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gic is stronger RAW novel - Chapter (197)
내 마법이 더 쎈데-197화(197/203)
< 제96장 – 짓밟아야만 하는 것. (2) >
[칼센 제국에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대륙 패권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소식은 빠른 속도로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일부는 반가워하는 목소리를, 또 다른 일부는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황제가 바뀐 이상, 대륙 각지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이 취할 행동은 하나밖에 없었다.
장소는 칼센 제국의 황궁 알현실.
옥좌를 차지한 자의 품격을 대변하듯 엄숙함이 감도는 그 장소에.
– 라프셀 왕국의 사절단 대표! 제1왕자 론티나 라프셀의 입장이오!
사절단 대표의 방문을 알리는 시종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프셀 왕국이라면······. 대륙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던 상업 강국이었지. 아마.’
바다와 대륙의 중심을 관통하는 커다란 강과 인접한 국가.
덕분에 육지 수송에 비해 시간과 비용이 비교적 저렴한 수상 운송 산업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꽤나 커다란 부를 축적한 나라로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저벅저벅.
붉은색 비단 위를 지나 알현실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은발이 특징적인 아름다운 미남자였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네르바 프리드리히 폰 칼센 황제 폐하. 정령이 깃든 알프람 강의 아들이자, 론티미노 라프셀 왕의 적자. 론티나 라프셀이라고 하옵니다.”
그림에 그린 듯한 우아한 인사와 함께.
론티나는 은백색의 속눈썹 아래로 별빛을 닮은 듯한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싱긋 미네르바를 향해 미소 지었다.
‘자신의 매력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군.’
평범한 여성들이었다면 방금 미소 하나로 단번에 마음이 녹아내리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론티나 왕자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첫인상이라는 건 서로 간의 만남에 있어 특히나 중요한 법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어.’
그는 자신이 가진 무기가 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셈이었다.
아마도 상업 왕국의 적자라는 입장 덕분에 무기를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고, 이골이 나있을 테지.
아무리 제국의 신임 황제라고 해도 상대는 십대 후반의 여성.
자신의 무기가 힘을 발휘하리라 생각했겠지만.
‘뭐, 아쉽게도.’
“멀리서 귀한 손님이 와주었군. 만나서 반갑네.”
돌아온 건 미네르바의 은은한 미소 뿐이었다.
예상과는 다른 전개.
미네르바가 보여준 가벼운 답 인사를 설마하니 예상치 못했는지.
“···예.”
론티나의 대답은 한 박자 늦었다.
잠깐의 수싸움이 있긴 했지만, 그 뒤로 오고간 대화는 가벼운 잡담에 불과했다.
알로스린 대공의 비호를 받고 있던 금빛 황금 상단이 몰락했다는 이야기나.
그 빈틈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사업 전략에 대해.
또한 추후 제국에서 벌이는 사업에 우리 왕국도 꼭 참여하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론티나는 적극적으로 미네르바가 원하기만 한다면 제국에 대한 원조나 공여를 아끼지 않겠다며 속내를 밝혀왔다.
말은 그렇게 해도 결국 그 말의 뜻은.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서라면 어떤 아첨도 불사한다. 이거군.’
그만큼 황제가 바뀐 지금을 기회로 보는 자들이 많다는 이야기이리라.
애당초 이번 만남은 딱히 미네르바가 타국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개최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사업 정비를 위해···라고 했던가.”
표면적으로는 새로이 대륙의 패자가 된 미네르바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라는 모양이지만.
그 실체는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즉 앞으로 미네르바가 이끌어 나갈 제국의 행보에 어떻게든 한 다리 걸치고 싶어 하는 자들이 이렇게 찾아와, 각자가 이전투구를 벌이는 장이 되었다.
론티나 이전에도 벌써 몇 명이나 사람을 만난 미네르바였다.
‘하나 같이 서로 입바른 말만 해서야. 듣는 쪽이 피곤해질 뿐이고.’
그런 판국에 론티나마저도 아무래도 좋을 흐리멍덩한 사업 비전이나 제국의 칭송 따위를 떠들고 있으니.
어찌 관심이 갈 수 있으랴.
결국.
“그대의 의견은 잘 들었네. 추후 제국 재상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대의 의견을 수용할지 말지 검토해보도록 하지.”
론티나에게 돌아간 대답은 검토라는 이름의 에두른 거절이다.
그쯤 되니 론티나도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겠지.
은발의 미남자는 안달이 난 표정으로 대화의 주제를 틀었다.
“하하하! 지루한 사업 이야기는 이쯤 해두도록 하지요. 그보다 이건 외적인 이야기입니다만. 황제 폐하를 뵙자마자 매우 놀라고야 말았습니다.”
“흐음?”
이제까지와 달리 미네르바가 흥미를 보였기 때문일까.
론티나는 더욱 흥이 오른 듯 말을 쏟아냈다.
“대륙의 패자라는 막중한 자리. 그 어깨를 누르고 있을 짐이 얼마나 무거울지 저는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만. 설마하니 그 당사자가 이렇게나 앳된 분이셨다니. 왕자의 신분으로 밖을 쏘다니기만 하던 제가 부끄러워 고개를 들기가 어렵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그대는 라프셀의 사절로서 아버지의 의견을 대행하기 위한 자리에 있지 않나. 그 또한 막중한 책임인 건 다름이 없을 터.”
“하하하! 그리 봐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래도 역시 국정을 다스리는 일보다도 티타임과 사교계가 더욱 어울리시는 그 가련한 아름다움이라니! 새삼 황제 폐하의 아름다움에 반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후에 저와 티타임을 함께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그야말로 여성이라는 생물을 단번에 함락시키기 위한 무기를 꺼내든 론티나.
아마도 그 속내는 이런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 사적인 자리라면 미네르바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은연중으로 자신감을 표현한 걸지도 모르겠으나.
‘아. 이건 끝났군.’
아르민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짐을 아름답다고 말해주다니. 고맙네. 설사 그것이 여염집의 여식이나, 사랑을 알고 부끄러워하는 귀족가의 귀공녀를 꼬드기기 위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듣기 좋은 말은 듣기 좋다. 그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닐지니.”
“예?! 아니, 제 말 뜻은 그런 게 아니라······!”
뒤늦게 수습하려는 론티나였지만, 이미 열차는 떠났다.
“짐에게 어울리는 곳은 달콤한 내음이 감도는 티타임 자리나, 서로가 사랑을 속삭이는 무도회장 따위가 아닐세. 그대와 이렇게 국정을 논하는 바로 이 자리지. 그걸 잊지 말게나.”
얼굴엔 미소를 짓고 있지만, 미네르바의 말은 냉혹하기 짝이 없다.
차근차근 외교적 결례를 지적하며 론티나의 무례를 까발린 미네르바는 이어서.
“그대의 말 덕분에 새삼 개안했네. 라프셀 왕국과의 교역 건은 다시 한 번 재고해보도록 하지.”
미네르바는 턱짓으로 호위병들을 향해 지시했다.
축객령이었다.
“화, 황제 폐하! 잠시만! 다시 한 번 제게 기회를······!”
쿠웅!
끝까지 발버둥치는 론티나가 호위병들의 손에 끌려나간 직후.
“············하아. 피곤하군”
미네르바의 거나한 한숨 소리가 아르민의 귓가에 닿았다.
“뭐, 이럴 줄 알고 있었잖아?”
아무리 제국의 황제라고 해도 외인이 보기에 미네르바는 어리다.
잘 봐줘야 이제 갓 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소녀.
제국 내 정치에 무지한 자들은 미네르바를 두고 그저 알로스린 대공이 죽고 황권의 공백이 확실해지자.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황제 자리에 오른 자라고 여기기도 한다.
겉으로는 예의를 포장하고 있어도, 사람의 감정과 속내를 파악하는데 능숙한 아르민이나 미네르바 눈에는 뻔히 보였다.
그들이 얼마나 미네르바를 얕잡아보고, 어린 계집이라 무시하고 있는지.
“아무리 전례가 없다고는 해도, 계집이 자리에 오른 것만으로도 다들 잡아먹으려고 드니. 당하는 입장에선 화가 나다 못해 쓴웃음이 나올 지경이라네.”
“론티나의 경우엔 정말로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그리 말한 모양이던데?”
평소에도 여자와 염문 뿌리는 걸 좋아하는 남자였음이 틀림없다.
“황제를 유혹하는 왕자라니. 연애 소설을 써대는 치들이 좋아할 이야기로군. 정작······.”
미네르바는 아르민을 지그시 바라본 채로 미소를 짓고는.
“황제가 유혹하려 한 남자는 콧방귀도 뀌지 않는데 말이야.”
“······그건 좀 봐주라.”
“후후. 농담일세.”
아르민으로선 심장에 안 좋은 농담이었다.
어쨌거나.
“언제까지 이런 광대 노릇을 해야 할는지······.”
“이 다음에 만날 사람은 믿어도 좋아.”
미네르바의 푸념에 아르민은 씨익 웃어보였다.
이 다음으로 만남이 약속된 상대.
그는 아르민이 인정하는 이였다.
“자네가 그토록 칭찬하는 자라니, 누군지 새삼 흥미가 솟는 군. 질투까지 날 지경이야.”
“기대하라고.”
아르민의 자신만만한 선언이 있고서 얼마 후.
상대가 도착했는지, 시종이 또 다시 우렁찬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 용병국가 포리네의 사절단 대표! 쿠올 베로니카의 입장이오!
****
어느덧 창밖으로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해가 뜨고 하늘을 가로질러 다시 지면서 스러지는 나날.
이 세계의 하늘은 아르민이 기억하던 시절의 그 하늘과 다름이 없었다.
여전히 덧없고 잔잔하며 또한 아름답다.
그래서 석양이 지는 하늘을 보고 있다 보면 싫어도 아르민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 이 세계 또한 내가 알고 있는 지구와 다를 바 없이 아름답노라고.
“그리고 세상은 그것만으로도 가치를 지닌다···인가.”
앞으로 자신이 하려는 일.
그것을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으려니, 잠시나마 감상적인 기분에 젖어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괜스레 밀려드는 감상적인 기분에 아르민이 쓰게 웃고 있을 쯔음.
“아르민 경. 여기 계셨군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와 대화는 끝났나 보지?”
“예. 다행스럽게도 폐하께서는 제 의견을 적극적으로 환영해주셨습니다.”
베로니카가 황제를 찾은 목적.
그건.
“대륙에서 경제력이 가장 월등한 제국을 중심으로 화폐 제도를 통일하자는 의견이었던가?”
베로니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부터 제국의 금화는 알음알음 상인들 간에 쓰이고 있었습니다만. 이번 기회에 황제 폐하께 간언을 드려 그것을 공식 제도화 하고자 했습니다.”
이 세계에서도 화폐는 존재한다.
보통 금화, 은화, 동화 따위로 가볍게 부르고는 있지만.
나라마다 주조한 동전의 재질이나 크기 따위가 제각각이고, 그로 인해 각국 간의 거래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도 만만치가 않았다.
요컨대 조금이라도 규모가 있는 거래(보통 건축 사업 따위가 그렇다)를 할 땐 골머리를 앓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상인들은 좋든 싫든 자연스럽게 거래에서 칼센 제국제의 금화를 선호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제국의 금화는 이미 상인들 사이에서 일종의 기준이 되고 있었다.
그런 암묵적인 룰을 아예 이 참에 제도를 정비해 공식화하고자 한다.
‘물론 거래 하나 편하자고 단순히 제국 금화만을 쓰는 식으로 제도를 통일해버리면 제국에게 경제력이 복속되는 결과가 될 테지만.’
바로 여기에서 베로니카의 능력이 빛을 발했다.
아르민은 떠올렸다.
방금 전 베로니카와 미네르바가 나누었던 대화를.
– 제국의 금화를 기준으로 화폐 제도를 통일하자니, 그러면 상인들 입장에서야 편할지 몰라도 귀국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
미네르바의 당연한 지적에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덧붙였다.
– 단지 금화의 사용을 통일하자는 게 아닙니다. 저는 황제 폐하께서 금화의 가치를 ‘보증’해주시기를 바랍니다.
– 보증······?
– 예, 금화를 이용한 거래는 가치의 담보가 확실하지만. 그만큼 거래에 품이 많이 듭니다. 금화 자체로는 무겁고, 수백 개의 금화를 움직이는 데도 비용이 발생하지요.
그러니 아예 생각을 바꾸었다.
금화의 가치를 제국이 보증해주고, 그 대신.
– 금화의 가치를 인정하는 종이표를, 화폐 대신으로 쓰고자 합니다.
– 그건 어음 아닌가! 상인 간에 쓰이는 어음을 화폐 대신으로 쓰자니!
–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일개 상인이 꺼내든 터무니없는 말에 대신들이 반발했지만.
미네르바만은 달랐다.
– 호오, 재미있군. 자네의 생각은 매우 기묘해. 그러니까 자네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렷다.
다름이 아닌 제국이란 나라 그 자체가.
– 어음의 가치를 ‘보증’하라고?
– 예.
미네르바는 웃었다.
유쾌하다는 듯이, 그 말 안에 담긴 내실을 알고서는 실로 기묘하다고 박수를 치면서.
– 좋네. 좋아. 재미있는 의견이야. 어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까!
그 시점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떠들어대는 대신들이나, 어차피 할 일도 없던 아르민이 방으로 쫓겨났다.
그건 그렇고 베로니카가 꺼내든 의견은 결굴 그거였다.
‘제국으로 하여금 금본위제를 도입하도록 유도하여 화폐 경제를 성립시키려고 한다.’
아르민은 기가 차다 못해 저도 모르게 웃어버리고야 말았다.
말 그대로 베로니카가 하려는 일은, 예전에 성배문답에서 그녀가 직접 언급했던 자본주의의 도입을 앞당기는 일이 아니느냐고.
“······만날 때마다 너란 여자에겐 매번 놀라게 되는 군.”
“그렇, 습니까?”
자칫 망상이라고 폄하 당할 것을 각오하고 있던 베로니카로서는 아르민의 높은 평가에 도리어 부담스럽다는 듯이 시선을 피했다.
뭐, 머리가 복잡해지는 경제 이야기는 여기까지면 되었다.
오늘 이렇게 아르민이 베로니카를 따로 불러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탐욕의 신물. 그것이 네게 도움이 되었나?”
“······그 날 성배를 손에 넣고 난 뒤로, 제게는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베로니카는 떠듬떠듬 아르민이 사라진 뒤의 일을 이야기했다.
쿠올 상단은 원래 중급 규모에 간신히 미치는 상단에 불과했다.
거래를 할 때에도 상대에게 얕잡아보이거나, 부당한 대우를 감수하는 것이 당연했던 상단.
그러나 탐욕의 신물을 손에 넣고서 부터는 그것이 조금 달라졌다고 베로니카는 회고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탐욕이 손에 잡힐 듯 보였습니다.”
상인은 속내를 숨기는 자들이다.
바라는 바를 숨기고, 의뭉을 떨며, 에둘러 자신이 바라는 것 이상의 이익을 취하려고 한다.
필연적으로 여기에서 발생하는 수 싸움이 곧 상인들의 전쟁인 법이었다.
하지만 신물 덕분인걸까.
베로니카는 그들이 무얼 원하는지, 무엇을 얻고자 하며, 어느 정도 얻는 시점에서 만족을 할 수 있을지.
“그들이 마음으로 내뱉는 소리가 제게 들려왔습니다.”
말 그대로 탐욕의 신처럼.
그들이 원하는 것이 뭔지 알게 된 베로니카다.
어떤 거래든지 질 리가 없었다.
과연, 상인이라면 누구라도 탐낼 신물이 아니한가.
하지만.
“그 물건을 다시 내놓으라고 했을 때,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나?”
아르민은 모노리스의 파편을 부수기 위해, 신물을 반환하라 요구했다.
욕심을 가진 자라면 누구라도 저어했을 이야기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예, 망설일 이유가 없으니까요.”
원래 그런 여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는 승낙했다.
“어째서지? 그것만 있으면 상인으로 성공하는 것 따윈 식은죽 먹기일 텐데.”
“신물이 없어진다 한들, 이미 제가 얻은 인연이나 거래 상대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고개를 들어 아르민과 시선을 맞춘 채로 이렇게 입을 열었다.
“신물을 돌려주지 않는다고 했을 때, 저는 무엇보다 소중한 것을 잃게 될 테지요.”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니······.”
“자고로 상인이란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 이익을 취하는 자입니다.”
베로니카가 담담히 꺼내는 말에 아르민은 공감했다.
실제로 저 여자는 나와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정조까지도 거래재료로 삼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잃을 것이 명확한 것.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엔 또한 미련을 가지지 않는 족속들이지요.”
바로 성배가 그러하며.
“당신이란 남자가 그렇습니다.”
“······평가가 높은 걸.”
“성배를 입수했을 당시, 당신이 초월적인 ‘그 분’을 상대로 벗이라고 부르던 말을 들었습니다.”
하긴 그때 아르민은 딱히 베로니카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짓 따윈 하지 않았다.
그런 일로 베로니카가 두려움을 품거나, 정이 떨어질 여자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신기하게도 당신을 보고서 공포나 두려움이 생기진 않았습니다. 단지······.”
“단지?”
베로니카의 눈동자는 약간이나마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눈빛을 보였다.
그녀는 말했다.
“시대에 한 명이나 볼까 말까한 영웅을 직접 목도하고······. 그의 여정에서 조촐하게나마 친구로 남을 수 있다면. 이 쿠올 베로니카. 당신을 만난 것 자체가 성배보다도 값진 보물이라 여길 뿐입니다.”
“·········정말로 평가가 쓸데없이 높은 걸.”
아르민의 반쯤 투덜거리는 말에도 베로니카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무슨 소리이십니까. 상인인 제가 가치를 몰라볼 리가 없지요.”
“그러십니까······.”
아르민은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자신과의 여정을 보물로 여겨준다니.
영웅의 여정이라······.
“아르고나우타이(Ἀργοναῦται)인가······.”
“아르, 고?”
“아, 내가 알고 있는 신화의 이야기야.”
이른 바 아르고 호의 원정.
영웅 이아손이 그리스의 수많은 영웅들과 함께 모험을 했던 불멸의 신화.
나 자신이 설마 남에게 그렇게 비춰질 줄이야.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고맙다.”
“별 말씀을.”
베로니카는 그저 우아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
마침내 모든 신물이 한 자리에 모였다.
탐식의 핵.
나태의 서.
질투의 검.
탐욕의 성배.
색욕의 그릇.
오만의 별.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노의 신물인 헬레나까지.
황궁 한 쪽에 마련된 궁정 마탑.
그곳의 지하 연구실을 빌린 아르민은 지난 한 달 간 세세한 작업을 통해 모노리스의 파편을 부수기 위한 술식을 짰다.
그리고 바로 오늘.
“모노리스의 편린을 부술 생각이야.”
그리 말하며 아르민은 연구실을 둘러보았다.
이번 술식을 실행하는 데에는 최소한의 사람만을 부른 참이다.
후배 민세희가 긴장한 얼굴로 아르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선 샤오메이가 기대감이 어린 시선으로 마법진의 구조를 보며 연신 “굉장해, 그 술식을 이런 식으로 응용하다니.”라며 감탄하는가 하면.
아르민의 종자인 이스텔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다음 명령이 있기 전까지 대기 모드에 들어갑니다.” 하고 중얼거리고 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마지막 한 사람.
“미스터 강.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
새삼스레 헬레나가 꺼낸 말에 아르민은 진심으로 동의했다.
“드디어 마지막이야.”
모노리스의 파편을 부수면 마침내 아르민이 걸어온 기나긴 여정이 끝이 난다.
마법진 중심에 모든 신물을 올려놓고 나자, 헬레나 또한 자기 발로 그 중심으로 걸어 들어갔다.
“······헬레나 씨.”
헬레나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민세희는 불안한 목소리를 냈다.
어째서 헬레나 그녀는 이처럼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하고.
“쉿. 이야기는 전부 끝났어. 나도 진짜 아쉬울 거 없으니. 세희, 네가 그런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어.”
그러니 오늘로 모든 것을 끝내자고.
“그럼 아프지 않게 잘 부탁해.”
“그래. 시작하마.”
아르민은 마력을 움직였다.
신물들이 공명한다.
떨림과 함께 연구실 내부러 퍼져 나가는 마력의 파동.
이 조화를 깨트리고 폭주시키면 신물의 근간을 이루는 핵을 부술 수가 있다.
이미 수차례 사전 검증도 끝냈고, 술식의 완성도 또한 아르민이 자신하는 물건이었다.
술식은 완벽하다.
“모두 안녕.”
손을 흔드는 헬레나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그래. 파괴만 하는 것이라면 간단하다.
실로 쉬운 일이다.
때문에.
“······그런 쉬운 길만을 걷지 않는 게 나 같은 현대 마법사란 족속들이야.”
“선배?”
아르민은 손목을 빙 휘둘러 스냅했다.
쿠웅!
술식이 반전된다.
아까까지와는 다른 흐름의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잠···! 잠깐! 미스터 강!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술식의 중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헬레나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을 때.
아르민은 장난을 꾸미는 악동처럼 대답했다.
“부수기만 하는 거면 간단해. 그 과정에서 헬레나, 네 육신과 영혼이 무너지는 것도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반대로 그것을 부수지 않고 신물을 추출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결론은 금방 나온다.
“신물을 부수는 게 아니라 다시 ‘만드는’ 거야.”
“······뭐?”
무슨 소리냐는 반문.
간단한 이치다.
모노리스가 파편으로 분리되어 헬레나의 몸에 스며든 것이라면.
이번엔 반대로 헬레나의 영혼으로부터 편린을 추출해 하나의 모노리스를 재구축한다.
그러면 헬레나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모노리스를 파괴하는 건 편린 상태든, 원본 상태든 상관이 없어.”
“하지만 그런 쓸데없는 과정을 더하면 오히려 술식의 완성도가······! 아! 진짜! 미스터 강 왜 당신은 매번 그런 짓만 골라 하는 거야?!”
기가 차지도 않는다는 듯이 헬레나가 꺼내든 발언에 아르민은 입가를 비틀었다.
“그야 한 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도전해보는 게 재미있잖아?”
그 결과로 소중한 동료를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베스트라고.
쿠우웅!
술식의 흐름과 동조한다.
자, 지금부터는 마력과의 싸움이다.
아르민의 눈에는 수없이도 많고, 또한 짙은 마력의 흐름이 보였다.
흘러라. 또 흘러라.
모노리스의 파편들이 허공으로 떠올라 하나의 형체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순조로워.’
역시나 예상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상. 아르민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었다.
이대로 모노리스의 원본을 작성하는데 성공한다면.
그 길로 다시 파괴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이 과정으로, 끝이다!”
파아앗!!
마지막으로 마력을 때려부어, 신물들을 융합시키려는 그 찰나.
[당신이라면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아스라이 멀리서 아르민의 귓가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쿠웅!
바로 그 순간.
마력이 폭주했다.
< 제96장 – 짓밟아야만 하는 것.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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