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gic is stronger RAW novel - Chapter (124)
내 마법이 더 쎈데-124화(124/203)
< 제62장 – 가장 비천한 이들. (1) >
타다닷.
음침한 뒷골목 사이로 급박한 뜀박질 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 오빠······. 나, 힘들어······.”
“안 돼! 베니! 여기서 멈추면 놈들에게 잡힐 거야!”
베오는 부지런히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서 들려오는 흉악한 목소리가 있었다.
– 쳇! 어디로 도망갔지?!
– 찾아!
– 먼저 잡는 놈이 임자다! 간만에 피냄새가 맡고 싶구만!
‘실수했어.’
베오는 연신 입술을 깨물었다.
수왕국 케뮬란의 진리.
케뮬란의 국민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수준에 맞게 살아가야만 한다.
최하 빈민의 계급 수드라라면, 응당 수드라답게 빈민촌에서 숨을 죽이면서 살아가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오늘, 베오는 베니를 데리고 어머니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려고 했다.
그때 실수로 두 남매는 크샤트리아의 영역을 밟고야 말았다.
‘그냥 어머니를 만나러 가려는 것 뿐이었는데!’
이미 벌어진 일은 무를 수 없다.
더구나 상대는 짐승과도 같은 후각을 지닌 크샤트리아였다.
바이샤보다도 뛰어나고, 수드라인 자신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짐승’에 가까운 자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베니는 생각을 떠올렸다.
***
세상이 이상해졌다.
베오가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수왕국 케뮬란의 국교인 만력교(萬力敎)의 교황이 바뀌던 바로 그 날부터였다.
새로이 선출된 교황 성하께선 뮬란 광장의 테라스에 나와 전국민을 향해 이렇게 선언하시었다.
– 유토피아께서 말씀하셨다. 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노라. 강한 힘을 지닌 자가 정의를 노래하노라. 강한 힘이야말로 올바름이라고 할 수 있노라.
교황께서 주창한 만력교의 교리.
그것이야말로 우리 수왕국 케뮬란이 나아가야할 방향이라면서, 교황 성하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 우리 케뮬란의 국민은 누구라도 강해질 자격이 있다. 강한 자라면 그 누구라도 고귀해지고, 부유해지고, 높은 자리에 올라설 자격이 있다.
최초의 열 두 수인족이라 불리는 지배자들의 계급 브라만.
그들을 모시는 긍지 높은 전사와 사제들의 계급 크샤트리아.
두 계급의 손발이 되어 사회를 지탱하는 자들의 계급 바이샤.
그리고 모두의 아래에서 가장 비천한 신분으로, 그들이 딛고 있는 대지를 떠받치는 자들의 계급 수드라까지.
케뮬란에 존재하는 총 네 가지의 계급들을 두고서, 그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위해.
– 지금부터 선언하노라. 케뮬란에서 살아가는 자들이여 종족 불문, 신분을 불문하여 모든 이들에게 ‘도전의 자격’을 부여한다.
<도전의 자격>
지금은 비천한 신분일지라도, 그대가 강하다면 직접 싸워서 증명해 쟁취해라.
강한 자만이 비로소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다는, 만력교의 교리에 부합하는 자격이었다.
국민들은 환호했다.
정확히는 천한 자들이 환희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자신의 처지를, 수인족답게 싸워서라도 바꿀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환호 소리는 한 달을 넘지 못했다.
당연했다.
– 평등을 바라는 건 비천한 자들뿐이었다.
싸워서 손에 얻으란 말에 위협을 느낀 건 원래부터 강자의 위치에 선 이들이었다.
브라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을 대신해 발톱을 갈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건 크샤트리아의 계급층이었다.
그들은 수드라를 핍박했다.
혹시라도 불온한 마음을 먹고, 도전의 자격으로 덤벼들지 모를 그들의 싹을 처음부터 짓밟아놓았다.
그때부터였다.
‘세상이 이상해졌다.’
수드라 출신으로서, 몸에 난 짐승의 증거라고는 자라다 만 꼬리가 전부였던 소년 베오.
그와 여동생, 홀어머니가 살아가는 세상은 한 순간에 뒤집혔다.
****
한 달이나 이어진 수드라 사냥 이후.
다행히 수드라의 반역 의지는 수그러들고, 크샤트리아의 행패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은연중에 차별은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이제까지 숨을 죽이고 눈에 띄지 않도록 살아온 건데.
“앗!”
순간 여동생 베니의 몸이 휘청거렸다.
툭, 하고 발에 부딪친 돌부리.
때문에 베니와 손을 잡고 있던 베오까지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쿠웅!
“아얏!”
“쉿!”
베니가 울음을 터트리려는 순간, 베오는 바로 동생의 입을 가로막았다.
제발 이대로 지나가줬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조차도 허무하게.
“크흐흐, 여기 있었구만. 수드라의 꼬맹이들.”
“사람 귀찮게 하고 말이야.”
“뭐야, 질질 짜고 있잖아. 우리가 그렇게 무섭냐?”
킬킬거리며 다가온 세 명의 수인족.
각각 호랑이나 사자, 표범의 색이 진하게 나탄 그들이야말로 현재 케뮬란에서 둘째가는 지배자 계급인 크샤트리아의 수인들이었다.
“오, 오빠······.”
베니는 눈을 꼭 감고 오빠 품에 안겨들어왔다.
무서울 것이다.
아직 열 살밖에 안 되는 동생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런 곳에서 크샤트리아들에게 붙들리고야 말다니.
‘제발······.’
베오는 꾹 말을 삼켰다.
이제까지 몇 번이고 삼켜온 말이 있었다.
비천한 신분으로, 여기서 ‘이 말’을 외친다 한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힐끗 바라 본 곳에서 울먹이는 여동생.
그런 동생을 위해서라도, 베오는 입술을 깨물고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누, 누가 제발 좀 도와주세요!!”
베오의 도움 요청에 크샤트리아의 수인들은 낄낄거리며 베오를 비웃어댔다.
“도와달라고? 크하하. 웃기는구만! 누가 너 같은 수드라 따위를 도와준단 말이냐?”
그 말이 맞았다.
그래서 언제나 이 말을 삼켜온 것이다.
도움이 오지 않으리란 걸, 도움이 오지 않는다는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게 되니까.
언제나 그들의 비웃음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서우면 이건 어때? 동생을 두고 가면 넌 살려주마. 그러면 넌 살 수 있다?”
“낄낄낄. 넌 진짜 못됐다.”
“야야, 수드라 같은 천한 놈들은 이러면 열이면 열은 다 가족을 두고 도망친다니까?”
그리 지껄이는 그들 앞에서, 무력한 자신을 통감할 수밖에 없는 순간.
“응?”
“왜 그래?”
“아니······. 저게······, 뭐지?”
표범 수인이 의아하다는 듯 가리킨 방향을 향해 호랑이 수인이 고개를 든 순간.
퍼억.
날아온 벽돌이 그대로 호랑이 수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뒤로 날아간 수인의 몸뚱이.
그걸 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던 베오였지만.
바로 그때였다.
소년의 귓가로.
“괜찮나요?!”
골목모퉁이에서, 생전 처음으로 그를 도와주기 위한 손길이 나타났다.
****
도움의 목소리를 듣고 도착한 장소.
거긴 척 봐도 불온한 분위기를 풍기는 세 명의 수인과 핍박을 당하고 있는 두 소년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민세희는 고민했다.
‘개입하는 게 옳을까?’
객관적으로 보면 소년소녀는 약자, 그들을 핍박하며 낄낄거리는 불한당으로 보이긴 했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일 뿐.
한 순간의 편견을 진실이라고 믿을 만큼, 민세희는 어수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망설임조차 그만두게 해주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그렇게 무서우면 이건 어때? 동생을 두고 가면 넌 살려주마. 그러면 넌 살 수 있다고?”
그 한 마디에 민세희의 행동이 결정되었다.
“세희 님?”
“여긴 제게 맡겨주세요.”
이멜다와 시선을 주고받은 뒤, 민세희는 품을 더듬었다.
지난 3년 간, 민세희 그녀 또한 가만히 놀고먹기만 한 건 아니었다.
바로 이런 순간.
힘이 필요할 때를 대비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무력수단을 충분히 만들어둔 것이다.
‘영핵 구성, 집중, 소재 흡수, 집결. 구현 좌표 10에 25, 그리고 37.’
그녀가 품에서 꺼내든 건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작은 구체였다.
주저 없이 이걸 뒷골목 사이로 던져 넣으며, 민세희는 마지막 스펠을 외었다.
“모습을 드러내라, 토스카나의 꼭두각시.”
동화를 모티브로 한 골렘 구현 마술.
피노키오라는 이름으로 보다 더 잘 알려졌을 ‘골렘’의 구현요소를 핵에 때려 부운 순간.
쿠궁!
벽돌, 나무, 쓰레기, 진흙 할 것 없이 주변의 사물을 집어삼켜 만들어진 ‘거짓말쟁이 골렘(簡易人形)’은 그대로 호랑이 수인을 향해 벽돌로 된 주먹을 휘갈겼다.
콰앙!
그 뒤부터는 골렘의 활약이 이어졌다.
때리고, 부수고, 박살내고, 그들을 침묵시킬 때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해봐야 5분 남짓.
“괴, 굉장하네요.”
이멜다가 태양의 신성력을 쓸 것도 없이, 민세희가 주조한 골렘은 순수한 폭력만으로 건장한 짐승인간을 전부 때려눕혔다.
그렇게.
“어디 다친 곳은 없니?”
이멜다와 민세희의 등장을 지켜본 소년 베오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채.
난데없이 나타나 도움을 준 여성들을 보고 얼떨떨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혹시 당신들은······ 마법사이신가요?”
마법사.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진에서 수인족 앞에서 함부로 긍정할 수도 없는 곤란한 질문이었지만.
민세희나 이멜다가 답을 하기도 전에 먼저.
쿠웅!
베오가 그녀들 앞에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앗?”
“······무슨 짓이지?”
이멜다의 당황한 목소리와 민세희의 경계 어린 목소리가 울릴 쯔음.
베오는 간절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제발······! 제게 마법을 가르쳐주세요!”
****
민세희와 이멜다는 베오에게 지난 3년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만력교가 주창한 교리에 따라 일그러진 세상과 수드라 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온 차별.
방금 전도 바로 그러한 상황이었다고.
베오가 마법을 배우고 싶어 하는 이유도 간단했다.
“제 몸은 약해요. 하지만 마법이라면, 마법으로 강해질 수 있다면! 저도 콘클라베에 도전할 수 있어요!”
이대로 있어봤자 가족은 상위 계급에게 끊임없이 수탈을 당할 뿐이다.
그러니 조만간 열릴 예정인 콘클라베에서 활약해, 상황을 바꾸고 싶다고.
그리 말하는 베오의 눈은 분명한 감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떻게든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일까.’
“저기 세희 님······. 어쩌면······.”
“마법을 가르쳐주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이멜다에게 민세희는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 해도, 마법을 쉬이 가르쳐줄 순 없다.
제자를 받고 자시고 전의 문제다.
상대는 수인족의 꼬맹이.
그나마 자라다 만 꼬리 정도가 엿보이는 수드라 계급의 소년이었다.
‘여기서 괜히 얽혀들었다간, 다른 수인족에게 우리 정체가 들키지 말란 법도 없어.’
“······역시, 쉽게는 안 되겠죠.”
그래도 베오는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소년이었다.
겉보기엔 겨우 15세 정도로 보이지만, 소년은 빠르게 체념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저희를 구해주신 은인인데,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천천히 물러나는 베오와 베니를, 두 사람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민세희와 이멜다는 필요한 식료품을 사들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일행들과 만나 방금 베오를 만난 이야기를, 그리고 전해들은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그러자.
“말도 안 되는군. 평등을 이유로 그런 차별이 자행되다니. 여기의 짐승들은 위에 선 자의 도리로서 아랫것을 돌본다는 생각도 못할 만큼 미개한 건가?”
가장 먼저 입을 연건 후작가의 장남이자, 검성의 제자라는 신분을 가진 카스팔 바이온이었다.
지난 3년 간 유토피아의 이름으로 자행되어온 비극.
그것은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형태의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상합니다. 그 말은 결국 수드라를 모든 계급의 공공의 적으로 만든 것에 지나지 않잖습니까?”
또 다른 검성의 제자 브리타의 말처럼.
평민 출신인 그녀이기에 더욱 민감한 냄새를 맡는지도 몰랐다.
“브리타 씨의 말대로에요. 지금 케뮬란은 수드라라는 계층을 만인의 적으로 만들어, 사회에 만연한 불만을 집중시키고 있는 형태에요.”
이멜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는 국가 전체가 행하고 있는 폭력이나 다름없다고.
“허허, 입성 때 경비원이 우리 신분에 민감하게 군 이유가 있었구먼.”
자색 마탑주 레프너겐조차도 이런 상황엔 질린 듯 그리 말했다.
경비원들에게조차 수드라는 박해의 대상이란 말이었다.
그때 이멜다는 조용히 손을 들어 이렇게 말했다.
“저희가 베오를 도와줄 수는 없을까요?”
그것은 필시 어려움을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그녀이기에 나온 발언이었겠지만.
민세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엔 저희들의 상황도 제법 힘드니까요.”
당장 콘클라베에 어떤 사람이 참가할지부터가 고민이 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검성의 제자들이나 레프너겐이나 모두가 의욕적으로 나서주고는 있지만.
“문제는 참가해서 우승까지 간 뒤에요. 정보를 알아낸 뒤엔 어떻게 탈출을 감행할 수 있을지. 아예 우리 정체가 들키면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는 희생을 강요해야만 했다.
때문에 브리타는 솔선해서 손을 들었다.
“카스팔 씨나 레프너겐 님은 후작가의 장손이고 마탑주이시지 않습니까? 이번 임무에선 차라리 평민 출신인 제가 가장 잘 어울립니다.”
선 위치에 대한 부담도 없고.
뭣보다.
“저라면 혼자 빠져 나올 자신도 있습니다.”
그리 단언하는 브리타였지만.
“그래서 나보고 평민 뒤에 숨어서 임무를 완수하란 거냐? 얼척이 없군.”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가장 싫어하는 티를 내던 카스팔이야말로 귀족으로서 의무를 저버릴 수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황녀 전하의 명이다. 차라리 귀족인 내가 콘클라베에 참가하도록 하지.”
하는 대화를 나누는가 하면.
여기에 또 레프너겐이 “늙은이도 도울 수 있네!” 라며 참가하기 시작하면 모든 이야기는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더구나.
‘그것만이 아니야.’
민세희는 일행에게 차마 밝히지 못한 신물 회수에 관한 부담도 지고 있었다.
어설프게 ‘정보만 얻고 빠진다’는 행위가, 그녀에겐 불가능했던 것이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민세희는 여관방을 빠져 나왔다.
‘선배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자신의 위치에 선배가 있다면, 그는 분명 명쾌한 해답을 꺼내줬을 것이다.
아니······. 멀리 갈 것 없이, 문득 민세희에겐 이런 생각 또한 들었다.
“만약 내 위치에 있던 게 이멜다 씨라면······.”
신물 회수를 하기 위해, 팀원의 희생을 강요해야할지도 모를 이런 상황에서.
성녀라 불리는 그녀는 과연 어떠한 선택을 했을까?
이멜다와 함께한 뒤부터 계속 민세희가 느끼던 감정이 있었다.
마음에서 꾸물거리는 질척한 이것.
재민 선배의 인정으로 성녀의 힘을 손에 넣은 그녀와 자신을 자꾸 비교만 해보는 나쁜 버릇이 생긴 것이다.
늘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태양의 성녀인 그녀이기에, 늘 그녀를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하아.”
그렇게 민세희가 기나긴 한숨을 내쉴 때.
“민세희. 주인님의 연락입니다.”
“이스텔 씨?”
지금 가장 목소리를 듣고 싶던 선배로부터 연락이 닿았다.
****
아르민으로부터 메시지가 전해져왔다.
– 지금 서부에서 미네르바 황녀와 신물 회수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
간단히 목적만을 밝히고,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말하면서.
– 민세희, 그쪽은 너에게 부탁하마.
아르민은 정말로 쉽게 그런 말을 꺼내들었지만.
민세희는 조용히 선배에게 물었다.
“선배······. 솔직히 제가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상황이 너무나도 안 좋았기에 흘러나온 푸념과도 같은 말이었다.
차라리.
“제가 아닌 선배가 와주는 편이 더······.”
차마 이멜다에게 내 대신을 부탁하는 건 어떻겠느냐고.
그 말은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해 입에 담지 못했지만.
절로 나온 그 약한 목소리를 들은 아르민은.
– 뭐야, 또 앓는 소리냐?
“······네?”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 피식 웃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그러고 보면 넌 연구실에 있을 때도 자주 그랬지. 연구가 막히고 잘 안 풀리면, 맨날 자긴 아무것도 아니라고 땅에 삽질이나 해댔잖아.
“가, 갑자기 그런 옛날이야기는 왜 꺼내고 그래요···!?”
부끄러운 과거 흑역사를 굳이 꺼내드는 말에 민세희는 펄쩍 뛰었다.
– 하지만 이렇게 푸념 하다가도 몇 번 술도 마시고, 골머리를 썩히다보면 늘 잘 해결했었지. 야, 애당초 내가 널 수석 연구원으로 받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 하냐?
“·········.”
아무 말도 못하는 민세희에게 아르민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겼다.
– 너보다 이번 일에 잘 어울리는 녀석은 없어. 이 선배는 후배를 믿는다. 잘해봐라.
뚝.
그렇게 연락이 끊겼다.
“연락 프로그램 종료. 통상 모드로 복귀합니다.”
이스텔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면서, 민세희는 고개를 숙인 채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가까스로 후배가 도움을 요청하고 여러 가지 푸념을 꺼냈건만 돌아오는 말이 ‘믿는다’라는 한 마디라니.
참.
“······그랬죠. 선배는 늘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떠맡기기만 했었죠.”
고개를 든 민세희는 이스텔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정말 너무한 선배라니까?”
“주인을 향한 험담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사무적으로 답하는 이스텔의 변함없는 모습에, 민세희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믿는다.
그 한 마디에 조금이나마 응어리가 풀린 느낌이다.
현 상황에 대한 고민.
지금 사태를 가장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민세희라는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을 낸다.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라면······.’
한 가지. 떠올랐다.
자칫 비정해보이지만, 실로 냉정하고 냉철하게, 현 상황에서 민세희라는 ‘연구원’이 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문제는 이것을 다른 이들이 이해하고 납득해주느냐 하는 것이지만.
“좋았어······.”
민세희는 거침없이 방으로 돌아가, 여전히 모여 있는 일행들에게 입을 열었다.
“마침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어요.”
누군가의 바람과 자신의 요구가 합쳐져 만들어진 가장 이상적인 결론.
“오늘 만난 수인족을, 우리의 미끼로 써먹을까 해요.”
콘클라베에 참가하고자 하는 수인족 소년의 바람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요컨대.
“수인족 소년을 저희 손으로 키우는 겁니다.”
우리의 손으로 프로듀스를 해보지 않겠냐고.
그녀는 모두에게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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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민의 바람에 따라 나태의 서에 기록되기 시작한 신물의 위치들.
그 내용은 이러했다.
[분노 – 알 수 없음.] [질투 – 남부 수왕국 케뮬란.] [오만 – 마도공화국 비발트.] [탐욕 – 용병연합국가 포리네]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
[색욕 – 제국 칼센. 제도 카라클]****
< 제62장 – 가장 비천한 이들. (1) > 끝
ⓒ 뫄뫄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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