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gic is stronger RAW novel - Chapter (195)
내 마법이 더 쎈데-195화(195/203)
< 제95장 – 찰나의 평온 >
알로스린 대공의 죽음을 끝으로 색욕의 신물을 둘러싼 기나긴 싸움도 막을 내렸다.
허나 싸움은 끝났을 지라도 그것이 할퀴고 간 자리엔 깊은 상처가 남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끔찍해요······.”
민세희의 말대로 눈앞에는 그야말로 시산혈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시체, 피, 그리고 뭉개진 살덩이.
이베트의 신성이 광장에 풀린 순간.
색욕의 신성을 목도한 자들은 하나 같이 실성한 채로 서로가 서로를 죽여 대며 악다구니를 써댔더랬다.
그 결과.
“마탑주 태반이 죽었어. 개중에는 미약하게나마 숨이 붙어 있는 놈도 있긴 하지만······. 저렇게 망가져서야 원래대로 돌아올 수는 없겠는 걸.”
헬레나의 짜증은 지당했다.
참변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을지라도 그 말로는 처참했으니까.
“허, 허허허·········. 사랑······. 내 사랑이여······.”
허물어진 담벼락에 몸을 기댄 채, 끊임없이 사랑을 읊조리는 노인의 눈동자에선 생기 하나 보이지 않는다.
아르민은 노인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레프너겐.”
자색의 마탑주로서 이곳까지 알로스린 대공을 이끌고 온 인도자.
색욕을 목도하고 인간을 사랑한 끝에, 인류를 다음 단계로 끌어 올리고자 했던 그조차도 이런 말로다.
“······안되겠어요. 말이 전혀 안통해요.”
민세희가 몇 번이고 말을 걸어 본들, 눈앞에서 손가락을 흔들어 보든 레프너겐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숨은 붙어있지만 그 의식은 진즉 죽어버린 탓이리라.
더구나 망가진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광장의 한 쪽 구석.
“·········.”
미네르바 황녀는 천천히 쓰러진 시체에게 다가갔다.
생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무언가를 갈구하듯 부릅뜬 채로 남아있는 눈꺼풀을 미네르바는 조용히 감겨주었다.
“앙칼라 백작인가?”
끄덕.
황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주들 뿐만이 아니라 암살교단의 단원들마저 전부 죽고 뭉개졌다.
특히나 개중에서 앙칼라 백작은 황녀에게 있어선 특별한 존재였던 것인지.
“궁정법, 그는 어렸을 적부터 날 돌봐주었던 사람이라네.”
귀족이 나눠 갖는 기사단의 권한과 별개로, 황족이 소유하는 궁정 마탑의 권한 때문에 언제나 그는 미네르바와 가까운 자리에 있었다.
처음엔 껄끄러웠다.
마법사라는 족속은 그 내면을 알기가 어렵고, 특히나 그것이 궁정 마법사쯤 되면 속내를 숨기고, 자신을 꾸미는 것이 당연한 자가 된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직 철부지 어린애였을 때 그는 내게 걱정 말라 말해주었지. 무서워할 필요 없다고, 어머니는 언제까지고 날 지켜봐줄 거라며 수호의 주문을 외워주었다네.”
그것이 단순한 호의에서 비롯된 것인지, 황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벌였던 유치한 연극인지는 몰라도.
“그때부터였지. 이반 황제가 서거하고 그 뒤로도 그를 내 수족으로 택한 이유는.”
아마 되돌아보면 그것은 실로 단순하게.
“본녀는 이 사람에게 기대고 있었을 뿐이야. 중압감을 주고 힘들게 했는지도 모르네.”
황족으로 태어나 평생을 권력투쟁 속에서 살아온 황녀는 피붙이에게 정을 느껴본 적 따윈 없다.
오히려 이 남자야말로 자신에게 있어선 가족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백작은······. 날 어찌 여겼는지 모르겠군.”
그거야 앞으로도 평생 알 일은 없을 이야기겠지.
문자 그대로 다시 ‘되살리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어쨌거나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되살리고자 했던 한 남자의 야망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누군가는 울고, 분해하며, 끝내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는 일들인 것은 분명했지만.
‘하지만.’
이런 비극 속에서 우리에겐 흉터만이 남은 것은 아니었다.
먼저.
사라락.
바람을 타고 온 정령이 아르민에게 다가와 귀엣말로 목소리를 전했다.
[그쪽 상황은 정리 됐지요? 여기도 제미니의 무사 생환을 확인 했어요.]연락을 전해온 건 샤오메이였다.
상황이 끝난 걸 확인하자마자, 누구보다 먼저 상아탑 학생들에게 달려간 그녀는 거기에서 제미니의 육체 또한 무사히 재구축 되었다는 걸 확인했다고 말했다.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다행이야.’
알로스린 대공이 제미니의 육체를 그릇으로 실행한 신성강림의 마법은 어디까지나 이 대지를 주축으로 한 술식이었다.
이베트의 신성이 자기 의지로 소실된 순간, 대지에 묶여 있던 술식이 무너지고 육체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을 터.
요컨대 세이브 & 로드가 실행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뭐, 소소한 문제로 숙소 강당에서 학생들이 불안에 떨고 있을 쯔음 허공에서 날아온 빛무리가 제미니의 육체로 화한 걸 보고 학생 몇이 소란을 떨긴 했다지만.
별 다른 큰 문제없이 샤오메이와 제미니의 주도 아래 상아탑의 혼란도 대강은 수습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저쪽은 해결이 됐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으, 으음.”
“앗, 엘레노아. 정신이 드니?”
민세희의 다정한 목소리에 아르민의 시선이 끌려간다.
지금 막 의식을 되찾은 듯, 엘레노아는 어슴푸레한 정신으로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깜빡였다.
“여, 여긴······. 저는, 어떻게 된 거죠···?”
엘레노아는 잠시 얼굴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앗, 맞다! 몸이. 저······! 분명 술식 속에서······!”
“괜찮아.”
혼란에 빠져 목소리를 높이는 엘레노아의 입술에 아르민은 검지를 대었다.
“전부 끝났으니까. 이제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
“스, 스승님······. 흐, 흐윽.”
엘레노아의 눈동자에서 구슬방울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무서웠을 거다.
내 몸이 내가 알지 못하는 것으로 바뀌어간다는 공포.
그 끝에 나를 이런 비참한 꼴로 만든 것에 대한 무수한 증오.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직접 보듬어주었던 스승님의 따스한 손길로.
그녀는 변하지 않을 수 있었다.
“스승님······. 스승님······.”
조용히 울려 퍼지는 엘레노아의 울음을 다독이며 아르민은 생각했다.
그래, 우리에게 남은 건 흉터만이 아니다.
이렇게 작게나마 일어난 기적들 또한 분명히 있노라고.
그리고
‘이것으로 많은 것이 변해가겠지.’
****
그로부터 며칠 후.
“황녀 전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소인이 호위기사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백금 기사단의 단장 보그너 백작이 기사단을 이끌고 다급히 이곳으로 찾아왔다.
회의실에서 미네르바 황녀와 대공, 그리고 다수의 귀족들이 난데없는 암살교단 커밍아웃과 함께 모습을 감추어버렸으니.
그로서는 말 그대로 속이 타들어가는 심정이었으리라.
원칙대로라면 제도 바깥으로 운용해서는 안 되는 백금 기사단을 데려온 것도.
– 황녀 전하와 알로스린 대공이 위험에 처했다. 그 두 분이 위험하다는 건 곧 제국의 존폐와도 직결되는 문제. 그분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라는 억지에 가까운 논리를 동원해가며 끌고 왔다고 했다.
덕분에 제국의 원로원은 설득할 수 있었던 모양이지만.
“대공의······ 사망, 말입니까?”
알로스린 대공의 사망 소식은 제아무리 백금 기사단의 단장이라고 해도 경악을 감출 수 없는 듯 했다.
“그래, 사망했네. 불운한 사고였지.”
황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사단원들 사이로 술렁거림이 퍼져 나간다.
미네르바 황녀는 대공의 죽음을 그저 안타까운 사고로 포장했다.
그가 신을 강림시키려 했다느니, 암살교단원과 손을 잡았다느니, 죽은 아내를 부활시키려 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전부 숨긴 것이다.
그런 선택을 한 건 간단했다.
‘이야기에 현실감이 없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 대공이 쌓아놓은 세력의 면모를 본녀는 아직 그 일각조차 다 파악하지 못했다네. 우선은 대공이 죽은 이유를 숨기고, 그가 암중에 가진 세력은 철저하게 청소할 필요가 있겠지.
모든 진상을 밝혀버리면 대공과 뜻을 함께 하던 이들이 위협을 느끼고 더욱 깊은 어둠으로 숨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들을 보다 확실히 소탕하기 위해서라도 미네르바 황녀는 정보를 손보기로 했다.
‘이런 면에서는 확실히 철저하고 유능해. 괜히 대공 다음 가는 세력을 자랑한 게 아니란 거야.’
더구나 기사단의 반응처럼.
대공의 죽음은 단순히 사람 하나 죽은 걸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 칼센 제국엔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불 걸세.”
거대하고도 커다란 바람이.
그리고 그 바람은.
“우리의 모든 것을 바꿔놓을 테지. 그러니 아르민 경.”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띤 미네르바 황녀는 아르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귀부인으로서 자신을 추종하는 기사에게 내미는 총애의 표시로서.
“그때까지 나를 도와주지 않겠나?”
“당신을 모시는 충정의 기사로서 명을 받들겠나이다.”
우아한 태도로 아르민은 황녀의 손등 위로 키스를 했다.
그 일련의 연극 덕택에 외야에서는.
“스, 스승님이 황녀 전하의 기사······!”
“선배답지 않네요.”
“나름의 예절이란 거잖아. 이해해줘야지. 푸하하.”
동화 같은 장면에 눈을 빛내는 엘레노아나 뚱한 민세희의 표정. 그리고 웃겨 죽겠다는 듯이 킬킬거리는 헬레나가 보였지만.
아르민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좋은 게 좋은 걸로 됐잖아?
****
그렇게 아르민 일행은 제국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제국은 한동안 권력의 개편과 이동으로 엄청 시끄러워질 것이다.
아르민은 혹시라도 그 사이에 발생할지도 모를 소요 사태를 걱정해.
“어때, 내가 도와줄까? 쓸데없이 반발하는 녀석들이 있으면 처리해줄 수도 있는데.”
암시나 최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자신의 마법 실력을 뽐내주겠다는 말에도 미네르바 황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여기서부터는 오직 본녀의 무대야. 앞으로 있을 풍랑조차 헤쳐 나가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이 내게 자격 따윈 없다는 말이 될 터이니 말일세.”
그러니 다시 황궁으로 부를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아르민은 그런 미네르바의 의견을 존중해 몸을 돌렸다.
어차피 그녀라면 혼란을 수습하는 일 따위야 가능하리라. 충분히 믿고 있었다.
그렇게 아르민은 집으로 돌아왔다.
“도련님!”
가장 먼저 아르민을 맞이해준 건 일레인스 가문의 하녀. 마리나였다.
호들갑스럽게 도련님의 방문을 맞이한 그녀는 순간, 우뚝. 못 박힌 듯 걸음을 멈춰섰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
아르민의 뒤에 선 채로 슬쩍 눈치를 보듯 몸을 가린 엘레노아를 발견한 마리나의 눈이 커졌다.
‘아, 하긴.’
그야 밖으로 나간 도련님이 처음 보는 소녀를 데려왔으니 하녀 입장에선 놀랄만도 하겠다. 싶어.
“이쪽은 이번에 내가······.”
제자로 들인 녀석이라고 말하려는 아르민보다 마리나의 입이 더 빨랐다.
“설마······! 설마, 설마······! 도련님의 숨겨둔 자식인 건가요?!”
망상이 폭발했다.
“아니, 무슨 헛소리를···.”
“하긴 도련님이라면······. 그 도련님이라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도 모른다고······. 저 마리나는 도련님을 모시는 종자로서 걱정도 하고 또한 약간의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설마 진짜 현실이 될 줄이야!”
“야, 잠만 마리나 내 말을 좀.”
“괜찮습니다. 도련님. 이해해요! 제가 보는 소설에 자주 나오는 전개였으니까요! 피가 이어졌지만 인정받지 못한 서자. 하지만 그런 자식이라도 도련님께선 차마 사랑하는 따님을 내버려둘 수 없어서······ 아아!”
아무래도 아르민이 없는 사이, 돌볼 사람도 없겠다 마리나는 평소 연애 소설에 푹 빠져 살아온 모양이었다.
그보다.
‘내가 망나니라는 설정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모양이구만.’
허탈한 나머지 웃음도 나오지 않는 전개였지만.
이대로 내버려두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됐고. 이쪽은 내가 이번에 들인 내제자(內弟子)다. 이름은 엘레노아 일레인스. 인사해.”
“······일레인스?”
의문을 표한 건 다름 아닌 엘레노아였다.
빈민가 출신인 그녀에게 성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더구나 일레인스라면.
“그건 스승님의 가문명인 게······.”
엘레노아의 질문에 답한 건 아르민이 아니었다.
“엘레노아 일레인스······. 제자란 말이냐.”
중후한 목소리.
복도 끄트머리에서 품위 있는 태도로 모습을 드러낸 건 아르민의 아버지, 칼레인이었다.
장년의 남자가 자기 이름을 입에 담았기 때문이겠지.
“읏.”
엘레노아는 위축된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사라락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 엘레노아의 눈동자를 가렸다.
창백한 피부 위로 도드라지는 가느다란 몸뚱이.
천천히 엘레노아를 바라본 칼레인은.
“······좋다. 그것이 네 결정이라면 상관없다.”
아르민의 예상보다도 더 쉽게, 그 결정을 받아들여주었다.
“제가 할 말은 아닙니다만. 괜찮으십니까?”
“마법사가 내제자를 들인다는 건 곧 혈육으로 삼는다는 말이 아니더냐?”
미처 자식을 만들지 못하거나 자신의 독문 마법을 전해줄 친인척이 없을 때 마법사들이 그러하는 것이 생리다.
칼레인은 마법사의 생리쯤은 알고 있다고 말했다.
무뚝뚝한 아버지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고생했다.”
아버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
제국에서 실각된 인물이라고 해도, 가진 바 위치를 고려한다면 어느 정도 진상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예. 감사합니다.”
아르민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시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가려는 칼레인의 뒤를 향해.
“참고로 오늘부터 손녀가 생기신 겁니다.”
“·········크흠.”
무안한 듯,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듯 헛기침을 하고서 칼레인은 사라졌다.
그 뒤엔 마리나가 호들갑을 떨거나.
“스, 스승님과 내, 내, 내가 가족······.”
엘레노아가 믿기지 않는 다는 듯이, 어딘지 모르게 붕 뜬 얼굴로 중얼거리기도 하는 등.
약간 혼란이 벌어졌지만.
그래도 아르민은 마음 깊이 느꼈다.
“아르민! 어머어머! 그 애는 또 누구야?!”
복도 멀리서 경박하게 달려오는 누님을 바라보면서.
‘집으로 돌아왔구나.’
여긴 결국 내 집이라는 걸 실감했다.
****
추후 며칠 간.
제국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대공의 세력이 축출되고 빠른 속도로 황녀파의 세력이 권력의 중심을 장악했다.
그 과정에서 피가 흐르는 일은 없었다.
어차피 대공이 모습을 감춘 이상, 누구에게 주도권이 있는지는 명백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모토는 [능력이 있는 자라면 그 누구라도 거절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 대회의에서 선언한다. 앞으로 한 달 뒤, 칼센 제국의 차기 황제. 미네르바 황녀의 즉위식을 열겠노라.
미네르바 황녀의 황제 즉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단숨에 거리는, 그리고 신문의 언론은, 세계는 차기 미네르바 황제에 대한 이야기로 뜨거워졌다.
지금까지 제국 원로원의 관리 아래 공석이 되었던 자리.
그곳이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이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축제가 개최될 거래요.”
최근 들어 평소보다 웃는 일이 많아진 엘레노아가 말했다.
이런 축제와 연이 멀었던 그녀로선 퍽이나 가슴이 뛰는 일인 듯 했다.
바깥 세상은 소란스러웠지만, 어쨌거나 아르민에겐 조금 머나먼 일이었다.
그 풍경을 뒤로한 채.
끼이익.
“왔어?”
“선배, 준비는 전부 끝났어요.”
아르민이 문을 열고 들어온 장소는 일레인스 가문의 저택 지하에 마련된 실험장이었다.
이미 그곳엔 선객이 있었다.
헬레나와 민세희.
그녀들은 앞서 정성들여 준비한 마법진 위로 물건들을 배치하고 있었다.
아르민의 시선이 물건들에게 향한다.
탐식의 핵.
나태의 서.
질투의 검.
색욕의 그릇.
오만의 별.
이번 사건을 해결하며 손에 넣은 신물의 전부다.
탐욕의 성배가 아직 쿠올 상단의 주인인 베로니카에게 남아있긴 하지만.
이로서 손에 넣은 신물은 총 6개.
“앞으로 남은 모노리스의 파편은 이제 한 개······.”
그리고 오늘.
나태의 서로도 소재 파악이 되지 않는 나머지 신물.
분노의 신물을 찾기 위해 아르민은 지난 며칠 동안 대규모 의식 마법을 준비했다.
“신물의 마력 패턴은 전부 동기화가 끝났어. 필요한 마력 결정도 궁정 마탑에서 제공 받았고. 아마 이걸로 대륙 전역을 커버하는 서치 마법이 발동 가능할 거야.”
헬레나의 설명대로 이건 신물이 가진 패턴을 분석해서 만들어낸 탐지 마법이었다.
이 정도의 표본이 있으니, 이걸 참고해 마지막 남은 분노의 패턴을 역추적하려는 것이다.
‘이제 신좌에 남은 신성은 아무도 없다.’
모리오카를 끝으로 저 별의 대해에도, 지상에도 신성이 전부 사라진 이상.
이 탐지 마법으로 찾아낼 수 있는 신성은 마지막 신물이 될 터였다.
‘이베트가 그랬지. 잘못된 선택을 하지 말라고······.’
그것이 무슨 의미일지, 아직은 알 수가 없지만.
그저 아르민은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할 뿐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분노의 신물만 발견하면 모든 신물을 모아 완전한 모노리스를 구축할 수 있겠지.”
그렇게 만들어진 모노리스의 파편을 부순다.
그게 아르민이 이제까지 해온 모험이 맞이할 결말이었다.
“그럼 술식을 시작하마.”
아르민은 손을 뻗었다.
어차피 정교한 마법진을 만든 이상, 주문을 외울 필요도 없었다.
우우웅!
마력을 받아들인 마법진이 공명하며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임계점을 향해 가는 마법진.
그것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순간.
“발동하라.”
두우우웅!
거대한 마력의 파동이 사방으로 뻗어져 나가기 시작한다.
자, 분노의 신물은 어디 있느냐.
그 어떠한 미세한 기척이라도 잡아내주겠다고.
아르민이 정신을 집중한 찰나였다.
“······어?”
찾았다.
하지만 이상했다.
대지를 가득 메우며 지금도 파동은 뻗어나가고 있지만.
그건 이미 의식에서 사라졌다.
너무나도 의외의 결과에 아르민의 눈동자가 흔들렀다.
“왜 그래요? 선배?”
“뭐, 잘못되기라도 했어?”
민세희는 물론 헬레나의 질문조차 아르민의 귓가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신물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탐지 마법이 가리킨 신물의 위치.
아르민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기엔.
“왜 그래? 사람을 무섭게 쳐다보고.”
헬레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으니.
분노의 신물.
그건 헬레나였다.
< 제95장 – 찰나의 평온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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