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10_4
그녀의 손을 붙잡은 것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나간 행동이었다.
“……내가 착해진다잖아.”
이브에게 보여 주어야 했다.
제가 착해질 수 있다는 걸.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온순하고 예쁜 개새끼가 될 수 있다는 걸.
“내가 못된 개새끼라서 또다시 너를 물까 봐 걱정된다면, 물지 않는 착한 개새끼가 될게, 응?”
나는 개야.
나는 개새끼야.
나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착하고 온순하고 귀여운 이브의 개새끼야.
개새끼는 마땅히 주인의 앞에서 재롱을 떨고 애교를 부려야지.
사랑받기 위해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쳐야지.
버림받지 않으려면 울고 질질 짤 게 아니라 예쁜 모습으로 예쁜 짓을 해야지.
테오도르는 그렇게 자기 세뇌를 하며 이브의 손등 위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주인님.”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는 저를 이브가 미친놈 보듯 보았으나, 진정한 개새끼라면 주인의 그런 시선마저 황홀해 마지않아야 하는 법이다.
테오도르는 두 뺨을 슬쩍 붉히며 생긋 웃었다.
“이브, 나의 주인님. 테오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네?”
황제로서의 체면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그래, 나는 이브의 개니까.
* * *
한편,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테오도르가 데려온 카타리나의 허수아비에게 한껏 관심을 부풀리는 중이었다.
사용인이 가져온 소식에 험악한 표정으로 뛰쳐나간 어머니의 뒤를 몰래 쫓았다.
밖으로 나오니 현관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어머니와 잘생긴 아저씨, 그리고 처음 보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저고 모지?”
오딜리아는 테오도르를 닮은 남자아이를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기분 나뿐 냄새 나.”
그러자 에르빈이 불쾌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오딜리아를 따라 인상을 찌푸렸다.
“냄새?”
오딜리아는 코를 킁킁거려 보았으나, 어떤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암 냄새두 안 난데.(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더러운 냄새 나. 지지 냄새.”
에르빈이 손을 휘휘 저으며 ‘우웩’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딜리아는 카타리나의 허수아비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잘샌긴 아조씨랑 똑같이 생겼어.”
처음 보는 남자아이는, 멀리서 훔쳐보기에도 테오도르와 썩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테오도르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
“리아는…… 숨겨야 하는데…….”
오딜리아는 괜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테오도르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 옆에 가만히 서 있는 테오도르를 닮은 작은 남자아이를 째릿 노려보았다.
[내가 네 아버지니까.] [우리가 가족이라는 증거.]자꾸만 제게 아버지니 가족이니 하던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생각이 났다.
괜한 배신감이 밀려왔다.
“잘샌긴 아조씨는 거진말쟁이 지지야. 어몬니 말씀 맞아.”
불퉁한 목소리가 오딜리아의 입술과 함께 삐죽 튀어나왔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각각 다른 이유로 숨어서 카타리나의 허수아비를 노려보았다.
테오도르와 이보네가 이야기를 하는 도중, 허수아비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슬쩍 자리를 옮겼다.
허수아비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수풀 사이를 헤치고 돌아다녔다.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였다.
그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허수아비의 걸음이 차츰 빨라지던 때였다.
문득 그 앞에 스산한 그림자가 어렸다.
허수아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넝, 지새꾸(쥐새끼).”
“이 지 가튼 새꾸야.(이 쥐 같은 새끼야.)”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두 눈을 음산하게 빛내며 허수아비를 내려다보았다.
허수아비는 그 기운에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아, 아뺘아…….”
탄생한 목적을 생각하자면 결코 뒷걸음치지 말아야 하는 자리이나, 겁을 먹고 말았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만큼이나 허수아비를 내려다보는 에르빈과 오딜리아의 눈빛이 험악하고 흉흉했다. 세 살 난 아이들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리고 그런 두 아이가 내뿜는 으스스한 살기는 테오도르가 불쾌할 때 풍기는 기운과 조금 닮았다.
“이 지새꾸 때문에 어모니 기분 나빠졌어.”
“구리구 리아 기분도 나빠졌어.”
“지새꾸한테 지지 냄새 나. 에르도 기분 나빠.”
“마쟈, 혼내 조야 해.”
두 아이가 주고받는 말에 허수아비는 오싹한 몸을 움츠렸다.
이때, 허수아비의 안에서 섬뜩한 목소리 한 자락이 울렸다.
순간 허수아비의 두 눈이 붉게 빛났다.
움츠리고 있던 허수아비가 별안간 아이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개처럼 구는 건 그만둬, 징그러우니까!”
테오도르의 손을 떨쳐내며 사납게 쏘아붙였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둥글게 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네, 주인님.”
“미쳤어? 내가 왜 네 주인님이야?”
“그야 주인님께서…….”
“존댓말도 때려치워.”
“응, 이브.”
테오도르는 순순히 강아지 행세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이브…….”
그가 내 눈치를 힐끔 보며 또다시 입을 열었다.
울 자격도 없는 게 울지 말라고 몇 마디 했더니, 더 이상 울지 않는 것은 좋았으나…….
“에르빈과 오딜리아, 내 아이들이지?”
그 대신 작전을 바꾸기라도 한 건지, 이 미친 자가 미친 소리를 끝없이 하고 있다.
“개소리하지 마.”
“맞잖아, 내 아이.”
“왜 네 아이라고 생각해?”
“그야…….”
테오도르가 돌연 수줍은 듯 두 뺨을 붉혔다.
“부끄러워, 이브. 그걸, 내 입으로 말하라니, 그것도 이렇게 밝은 대낮에 바깥에서.”
“…….”
“하긴, 너는 원래도 대담했지. 나, 이제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해. 우리가 황제궁 뒤편의 정원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투명하게 내비쳐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나 보다.
나도 모르게 말이 나간 것은.
“내가 침대에 끌어들인 남자가 너뿐일 거라 여기는 거야?”
순간 테오도르가 멈칫하며 나를 보았다.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니야.”
당연하게도 나와 한 침대를 데운 남자는 테오도르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며 속으로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원래 사람은 나쁜 건 빨리 배우는 법이다.
이제 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하는 것도 잘할 수 있다.
테오도르가 그러는 것처럼.
“그럴 리가…….”
아주 천천히, 테오도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져 갔다.
감정이 싸악 가신 듯한 그의 표정이 다소 으스스하게 느껴지려는 찰나.
“이건…….”
그가 사납게 으르릉거리며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
단순히 나의 도발에 그러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젠장, 흑마법.”
그가 나직한 욕설을 내뱉으며 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 가짜 새끼가, 어디로…….”
그제야 나는 조금 전까지 이 자리에 있었던 카타리나의 허수아비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그냥 길을 잃은 거겠지. 사용인들에게 찾으라고 이를게.”
“흑마법이 느껴졌어.”
“뭐?”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어디 있지?”
테오도르가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나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저택 안에…….”
“저쪽이야.”
그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 * *
테오도르는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찾아 뛰어다녔다.
분명한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가짜 새끼의 짓인가.’
만일 그것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면, 분명 좋은 방향은 아닐 것이다.
테오도르는 바드득 어금니를 짓씹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허수아비도 흑마법을 쓸 수 있는 건가?’
본디 가호의 힘은 브리힘 신의 영광이 닿은 자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그건 인간도 아니고, 그런 걸 쓸 수 있을 리가…….
‘젠장. 모르겠어.’
마음이 조급해서 그런지 자꾸만 생각이 엉켰다.
테오도르는 일단 뛰었다.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질 여력이 되지 않았다.
혹시라도, 아주 만에 하나라도 아이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잘샌긴 아조씨, 안넝.] [어모니, 저 아조씨 누구야요?]에르빈과 오딜리아의 천진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그 사랑스러운 목소리에 변고라도 생긴다면.
“안 돼.”
테오도르는 그 가짜를 들고 이곳까지 찾아온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마침내 그가 흑마법의 흔적을 좇아 수풀 앞에서 멈추었다.
“허억, 헉…….”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있노라니, 훌쩍이는 아이의 소리가 수풀 너머에서 들려왔다. 오딜리아의 목소리였다.
테오도르는 덜컥 겁이 나 거칠게 수풀을 헤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 아조씨?”
그러자 오딜리아가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고 테오도르를 돌아보았다.
“괜찮……!”
괜찮냐고 물어보려던 테오도르는 오딜리아가 아주 멀쩡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딜리아뿐만이 아니었다. 에르빈 또한 오딜리아의 옆에 멀쩡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카타리나의 허수아비가 아이들의 앞에 힘없이 주검처럼 쓰러져 있었다.
“이게, 어떻게…….”
“리아가 혼내 조써.”
멍청하니 중얼거리는 테오도르에게 오딜리아가 설명했다.
“혼을 내 줘?”
“웅, 지새꾸 드럽꼬 냄새나서 기분 나빠. 구래서 리아랑 에르랑 혼내 줬어.”
그렇게 말하는 오딜리아는 무척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리아, 저 아조씨랑 친구야?”
오딜리아가 테오도르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자, 에르빈이 경계하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테오도르는 돌연 심장을 움켜쥐었다.
‘윽…….’
이브를 똑 닮은 자그마한 아이들이 나란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광경이라니.
‘심장이 아프군.’
테오도르는 아이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에르빈에게서 익숙한, 그가 사랑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이브의 기운과 비슷해.’
에르빈의 손끝에서 찰랑거리는 녹색 검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테오도르의 시선이 오딜리아에게로 향했다.
‘이쪽은…… 내가 잘못 느낀 게 아니라면…….’
테오도르는 짐짓 심각해져서, 무릎을 꺾어 앉았다.
오딜리아와 눈높이를 맞춘 그가 오딜리아의 손끝을 붙잡았다.
흑마법의 술식이 그곳에 있었다.
“이건, 어떻게 한 거지?”
“웅?”
“이 술식…….”
술식이라기엔 퍽 엉성한 모양이긴 했다.
소용돌이치는 동그라미 모양과 삐뚤어진 별 모양은 얼핏 아이가 흙바닥에 죽죽 긋던 낙서에서 본 것 같기도 했다.
“술씨(술식)? 술씨가 모야?”
오딜리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흑마법이니, 술식이니 하는 것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무의식중에 그려 냈다는 건가.’
테오도르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조씨, 리아 손 맘대로 잡지 마!”
옆에서 에르빈이 바득바득 화를 내고 있었기에, 그는 일단 오딜리아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말을 슥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왜 울고 있었지?”
“아, 구게…….”
곧바로 침울해진 오딜리아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훌쩍였다.
“리아 머리카랑이…….”
“머리카락이, 왜.”
“리아 머리카랑이 까매져서…….”
“아…….”
오딜리아의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아이들의 안전에만 집중하여 살피던 테오도르는 뒤늦게 그것을 알아차렸다.
“어몬니가 리아 말썬재미(말썽쟁이)라고 생각하실 거야.”
“아냐, 리아. 울지 마.”
옆에서 에르빈이 훌쩍이는 오딜리아를 달래 주며 말했다.
“리아 머리카락 밤하눌처럼 애뿌단 말야.”
“그래, 에르빈의 말이 맞아.”
그것을 잠잠히 지켜보던 테오도르가 이내 맞장구를 쳤다.
“네 머리카락은 밤하늘처럼 예쁘니까 속상해할 필요 없어.”
“하찌만…… 하찌만……!”
울먹이던 오딜리아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어몬니는 리아 머리카락 새까만 거 시러하신단 말야!”
“싫어한다고?”
“리아, 울지 마. 울지 마.”
에르빈은 안절부절못하며 오딜리아의 눈가를 소매로 박박 닦아 주었다.
테오도르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왜…… 싫어하지?”
설마, 내 머리가 검은색이라서?
예전에는 검은 머리가 밤하늘처럼 예쁘다고 그랬잖아.
이제는 꼴도 보기 싫어진 건가?
그래서, 아이가 이렇게 울며 걱정할 만큼?
온갖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몬라(몰라). 감춰야 한댔어. 어몬니랑 베냐민 삼쫀 이야기하는 거 리아가 다 들었어.”
“아냐, 리아. 쩌번에 어모니가 갠찬타구 했잖아.”
“하찌만…….”
오딜리아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다가, 테오도르를 힐긋 쳐다보았다.
“있쬬, 아조씨. 아조씨가 리아 머리카락 바꼬 주면 안 돼요?”
오딜리아가 공손한 목소리로 테오도르에게 물었다.
“안 돼. 나는 그런 능력 없어.”
“베냐민 삼쫀은 해 주는데…….”
그러나 테오도르가 고개를 젓자, 아이는 곧바로 공손한 가면을 벗고서 투덜거렸다.
벤야민과 비교하는 말에 테오도르의 눈썹이 삐뚜름히 치솟았다.
“대신 다른 방법으로 너를 도울 순 있지.”
“따룬 방봅?(다른 방법?)”
오딜리아가 두 눈을 끔뻑였다.
* * *
테오도르는 무려 체르니시아의 가주인 나마저 쫓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전장에서 오랜 기간 굴렀다더니.’
테오도르와 흩어져 아이들을 찾던 나는, 수풀 너머에서 들려오는 도란도란한 말소리에 멈칫했다.
수풀을 헤집고 안쪽으로 발을 들이자, 테오도르가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
그가 나보다 먼저 아이들을 찾은 모양이다.
“이브!”
그는 헐레벌떡 뛰어가던 것치고는 평이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어모니!”
“어몬니이!”
그 옆에 있던 에르빈과 오딜리아도 함께 나를 돌아봤다.
아이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내가 착각한 건가 봐. 아무 일도 없었어.”
테오도르가 태연히 설명했다.
나는 시선을 천천히 옆으로 옮겨, 볼품없이 픽 쓰러져 있는 카타리나의 허수아비를 가리켰다.
“그럼 왜 저건 저렇게 엎어져 있지?”
“몰라. 저걸 운용하던 자의 마력이 다했나 보지.”
테오도르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수상했다.
그러다 나는 오딜리아의 머리카락을 보고 미묘한 이질감을 느끼다가 놀라 물었다.
“리아, 머리카락이 짧아졌잖아?”
오딜리아의 머리카락이 또 한 뼘 정도 잘려 있었다.
“녜, 구게…….”
오딜리아는 두 눈을 데구루루 굴리다가 테오도르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자 테오도르가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잘랐어.”
“뭐?”
순간 나는 기가 차서 되물었다.
“자른 게 더 예쁘잖아.”
“아이 머리카락을 부모에게 말도 안 하고 멋대로 자르면 어떡해?”
어이가 없어서 쏘아붙이자, 그는 더욱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나도 부모야.”
“헛소리하지 말고 당장 끄……즈 브르.”
욕설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으나, 차마 아이들 앞에서 험한 말을 내뱉을 수 없어 어금니를 악물어야 했다.
* * *
‘끄즈 브르, 라니. 어쩜 욕을 하는 것도 이렇게 사랑스럽지.’
테오도르는 그녀를 떠올리며 변태처럼 혼자 히죽 웃었다.
[이제 이만 돌아가. 네가 말한 대로 이야기를 들어 줬으니까, 앞으론 찾아오지 마.] [하지만, 아직…….] [이야기만 들어 달라며? 그런데 이제는 용서도 해 달라고? 인성만 없는 줄 알았더니 염치도 없나 보지?]이브는 냉담한 목소리로 테오도르를 쫓아냈다.
만일 아이들이 옆에 없었더라면, 험한 욕설과 함께 저를 두들겨 패기라도 할 눈빛이었다.
아직 그녀에게 할 말이 많이 남았다.
용서를 받지도 못했다.
어쩌면 평생토록 용서를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욱신- 하고 아파 왔으나, 테오도르는 일단 물러나는 쪽을 선택했다.
‘이브가 오해를 풀어 줄까.’
오해가 풀리고 나면, 조금은 저를 용서해 주지 않을까. 그 작은 희망에 기대어.
이브는 당장 제 말을 믿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며 차차 제 말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페르디난트 저택으로 병사들을 보내고, 대신전에 신관을 보내 달라 요청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찾아가서 찢어 죽이고 싶은데.’
귀찮은 절차를 무릅쓰는 것은, 그의 죄목을 낱낱이 밝히기 위함이었다.
벤야민은 머지않아 재판정에 오를 것이다.
제 기억에 손을 댄 게 밝혀진다면, 이브도 제 말을 믿어 주겠지.
그리고 브리안을 공격한 사실마저 밝혀지면, 그 음침한 페르디난트의 놈은 두 번 다시 이브의 옆에서 친구 행세를 하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이참에 그녀의 옆에서 영영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는데.’
테오도르는 축 늘어진 카타리나의 허수아비를 기사들에게 맡겼다.
저를 본떠 만든 것이 불쾌해서 쳐다보기도 싫었다.
테오도르는 부러 말과 마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정문까지 나갔다.
그녀의 흔적이 머무른 공기를 조금 더 맡고 싶었던 탓이다.
“아조씨.”
이때, 자그마한 목소리가 테오도르를 붙잡았다.
“아조씨, 지지 아조씨.”
힐긋 돌아보자 에르빈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지 아저씨? 나를 말하는 건가?”
“리아 도와줘서 고마워요.”
“딱히.”
테오도르는 뿌듯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누르며 대답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
“에르가 보답하께!”
“보답?”
에르빈이 테오도르의 소매를 쭉쭉 잡아당겼다.
몸을 낮추라는 그 신호에 테오도르는 영문을 모른 채로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에르빈이 까치발을 들어 그의 뺨에 호- 하고 입김을 불어 주었다.
“어……?”
순간 테오도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몸을 슬쩍 뗀 에르빈이 배시시 웃으며 테오도르를 보았다.
“방금, 이건.”
“에르는 의사야! 에르가 호 하면 아야 한 거 다 나아!”
테오도르는 아이의 입김이 닿았던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그 자리는 칼리고르 왕성에서 마주쳤던 이브가 제게 남긴 상처가 머물던 곳이었다.
그녀의 종적을 알지 못하여 괴로워할 적에, 그녀의 작은 흔적이나마 아쉬워 일부러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 둔 상흔이기도 했다.
검기가 깃든 상흔이기에 오로지 성력으로만 치료가 가능한 것이었는데…….
“상처가…….”
테오도르는 에르빈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과 똑같은 황금색 눈동자.
저것은…… 레오브란테의 색이었다.
‘검기뿐만 아니라, 성력도 갖고 있는 건가? 두 가지 가호를 동시에 발현했다고? 가능한 일인가?’
이론적으로 불가하지 않다고 들었으나, 실제로 그것을 행한 자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에르빈은 이제 겨우 세 살인데…….
‘어쩌면 이브와 나의 아기들은, 천재가 아닐까?’
검기와 성력을 동시에 발현한 에르빈.
그리고, 비록 제국에서는 금지된 힘이지만 본능적으로 흑마법의 술식을 그리던 오딜리아.
테오도르는 그녀와 제 아이들의 비범함에 가슴이 벅차는 것을 느꼈다.
“구치만 나 아조씨 시러.”
이때, 에르빈이 불쑥 말했다.
“아조씨 때무네 어모니 기분 안 조아.”
미간을 가득 모으며 눈썹을 치켜뜬 에르빈의 표정이 이브의 것과 닮아 있었다.
“구니까 이제 에르 집에 오지 마.”
에르빈은 조금 전 살갑게 치료를 해 주던 때와 달리, 냉담하게 테오도르의 몸을 정문 바깥으로 밀어냈다.
“안녕, 아조씨.”
그러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
테오도르는 멍하니 쫓겨나며 조금 전 에르빈의 입김이 닿았던 뺨을 매만졌다.
* * *
황제의 병사들이 페르디난트 저택에 들이닥쳤다.
“페르디난트의 가주 벤야민은 황궁 마법진을 망가뜨리고, 브리안 체르니시아를 습격하였으며, 금지된 술법으로 황제 폐하의 기억에 손을 댄 시해범으로 지목되었기에 황궁으로 연행한다.”
병사들을 이끌고 온 황제의 수석 호위 기사인 린든이 말 위에서 엄숙한 목소리로 선고했다.
“증거, 있습니까?”
그러나 벤야민은 도리어 뻔뻔한 목소리로 느긋하게 물었다.
“카타리나 페르디난트의 자백이 있었다.”
“4년 전에 사라졌다가 나타난 여자의 말만 믿고 페르디난트의 가주를 잡아가겠다고?”
피식.
비릿한 비웃음이 벤야민의 입가에 걸렸다.
“명확한 증거 없이 3대 가문의 가주를 겁박하는 것은 황권의 남용입니다.”
어차피 신전에서 신관이 찾아와 조사를 하다 보면 그가 정말로 흑마법을 사용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가 이처럼 당당하게 나오자 린든은 조금 헷갈려졌다.
그러나 태연한 겉과 달리, 벤야민의 속은 타들어 갈 듯 초조했다.
황제가 이렇게 나왔다는 건, 분명 머지않아 이브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라는 뜻이니까.
제가 황제의 기억을 조작하는 데 개입하고, 그녀의 남매를 습격했던 것까지, 모두.
* * *
황궁에 돌아온 테오도르는 벤야민이 순순히 잡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워낙 완강하게 나온지라…….”
마차에서 내림과 동시에 황제궁 정문 앞에 기다리고 있던 린든이 그에게 주섬주섬 변명했다.
“그래.”
테오도르는 무신경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한마디 할 거라 생각했던 그가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자, 린든은 도리어 놀라 두 눈을 끔뻑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