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10_3
그래서 난 테오도르가 더욱 미웠다.
그가 조금만 더 일찍 나를 기억해 줬더라면.
그랬더라면 나의 지난 4년이 조금은 덜 외로웠을 텐데, 하는 나약한 생각이 자꾸만 나의 틈을 비집으려고 해서.
나는 테오도르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마지막 경고야, 테오도르. 한 번만 더 네 멋대로 찾아오면…….”
“왜……!”
순간 그가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가짜라고 했잖아! 왜 내 말을 안 들어 주는 거야?”
씨근덕거리며 화를 내는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지금 뭘 잘했다고 화를 내는 거야?”
카타리나가 데려온 아이가 가짜라는 게 밝혀지면, 그걸로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라 생각하기라도 한 걸까?
애초에 그 여자가 저런 것을 만들어 나타날 여지를 제공한 것도 그 아닌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꺼져. 너랑 대화를 하느니 바퀴벌레랑 친구가 될 거야.”
바퀴벌레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다.
테오도르가 그 잘생긴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기 시작했다.
흡사 나와 친구가 될 바퀴벌레를 모조리 찾아내어 박멸할 듯한 눈빛이었다.
기억을 잃은 그의 곁에서 그가 필요하다면 얼마나 냉혹하고 잔인하며 악랄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보아 왔었다.
그랬기에 나는 아주 조금 겁을 먹었다.
‘본성을 보이려는 건가?’
여차하면 그를 제지할 요량으로 허리에 찬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는 때였다.
푸욱.
테오도르의 고개가 아래로 꺾이며, 그 주위로 황금색 빛무리가 음울하게 퍼져 나왔다.
‘성력……?’
그의 어깨가 자그맣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위협적으로 번져 나가는 그 기괴한 빛무리에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노려보는 찰나.
“으흑…….”
순간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화낸 거…… 흑, 화낸 거, 아니야…….”
그러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뜨문뜨문 꺼낸 그의 말 속에 섞여 있는 것은 분명 울음이었다.
“테오……도르?”
나는 당황하여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또르르, 후둑-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턱 끝에 아롱지는가 싶더니,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그의 주위로 험상궂게 일렁거리던 빛무리는 반짝거리는 금가루가 되어 파스스 흘러내렸다.
“그러니까, 바퀴, 벌레랑, 친구, 하지 마, 끕…… 너, 그거, 그거, 흑, 싫어, 하잖아…….”
나는 아주 잠시 내가 본 것을 믿지 못해 두 눈을 끔뻑였다.
온 얼굴을 축축하게 적신 채로, 테오도르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너, 지금 우는 거야?”
세상에! 테오도르가 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다니!
“네가, 내 말, 하나도, 안 들어, 주고, 바퀴, 벌레랑…… 으흐윽…….”
‘바퀴벌레’라는 단어에 무슨 마법이라도 걸렸는지, 바퀴벌레 소리가 나올 때마다 그의 눈가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퐁퐁 흘러내렸다.
“그, 그런 걸로 울어?”
졸지에 나도 말을 더듬고 말았다.
일전에 체르니시아의 가주로서 등장한 나를 보고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환하게 웃으며 눈물만 흘리던 그때의 그가 미치광이 같았다면, 지금의 그는…… 꼭 부모를 잃은 아이 같았다.
다 큰 성인이 보이기엔 퍽 볼품 없는 모양새였으나, 잘생긴 얼굴로 저러니 그마저도 조각 같아서 보기 나쁘진 않았다.
“나, 나는…….”
서럽게 울던 그가 간신히 울음을 삼켜 내며 나를 쳐다보았다.
촉촉이 젖은 속눈썹과 발간 눈가가 시선을 잡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이렇게 조심스러운 사람은 너뿐이라서. 미움받기 싫고 잘 보이고 싶은 사람도 너뿐이라서.”
“…….”
“그런데 내 방식대로 하면 네가 날 더 미워할 것 같고…….”
테오도르는 숨을 헐떡이며 내게 말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렇게 찾아와서 네가 화를 풀어 주길 기다리는 것밖에…….”
이윽고 그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지며, 그가 자신의 왼 가슴을 고통스레 움켜쥐었다.
“미안해, 이브.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한 번만 내 이야기 들어 주면 안 돼?”
“…….”
“내가 이런 말 할 자격, 없다는 거, 나도 아는데, 그런데, 그렇지만…….”
“…….”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자 그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이상하게 그가 우는 모습이 에르빈과 오딜리아의 우는 모습을 생각나게 했다.
오래전, 내가 그를 떠나던 때에.
나는 생각했었다.
그를 떠나서도 나는 잘 살 것 같다고. 그렇지만 기억을 되찾을 그는 그러지 못할 것 같다고.
기억을 되찾을 그에게 내 존재가 ‘혼란’ 그 외에는 무엇도 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건 내가 그를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기억을 잃어버리기 전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안타까워서, 나는 조금 울었다.
그때는 내가 그의 앞에서 울었는데, 이제는 그가 내 앞에서 울고 있다.
차라리 날 다시 기억하지나 말지.
그럼 서로 미워하며 원수처럼 지낼 수 있었을 텐데.
그를 미워하는 나를, 그가 홀로 사랑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과거, 하루아침에 사랑을 잃어버린 내가 그를 홀로 사랑하면서 느꼈던 그 외로움과 서러움을 그에게 돌려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테오도르.”
나는 팔짱을 끼며 그를 불렀다.
그가 히끅히끅 울며 나를 쳐다봤다.
“내가 예전에 네 앞에서 울었을 때, 네가 내게 그랬잖아.”
나는 그런 테오도르를 향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질질 짜려거든 나가 울라고. 듣기 싫다고.”
[왜 울고 있지?] [질질 짜려거든 나가 울어. 듣기 싫으니까.]그날 그가 내게 날린 독설은 그다지 내게 큰 타격을 주지 못했었다.
당시의 나는 이미 그를 향한 모든 마음을 놓아 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심하게 꺼낼 수 있는 과거였으나, 테오도르에겐 그렇지 않았나 보다.
그가 더욱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내가 그땐 미쳐서…….”
급기야 테오도르는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숨 쉬기가 힘든지 가쁘게 호흡을 내쉬면서도, 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저러다 울다 죽은 최초의 황제로 역사서에 실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다람쥐 용사가 사실 악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르빈과 오딜리아도 저렇게 울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너와 달리 인성이 바른 사람이라 우는 사람에게 그딴 식으로 말하지 않아.”
나는 선심을 쓰듯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한번 말해 봐. 특별히 들어 줄게.”
순간 테오도르가 우는 것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정……말?”
그가 몹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묻는 그의 얼굴이 퍽 청초했다.
“대신 이야기를 들어 주면 울음을 그쳐야 해.”
그러자 테오도르는 입술을 꾸욱 앙다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나는 그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조금 기다려 주었다.
조금 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나는 그 여자와 그런 관계가 아니야. 다 거짓이었어. 너를 찾으려고 그 여자랑 거래를 했던 거야.”
테오도르는 퍽 진중하고 신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축축하게 젖은 눈가 때문인지 괜히 더 진실되게 들렸다.
“거짓이라고?”
“응, 그리고 그 여자의 임신도. 페르디난트에 잠입하려고 어쩔 수 없이 지어낸 거짓말이야. 너도 기억하잖아, 내가 페르디난트에서 네 마지막 족적을 찾고 있었던 거…….”
“그 말을 믿으라고?”
조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네가 그 여자와 얼마나 떠들썩하고 요란한 사랑을 했는지, 내가 다 보았는데?”
뾰족한 반문에 테오도르가 입술을 꾸욱 깨물며 두 눈을 내려뜨렸다.
일견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내게 상처를 준 건 저면서, 왜 제가 더 상처받은 표정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는 잠시 말이 없더니, 내 눈치를 힐긋 보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내 기억도.”
“……?”
“낙마를 하면서 잃어버렸다던 내 기억, 그게 아니었어. 나는 그 같잖은 사고로 널 잊어버린 게 아니야. 페르디난트의 그 죽일 것들이 공모해서 내 기억을 잃어버리게 만든 거였어.”
공모?
기억을 잃게 만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말들에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처음부터 이상했어. 내가 기억을 잃고 얼마 되지 않아 페르디난트는 기다렸다는 듯 혼담을 넣어 왔지. 마지막 만남을 생각하면 퍽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
“그런데 너도, 나도 이상한 걸 못 느꼈잖아.”
테오도르의 설명을 들은 순간, 한 번도 이상하다 여기지 못했던 것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겨졌다.
마치 두 눈을 가리던 장막이 깨진 것처럼.
“뭐야, 대체, 왜.”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어째서,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한 거지?
분명 나를 페르디난트에서 꺼내 갔던 날, 테오도르는 카타리나의 목에 검을 들이밀며 위협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타난 카타리나는 테오도르를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었다.
오히려 벤야민과 함께 황궁에 찾아와 당당하게 혼담을 제의하였고…….
“술식이야. 네가 그 어설픈 남장을 했을 때, 누구도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하고 네가 남자라 믿었던 것처럼.”
“술식……?”
내 남장에 술식이 간섭했다는 것도 놀라웠으나, 그보다 더한 충격으로 인해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그리고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그들의 이름을 읊조리는 순간, 내내 청초하게 젖어 있던 테오도르의 얼굴 위로 음산한 기운이 떠올랐다.
“그자들이 한 짓이야. 너랑 나를 갈라놓으려고, 흑마법으로…….”
철렁-
심장이 선득하게 내려앉았다.
“…….”
테오도르를 응시하는 내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말도 안 돼.’
오직 한 가지 외침만이 머릿속에서 가득 메아리쳤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여자가 다 실토했어. 벤야민 페르디난트에게도 병사들을 보냈고.”
“…….”
힘들게 대화의 기회를 얻어 낸 그가 근거 없이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쉽게 믿기도 어려웠다.
금지된 흑마법까지 써서 나와 테오도르를 갈라놓으려 했다고?
카타리나는 그렇다 쳐도, 벤야민이 왜?
“벤야민은…….”
“그리고 기회가 없어 미처 말 못 했는데, 브리안을 칼리고르로 소환했을 때 누군가 이동 마법진에 손을 써 두고 그를 습격했어.”
테오도르가 재빠르게 내가 모르던 사실 하나를 더 알렸다.
“황궁 마법진은…… 그렇게 쉽게 장난질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응. 그래서 조사 중이야. 가장 유력한 범인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테오도르의 뒷말이 먹먹하게 귓가에 아스러졌다.
나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테오도르를 노려보았다.
그는 나를 끔찍했던 페르디난트에서 꺼내 주고, 내게 사랑을 알려 주었던 남자였다.
그와 함께 지낸 반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행복한 날들이었다.
그랬기에 그가 기억을 잃었을 때, 더욱 짙은 참담함이 나를 아프게 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 [네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차렸을 거야.]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를, 조금 원망했었다.
아니, 조금 원망했다는 것은 애써 무던한 척하려는 나의 허세이다.
많이, 정말 많이 그를 미워하고 원망했었다.
나 또한 한때 그를 참 많이 사랑했었기에, 그를 사랑했던 만큼 더욱 그를 원망했다.
그리고 그 뾰족한 원망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에게 닿지 못하고 내게 되돌아와 나를 아프게 할퀴었다.
그 속에서 너덜너덜 찢기고 넝마가 된 내 사랑을, 나는 끝내 모두 버리고 떠났다.
첫사랑의 말로는 그처럼 비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모두 누군가의 악의로 인한 일이었다고?
하필이면 내가 오랫동안 친구라고 믿었던 벤야민이 이 일에 개입했다고?
그리고 그가, 어쩌면 내 오빠까지도 죽이려 했다고?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다.
나는 나를 한때 세상에서 가장 빛나게 해 주었다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여자로 만들었던, 한때 내가 사랑했던 남자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테오도르는 나와 그 사이에 있던 불편한 과거가 모두 타인의 악의와 기만으로 인해 벌어진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만일 이 말마저 거짓이라면, 테오도르는 정말 잔인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거짓이길 바랄 수도, 진실이길 바랄 수도 없어 망연해졌다.
“당장 믿기 힘든 거 알아. 그렇지만 얼마 가지 않아 밝혀질 일들을 거짓으로 꾸며 낸 건 아니야.”
“…….”
나는 테오도르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말마따나, 흑마법에 손을 대어 황제의 기억을 조작하고 황궁 마법진을 고장 내고 브리안을 습격한 게 모두 벤야민의 짓이라면…….
‘흑마법. 황제 시해. 황궁 마법진 조작. 민간인 습격…….’
앞의 두 개만으로도 제국에서 가장 중죄로 다루는 것들이었다.
내가 믿든 믿지 않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 앞에 낱낱이 밝혀질 것이리라.
“하…….”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머리가 아팠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테오도르에게 물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 말을 하려고 계속 찾아왔던 건가?”
이제 할 말이 끝났으면 썩 물러가라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잠깐, 이브. 나 너한테 아직…….”
그런 내 기색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그가 다급한 표정으로 나를 붙잡더니, 대놓고 내 눈치를 살폈다.
하고픈 말을 섣불리 꺼내지 못하고 달싹거리는 그의 입술이 눈물에 젖어 유독 붉고 촉촉했다.
“빨리 말하고 끄…… 사라져.”
“정말 말해도 돼?”
조금 전까지 잘만 말하더니, 갑작스럽게 조심스러워진 게 썩 수상했다.
“그럼 그냥 돌아가든가.”
내가 이대로 돌아설 것처럼 퉁명스럽게 대꾸할 때였다.
“사랑해, 이브.”
그가 불쑥 고백을 해 왔다.
“……?”
갑작스러운 그의 고백에 내 얼굴이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야?’
가만히 응시하자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또다시 처연하게 젖어 들었다.
“날 버리지 마. 네가 없으면 난…….”
두 눈을 내리깔며 속눈썹을 파르르 떨던 그가, 가냘픈 목소리로 물었다.
“날 버릴 거야?”
서글피 젖은 얼굴을 끔뻑끔뻑 쳐다보던 나는 이내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테오도르는 이미 한 번 눈물로 원하는 바를 조금이나마 이루어 냈다.
또한 테오도르는 자신이 얼마나 잘생겼는지, 그리고 그 잘생긴 얼굴이 얼마나 강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아는 남자였다.
그러니까 지금, 그는 그 잘생긴 얼굴과 눈물을 이용해서…….
‘미인계에, 눈물 작전을 쓰고 있잖아?’
다분히 의도적인 저 얼굴 각도와 표정을 본 순간, 알아챌 수 있었다.
비록 저 눈물이 억지로 짜낸 것은 아닐지라도, 테오도르는 자신의 눈물마저 이용할 수 있는 남자니까.
그리고 그것을 알아챈 순간, 나의 표정은 더욱 냉담해졌다.
“버리다니. 네가 언제부터 내 것이었다고.”
이야기를 들어 준다고 했지, 고백을 들어 줄 생각은 없었다.
싸늘한 목소리로 받아치자, 그가 정말로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그렁그렁한 표정을 지었다.
“나, 너의 테오잖아.”
“카타리나의 테오겠지.”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는 소리를 들은 사람의 얼굴로 무심히 대꾸했다.
아직도 그를 향해 ‘테오’ 하고 부르며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던 카타리나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그런데 어딜 감히 내 앞에서 ‘너의 테오’ 운운한단 말인가.
“……내가 기억을 잃고 너를 몰라봐서, 그래서 그래? 내가 바보처럼 그깟 흑마법 따위에 당해 가지고…….”
테오도르는 자신이 기억을 잃은 것이 우리의 관계를 어긋나게 한 모든 원흉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 또한 내가 받은 상처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우리 사이의 문제는 단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네가 사랑하는 건 내가 아니야. 어린 날의 기억일 뿐이지.”
나는 다시 만난 이후로 줄곧 내게 애틋한 시선을 보내는 그를 보며 생각하였던 것을 입 밖으로 꺼내었다.
“궤변이야, 이브! 내가 사랑한 건 오래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래, 오래전에. 너는 ‘이보네’를 사랑해서 10년이 넘도록 나를 찾아 헤맸다고 했었지?”
“맞아, 나는……!”
“네가 사랑한 건 ‘이보네’인 나였어. ‘이브’가 아니라.”
그를 향해 쐐기를 박듯 말했다.
“무슨 소리야? ‘이보네’도 ‘이브’도 모두 너잖아.”
테오도르는 곧바로 반박하였으나, 그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듯한, 조금은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네가 ‘이브’를 ‘이보네’만큼 사랑해 주었더라면, 우리 사이에 그런 일은 없었을 거야.”
“이브, 그건…….”
“너는 ‘이브’를 싫어했잖아. 무시하고 경멸했잖아.”
“…….”
말문이 막힌 테오도르가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네 말대로 네가 사랑한 ‘이보네’도 네가 싫어한 ‘이브’도 모두 나야. 그리고 ‘이브’는 더 이상 네 사랑을 믿지 못하겠대.”
이미 우리 사이에 신뢰는 형체 없이 무너진 채였다.
그리고 그 단단하던 사랑과 신뢰를 무너뜨린 것은 모두 테오도르였다.
“……아니야.”
그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부정했다.
“아니야, 이브. 나는, 나는 널 싫어한 게 아니라…….”
“싫어한 게 아니면? 설마 좋아했다고 말하려는 거야?”
“…….”
비꼬듯 흘러나온 내 말에 테오도르가 정곡을 찔린 표정을 지었다.
“허…….”
나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날 그렇게 대해 놓고서, 이제 와 날 좋아했다고?”
“…….”
“네 입으로 그랬잖아. 나는 네게 아무것도 아닌 여자라고.”
“…….”
“더럽고, 추악하다며? 내게 줄 화대는 동전 한 닢도 아깝다며 나를 경멸했잖아?”
내 입으로 묻어 두었던 과거를 꺼내자니,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게 아니야, 이브…….”
얼굴이 하얗게 질린 테오도르가 고개를 잘게 흔들며 변명했다.
“네가 좋아서,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좋아서 그랬어, 네가 너무, 너무 좋아서…….”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좋아하는 여자한테 그딴 식으로 망발을 해?”
“그건…….”
“이보네한테는 안 그랬잖아.”
테오도르는 이보네에게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며, 좋은 모습만 보여 주었다.
그게 테오도르의 사랑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와, 이브를 사랑했다는 테오도르의 말을 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로 네가 좋아서 그랬어. 기억을 잃은 뒤에도, 널 보면서 자꾸 마음이 끌리고 흔들려서.”
그러나 테오도르는 끈기 있게 항변을 이어 갔다.
“이보네를 흉내 낸 여자라 생각했던 네게 흔들리는 게, 이보네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서, 그래서 더 못되게 굴고 상처를 줬어.”
“상처를 준 건 알긴 하나 보네?”
“…….”
콧방귀를 뀌며 대꾸하자 다시 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내게 준 상처가 어디 보통 상처였던가?
“이브, 내가 미안…….”
“뭘 잘했다고 울먹여? 네가 울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
또다시 울먹이려는 그를 향해 싸늘하게 일갈했다.
그러자 그가 울컥거리는 감정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저 잘생긴 얼굴로 상처받은 눈을 하고 있으니, 아주 살짝 동정심이 일려고 하였으나…….
[머리핀을 카타리나 양에게 넘겨.] [이제 장식할 머리카락이 없으니, 머리핀은 필요 없겠군.]내게 머리를 길러 보라 하였으면서 그 여자를 위해 내 머리를 자른 테오도르.
[카타리나 양이 내 아이를 가졌다. 마땅히 황족으로 대우하며 각별히 그녀의 호위를 맡아야 할 거야.] [카타리나 양은 나의 약혼녀이니 나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돼.]체르니시아의 이름을 찾기 전까지는 검을 들지 말라 했으면서, 카타리나의 호위를 맡으라던 테오도르.
[이브 경이 저를 다치게 했어요.] [이브 로웰린의 징계는 그대에게 모두 일임하지.]내 상처를 모두 치료해 주겠다면서, 같은 자리에 카타리나가 상처를 남기는 걸 묵인한 테오도르.
그리고,
[테오……. 나, 너무…… 아파……. 너무, 너무 아파서…… 그래서…….] [폐하, 카타리나 양이 방문했습니다.] [아…….]아파 우는 나를 두고 카타리나의 방문 소식에 화색이 되어 멀어지던 테오도르와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혼절하고 만 나.
그것들을 떠올린 순간, 고개를 들던 동정심은 곧바로 다시 꺾이고 말았다.
카타리나와 정말 연애를 했든, 가짜 연애를 했든.
세상에 어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고 행동한단 말인가?
인성의 한 부분이 고장 난 사람이 아니고서야.
“아.”
나는 문득 그를 믿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를 떠올리며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너, 아주 쓰레기 같은 인성을 내 앞에서 숨기느라 애썼던데.”
이브에게 들키고 말았다.
사실은 제가 전혀 다정하지도, 착하지도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아주 어렸을 때,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꼭꼭 숨기고 감추어 왔던 것을 모두 들키고 말았다.
그녀를 잃어버린 이후, 잠시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그녀가 언급한 순간.
테오도르는 온몸에 핏기가 사아악- 가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사람이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그렇게 서슴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아.”
“…….”
“기억을 잃지 않았더라면,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평생 모르고 살았을 테지.”
저를 쳐다보는 이브의 눈동자는 냉담하기 그지없었고, 저의 잘못을 하나씩 지적하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저를 향한 아주 작은 감정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는 완연히 타인을 대하는 듯한 그녀의 차가운 태도에 심장이 아프게 조여 왔다.
이브는, 이브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밝고, 선하고, 단단한 사람.
약자를 보호하는 체르니시아의 긍지를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던 사람.
저처럼 어둡고 포악한 이가 다가가기에는 너무나 밝고 환한 사람이라, 그 빛에 기대어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숨기고 포장하였다.
그녀가 저를 좋은 사람으로 알도록.
저의 좋은 모습만 보임으로써, 감히 그 애정을 한 자락이나마 훔쳐낼 수 있도록.
그러나 그 부단한 노력을 모두 망쳐 버렸다.
기억을 잃고 그녀를 몰라본 어리석은 제가 제 손으로 모두 망쳤다.
‘내가 다 망쳤어…….’
테오도르는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만 자신의 손바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어 들려오는 그녀의 질책에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체르니시아는 쓰레기를 버리라 가르쳐. 알브레히트는 달라?”
“…….”
대답, 해야 하는데.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그녀를 붙잡아야 하는데.
“그러니 괜한 힘 빼지 말고 돌아가.”
“…….”
마른 입술이 몇 번이나 달싹였으나, 끝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 안을 맴돌던 수많은 변명들이 소리가 되지 못하고 다시금 목구멍 안으로 삼켜졌다.
어떤 말을 꺼내도, 그녀에게는 비겁하고 못난 변명일 뿐이리라.
소리가 되지 못한 그 수많은 변명들은 가쁜 숨이 되어 거칠게 그의 목구멍을 긁어댔다.
테오도르는 차마 울지도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그럴 적에 그의 눈은 아프도록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퍽 볼썽사나우면서도 가엾은 몰골일 것이다.
그러나 이브는 그런 제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이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안 돼. 붙잡아야 해.’
지금 그녀를 놓치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라.”
그 순간 간신히 끌어 올린 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한 번 거둔 것은 절대 버리지 않는 거라 배웠어, 나는.”
테오도르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알지 못한 채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이브. 너의 테오는 네게 애정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배를 뒤집어 까고 재롱을 부리는 착한 개새끼가 될 수 있어.”
그러나 그것은 곧 그의 본심이기도 했다.
테오도르는 스스로가 착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이미 아주 어릴 적부터 그 손에 묻힌 피가 너무나 많은 저는 결코 그녀와 같은 선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착해질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착한 개새끼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날 버리지 마.”
그녀가 저를 버린다고 생각하니 울컥, 울음이 나오려 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울지 않았다.
[뭘 잘했다고 울먹여? 네가 울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제가 울면…… 그녀가 싫어하니까.
우는 순간 저를 두고 가 버릴 것이다.
“유감이네. 못된 강아지는 주인을 무는 법이라.”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는 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착해지겠다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저 단호했다.
그녀는 저를 원치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이 자리에서 제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점멸되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이브를 붙잡을 수 있지?
어떻게 해야 이브와 조금이라도 더…….
덥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