 숲은 여전히 마수로 들끓고 있었다.
역시나 오우거와 같은 마수들은 난감한 문제로서 작용하고 있었다.
“두 분이 있었다면···.”
루벤의 수호령, 레아.
루벤의 수호기사, 켄드릭.
둘이 있었을 때는 오우거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힘 앞에 그 어떤 마수들도 범접할 수 없었으니까.
“루벤의 병사들 수준에서 위협이 될 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어진 한스의 말.
하기사, 역시나 루벤이 어떤 곳이란 말인가.
천상의 유토피아임과 동시에 대륙 역사상 전무후무한 전력.
100만의 대군조차 루벤을 넘어설 수 없었다.
실재하는 신(神)조차 끝내 루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알겠어요. 고생 많으셨어요 한스.”
엘레나는 괜한 기우에 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
똑똑.
-엘레나. 저 아리아예요.
집무실 밖에서 아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엘레나는 곧장 답을 해보였고.
이내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아리아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 한스도 있었어요? 일 이야기 중이었던 것 같은데··· 제가 좋지 않은 타이밍에 온 게 아닐까 싶네요.”
“아닙니다. 마침 보고도 끝난 참이었습니다. 두 분이서 편하게 이야기 나누시죠.”
한스는 그 말을 끝으로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한스가 떠나가고 난 뒤.
“아리아. 죄송한데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주시겠어요? 급하게 처리해야할 결재 건이 있어서. 금방 끝나요.”
“천천히 하세요.”
아리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무실의 쇼파에 앉았다.
그리고 정말 짧은 시간이 지나.
“죄송해요. 예산 결재서를 빠르게 승인해줘야해서요.”
엘레나가 미안한 표정으로 걸어왔다.
이윽고 엘레나가 아리아의 맞은 편에 앉아보였다.
“보면 볼수록 엘레나는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전 보고서만 봐도 머리가 아픈데 엘레나의 능력은 참···.”
“새 시대의 영웅인 아리아에게 들을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엘레나와 아리아가 서로를 마주보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건 그렇고. 제게 할 말이 있다고요.”
“별 다른 건 아니고. 혹시 부군께서 어디에 가셨는지 알고 계시나요?”
“시안이요?”
“네. 며칠 전부터 모습이 안 보여서요.”
“어··· 글쎄요. 저도 못 본지 꽤 된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시안을 못 본 일수가 꽤 된 것 같았다.
평소라면 식사자리는 물론 종종 사피에르를 돌보던 시안이었는데 말이다.
“아리아한테 별 다른 이야기가 없었나요?”
“네. 무슨 일이 있으면 저보다는 엘레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요? 엘레나가 여러모로 루벤을 총괄하고 있으니까요.”
“아리아는 부군과 같은 영웅이시잖아요. 대륙의 명운에 관해 의논할 일들이 있으면 저보다는 아리아를 찾으시겠죠.”
“말씀도 참. 하지만 그런 거 없어요.”
아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아리아도 모르시는 건가요?”
“네. 저도 딱히···.”
“그렇군요.”
엘레나는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아래로 내려보였다.
아리아는 그런 엘레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태양빛을 닮은 금발과 매력적인 미모의 엘레나.
10년이란 나이가 지났으나 그 미모는 여전했다.
되려 깊이가 더 깊어져 아름다워져있었다.
“······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뇨. 엘레나가 너무 예뻐서요.”
그러자 엘레나가 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 놀리시는 거죠?”
“진심이에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아리아가 그런 소리하니까 영 믿음이 안 가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아리아의 미모를 보라.
1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퇴색되지 않은 초월적인 미모.
실로 인간이라 믿기지 않는 미모였다.
이 세상에서 아리아 앞에서 미(美)를 논할 수가 없었다.
물론 세월이 조금만 지난다면야···
아마 그 기준은 바뀔 터였다.
시안과 아리아의 딸, 사피에르.
될 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보인다고.
사피에르는 아리아를 넘어설 것이 분명해보였다.
어쨌거나 같은 여자가 봐도 황홀해지는 미모거늘.
저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람 날인가.
그런데 아리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의미로 물었던 것일까.
“엘레나. 왜 시안과 저의 결혼을··· 허락해주셨어요?”
아리아가 엘레나에게 뜬금없는 물음을 해왔다.
엘레나는 살며시 시선을 들어보였다.
그리고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아리아에게 말했다.
“저도 부군과 결혼했는데요.”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아리아가 질책하는 눈빛을 지어보였다.
엘레나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그건 왜요?”
아리아는 이걸 뭐라 대답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으니까.
어쩌면 아까 전 그 말도 안되는 동화 때문일까.
“그냥요.”
아리아는 이렇게 얼버무렸고.
엘레나 또한 그에 관해서 굳이 캐묻지 않았다.
“음··· 제국법상 가문 간의 결합은 다처제 혹은 다부제가 허용되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이어진 엘레나의 답.
“저는 제국의 황녀예요. 물론 지금은 아니긴 하지만, 당시에는 그랬죠. 황녀가 제국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잖아요.”
무엇보다.
“아리아까지는 어떻게 양보해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네?”
“부군을 향한 아리아의 사랑은 정말 유명하잖아요. 어찌나 유명한지 얼마 전, 루벤 출판사에서 그와 관련한 야화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그건···!”
아리아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새빨개지다 못해 달아오른 아리아의 얼굴.
엘레나는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
“······ 보셨군요.”
“그래도 제가 출판은 막았어요. 아, 혹시 원하신다면···.”
“아뇨. 절대요. 잘하셨어요.”
아리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에 엘레나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저도 양보받은 것이잖아요. 아리아만 양보한 것이 아니라. 그런 의미로 아리아와 저는 의외로 닮은 면이 상당히 많아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하기도 했고요.”
바로 지금처럼요.
엘레나는 싱긋, 웃어보였다.
“설마하니 나중에 우리가 후계 문제로 다투지는 않겠죠?”
이번엔 아리아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다투고 싶어도 사피에르가 그럴 생각이 없어보이던걸요. 어째, 저보다 카르제를 더 좋아하더라니까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카르제가 저보다 사피에르를 더 자주 찾아가는 것 같아 섭섭해요.”
엘레나와 아리아가 서로 마주보며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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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를 빼곡히 채운 나무들.
어둠의 숲에 위치한 어딘가.
“이쯤··· 인 것 같은데.”
시안은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띠링!
《빨리요! 빨리!》
《어서요! 어서!》
띠링! 띠리링!
띠리리링!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고욧!》
정신을 어지럽히는 수많은 알림창이 망막 위로 떠올랐다.
재촉이라도 하듯 모바일 영주의 알림창이 쉼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스마트 폰이었다면 그냥 무시하면 되었건만.
망막 위로 떠오르는 알림창은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가끔은 DLC를 괜히 샀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시안은 짙은 한숨을 내쉬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를 찾아 해맨 며칠.
그 노력의 결실 덕분일까.
“찾았다.”
시안 찾아해매던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둠의 숲에 위치한 이름 모를 동굴.
다름 아닌 시안이 처음 스마트 폰을 얻었던 장소였다.
“금방 찾을 줄 알고 아무 말도 없이 나왔는데···.”
이렇게 며칠씩이나 걸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감각으로도 느껴지지 않을 줄 누가 알았어.”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안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동굴의 입구를 바라봤다.
기억 속의 모습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루벤에서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강산이 뭐란 말인가.
아예 딴 차원이 되어버리는 곳이 루벤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처음 그대로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모든 것들의 시작이었던 곳.
지금의 시안이 있을 수 있게 해준 장소.
그때 그 모습을 말이다.
시안은 동굴의 어둠 속으로 천천히 몸을 밀어넣었다.
그렇게 들어간 동굴 속.
안 쪽 또한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마치 여기만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시안은 감상에 젖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띠링!
《아이 참! 그렇게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고욧!》
그 순간 다시 떠오르는 모바일 영주의 알림창.
“네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꾸물거렸다고 그럽니까?”
《당신이요! 당신! 지금 ‘아··· 라떼는 그랬지···.’ 라며 꼰대 눈빛을 지어보이지 않았습니까!》
“꼰대요? 그게 뭔··· 아니, 그보다 아주 대놓고 답하십니다? 이젠 시스템인 척, 숨길 생각도 없는 겁니까?”
《숨겨요? 뭘요? 이제 와 뭘 숨긴 답니깟!》
《설마! 당신! 아내들 몰래 또 비자금을 숨긴 겁니까?!》
《어디죠! 거기가 대체 어디에요!》
《지난 번에 엘레나한테 걸렸던 당신의 팬티 속 인가욧?!》
《아니면 지지난 번에 아리아와 함께 들어갔던 욕실 안 인가욧?!》
꾹.
《그것도 아니면 저번에··· 저번에 막··· 막 셋이서···!》
《제기랄! 제에엔장!》
《당신! 나가 죽어버려욧!》
그러더니 씩씩, 거리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화가 잔뜩 나버린 것만 같은 기색으로 띠! 링! 알림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 뭔데?”
진짜 뭔가 싶었다.
뭐, 어쨌든.
시안은 화가 난 모바일 영주를 뒤로한 채 동굴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동굴의 가장 안 쪽.
다름 아닌 스마트 폰이 놓여져있던 바로 그 장소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시안이 모바일 영주를 처음 만난 곳.
천 년전, 카일이 안배한 모든 것의 시작인 이곳.
“여기도 달라진 게 하나 없네.”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어도 달라진 것이 하나 없었다.
“정말 시간이라도 정지한 게 아닌가 싶네.”
··· 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그렇게 감상에 잠깐 젖어있는 것도 잠시.
“이제 뭐하면 됩니까?”
시안은 모바일 영주를 향해 물었다.
《흥! 기다리라고욧!》
그러자 모바일 영주가 씩씩, 거리며 답을 해보였다.
대체 뭐 때문에 화가 난 건지는 모르겠다만 뭐, 어쨌든.
시안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1분, 5분, 10분.
그리고 30분을 넘어 대체 뭐하는 건가 싶던 생각이 들던 찰나.
쩌어억─!
동굴 한 쪽의 공간이 기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괴수가 눈동자를 떠보이는 것처럼 공간이 갈라지며 커다란 틈을 만들어내었다.
“참··· 빨리도 오십니다.”
시안은 질책의 시선과 함께 투덜거리는 어투로 말했다.
이윽고 벌어진 틈 사이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사 하나가 빠진 듯한 어벙한 흑발의 사내.
“하하하··· 미안미안! 이게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말이지.”
서준이 멋쩍게 웃으며 답을 해보였다.
“나중에 보자고 하시더니. 그때로부터 얼마나 지났는지 알고는 하시는 말씀입니까?”
“글쎄? 한 1년? 2년?”
“10년입니다. 10년.”
“10년? 벌써 그렇게나 지났어?”
서준은 놀란 눈을 떠보였다.
그리고 시안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더니.
“어쩐지··· 그때보다 얼굴이 많이 삭았네. 그래도 아직 젊은데? 전에는 젊다 못해 어린 상태여서 그런가?”
“그땐 성인이 된지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니까요. 지금은 결혼도 한 상태입니다.”
“오. 그래?”
띠링!
《지이인짜 예쁘고 참한 아내가 두 명이나 있는 못 되먹은 놈입니다 김서준님!》
시안의 답을 대신하듯 모바일 영주가 알림창을 띄워보냈다.
시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떠오른 알림창의 X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두 명이나? 이거이거. 남자구만 남자야.”
서준이 그에 따른 답을 해보였다?
누가 봐도 모바일 영주의 알림창을 보고 답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모바일 영주의 알림창은 나만 보이는 거 아니였나?
그런 시안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 지.
“아! 혹시 괜찮은 남자는 없어?”
서준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을 해왔다.
이에 시안은 다시 한 번 정신이 멍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를 찾고 있었으니까.
설마···?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
“그게 내 동료 중에 이하윤이라는 참한 애가 있거든. 근데 얘가 아직도 결혼을 못했어. 남자도 한 번 못 만나봤다니까.”
서준이 다시 입을 열어보였다.
《어랏! 김서준님! 이하윤님이라면··· 김서준님의 제자인 칼스인가 뭐시깽이인가와 이어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깟?!》
“아, 그게 어쩌보니 잘 안 되었어.”
《에엣?! 어쩌다가요? 이하윤님 정도면 엄청 예쁜데 말입니다! 성격이 좀 차갑긴 합니다만··· 그게 또 매력이잖습니까! 얼음 공주 스타일!》
“그렇긴 한데··· 사실 내가 지구로 돌아가서 서윤이랑 막, 이것저것 한다고··· 크흠. 아무튼 칼스가 있는 차원과 지구를 늦게 연결해버렸거든. 연결 전에 차원 간 시간이 다르게 흐르다 보니, 칼스가 먼저 결혼을 해버렸다네. 아무래도 황제로 즉위하면서 대신들의 압박에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야.”
《어이쿠 저런! 이하윤님이 많이 실망하셨겠습니다요! 하하핫!》
모바일 영주는 역시 솔로가 최고라는 듯 알림창을 띄워 보냈다.
“뭐, 어쨌든. 내게도 책임이 있어서 말이야. 그런 의미로.”
이윽고 서준이 시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여기에 괜찮은 남자 있으면 소개 좀 시켜줘라. 보니까 여기도 황태자가 있는 것 같은데··· 내 면을 좀 세워줘라.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
서준은 시안에게 간곡히 부탁을 해보였고.
그런 서준의 부탁 때문일까.
시안은 자연스레 콘라드의 생각이 떠올랐다.
샤를롯의 뒤를 잇는 새로운 시대의 영웅이자.
현 시대의 새로운 황제로 즉위한 콘라드.
전 황제, 발루아가가 죽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뛰어난 황제가 있으면 물러나는 것도 미덕이라며 발루아가는 태상황으로서 물러난 상황이었다.
그리고 황제가 된 콘라드는 아직 미혼이었다.
황후의 자리가 공석이었다.
그에 따라 하루가 멀다하고 대신들이 상소문을 올리고 있었다.
하루 빨리 황후를 들여야 한다며 국정 회의 때마다 소리치고 있었다.
황제로서 후사를 남겨야하는 것은 책임이자 의무.
그에 따라 수많은 가문들의 여식들이 줄을 서고 있지만 콘라드는 딱히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말로는 아직 자신은 젊으니 시간에 구애받기 싫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뭐, 맞는 말이긴 했다만 정말 그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역시나 대신들은 매일 같이 상소문을 올렸고.
콘라드가 죽을 때까지 후사가 없으면 시안과 엘레나 사이의 자식, 카르제 루벤.
그를 다음 시대의 황제로 추대하겠다는 말 공식 석상에서 해버렸다.
뭐, 루벤 가(家)의 자식이라고는 하나, 카르제는 엘레나의 피가 이어진 황가의 후손이기도 했다.
정말 후사가 없으면 못할 것도 없긴 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덕분에 황궁이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던 적도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말씀하신 건지···.’
여러모로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콘라드는 현재 황후는 커녕 후궁 한 명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시안 또한 내심 콘라드의 혼사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내로하는 가문의 여식도 내차는 콘라드였지만, 시안이 소개해주는 여자라면 한 번 만나는 볼 터.
또한 서준 정도의 존재가 소개해주는 여자라면 평범한 여인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의미로··· 아니, 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아니, 그보다. 모바일 영주의 알림창이 보이십니까?”
“알림창? 아, 그건 아니고.”
서준이 살짝,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모바일 영주가 하는 말을 듣는 거야.”
“모바일 영주가 하는 말을 들어요?”
“그게 설명하면 복잡한데··· 간단하게 설명하면 카일에게 스마트 폰을 준 게 나야.”
“······ 예?”
간단하게 설명한다더니.
어째 더 생각이 복잡해져왔다.
아니, 뭐.
스마트 폰이 이 대륙의 물건이 아닌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내가 예전에 쓰던 건데. 난 이제 딱히 필요가 없어서 말이지.”
저게 대체 무슨 말인지 원···.
아니,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치자.
“그럼 이 모바일 영주는 대체 누굽니까?”
“멘토님의 제자.”
“멘토님의··· 제자요?”
“그게 이것도 설명하기가 참 복잡한데. 그러니까···.”
띠링!
《그냥 제자가 아닙니다! 무려 수제자!》
《모든 차원을 통틀어 멘토님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유일한 후계자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네?”
대체 뭐가 그렇다는 걸까.
시안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니까 크게 신경쓰지마.”
그런 서준의 말과 동시에 띠링! 띠리링!
모바일 영주의 발작하는 알림창이 가득히 떠올랐다.
슥, 보아하니 중요하지 않다니욧!!
저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데요오옷!!!
···와 같은 시덥잖은 내용이 가득해있었다.
그래서 시안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튼. 늦어서 미안해. 네 차원과 시공간을 연결하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어서 말이야. 원래는 네가 초월했을 그때 했어야 했는데. 그러면 네가 돌아가는 시간이 늦어졌을 터라 어쩔 수 없었어.”
그리고 카일이 아니었다면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
“마지막의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저번에 왔었던 곳 기억나?”
“누누히 말씀드리지면 여긴 10년의 격차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제가 어떻게 압니까?”
“미안미안. 그 새햐안 백광만 가득하던 곳 말이야. 경계의 공간이라고 했던 곳.”
“아··· 네. 기억납니다.”
새하얀 백광만이 가득했던 공간.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기억만큼은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원래 거기는 초월자들이 초월 직전에 오는 공간이야. 차원과 그 너머를 잇는 공간이기도해.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초월자들을 차원 밖으로 추방하기 직전에 관조자가 불러오는 공간이지. 해서 관조자가 추방된 이후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뭐, 아무튼.
“그 공간에 왔다는 것은 초월의 영역에 발을 디뎠다는 뜻과 같아. 따라서 너는 물론, 카일 또한 초월의 영역에 발을 디뎠다는 의미지.”
시안이 본 카일의 기억 속.
카일 또한 경계의 공간이라는 곳에 다녀간 적이 있었다.
“카일은 초월과 동시에 경계의 공간으로 왔고, 그곳에서 이 우주가 품은 차원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지.”
“······”
“그리고 카일은 그곳에서 초월을 할 수 있었어. 모든 법칙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뜻이야.”
“그렇다는 건···.”
“그래. 너도 알다시피 카일은 그러지 않았어.”
서준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카일은 스스로의 존재를 제물, 그러니까 인과로 바쳐 이곳, 네 차원과 나를 연결시켰어. 그 때문에 내가 스마트 폰을 카일에게 넘겨줄 수 있었던 거고. 고작 존재를 바친 대가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어. 하지만··· 초월성을 포기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초월성이요?”
“이 또한 설명하면 복잡하지만··· 초월성은 초월자들의 격(格)을 의미해. 인과의 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최상위의 격(格). 다시 말하면 인과의 법칙에서 가장 권위가 높은 인(因)이라 보면 돼.”
이를 또 다시 말하면.
“초월성을 대가(因)로 바치면 그 어떠한 결과(果)를 만들어낼 수 있지. 카일이 안배한 인과를 베어내는 검(劍)은 물론, 전 우주 차원의 붕괴도 가능하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쉽다는 뜻은 아니야. 하지만 실제로 내 차원에서 있었던 일이지. 우리 지구라는 차원에서 초월성을 포기하며 지구를 넘어 모든 차원을 멸망시키려했던 초월자가 한 명 있었어.”
서준은 그 당사자를 생각하듯 잠시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시안 또한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서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역시나 잘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카일은 스스로의 존재를 희생하여 이 모든 것들을 안배했다.
하지 않아도 되었음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있었음에도.
카일은 이 대륙에 남아 아르나이즈로서 생을 마감했다.
괜시리 숙연해지는 마음에 시안은 크게 호흡을 들이켰다.
폐부에 들어차는 공기에 정신이 맑아짐을 느끼며 서준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렇게 제게 다시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저번에 말했던 것 때문에.”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전 10년입니다.”
시안은 인상을 와락, 찡그리며 물었고.
서준은 깜빡했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우린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말이야.”
“무슨 동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음···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하나.”
서준은 잠시 생각을 해보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우주에는 단 한 명의 신(神)이 실재해. 이름도, 존재도 확실하지 않지만 우리는 창조자(昌造者)라 불러.”
“창조자요?”
서준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창조자는 말 그대로 창조자야. 이 우주의 다양한 차원에는 신(神)이라 불리는 이들이 많아. 신의 격을 획득한 이들도 많고. 이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시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만의 끝에 선 카이.
시안은 실재하는 신(神)과 직접 대적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모두 가짜 신이야. 만들어진 신이라고 해야할까. 이 우주에서. 무한에 가까운 차원 속에서 신(神)이라 불리는 존재는 딱 한 명.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한 신(神). 신의 격을 획득한 것과는 달라. 이야기 속의 거짓된 신도 아니지. 그는 존재의 필연성에 기대지 않고, 존재의 관찰이 없어도 홀로 존재하는 존재.”
존재의 필연성?
존재의 관찰?
시안은 저게 뭔 헛소린가 싶었다.
그런 시안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창조자는 이 우주에 군림하여 우리를 방관해. 마치 인형들이 살아가는 역할극 놀이를 본다고 해야할까? 하지만 그가 개입하면, 우리는 그를 거스를 수도, 거역할 수도 없어. 죽으라면 죽어야하고, 이렇게 하라면 그렇게 해야하지. 그는 우주는 물론, 우리를 창조한 창조자니까.”
서준은 저 할 말을 계속 이어갔다.
“나는 그런 창조자로부터 완벽한 독립을 위해 싸워오고 있었지. 하지만··· 나 혼자는 역부족이었어. 관조자를 추방할 수는 있었지만, 관조자는 어디까지나 관리자에 지나지 않았거든. 하지만 창조자는···.”
서준은 진중한 눈빛을 지어보였다.
장난기 가득하던 기색은 온데간데 없어져 있었다.
“그래서 동료를 찾고 있었어. 나와 같이 창조자와 싸울 대적자를 말이야. 단순한 초월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구속된 운명을 베어낼 수 있는 대적자 동료를.”
“그게 무슨···.”
“여기까지.”
서준은 시안의 말을 끊어보였다.
“이 이상의 이야기는 전달되면 안 되거든.”
그리고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해보였다.
“전달 돼요? 대체 누구한테 전달된다는 말씀입니까?”
“지금 이 이야기를 보고 있는 이들한테.”
“······ 그건 또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시안은 서준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와서 하는 게 어때?”
그와 동시에 쩌어억─!
서준의 뒤쪽 공간이 일시에 갈라져보였다.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소개해주고 싶은 초월자들도 많고.”
시안은 갈라진 뒤쪽의 공간을 바라봤다.
일렁이며 찢어진 공간의 일그러짐.
“저기 들어가도 되는 겁니까? 아까 전에 이쪽과 그쪽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가뜩이나 말도 없이 나온 터라 늦게 돌아가면 저··· 진짜 엘레나랑 아리아한테 죽습니다.”
시안의 답에 서준이 낄낄, 거리며 웃어보였다.
그리고 충분히 공감하고 또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 마. 이제 차원이 연결되어서 시간이 다르게 흐르지 않으니까. 그로써 이제 네 세계도 보이지 않게 될테지.”
“보이지 않아요?”
시안은 서준에게 물었고.
서준은 그에 따른 답을 해보이지 않았다.
되려 시안을 지나쳐 시안 뒤쪽의 너머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하지만 서준은 누군가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웠어.”
누군가를 향해 웃음 또한 지어보였다.
“기회가 되면, 또 보자고.”
그와 동시에 따악─!
들려오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주변의 공간들이
<현질하는 영주님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