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10_1
09. 물지 않는 착한 강아지
[카, 카타리나 아가씨께서…… 테오도르 황제의 아이와 함께……!]사용인의 말에 벤야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카타리나, 라고 스스로 주장한다는 여자는 어디에 있지?”
“지금 1층 응접실에…….”
벤야민은 사용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층계를 내려갔다.
나도 그의 뒤를 쫓았다.
1층 응접실 앞에는 사용인들이 안쪽을 힐끔거리며 저들끼리 숙덕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벤야민을 발견하고 재빠르게 삼삼오오 흩어졌다.
벤야민이 응접실 안쪽으로 들어서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서 안에 앉은 여자를 노려보았다.
테이블 앞에는 낯익은 여자가 주인처럼 거만하게 앉아 찻잔을 들고 있었다.
“카타리나.”
“벤야민 님, 안녕하세요.”
여자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화사하게 웃었다.
“여긴 왜 나타난 거지?”
“어머, 오랜만에 뵙는 건데 제 안위가 궁금하진 않으신가요?”
벤야민의 냉랭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차마 응접실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방문자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카타리나였다.
4년 전에 실종되었다는 카타리나가, 작은 아이를 안고서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아이는 틀림없이…….
“이것 보세요. 폐하의 아이예요.”
“테오도르 폐하의, 아이라고?”
벤야민의 눈가가 잔뜩 찌푸려졌다.
나는 그들을 따라 카타리나의 옆에 앉아 있는 자그마한 남자아이를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금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아이는 에르빈과 오딜리아보다 조금 더 작았지만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게다가…….
‘테오도르랑 닮았네.’
테오도르와 닮은 구석이라곤 전무하다 싶은 에르빈과 오딜리아와 달리, 카타리나가 데려온 아이는 테오도르를 복제해 낸 듯 똑같이 생겼다.
4년 만에 홀연 사라졌다 나타난 그녀가 ‘이 아이는 황제의 핏줄이노라’ 말하여도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넌 내게 늘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인걸.]문득 내게 애틋한 목소리로 속삭이던 테오도르가 생각이 났다.
[이브, 잠깐만. 그건 오해가…….] [내 말 좀 한 번만 들어 줘 봐. 사실은…….]마치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굴더니.
‘그럼 그렇지. 오해는 무슨.’
그 순간 나는 그를 향해 생겼던 미약한 기대가 다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테오도르가 어떤 남자인지 알면서, 그가 이전처럼 나를 사랑하는 듯이 행동하자 우리 사이에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이라 기대라도 한 건가.
오해 같은 건 없었다.
테오도르는 정말로 카타리나를 사랑했다. 저 아이가 그 증표였다.
애초에 그가 얼마나 헤프고 도덕성 없는 남자인지, 기억을 잃은 그의 옆에서 지켜보지 않았던가.
매일같이 여자를 바꿔 만나고, 카타리나와 약혼식을 하루 앞둔 날에도 내게 치근덕거리며 뻔뻔하게 굴었던 그 모습을 벌써 잊은 것도 아닌데.
‘그때랑 같아. 내가 그의 본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이번에도 깜빡 속아 넘어갔겠지.’
나는 입술 안쪽 살을 꾸욱 깨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마침 카타리나가 나를 발견하고서 알은체를 했다.
“저 애는 이브 로웰린 아닌가요? 저 애가 왜 여기에 있죠?”
“상관 마.”
벤야민이 카타리나로부터 나를 향한 시선을 차단하며 딱딱하게 말했다.
“반가워서 그러지요. 안녕, 이브 로웰린.”
“당장 내 저택에서 꺼…….”
그가 카타리나를 향해 험한 말을 쏟아 내려고 할 때였다.
“가, 가주님! 가주님!”
예의 사용인이 또다시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다.
벤야민이 카타리나를 노려본 채로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왜.”
“이, 이번엔, 폐, 폐, 폐, 폐……!”
“폐?”
“폐하께서!”
“뭐?”
그리고 사용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타리나 페르디난트는 어디에 있지?”
몹시 흥분하고 들뜬 듯한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 안에 얇게 서린 무언가가 쨍강-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와 재회했을 땐 아무 말도 못 하더니…….’
카타리나와 다시 만나는 게 이다지도 기쁜 일이라는 듯, 경쾌하고 빠른 발소리가 꼭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하…….”
마침내 응접실 앞에 당도한 테오도르가 짧은 숨을 터뜨리며 멈추어 섰다.
검은 머리칼이 다소 흐트러진 그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가 나를 발견하고 멈칫하더니, 이내 비식 웃으며 카타리나를 보았다.
“정말이군.”
카타리나를 발견한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사르르 휘었다.
“정말로 카타리나 페르디난트가 돌아왔어.”
그가 반가운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카타리나를 향해.
시공의 공간에서 돌아온 테오도르는 아르민으로부터 브리안을 습격한 자들에 대한 단서를 보고받는 중이었다.
“황궁 마법사들이 마법진을 조사하였는데, 흑마법이 개입한 것 같다고 합니다.”
“흑마법?”
“네.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용의자가 좁혀지긴 했는데…….”
순간 테오도르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렇지만 확증 없이 움직일 순 없었다.
“그래서 신전에 연락을 취하려고 합니다. 신관을 보내 주면 가장 좋겠지만, 흑마법을 감지할 수 있는 수정구라도 보내 준다면…….”
“잠깐.”
테오도르는 미간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흑마법을 감지하는 수정구라면, 내게 하나 있어.”
그는 오래전에 카타리나로부터 받았던 수정구를 떠올렸다.
‘그 망할 여자가 나와 이브를 이간질하려고 한 거였지.’
결과적으로 테오도르는 그 수정구 때문에 이브를 더욱 믿지 못하게 되었지만.
당시 이브가 운반하여 온 수정구는 뚜껑을 열었을 때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것을 보며, 어쩌면 그녀가 흑마법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더욱 멀리하였다.
‘흑마법으로 나를 현혹시키는 거라고 생각했었지.’
지금에 와서야, 그녀가 차라리 저를 현혹이라도 해 주길 애타게 바라는 심정이 되었지만…….
구석의 서랍 안을 뒤진 테오도르가 작은 나무 함을 하나 꺼냈다.
달칵.
나무 함의 뚜껑을 열자, 새까만 수정구가 모습을 보였다.
“……?”
테오도르는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상한 일이다.
흑마법에만 반응한다는 작은 수정구가, 여전히 까맸다.
‘이 방 안에서 흑마법이 자행되기라도 했다는 건가.’
곧바로 생각나는 게 하나 있었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검은 거울을 보았다.
‘테네브리스의 성물……. 그럼 내가 오딜리아와 만난 것도 흑마법 때문에?’
막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하긴 했으나, 정말 흑마법의 힘이란 걸 알고 나니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
‘오딜리아는…… 어떻게 흑마법의 영역에 발을 들인 거지?’
테오도르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왜…….
이때였다.
“폐하!”
황궁 바깥의 소식을 전하는 기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수정구를 보고 잠잠히 생각에 잠긴 테오도르를 대신해 아르민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카타리나 양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카타리나 양이라면…… 4년 전 사라졌던 그 여자 말이냐?”
“네, 그…… 카타리나 양이 페르디난트 저택에 찾아왔다고……. 폐하의 아이를 데리고…….”
순간 테오도르가 손에 들고 있던 수정구를 툭 떨어뜨렸다.
“뭐?”
돌아보는 테오도르의 눈동자에 위험한 빛깔이 돌았다.
“누가, 돌아왔다고?”
“폐하의 약혼녀셨던 카타리나 양이…….”
“…….”
테오도르는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숨 막힐 것 같은 침묵에 아르민과 기사는 그의 눈치만 힐긋힐긋 살폈다.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이브를 괴롭혔던 그 여자.”
카타리나의 이름을 느릿하게 곱씹는 그의 입꼬리가 히죽 말려 올라갔다.
“이브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제 발로 찾아왔잖아.”
이윽고 아주 천천히, 그의 얼굴 위로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어둑어둑한 감옥 안.
‘이게…… 무슨 일이야?’
카타리나는 갑작스럽게 난입한 테오도르의 병사들에게 붙들려 황궁 지하 감옥에 갇혀 버렸다.
기억을 되찾은 테오도르 황제가 순순히 저를 받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한마디 말도 섞어 보지 못한 채 감옥에 가둬 버릴 줄은 몰랐다.
‘젠장, 그 또라이 황제.’
계획에 상당히 큰 차질이 생겨 버렸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저의 볼품없는 마력으로 만들어 낸 허수아비는 아직 들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4년 전, 벤야민에게 감금당하였던 카타리나는 홀연히 나타난 ‘그분’의 도움으로 저택을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카타리나는 ‘그분’이 그릇에 매여 있는 동안 그분을 대신해 그분의 부활을 위해 움직여야 했다.
물론 그녀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은 아니었다.
[살고 싶어?] [좋아, 그럼 거래를 하지.]페르디난트를 빠져나가던 날, 그녀의 영혼 위로 새겨진 그와의 계약이 그녀를 옭아맸다.
‘그분’과의 계약은 한때 그녀가 이브 로웰린을 묶어 두었던 주종 계약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악랄하였다.
‘그분’의 그릇은 과거 마르가라테 황후와 루돌프 페르디난트가 순수한 영혼에 ‘그분’의 영혼 조각을 담아 만들어 낸 걸작이었다.
그릇을 유지하기 위해 제물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분’의 영혼이 눈을 뜬 이후로는 더 많은 제물이 필요해졌다.
브리힘 신의 가호를 받은 자들의 생명은 ‘그분’의 그릇을 유지하기 위한 좋은 제물이었다.
카타리나는 ‘그분’의 종이 되어 그릇을 유지하기 위해 제물을 모아야 했다.
매일 밤, ‘그분’의 처소에서 희생된 제물들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죽은 이의 시체가 나왔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분’은 단순한 그릇의 유지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더 강하고 완벽한 제물이 필요해. 나를 이 ‘그릇’ 밖으로 깨워 낼.]그리고 며칠 전, ‘그분’이 카타리나를 불러 언제 들어도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기쁘게 말했다.
[드디어 나를 깨울 가장 완벽한 제물을 찾았다.]카타리나는 ‘그분’의 명령대로, 가짜 아이를 만들어 페르디난트를 찾아갔다.
하필 그곳에 이브 로웰린이 같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곧바로 찾아온 테오도르가 저를 이곳에 가둘 줄은 더 몰랐다.
갑작스러운 테오도르의 방문에 놀라긴 했지만, 카타리나는 애써 태연하게 활짝 웃으며 오랜만에 재회한 연인을 연기했다.
[테오!]본래라면 가짜 아이를 데리고 황궁을 찾아갈 예정이었으나, 이렇게 된 이상 그가 자신의 연기를 받아 주길 바랄 뿐이었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이것 보세요, 나 테오의 아이를…….] [붙잡아.]그러나 테오도르는 그녀와의 연기를 이어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카타리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르르 몰려온 병사들이 그녀를 포박했다.
[테, 테오? 테오, 잠시만 저의 이야기를 먼저…….] [혀를 뽑아 버리기 전에 내 이름을 감히 그딴 식으로 부르는 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테오도르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카타리나를 노려보며 협박했다.
카타리나는 히끅 숨을 삼키며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그사이, 황궁 병사들에게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암담해진 카타리나가 자신을 가둔 쇠창살을 망연한 얼굴로 쳐다볼 때였다.
차박, 차박, 차박, 차박-
축축한 감옥 안에 섬뜩한 발소리가 울렸다.
정작 발소리의 주인은 몹시 산뜻한 기분이었다.
테오도르는 카타리나를 가둔 옥사의 쇠창살 앞에서 멈추었다.
그가 창살 너머 오들오들 떨고 있는 카타리나를 내려다보며 제 턱 끝을 쓸었다.
“이런, 이런.”
잔뜩 신이 난, 즐거운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이브에게 바칠 나의 선물이, 제 발로 찾아오다니.”
애써 평온한 척해 보려 하여도, 슬금슬금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릴 수 없었다.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제가 이브에게 저지른 죄악들의 원흉.
물론 기억을 잃은 후 그녀를 냉대했던 것은 저 자신이 짊어져야 할 업보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저 여자가 저의 이브에게 저지른 짓들이 옅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 기간, 그 빌어먹을 주종 문서를 갖고서 어린 이브를 괴롭힌 여자였다.
다시 만난 그녀의 몸에 있던 수많은 상처들은 모두 저 여자가 만든 것이었다.
제가 기억을 잃은 동안에는 저와 그녀의 사이를 가르기 위해 이간질을 하고, 더욱 악랄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힌 여자였다.
[어찌 되었든 조심하세요. 흑마법과 관련이 있는 데다가, 무려 벤야민의 숨은 연인이니…….]테오도르는 제가 이브를 끊임없이 의심하도록 만들던 카타리나의 교활한 속삭임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했다.
그리고 부러 이브의 앞에서 자신과의 관계를 과시하며, 그녀를 괴롭힌 것 또한.
[테오, 나 저 머리핀이 갖고 싶어요. 내게 주세요, 네?] [이브 경이 저를 호위해 주면 좋지 않을까요?] [이브 경이 저를 다치게 했어요. 당신의 약혼녀로서 이브 경을 징벌해도 될까요?]기억을 잃었을 적의 테오도르는 이브가 자신을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카타리나의 그러한 말과 행동이 그녀를 더욱 아프게 하리란 것 또한 알았다.
제가 치유한 그녀의 팔에 또다시 상처를 남긴 것도 카타리나 저 여자였으며, 눈 내리는 겨울 그녀를 몇 시간 동안 세워 두어 아프게 한 것도 저 여자였다.
그러니 테오도르에게 카타리나는 죽여 마땅한 여자였으나…….
카타리나를 향한 증오를 불태울수록 으레 함께 타오르는 것은 과거의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제아무리 이보네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라지만, 겨우 저딴 여자의 손을 잡고서 그녀를 상처 준 과거의 제 자신 또한 죽어 마땅한 남자였다.
이브가 저를 믿어 주지 않는 것 또한 당연했다.
그녀는 카타리나와의 관계는 모두 오해라는 저의 말을 믿지 않을뿐더러, 끝까지 들어 주지도 않았다.
[내가 이야기 한 번만 하자고 했을 때, 넌 어떻게 했었어?]그 냉담한 한마디에 테오도르는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감히 그녀의 앞에서 그 너저분하고 비루한 변명이나마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오도르는 카타리나가 그렇게 실종된 것이 더욱 안타까웠다.
카타리나가 살아 있었더라면, 그녀를 죽여 그녀와의 관계가 거짓이며 오해였다는 것을 알릴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그 카타리나가 이렇게 제 발로 돌아오다니!
“네 목을 베어서 이브에게 들고 가면, 내 말을 믿어 줄지도 몰라.”
예상하지 못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뻤다.
테오도르는 창살 너머의 카타리나를 응시하며 희번덕 눈을 빛냈다.
테오도르는 도무지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설령 이브가 여전히 저를 믿어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신을 그렇게 괴롭힌 여자의 목을 바치면 분명 기뻐할 것이다.
그녀가 아주 조금이나마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테오도르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카타리나 페르디난트는 그녀를 위한 저의 제물이 되어야 했다.
테오도르가 가볍게 손끝을 까딱이자, 그 주위로 황금색 빛무리가 피어났다.
와장창!
창살 쪽으로 서서히 옮겨 간 빛무리가 자물쇠를 깨부쉈다.
닫힌 창살이 끼이익- 거친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테오도르는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폐, 폐하……!”
카타리나는 제게 다가오는 테오도르를 피해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잠, 잠깐만요, 폐하. 저, 저는 폐하의 아이를……!”
“아이?”
“폐, 폐하도 아이가 필요하…… 꺄아악!”
쿠과과과광-!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옆으로 떨어진 빛무리가 강한 폭발음을 내었다.
카타리나는 부서진 바닥을 보며 덜덜 떨었다.
“그래, 네가 데려온 내 ‘아이’라는 그것.”
테오도르는 페르디난트의 응접실에 얌전히 앉아 있던 그 ‘가짜 아이’를 떠올리며 비죽 웃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동자는 퍽 저와 비슷한 모양으로 흉내를 내고 있었으나…….
흡사 진짜 사람처럼 잘 빚어진 그것에게서 더러운 냄새가 났다.
마치 오래전 저를 떠나기 직전의 이브가 내뿜었던 벤야민 페르디난트의 냄새와 비슷한, 불쾌하고 축축하고 음습한 내음이었다.
카타리나와 당연히 아무런 관계도 없었으니, 그것 또한 제 아이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저와 비슷한 외양 특징을 지닌 세 살가량의 아이를 물색하여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가짜.
그것은 사람처럼 말하고 움직이는, 가짜였다.
“항상 궁금했지. 이브가 어떻게 나를 속이고 도망친 건지.”
마침내 그 실마리를 움켜쥔 테오도르가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네 덕에 확실히 알게 됐어.”
자박, 자박.
카타리나의 바로 앞까지 걸어간 테오도르가 느릿하게 몸을 숙이며 겁에 질린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페르디난트의 것들이 흑마법에 손을 대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흠칫.
흑마법, 이라는 말에 카타리나가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렸다.
“강한 신성력이 있으면, 흑마법의 술식을 찾아낼 수 있다고. 네가 알려 줬었지.”
강한 신성력을 가진 자는 흑마법이 자행된 장소에서 그 술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과거 카타리나가 페르디난트의 안뜰에 살인 마법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과 함께 알려 준 것이었다.
그 때문에 테오도르는 더욱더 그 장소에 집착했었다.
제가 이보네의 종적이 끊긴 그곳에 가기만 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수 있을 거라고.
결과적으로 그것에 집착한 탓에 이브를 잃어야 했지만…….
“페르디난트의 안뜰에서는 그 빌어먹을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4년 전에 모두 불태워 버려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지만.”
막상 페르디난트의 안뜰에 발을 들였을 때, 불타 없어진 그 공간에서 테오도르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살인 마법의 흔적도, 그리고 그곳에서 자행되었을 다른 흑마법들의 술식 또한…….
“이번에는 내가 잃어야 했던 것들을 모두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테오도르가 사르륵 두 눈을 휘며 카타리나의 하관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내내 궁금했는데 말이야.”
“흐윽…….”
고통스러운 신음이 카타리나의 잇새로 흘러나왔으나,
“참 이상하잖아.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 그 빌어먹을 저택에서 분명 너를 보았고, 네 목숨을 대가로 거래까지 했었는데.”
테오도르는 오래전, 이브를 페르디난트에서 꺼내 올 당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당시 카타리나는 저로 인해 목이 잘릴 뻔했고, 그 두려움에 결국 주종 문서를 넘기기까지 했다.
“그런데 너는 기억을 잃은 내게 다시 찾아와 혼담을 이야기했지. 대담하게도.”
테오도르는 제게 거래를 하자던 카타리나의 그 미묘한 표정을 떠올렸다.
“마치 내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 같았어. 내가 내 손으로 이브를 그곳에서 데려간 걸 네가 모를 리 없는데.”
기억을 되찾은 이후, 미약한 의문이 들었다.
저로 인해 목이 잘릴 뻔했으면서, 무슨 대범함으로 다시 황궁을 찾아와 혼담을 넣은 걸까?
제가 기억을 잃은 사실을 알기라도 한 걸까?
그건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아르민과 황실 기사들, 그리고 저를 진찰한 의사를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을 곱씹으면, 으레 따라오는 의문이 하나 더 있었다.
“내 기억에 장난질을 한 것도 너지?”
어쩌면 제 기억을 그렇게 엉망으로 만든 것 또한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이 교활한 여자의 짓거리가 아닐까.
“네가 이브를 통해서 내게 보낸 까맣게 변한 그 수정구. 사실은 이브가 아니라 나한테 반응했던 거야.”
그 끝에 그가 도달한 것은 단 하나의 결론이었다.
“네놈들이 내 머리통에 그 빌어먹을 흑마법으로 장난질을 쳐 놨으니까.”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페르디난트의 것들이, 제 기억에 몹쓸 짓거리를 벌였다고.
* * *
나는 달리는 마차의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로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나는 느리게 미간을 찌푸리며 조금 전의 상황을 정리해 나갔다.
내내 차 한잔 마시자는 벤야민의 초대에도 시간을 낼 틈이 없었다.
제국으로 돌아온 직후로 줄곧 바빴기 때문이다.
브리안 오빠가 도와주긴 했지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채 덜컥 맡게 된 가주직은 나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나의 체르니시아를 위한 일이었다.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기쁨과 보람이 앞섰다.
어느 정도 주변이 정리되면 벤야민을 찾아가기로 약속했으나 시간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 오늘 함께한 마물 토벌을 마치고, 그를 만나러 간 참이었다.
모처럼 한가하게 차를 홀짝이며 소소한 대화를 이어 가던 중, 카타리나가 찾아왔다.
테오도르를 닮은, 테오도르의 아이와 함께.
그리고 연달아 다급히 찾아온 테오도르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타리나를 다시 만나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테오도르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신이 나서 카타리나를 포박했다.
[당장 저 여자를 황궁의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 [네, 폐하.]황제의 병사들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카타리나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카타리나의 처절한 비명 소리만이 그 자리에 맴돌았다.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녀가 떠나간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테오도르가 몹시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브.]그는 마치 칭찬해 달라는 듯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내게 다가왔다.
[내가 그랬잖아. 저 여자와 난 아무 사이 아니라고, 오해가 있는 거라고.] [오해가 있었다고?]나는 두 눈을 가늘게 좁혀 뜨며 그를 응시했다.
[응, 다 오해야. 그러니까 내가 저 여자를 잡으러 온 거지. 내 약혼녀 행세를 하며 너를 괴롭힌 못된 여자니까.] [무슨 소리야. 약혼녀 행세가 아니라, 분명 너는 그 여자를…….] [아니야. 그거 다 오해고, 거짓이었어. 그게 아니면 내가 왜 저 여자를 감옥에 가두겠어.] […….]나는 아주 잠시 그의 말에 흔들렸다.
그렇지만 테오도르는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기억을 잃은 그의 옆에서, 그가 얼마나 사악한 인성을 지닌 남자였는지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내가 그 사실을 상기하며 다시금 표정을 굳힐 때였다.
[아뺘.]자그마한 아이가 테오도르의 바지 자락을 붙잡으며 흔들었다.
카타리나가 두고 간 아이였다.
[뭐야?] [아뺘아.]순간 테오도르의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아이는 테오도르의 다리에 와락 매달리며 고개를 비비적거렸다.
[젠장, 떨어져. 이 징그러운 건 또 뭐야?] [아뺘아. 아뺘.] [내가 왜 네놈의…… 잠깐, 이브! 어디 가, 이브? 이브!]그리고 그 장면을 목도한 나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이브……!]뒤에서 나를 부르는 테오도르의 처절한 목소리가 들렸으나, 외면했다.
[이브, 지금 가는 거야?] [응, 다시 연락할게.] [……그래.]벤야민 또한 평화롭던 티타임이 망가졌음을 깨닫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벤야민에게만 인사를 한 채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줄곧 지금의 상태였다.
‘오해는 무슨.’
말아 쥔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뭐? 아빠?’
에르빈과 오딜리아에게는 한 번도 허락된 적 없는 그 이름에, 불쾌함이 거세졌다.
테오도르는 어떻게든 카타리나와의 관계를 부정하려고 했으나, 그를 향해 ‘아뺘’ 하고 부르던 그 아기가 두 사람의 관계를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였으며…….
‘오해고, 거짓이었다고? 그 여자가 약혼녀 행세를 한 거라고?’
카타리나가 황제의 약혼녀 행세를 하며 기고만장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테오도르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의 말마따나 카타리나와의 관계가 거짓이었다 하더라도…….
‘그 여자랑 그 짓을 한 거잖아. 더러운 새끼.’
나는 테오도르가 카타리나와 입 맞추던 것을 보았다.
그가 그 여자와 그 이상의 짓거릴 하는 건 본 적이 없지만, 그는 카타리나의 것이 분명한 흔적을 달고서 그녀가 제 아이를 가졌음을 내게 말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