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gic is stronger RAW novel - Chapter (202)
내 마법이 더 쎈데-202화(202/203)
< 제99장 – Epilogue : 소중한 기억 >
한낮의 오후.
새의 지저귐도 잦아들고, 어느덧 따사로운 오후 햇살이 내리쬘 무렵.
황궁의 내성에 마련된 정원에서 찻잔을 기울이는 두 명의 여성이 있었다.
달칵.
한 쪽은 우아한 태도로 찻잔을 내려놓은 금발의 소녀.
현 제국의 진정한 주인이자, 대륙의 패자.
미네르바 폰 프리드리히 칼센.
다른 한 쪽은 햇살이 부딪쳐 잔잔히 부딪치는 흑발이 어여쁜 현 궁정 마탑 소속 연구자 민세희였다.
“오늘은 차향이 그윽하네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그대를 위해 특별히 주문한 제품이라네.”
모르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본다면 꼼짝없이 아름다운 처녀들이 다과회를 즐긴다고만 생각할 풍경이었지만.
정작 그녀들 사이로 오가는 대화는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이번에 최종적으로 쿠올 상단과 약조했던 어음국가보장제도의 세부사항이 결정되었네. 빠르면 내달 중으로 협의가 끝나고 제도 도입을 위한 조직 구성에 들어갈 테지.”
“이것으로 제국을 위주로 국제 경제가 재편되겠네요.”
“자네 말로는 화폐···라고 했던가? 제국의 지급 보증을 안전망으로 삼아 타국과 경제를 함께 한다는 발상은 아무리 나라고 해도 놀랐네만. 이것으로 어떤 변화가 올지. 짐작하기가 어렵군.”
“많은 변화가 있겠죠. 좋든 싫든 대륙 전체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딛게 되는 셈이니까요.”
“그걸 잘 헤쳐 나가는 게 우리의 역할이란 건가······.”
그밖에도 민세희는 차분히 탁자 위에 올려놓은 보고서를 읽어가며 입을 열었다.
“서부 황무지에서 세력을 넓힌 클랜에 대한 적랑 기사단의 토벌 작전이 이번 주 내로 마무리된다는 소식이에요.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흡혈귀의 잔당들인 모양이더군요.”
“······내가 보았던 놈들도 거친 놈들이었지.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처지는 군. 그쪽은 적랑에게 맡겨두면 안심할 수 있겠군.”
“그 외에도 상아탑과의 교류회에 대해서······”
등등.
제국의 현안과 대륙의 정세.
그밖에도 여러 정치적 문제 따위를 언급하며 각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과 진행 상황.
나아가서는 해결 후의 뒤처리에 대해 나누는 그들은, 어엿한 대국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대화를 나누었을까.
한 차례의 보고와 업무지시가 끝난 뒤.
“그러고 보면 자네가 이곳에 찾아온 지도······. 벌써 4년이 넘었던가?”
“아······, 생각해보니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쏴아아.
과거를 되돌아보듯, 잠시나마 생각을 고르는 두 사람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지나간다.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나자.
“슬슬 정식으로 황궁에서 일해 볼 생각 없나?”
미네르바는 민세희에게 파격적이 제안을 던져왔다.
“황궁, 말인가요?”
“자네가 가진 지식이나 식견은 나도 놀랄 정도로 뛰어나지 않나. 마탑에서 전문 연구원으로 일해 주는 것도 물론 충분히 고마운 일이네만. 그걸 내정을 보살피는데 활용해줬으면 하네.”
미네르바는 민세희의 재능을 높이 샀다.
칼센 제국의 정신이 무엇이던가.
재능이 있는 자라면 성별, 나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등용하라던 선대의 정신이다.
“원한다면 재상의 자리까지도 내어줄 수 있다네. 그렇지 않아도 마침 볼보트 재상이 쓸만 한 후계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고 있다네.”
아마 볼보트 재상이라면 민세희를 기꺼워할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지만.
민세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고마운 말씀이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남들이라면 눈이 벌게져서 덥석 물었을 제안이거늘. 허어.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민세희는 물끄머리 미네르바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아직은 후계자의 자리라고 해도 재상이 되어달라는 건, 그녀가 자신을 전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리라.
때문에 무작정 거절하는 건, 미네르바에게도 무례를 저지르는 일이 될 테지만.
민세희는 한 곳에 안주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요즘 들어, 제 가슴 속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어요.”
이건 단순히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서 채워지는 공허함이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해야지 채워지는 종류의 감정.
그것은 자기계발일 수도 있고 혹은 평생을 안고 가야할 그런 감정일지도 몰랐지만.
어쨌거나 단순히 재상에 자리에 앉는다고 채워질 것이 아니라는 걸.
민세희는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렇게 저 자신만을 생각하는 앙큼한 여자에게 제안해주신 자리는 과분할 뿐이죠.”
“그런가···. 공허함이라······. 그건 짐도 비슷하군.”
“황제 폐하께서도?”
미네르바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요즘엔 뭔가 빈자리를 곧잘 느낀다네. 무엇이 문제일까. 잡무나 당면한 문제가 많다 해도 우리는 잘 해내고 있을 터인데.”
마치.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네.”
이 아릿한 감각의 원인을 모르겠다.
특히나 최근 들어 그 느낌이 더 강해졌다면서 미네르바는 불만을 토로해왔다.
잠시 말을 아끼던 민세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건 혹시······.”
.
.
.
.
“선배 때문이 아닐까요? 그도 그럴 게 오늘이 돌아오는 날이잖아요?”
난데없는 선언에 몸이 움찔한 미네르바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그게 정말인가? 오늘이라고······?”
말없이 손가락을 세어보던 미네르바의 눈동자가 커졌다.
셈을 해보니 정말 계산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허어, 이런 불찰이. 오늘은 제대로 꾸미지도 못했거늘!”
“후후, 황제 폐하는 평소에도 아름다우시니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
“칭찬의 말은 고맙네만,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지. 미안하네만 먼저 실례하겠네!”
황급히 시종을 불러 몸단장을 하러 떠난 황제를 배웅하며 민세희는 찻잔을 기울었다.
그렇다.
바로 오늘.
내가 가장 존경하고 있는 선배, 아르민 일레인스가 3개월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다.
“······그러고 보니 벌써 1년이나 지났나.”
민세희는 조용히 떠올렸다.
그 날.
선배가 무책임하게도 자신을 버려두고 떠나려고 했을 때.
우리가 마주했던 1년 전의 기적을.
****
“아·········.”
내가 눈을 떴을 때, 모든 게 끝이 났다고 직감했다.
하지만.
– 무엇이?
무엇이 끝이 났단 말인가.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다.
꿈을 꾸고 난 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바로 직전까지 꾸고 있던 꿈을 잊어버린 것처럼.
기억이라는 것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것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는 그때.
“왜 그래? 얼굴이 창백해져서, 무슨 일 있어?”
“······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곳은 식당이었다.
왁자지껄한 소음과 이제 갓 나온 음식에서 풍기는 맛있는 내음.
이국적인 요리들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워지고, 입 안으로 침이 고인다.
“아니, 뭔가 기색이 이상하길래. 음식 맛이 입에 안맞아?”
“앗, 제가 너무 무리하게 이곳 음식을 추천한 걸까요?”
헬레나 씨와 제미니 씨.
두 사람이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맞다.’
천천히 부감하듯 기억이 떠오른다.
오늘 우리는 제미니 씨의 초대로 상아탑을 견학하기 위해 마도 공화국 비발트를 찾았다.
본격적인 견학에 앞서 이렇게 제미니 씨가 마련한 식사 자리에 함께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제미니 씨······와, 어디서 만났지?’
갑자기 떠오른 의문은.
달칵.
갑작스레 식기가 그릇이 부딪힌 소리를 내는 바람에 저 너머로 사라졌다.
“영양 보급, 종료했습니다.”
“응? 이스텔. 입가에 다 묻히고 이게 뭐야?”
헬레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냅킨을 들어 이스텔의 입가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새빨간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였다.
이스텔······. 분명······. 헬레나 씨의 지인이라고······.
하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생각은 미처 이어지기도 전에.
“자, 식사가 전부 끝났다면 상아탑으로 안내해드릴게요.”
제미니의 말을 끝으로 상념이 지워졌다.
****
상아탑의 거리를 걸었다.
와하하 웃으면서 거리를 걷는 일단의 무리들.
복장이 통일된 로브 스타일의 복장인 걸 보면, 저것이 이곳 상아탑의 교복이 되는 것이겠지.
“시설이 제법 본격적인데? 꼭 대학 같은 걸.”
“그러게요.”
“대학······이요? 잘은 모르겠지만. 교학장님께서 말하시길 이런 시설들이 갖춰져야 그나마 비발트 제일의 교육 시설이라는 이름에 먹칠은 안한다고 하시더라구요.”
“하긴 샤오메이라면 영국 대학가도 잘 알고 있으려나. 도술 쪽에서는 천재라고 불리면서 여기저기 입학 초청도 많이 받았을 테니까.”
헬레나와 제미니가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자니.
샤오메이.
그래, 기억났다.
칠영웅 중 한 명이자, 이곳 상아탑의 교학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라고.
······순간 위화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칠, 영웅?”
“응? 칠영웅이 왜?”
“아뇨, 뭔가······.”
뭔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입으로 내뱉기엔 목구멍에서 턱하고 막히는 감각이 있었다.
그것이 뭔지 골몰히 생각할 시간도 없이.
[이번에도 승부야!] [어머, 어제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당해놓고 또 덤비는 건가요?]멀리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아탑 안쪽에 마련된 운동장에서 투닥거리는 무리가 있었다.
– 오오! 엘레노아랑 조슈펠의 대결이다!
– 어제도 막상막하였지?
– 조슈펠 님! 응원하고 있어요!
무리의 중심에 서 있는 건 두 명의 소녀였다.
체구는 조금 작지만, 악을 쓰면서 서 있는 덕에 작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억척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소녀.
그리고 그에 대비되듯 아름다운 은발을 자랑하는 기품 있는 소녀였다.
그녀들을 보자마자 나는 두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엘레노아······와 조슈펠 영애네요.”
“아, 알고 계셨나요?”
“······네?”
제미니의 반문에 도리어 나는 의문성을 토했다.
알 리가 없다.
나는 방금 저 두 사람을 처음으로 봤다.
그런데.
“그보다 교사로서 보고 있을 수만은 없겠어요! 두 사람 다! 그만 두세요! 아무리 친구 사이라고 해도 학내 결투는 정식 인가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제미니가 뒤늦게 호통을 치면서 다가들자.
엘레노아와 조슈펠의 얼굴 위로 ‘들켰다!’ 라는, 악동들이 지을법한 미소가 걸렸다.
“에잇, 이렇게 된 거 종목 변경이다! 조슈펠! 누가 잡히지 않고 마지막까지 도망칠 수 있는지 시합이다!”
“어차피 기숙사로 돌아가면 걸리게 된다구요······라는 말은 예스럽지 않으니 관두겠어요.”
“크흐흐. 그렇게 말해야 내 라이벌이지!”
“라이벌로서 대결에 응해드리죠!”
– 오오오! 시작됐다!
– 제32회 상아탑배 라이벌 대결이다!
학생들의 환호 속에서 시작된 추격전.
“모두! 교사를 놀리면 못써요! ······좋아요. 걸리면 벌점을 두 배로 때릴 테니. 그리 아세요!”
기껏 손님을 모셔왔건만, 제미니는 양해를 구하고 두 사람을 잡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사람도, 쫓는 사람도, 그걸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피어있는 웃음꽃.
이 관계가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이야말로 응당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것처럼.
문득 나는 떠올렸다.
이 광경이야말로.
– 그 사람이 바랐을 광경이라고.
그 사람······?
위화감이 부푼다.
더욱 더 가슴 속에 남아있는 공허함이 커졌다.
끝내 그것은 한없이 부풀어 올라.
주륵.
내 눈가에서 눈물이 되어 흘렀다.
“세희, 너 울어? 아까부터 진짜 왜 그래? 사람 걱정되게.”
헬레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눈가에 흐른 눈물을 닦아냈다.
왜 그러느냐고.
그 질문에 내가 낼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가슴이, 아파서요.”
애달프다.
가슴을 채우는 공허함이 있었다.
있어야할 것이 없어져버렸다.
이 기쁘고 행복하기만 한 장면이, 어째선지 너무나도 슬프다고 느껴졌다.
한 걸음.
왈칵.
걸음을 내딛은 순간, 나는 참지 못하고 멈추어 선 채로 눈물을 쏟았다.
“어쩌지, 의무실이라도 갈래? 이스텔! 이 근처에서······!”
헬레나가 말하는 목소리 대신.
이때 내 머릿속으로 홍수처럼 밀려드는 기억이 있었다.
****
“네가 민세희냐?”
그 날 긴장된 상태로 연구실에 앉아 있을 때였다.
앞으로 만날 사람이 굉장한 사람이라, 자연스럽게 긴장하고 겁먹은 토끼처럼 소파에 앉아있을 때.
그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게 다가와.
“커피 마실래?”
들고 있던 종이컵을 건네주었다.
그걸 받아든 나는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이거······. 마시던 거 아닌가요?”
“응, 그런데?”
오히려 나를 놀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태연하던 모습.
그 표정에 나는 결국 웃어버리고야 말았다.
그러자.
“긴장은 좀 풀렸냐?”
그 사람은 웃었다.
내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친 장난인 걸까.
입가엔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걸고서.
“그래서 날 만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다고? 취향 한 번 특이하네. 뭐, 정식으로 소개할까. ■■■ 이다. 이래봬도 마법에 관해서는 엄청 잘 알고 있거든.”
정말 당연하다는 듯이 튀어나온 자기 자랑에,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실수로 튄 믹스 커피 내용물에.
“으앗, 이거 얼룩지니까 조심해주라!”
호들갑을 떨던 남자.
첫 만남이었다.
그것은 내게 남아있는, 소중한 기억이었다.
아름다워서 절대로 잊어버리고 싶지 않던 기억.
하지만.
‘기억 나지 않아.’
그 얼굴이.
이름이.
목소리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지금 이 순간에도 희미해져만 간다.
하지만 그래도 가슴이 외치고 있었다.
–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
다름 아닌 내가, 당신을 잊고 싶지 않다고.
잊어서는 안 된다고 속삭였다.
누구지?
누구였던 거지?
그렇게 바쁘게 돌아가던 기억의 톱니바퀴가.
덜컥.
멈추었다.
역시나 아무리 떠올려보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 그걸로 된 거야.
귓가에 남는 목소리는, 그것으로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여기까지면 된다.
날 떠올려주려고 한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 보고 있는 풍경으로 돌아가도 괜찮다고.
‘그래, 어쩔 수 없잖아.’
떠오르지 않는 걸, 괴로워하면서까지 가슴에 품을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나는 나 자신을 속였다.
그러니까.
– 기적이란 건 말이야. 일어날 이유가 있다면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거야. 희생을 치르고 그저 스러져야만 한다면 그건 단순한 비극에 지나지 않잖아?
그래선 재미가 없다.
그래서 누가 이득을 본단 말이냐고.
– 즉 기적이라는 게 일어났다면, 그건 당연해서 일어났을 뿐이라는 거지.
그 사람이 해주었던 말.
누구보다 소중했던 사람.
자기가 직접 그렇게 말해놓고.
정작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은 채 스러져버린 사람.
그 사람은.
.
.
.
.
.
“·········선, 배.”
선배.
그래, 선배.
선배였다.
잊어버린 얼굴은 선배의 얼굴이다.
떠오른다.
이걸 어째서 잊어버렸냐고 타박하듯이.
순식간에 떠오르는 파노라마는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해왔던 풍경이었다.
“······선배가 말했잖아요.”
희생을 한 사람은.
자기가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스러져버린 사람이라면 반드시 보답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기적이, 일어나줘야 하지 않겠냐고.
“헬레나 씨.”
“응? 왜? 이제 괜찮아 진거야?”
“마법이 필요해요.”
“······마법? 그야 상아탑이면 뭐든 마법은 가능할 테지만.”
“그런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라진 사람을 찾기 위한 기적이······, 아.”
그때 내 시선이 이스텔과 마주쳤다.
얌전히, 그녀는 기다려주고 있었다.
이 순간만이 찾아오기를.
그래서.
그래서구나.
그래서 이 사람은 내 곁에 있어주는 거구나. 라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스텔 씨. 세계에 접속하는 방법, 알고 계시죠?”
“세계? 무슨 소리야?”
헬레나의 의아하단 목소리는 뒤편으로 제치고서, 이스텔이 눈을 감는다.
이윽고 그녀는 대답했다.
“마스터가 남겨둔 명령 대행 권한이 작동하는 것을 확인. 시스템에 접속하시겠습니까?”
“네.”
전부 지워졌을 테지만.
지워졌다고 해서 전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지우개로 지운 빈칸에는 반드시 공백이 남기 마련이다.
“검색 시작.”
용들이 일평생을 바쳐 검색해왔을 수백억의 생명.
거기엔 태어난 순간도, 살아간 생도, 끝내 명멸하며 스러졌을 죽음조차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선배가 전부 지우고 혼자 사라진 것이라면.
“·········검색 완료. 메모리 데이터베이스에서 데드 섹션을 검출했습니다.”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공간.
“나를 그리로 데려다줘요.”
망설이지 않고 주저 따윈 없이 나는 그녀에게 시스템 속으로 데려달라고 했다.
“스피릿 다이브 시스템 작동. 3······ 2······.”
“세희야? 잠깐 뭘 하려고······?!”
당황해하는 헬레나에게 나는 싱긋 웃고는 말했다.
“기적을 이룰 생각이에요.”
“1. 실행합니다.”
쿠웅!
****
공간이 사라졌다.
한없이 가라앉는다.
어둠 속으로 가라앉은 중에 나는 발견했다.
빈 공간.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세계를 향해 추락한다.
돌아와요.
이대로 혼자만 도망치는 건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 선배에겐 아직 배워야할 게 많이 남아있으니까.
쾌활하게 웃고 평소에는 버릇없이 굴면서도 장난기가 넘치던 그 사람은.
또한 다정한 사람이란 것을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파아앗!
빈 공간에서 차오르는 빛무리를 향해.
– 나는 손을 뻗었다.
“이제는 절대로 놓치지 않아요.”
나는 눈물 젖은 미소를 지었다.
150년의 시간은, 기적을 이루기에 충분하잖아요?
****
조용히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려니, 저 멀리서 다가오는 세 명이 보였다.
“스~승~님! 그 후줄근한 로브 차림은 좀 어떻게 안 되는 거에요? 3개월만에 황제 폐하랑 연인분을 뵙는 거잖아요! 체면을 좀 지켜주세요!”
야단법석을 떠는 엘레노아의 곁에서 조슈펠 영애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런 게 스승님다운 모습이니까요. 아마 다른 분들도 진작 포기하셨겠죠.”
“조슈펠은 나한테는 엄하게 굴면서 스승님만 오냐오냐 해준다니까! 그러니까 맨날 콧대만 높아지고 으쓱거리는 거라고!”
두 사람이 투닥거리고 있는 중심에서.
“내가 무슨 피노키오냐······. 오히려 여기서 갑자기 예의 차린다고 하면 짜게 식을걸.”
그 사람이 있었다.
평소와 다름 없이 난처하다는 듯이 웃으면서도, 귀여운 제자들 앞에 어쩔 수 없이 휘둘리는 그 사람이.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앗, 세희 선배!”
때 마침 날 발견한 엘레노아가 붕붕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선배가 나를 보았다.
오랜 여행을 떠나 드디어 돌아온 소중한 사람.
“어? 기다리고 있었냐? 아직 만날 때까지는 시간이 좀 있을 텐데.”
그래도 제자에게 지적 받은 걸 영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대충이나마 로브의 먼지를 털면서 다가온 그 사람에게 나는 말했다.
“어서오세요. 아르민 선배.”
환영 인사를 듣고서 선배는 역시나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고선.
“다녀왔다는 말은 안할 거야. 너무 진부하잖아.”
“선배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어? 진짜?”
내가 그렇게 단순해 보이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선배였지만.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건 장난스럽게 다시 곁으로 돌아와 주는 사람.
– 그게 내가 기억하고 사랑하는 선배니까.
< 제99장 – Epilogue : 소중한 기억 > 끝
ⓒ 뫄뫄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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