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10_2
다시 만난 그는 카타리나와의 관계가 거짓이라 했다.
어찌나 애절하고 처량 맞게 읍소하던지 아주 잠시 그 말이 정말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할 뻔했다.
오늘, 카타리나가 그를 닮은 아이를 데리고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면.
테오도르를 향해 ‘아뺘’ 하고 부르며 매달리던 아이는 누가 봐도 그의 아이였다.
어쩌면 이제 와 변덕이 인 건지도 모른다.
카타리나에게 흥미가 식어서 뒤늦게 내게 이러는 건지도 모르지.
테오도르는 카타리나와의 약혼식 직전까지도 내게 몹쓸 추파를 던지던 쓰레기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와, 그럼 이거…… 제 아이를 데리고 나타난 여자를 모른 척하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그가 더더욱 몹쓸 놈처럼 느껴졌다.
내가 카타리나를 싫어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말이다.
‘더러운 바람둥이 새끼. 책임감도 없는 역겨운 쓰레기 새끼. 어디서 그런 거짓말로 내 마음을 돌리려고.’
나는 잠시나마 그 괘씸한 쓰레기의 말에 귀를 기울일 뻔하였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도착했습니다, 가주님.”
어느덧 저택의 정문을 통과한 마차가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마차에서 내리는데, 이상한 냄새가 났다.
‘음……?’
미묘한 탄 내음이 공기 중에 섞여 있었다.
불길한 느낌에 냄새가 나는 곳을 향해 뛰어가자, 불타 그을린 정원이 나를 반겼다.
“이게 무슨…….”
당혹스러워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자, 뒷정리를 하고 있던 브리안이 날 보고 다가왔다.
“왔어, 이보네?”
“대체 무슨 일이야, 오빠?”
“아, 그게…….”
브리안이 조금 수척해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이 정원에서 놀다가 실수로 불을 낸 모양이야. 다행히 로라가 곧바로 발견해서 큰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는데, 아무래도 뒤처리할 게 많아서.”
“에르와 리아가 실수로 불을 냈다고?”
아르벨라에서 지내며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덜컥 이는 걱정과 함께,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아이들만 두고 나가서…….”
에르와 리아는 이제 겨우 세 살이었다.
“네 잘못이 아니니 자책할 필요는 없어. 불의의 사고였으니까. 자책할 시간은 더 없고.”
브리안이 달래 주었으나, 놀란 가슴이 진정되질 않았다.
“리아가 특히 놀란 것 같아. 불길을 진압한 직후에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거든. 그러니 네가 가서 달래 줘야지, 엄마니까.”
“응.”
나는 서둘러 몸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로라! 아이들은?”
“2층 끝 방에 계셔요.”
로라가 알려 준 대로 2층 끝 방에 도착하자, 살짝 열린 문 틈 너머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아 어케.(리아 어떡해.)”
“갠차나, 리아.”
“어몬니 이제 리아가 망가뜨린 정원 보구 화나실 거야…….”
“어모니 화 안 나실 거야.”
“에르가 구거 어케 알아!(에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모니가 화내면 에르가 혼내 주께.”
“우으으…….”
잠잠히 두 아이의 대화를 듣던 나는 참지 못하고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모아 세운 무릎 위로 고개를 파묻은 채 웅얼거리던 오딜리아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
“어, 어모니, 오셨어요……!”
아무 말도 못 하는 오딜리아를 대신해 에르빈이 인사를 했다.
“에르, 리아.”
차분한 목소리로 부르자, 리아가 움찔 몸을 떨었다.
“리아가 실수로 구런 거예요. 구러니까 화내면 안 돼요.”
에르는 리아를 보호하려는 듯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보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괜찮니, 리아? 많이 놀라진 않았어?”
다정한 목소리로 묻자 오딜리아가 힐끔 내 눈치를 보았다.
“어몬니이…… 화 안 났어요?”
“그래.”
피식 웃으며 답하자 오딜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내 그 커다랗고 올망졸망한 눈동자 위로 그렁그렁한 눈물이 차올랐다.
“정말루요?”
“응.”
“지쨔루요(진짜로요)?”
“그럼.”
“우으…… 우으으…….”
그러자 울먹울먹하던 오딜리아가 으아앙, 울음을 터뜨리며 내게 달려와 안겼다.
“우에엥, 잘몬태써요(잘못했어요), 어몬니이…….”
“괜찮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나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다친 곳은 없는지 다시 한번 세심하게 살폈다.
“리아가 이, 일부러 불낸 거 아니구…… 실수로…… 불 뿜따가…….”
불 뿜는 다람쥐 놀이를 하다가 실수로 정말 불을 내기라도 한 걸까?
‘앞으로는 조심하라고 알려 줘야겠어. 오늘은 일단 달래 준 뒤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머니는 우리 리아와 에르가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뻐.”
“조금 아야 했는데, 에르가 호 해 줬어요.”
오딜리아가 손가락을 꾸물꾸물 내밀며 말했다.
“어몬니도 아야 하면 에르한테 호 해 달라고 하세요. 구럼 한나도 안 아파요.”
“웅웅, 에르가 호 해 줬어! 에르는 의사야!”
옆에서 에르빈이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가볍게 웃으며 에르의 머리를 함께 쓰다듬어 주던 나는 그 표정에 멈칫했다.
조금 전에 카타리나를 포박하여 감옥에 보내고서 뿌듯해하던 테오도르의 표정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그 잔상을 지워 내며 에르를 향해 싱긋 웃었다.
“우리 에르가 리아를 지켜 준 거야?”
“웅! 에르가 리아 지켜 준 거예요!”
“우리 에르, 대단하네.”
“에헤헤.”
어느덧 방 안의 분위기가 밝아졌다.
울적한 기운을 떨쳐 낸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내 옆에서 꼬물거리며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에르가 요로케 호오 하몬…….(에르가 이렇게 호오 하면…….)”
리아는 에르의 흉내를 내며 손가락에 호오- 하고 입김을 불었다.
“반짝하몬서(반짝하면서) 아야 한 거 다 나아요!”
아이다운 그 상상력이 귀여워서 나는 박수를 치며 감탄하는 시늉을 했다.
“우와, 신기해라!”
“구니까 어모니도 아야 하면 에르한테 말해 줘야 해요!”
“그래, 그래, 에르. 아픈 게 생기면 꼭 에르에게 부탁할게.”
그 말이 기뻤던지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에르빈의 잇새로 터져 나왔다.
아이들의 수다는 해가 기울 때까지 이어지다가, 로라가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고서야 아쉽게 끝이 났다.
* * *
꼬박 하룻밤을 새운 심문 끝에 카타리나는 결국 실토했다.
“다, 다 벤야민이 시킨 짓이에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을, 테오도르는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벤야민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를 죽이겠다고 협박했어요. 그래서, 그래서 저는 어쩔 수 없이…….”
“그러니까.”
질질 이어지는 그녀의 변명을, 테오도르가 나직이 끊어 냈다.
“너랑 벤야민 페르디난트, 둘이서 공모를 해서 내 기억에 손을 댔다?”
“고, 공모가 아니라, 그, 그자가 억지로 시켜서……”
“하하!”
돌연 광포한 웃음소리가 테오도르의 잇새로 터져 나왔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미친 자처럼 웃음을 터뜨리던 테오도르가, 일순 뚝- 하고 웃음을 그쳤다.
“내 기억에 그따위 장난질을 하고, 나와 이브를 이간질한 게.”
테오도르는 느리게 손을 아래로 내렸다.
“모두 네놈들 짓이었다고.”
푸석해진 얼굴 위로 흉흉한 안광이 빛났다.
밤을 새웠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고 날카로웠다.
“젠장. 찢어 죽일 페르디난트. 말려 죽일 페르디난트. 비틀어 죽일 페르디난트. 그 개잡것들이.”
차마 형용하기 어려운 거친 욕설들이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테오도르는 제가 고작 흑마법 따위에 당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 씹어 삼켜도 부족할 페르디난트를 멸족시켜 버리고만 싶었다.
죽이고, 죽이고, 죽여도 그간 제가 느껴야 했던 고통을 상쇄시키지 못할 것이다.
당연했다.
그들을 죽인다 한들, 이브의 상처받은 과거는 보상받지 못할 테니까.
“감히 황제의 정신에 손을 댔으니, 명분은 충분할 테지.”
벤야민 페르디난트, 그 음침한 새끼.
이브를 보는 그 작자의 눈이 수상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이브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제게서 떨어뜨리고자 할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이브는 페르디난트에서도 고립된 채 자랐었지. 어쩌면, 그것도…….’
테오도르는 오래전부터 정말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브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운 애에게 친구가 벤야민뿐이라는 게.
황궁에서 제 측근 기사로 지낼 적에도, 동료들과 궁정인들의 애정 어린 시선을 담뿍 받던 그녀가 아닌가.
이따금씩 테오도르는 그녀를 향한 시선들에 시샘이 나면서도, 이처럼 사랑스러운 이가 제 연인이라는 사실에 뿌듯할 정도였다.
‘그자가 이브에게 다른 친구가 생기는 걸 막은 거야.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돼.’
그녀가 마음을 다치고 상처를 받아도, 제게만 돌아가면 상관없다는 건가?
‘뭐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이 다 있어.’
테오도르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음침한 그의 작태에 치를 떨었다.
비록 저 또한 타인에게 한마디 얹을 수 없는 무인성의 쓰레기였으나, 벤야민에 비하면 스스로가 퍽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당장 이브에게 알려 줘야지. 그딴 쓰레기 같은 놈을 친구라고…….’
당장 하루 전만 해도 이브는 그 쓰레기를 친구랍시고 만나러 가지 않았던가.
순진한 이브가 벤야민에게 속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속에서 치솟았다.
“폐, 폐하.”
심상찮은 그 기세에, 그러잖아도 밤새 이어진 심문으로 잔뜩 겁먹은 카타리나가 윗니와 아랫니를 딱딱 부딪치며 애원했다.
“부디 베, 벤야민만 벌하시고, 저는 사, 살, 살, 살려…….”
테오도르는 그런 카타리나를 쓰레기 보듯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내 기억을 잃게 만든 건 모두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종용한 거고, 넌 잘못이 없다?”
“네, 네, 저는, 저는 억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카타리나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울먹였다.
그녀를 응시하는 테오도르의 두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너, 내 약혼녀 행세를 하며 이브를 괴롭혔잖아.”
“그, 그건…… 폐, 폐하와의 거래를 위해…….”
“거래?”
가당치도 않은 소리에 테오도르가 픽,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억을 잃은 나 새끼가 너와 나눈 거래 속에 이브를 괴롭히는 내용은 없었어. 순전히 네 즐거움을 위한 행동들이었지.”
그의 말에 카타리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가셨다.
물론 그가 준 약혼녀의 지위를 이용해 이브를 괴롭히긴 했지만, 그의 눈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교묘하게 이루어졌었다.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테오도르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가엾다는 생각은 당연하게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나와 이브의 사이를 이간질하기까지 했잖아?”
“그, 그것도 벤야민이…….”
“네가 나한테 그랬었지. 이브 로웰린은 흑마법과 관련이 있으니 멀리하라고.”
카타리나가 이브를 통해 보낸 수정구는 나무 함을 연 순간부터 새까맸었다.
저 자신이 흑마법에 당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 같은 공간에 있던 이브를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실 흑마법에 물든 것은 등신 같은 제 기억이었고, 그것을 알지 못한 저는 그 독사처럼 교묘한 이간질에 넘어가 이브를 더욱 멀리했다.
“그, 그게…… 그게…….”
카타리나가 앞니를 딱딱 부딪치며 몸을 떨었다.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나의 이브의 몸에 상처를 냈어.”
우드득-
어금니가 거칠게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타리나는 공포에 질린 낯으로 움찔 몸을 떨었다.
“폐, 폐하께서…… 폐하께서도 허락하셨던 거잖아요.”
그 와중에도 애써 잘못을 저만의 것이 아니라 변명하는 게 참 뻔뻔스러웠다.
“그래. 그건 빌어먹을 과거의 나 새끼가 묵인한 거였지.”
테오도르가 순순히 인정하듯 말하자, 움츠러들었던 카타리나의 어깨에 힘이 조금 빠졌다.
그러나 안도도 잠시.
“그런데 그거 말고도, 아주 오랫동안 악의를 담아 이브를 괴롭혔잖아. 그 빌어먹을 주종 문서를 믿고서.”
이어 흘러나온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그녀를 씹어 죽일 듯 매섭게 옭아맸다.
“그걸 어떻……! 아, 아니에요, 저는 억울…….”
콰아앙-!
“아아악!”
카타리나가 무어라 변명을 내뱉으려 하기 무섭게, 그녀의 뺨을 스치며 폭발음이 일어났다.
이미 너덜너덜해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그녀의 뒤편 벽면이 한 번 더 무너졌다.
“억울해?”
“아, 아아, 아아아…….”
카타리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도리질을 했다.
“자, 잘못했습니다, 폐하. 잘못, 잘못…….”
바닥에 엎어져 침을 뚝뚝 흘리며 같은 말만 반복하는 카타리나의 위로,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이 떨어졌다.
테오도르는 고작 저런 여자가 자신의 이브를 그렇게 악랄하게 괴롭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저 여자가 이브를 괴롭힐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저의 과오였기에, 카타리나를 향한 분노가 거세어질수록 제 자신을 향한 혐오도 함께 커져 갔다.
“살고 싶어?”
“사, 살려…….”
“그럼 내 질문에 똑바로 대답해.”
물론 살려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카타리나를 왜 살려 준단 말인가? 이브를 위해 바칠 선물인데.
그렇지만 테오도르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이 정도 거짓말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브가 짐작하는 것과 같이.
“왜 다시 나타났지?”
“……!”
“4년 전에 사라졌다가 어제 갑자기 다시 나타났잖아. 그 사람도 아닌 것을 데리고서.”
추궁하는 목소리에 의문이 가득 담겨 있었다.
벤야민과 공모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페르디난트 저택에서 본 그 또한 카타리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듯 보였으니까.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카타리나를 향해, 테오도르가 달콤한 미소를 보였다.
“솔직하게 답하면 널 살려 줄게. 황제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그, 그건…….”
이윽고, 카타리나가 무언가 대답하기 위해 입을 달싹였다.
그리고 그 순간.
“아……!”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아, 아아……!”
그녀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는 테오도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보고 공포에 질려 갔다.
그러다가 그만.
“꺄아아아아아아악!”
카타리나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경련을 일으키다 옆으로 툭 쓰러졌다.
“무슨……?”
당황한 테오도르가 쓰러진 그녀의 몸을 내려다봤다.
‘뭐지? 벤야민의 짓인가?’
잠시 그를 의심하던 테오도르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놈의 짓은 아니야.’
테오도르는 주머니에서 수정구를 꺼내 보았다.
수정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흑마법…….”
틀림없는 흑마법이었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성력을 동원하여 흑마법을 감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의 주위 어디에서도 술식은 발견되지 않았…….
“잠깐.”
그의 성력이 무언가를 감지했다.
테오도르는 멈칫하며 불길한 기운이 넘실대는 곳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
“윽…….”
술식을 찾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집중하였으나, 그럴수록 반동이 일어나 그의 몸에 무리를 주었다. 그러다 결국.
와장창-!
새까맣게 달아오른 수정구가 쨍그랑 깨지며, 그 파편이 그의 손에 깊은 생채기를 냈다.
뚝, 뚝 떨어지는 핏물을 응시하며 테오도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뭐지, 이건……?”
처음이었다.
저의 성력마저 튕겨 나온 것은.
“누군가…… 저 여자를 이용해서 일을 꾸미고 있어.”
문득 오싹한 기운과 함께 강한 희열감이 차올랐다.
“벤야민 페르디난트보다 더한 놈이.”
처음으로 적수를 마주친 듯한 감각에 전신이 짜릿했다.
카타리나가 쓰러진 탓에, 더 이상 심문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테오도르는 퀴퀴한 지하 감옥에서 나와 걸었다.
밤새 그 여자를 심문하느라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을 참이었다.
그러다 그는 황제궁의 복도에 얌전히 서서 자신을 기다리는 작은 남자아이를 발견했다.
“아뺘.”
검은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동자.
퍽 그를 흉내 낸 것이 테오도르를 보며 황금색 눈동자를 사르르 휘었다.
동시에 풍기는 역겨운 내음에 테오도르는 얼굴을 왈각 일그러뜨렸다.
“아뺘아.”
그 인간 같지도 않은 것이 테오도르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테오도르는 재빠르게 성력을 운용하여 그것을 허공으로 붕 띄웠다.
그러자 황금색 빛무리에 목덜미가 붙잡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그것이 팔과 다리를 축 늘어뜨렸다.
그것에게서 느껴지는 악취는 카타리나의 냄새였다.
과거 이브에게서도, 아니, 이브라고 생각했던 그것에게서도 꼭 이런 비슷한 냄새가 났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이브를 흉내 낸 그것이 풍기던 것은 카타리나가 아닌 벤야민의 냄새였다는 것이었다.
마치 그자와 한 몸이라도 된 것 같던 그 짙은 냄새에 울컥 화를 토해 냈던 기억이 났다.
그녀가 벤야민의 냄새를 묻힌 게 싫어서.
그녀에게서 벤야민의 냄새가 나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보통 그만큼이나 냄새를 가득 묻히는 방법은…… 그런 것들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이브가 아니었고, 벤야민이 어둠의 술식으로 만들어 낸 거짓된 생명체라 그의 냄새가 잔뜩 나는 것이었다.
테오도르는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참 다행이지, 이브. 네가 그 개 같은 놈과 아무런 관계가 아니란 걸 알아서.”
힐끗 고개를 들어 올린 그가 허공에 늘어진 가짜 아기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얼핏 완벽한 사람을 흉내 내고 있지만, 하나씩 뜯어보면 엉성하고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아뺘, 아뺘아아아.”
할 줄 아는 말도 하나밖에 없었고, 삐걱삐걱 움직이는 팔다리도 어설펐다.
벤야민이 만들었던 가짜 이브가 그녀를 완벽하게 흉내 내던 것과 달랐다.
‘그 여자의 마력이 벤야민 페르디난트의 것만큼 좋지 못해서인가.’
아무튼 이걸 이브에게 가져가서 보여 주면, 조금이나마 제 말을 믿어 줄 것 같았다.
“이브…….”
이브를 떠올리자, 저것이 제게 들러붙던 순간 화나서 몸을 돌려 버리던 그녀가 생각이 났다.
마지막에 보았던 눈빛이 얼핏 저를 경멸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많이 화난 것 같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테오도르의 어깨가 힘이 빠져 축 늘어졌다.
* * *
불타 버린 정원이 완전하게 복구되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라 했다.
브리안 오빠가 전해 준 말에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내 눈치를 보았다.
“앞으로는 불장난을 하면 안 돼.”
“리아, 불짱난(불장난) 한 거 아니라…….”
오딜리아가 왠지 억울한 듯한 목소리로 항변했다.
그러나 내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한쪽 눈썹을 치켜뜨자,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우웅, 아라써요오…….”
“다람쥐 용사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안전이야.”
“지쨔 불짱난 아닌데…….”
한바탕 설교를 시작하려 하자, 오딜리아가 다시 한마디 붙였다.
그렇지만 어제처럼 의기소침한 것보다는 고집스러운 지금이 훨씬 나았기에, 나는 다정하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수리 위로 입을 맞춰 주었다.
“만약 어제 에르와 리아가 조금이라도 다쳤다면, 나는 정말 많이 속상했을 거야.”
“리아가 잘몬태써요…….”
“에르도요…….”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동시에 내 품으로 파고들며 고개를 비비적거렸다.
애교를 부리는 그 모습이 꼭 새끼 강아지들처럼 귀여웠다.
그러나 잔잔한 나의 평화는 이어진 불청객의 방문으로 인해 어그러지고 말았다.
“가주님! 황제 폐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뭐?”
나는 아이들의 앞에서 찌푸려지는 표정을 차마 감추지도 못한 채 되물었다.
“어디로 모실…….”
“어딜 감히!”
어제 정원에 난 불로 정신이 없어 잊고 있던 불쾌한 기억이 다시 떠오른 순간, 나는 버럭 소리쳤다.
험악하게 변한 나의 표정에 사용인이 놀란 것이 느껴졌지만,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테오도르 황제는 어디에 있지?”
“아, 그게, 현관 앞에…….”
내가 몇 차례 그를 문전 박대 했던 탓에, 사용인들은 그를 들여보내지 않고 현관 앞에 세워 두었다고 전해 주었다.
나는 사용인이 알려 준 장소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러자 현관 앞에는 정말로 테오도르가 와 있었다.
어제 페르디난트 저택에서 본 카타리나의 아이와 함께.
‘뭐지? 나를 놀리기라도 하려는 건가?’
구태여 이곳까지 카타리나의 아이를 데려온 저의를 알 수 없어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브……!”
나를 발견한 테오도르가 반가운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러나 잘생긴 그의 얼굴은 내게 조금의 감흥도 주질 못했다.
저 얼굴로 다른 여자에게 웃어 주었을 그를 생각하니 오히려 더 불쾌해졌다.
“또, 약속도 없이 찾아오셨군요.”
나는 마땅한 예법마저 잊은 채, 책망하는 말투로 쏘아붙였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웃음을 거두지도, 당황하지도 않으며 방긋 눈을 휘었다.
“오해를 풀러 왔어, 이브. 이것 좀 봐 줘.”
“폐하와는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습…….”
“나는 너 말고 다른 여자랑 나쁜 짓 한 적 없어.”
뻔뻔하게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테오도르의 모습에 내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꿋꿋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 여자가 헛소리를 한 거야. 이거 봐 봐, 나랑 하나도 안 닮았잖아. 우리 아이들과 달리.”
마지막에 덧붙인 말에 그를 한 번 노려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움직여 테오도르의 옆에 서 있는 카타리나의 아이를 쳐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사르르 웃었다.
나란히 선 테오도르와 소름 끼치도록 닮은 눈웃음이었지만…….
‘조금 달라.’
자세히 보니 테오도르와 전혀 닮지 않았다.
황금색 눈동자가 둥글게 휠 때, 그 호선의 크기가 달랐고.
웃을 때 햇살에 반사되는 눈동자의 빛깔이 달랐으며.
또한 비스듬히 올라가는 입꼬리의 각도마저 달랐다.
카타리나의 아이는 얼핏 다른 점을 찾기 어려울 만큼 테오도르를 쏙 닮아 있었지만, 한때 테오도르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알았던 내 눈에는 그 차이가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곧바로 알아봤단 사실에 더 짜증이 났다.
“……그러네.”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뭐.”
그러고는 존대를 내던지며 맹렬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같은 사람이 아니니 당연히 다르겠지. 고작 그런 이유로 뭐가 증명된다고.”
내 배로 낳은 아이인 에르빈과 오딜리아도 자세히 관찰하면 나와 다른 부분이 꽤 많았다.
같은 사람이 아니니 다른 건 당연하다.
이런 되지도 않는 이유를 변명이라고 들고 와 내 평화를 깨뜨린 테오도르에게 화가 났다.
그런 나의 기색을 알아차린 테오도르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이거, 사람 아니야. 가짜야.”
“……?”
잠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그다지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란 듯, 마지못해 덧붙였다.
“……네가 나를 떠날 때, 그랬던 것처럼.”
나는 벤야민이 만들었던 허수아비를 떠올리며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아, 허수아비.”
“허수아비?”
테오도르가 처음 듣는 명칭에 내 말을 따라 했다.
“…….”
나는 입을 꾹 다물고 테오도르와 그를 본떠 만든 작은 아이를 노려보았다.
정말로 저것이 허수아비라면, 저것을 만든 이는 필히 그 여자일 테다.
‘카타리나, 그 여자라면 충분히 저런 것을 만들 수 있었을 테지.’
그렇게 생각하자 괜히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아뺘아!”
카타리나의 아이, 아니, 카타리나가 만든 허수아비가 나를 향해 외쳤다.
“아뺘! 아뺘아아아!”
아무래도 할 수 있는 말이 저것뿐인 듯했다.
공연히 머리가 아파 와, 한숨을 포옥 내쉬며 다시 테오도르를 보았다.
“그래, 설사 저것이 가짜라고 해도, 달라지는 게 뭐가 있지?”
“아주 많…….”
“돌아가.”
나는 차갑게 그의 말을 끊어 냈다.
그러자 테오도르의 황금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브, 나 너한테 꼭 해야 하는 말이…….”
“학습 능력이 없는 건가? 말했잖아. 너랑 대화하고 싶지 않다고.”
테오도르가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나는 따분한 표정으로 그 얼굴을 보았다.
저 아이가 정말로 그의 아이이든, 카타리나가 만든 가짜이든.
‘그게 뭐 어쨌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는 나와의 사랑을 잊었고, 내 사랑을 경멸하였으며, 내 앞에서 다른 여자를 사랑하노라 당당하게 선언했다.
이제 와 그가 기억을 되찾고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한들, 그 과거가 바뀌는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