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10_5
기실 테오도르는 아까부터 제 한쪽 뺨에 닿았던 자그마한 온기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상태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에르빈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만져 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말려 올라갔다.
에르빈이 제가 싫다며 앞으로 찾아오지 말라 한 것은 이미 새까맣게 잊은 터였다.
미친 자처럼 히죽히죽 웃는 테오도르의 모습에 린든은 공연히 기분이 찜찜해졌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이보네 님은 잘 만나셨…….”
린든이 그 부담스러운 웃음을 그만 보고 싶어서 말을 돌리려 할 때였다.
“형님.”
불쑥,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테오도르는 겁 없이 자신을 부른 이를 돌아보았다.
“……에른스트.”
그 얼굴을 보자 조금 전까지 좋았던 기분이 나빠졌다.
테오도르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복 아우를 몹시 싫어했으니까.
“형님의 전 약혼녀가 형님의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고 들었습니다. 정말입니까?”
“네가 내 일엔 무슨 상관이야?”
테오도르는 삐딱하니 팔짱을 끼고서 에른스트를 쳐다보았다.
카타리나는 저의 전 약혼녀도 아니고 그녀가 데려온 아이 또한 당연히 제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테오도르는 이브도 아니고 에른스트 따위에게 그런 것들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싶은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확실하게 하세요. 이보네를 상처 주지 말고요.”
에른스트가 테오도르를 향해 힘주어 말했다.
이에 테오도르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이래서였다.
테오도르는 이래서, 에른스트가 싫었다.
“마치, 네가 이브의 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
그때도 그랬었지.
그녀가 죽은 줄 알았을 때, 저를 찾아와 꼭 뭐라도 되는 것처럼 시비를 걸어왔지.
“저는 그 애의 친구예요.”
“친구는 무슨.”
테오도르는 짧은 코웃음을 쳤다.
“누가 친구를 그딴 눈으로 쳐다봐?”
그 말에 에른스트가 두 눈을 가늘게 떨었다.
“그, 그게 무슨…….”
“너, 좋아하잖아, 이브를.”
“……!”
에른스트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는가 싶더니, 이내 화르르 달아올랐다.
그 모습에 테오도르는 어이가 없었다.
설마 정말로 제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아주 어릴 때부터 좋아 죽겠다는 눈으로 이브를 쳐다봐 놓고서.
오죽하면 눈치 없는 이브도 그걸 알아채지 않았었나.
“감히, 주제도 모르고.”
테오도르는 혀를 쯧쯧 차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 정도로 위협을 하면 물러나야 할 그의 이복 아우는, 오늘따라 유난히 끈질기게 버티며 저를 도발했다.
“……주제를 모르는 건 형님이에요.”
“허?”
테오도르가 험악한 표정으로 에른스트를 노려보았다.
“이보네는 형님처럼 나, 나쁘고 못된 사람이 넘볼 수 있는 애가 아니에요.”
“어디, 계속 말해 봐.”
한번 들어나 보자는 듯, 테오도르가 입꼬리를 삐뚜름히 끌어당기며 턱짓을 했다.
그 시선에 에른스트는 움찔하였으나, 물러서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형님이랑 형님의 약혼녀 때문에 이보네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그 애의 머리카락을 자른 것도, 형님 약혼녀가 그 애의 몸에 폭력을 가하는 걸 묵인한 것도, 다 형님이잖아요.”
에른스트가 테오도르의 과오를 하나씩 꼽을 때마다, 그러잖아도 험상궂던 테오도르의 표정이 더욱 무섭게 변해 갔다.
“또다시 그 애를 상처 주지 말고, 그냥 그 애를 내버려 두세요.”
아무래도 지난번, 제가 체르니시아 저택을 방문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게다가 이제 형님의 전 약혼녀도 돌아왔잖아요. 형님의 아이랑 같이.”
“…….”
테오도르는 기분 나쁘게 생긴 에른스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에른스트는 카타리나가 돌아왔다는 소식만 듣고,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듣지 못한 모양이다.
‘소식이 느리군.’
마르가라테 황후의 죽음 이후 에른스트는 줄곧 끈 떨어진 신세였다.
후계가 없는 황제 때문에 황궁에 명목상 남아 황족의 의무를 다하는 것뿐.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가 제게 두 눈을 부릅뜨고서 따지는 게 그저 우스웠다.
“그래서, 지금 나한테 그걸 따지러 온 건가?”
“네, 따지러 왔어요. 이제 이브는 편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라고…….”
마침 그때, 테오도르의 뒤편으로 기사들이 카타리나의 허수아비를 옮기고 있었다.
에른스트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뭐지?’
누구나 시선을 빼앗길 만큼 생소한 광경이긴 했다.
황궁에서는 보기 힘든 어린 남자아이가 기절한 채로 기사의 어깨에 들려 가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아이는 황제를 쏘옥 빼어 닮아 있었다.
“설마, 저 아이가…….”
에른스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가 싶더니, 이내 그가 테오도르를 쓰레기 보듯 돌아봤다.
“……?”
테오도르는 이게 또 왜 날 저런 눈으로 쳐다보냐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가 카타리나의 허수아비를 발견했다.
‘저걸 발견한 거군.’
아이들을 공격했다기에 감옥에 박아 두고 조사를 할 생각이었다.
[우리가 몬조 때린 고 아냐. 갑짜기 요게 리아 공격해써. 구래서 혼내 준 고야.] [마쟈, 마쟈. 에르랑 리아 나쁀 아이들 아냐. 차카게 대해 주러고 핸눈데 조게 리아한테 막 난라와서…….]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저것이 갑자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고 했다.
다행히 별 탈 없이 제압한 것 같았지만, 수상한 걸 내버려 둘 순 없었다.
테오도르는 쥐 죽은 듯 기절한 그것을 그대로 황궁으로 가져왔다.
“형님의 전 약혼녀가 데려왔다는 아이가 저 아이인가요?”
“뭐, 그렇지.”
“그런데 왜…… 꼭 고문이라도 할 것처럼…….”
“맞게 봤네. 고문할 거야.”
“……!”
비록 겉 외양은 저를 본떠 만든 어린 남자아이지만,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서 꺼림칙한 건 없었다.
그렇지만 에른스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아무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왜? 조금 전에는 확실히 하라면서? 그래서 확실히 하려고 그 여자를 감옥에 가두고 저것을 고문하려는데, 왜. 문제 있어?”
“사람이 어떻게……!”
“뭐. 너도 저 꼴로 만들어 줘?”
테오도르는 험악한 목소리로 협박하듯 말했다.
“혀, 형님의 아이잖아요!”
“아니야.”
“형님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그렇게 가엾으면 네가 삼촌이니까 데려가서 돌보든가.”
“네?”
“너 원래 그런 거 잘하잖아. 내 아이들이랑 놀아 주는 거. 삼촌으로서.”
테오도르가 코웃음을 치며 에른스트를 비웃을 때였다.
기사의 어깨 위에 축 늘어져 있던 허수아비가 돌연 눈을 떴다.
“어……?”
그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에른스트였다.
황금색 눈동자가 에른스트와 마주치는 순간 붉게 물드는가 싶더니.
“아뺘아!”
허수아비가 돌연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내…….
쿠과앙!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광풍이 몰아쳤다.
“뭐야.”
간신히 폭발의 피해에서 벗어난 테오도르가 이를 악물고 광풍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뒤늦게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이래서야 어떻게 저를 지킨단 말인가, 쯧.
테오도르는 혀를 한 번 찼다.
이때였다.
“황자 전하!”
반대편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황자 전하, 눈을……!”
소란에 휘말린 에른스트가 피를 흘린 채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카타리나의 허수아비는 본래의 목적이 그것이었던 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다만 그 자리에 허수아비가 입고 있던 의복이 누더기가 되어 굴러다녔다.
테오도르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젠장. 대체 뭐야.”
테오도르는 곧바로 카타리나를 찾아갔다.
카타리나는 감옥에서 밤새 심문을 당하던 끝에,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었다.
아직 그녀는 죽어선 안 되었기에, 테오도르는 그녀를 치료하라 사람을 붙여 둔 터였다.
벌컥, 문을 열자 침대 위에 앉아 있던 카타리나가 테오도르를 발견하고 몸을 오돌돌 떨었다.
테오도르는 성큼성큼 걸어가 카타리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네가 만든 게 갑자기 폭발하면서 사람이 다쳤어.”
그러고는 무섭게 윽박질렀다.
“너, 그걸로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거지?”
그것이 황궁에서 터져서 다행이지, 만약 아이들과 있었을 때 조금 전과 같은 일이 발생했더라면…….
오싹,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아, 아니에요. 저는, 저는 아무 짓도…….”
“똑바로 대답해!”
“흐, 흑마력에 반응하도록 만들어진…….”
“흑마력?”
예상치 못한 단어에 테오도르가 눈가를 찡그렸다.
‘조금 전 그 자리에 흑마력이 있었나? 설마 나한테?’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저와 에른스트, 그리고 오랫동안 저를 따라다니던 기사들뿐이었다.
비록 테오도르 그 자신이 검은 머리카락으로 인해 어렸을 때부터 고대 어둠의 현신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를 듣긴 했으나…….
‘잠깐.’
테오도르는 멈칫하며 표정을 굳혔다.
체르니시아 저택에서 보았던 오딜리아의 술식이 생각난 것이다.
다행히도 아이들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쩌면 아이들이 위험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식은땀 한 줄기가 그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왜, 그런 걸 만든 거지?”
묻는 목소리가 사나웠다.
“너, 대답하지 않으면…….”
그러나 서늘한 위협에도 카타리나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로 두 눈만 질끈 감을 뿐이었다.
“…….”
“…….”
잠시간 짧은 침묵이 흘렀다.
테오도르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카타리나에게 말을 할 수 없는 금제가 걸려 있었다.
그것도, 저의 신성력으로도 감히 어찌할 도리가 없는 아주 강력한 금제가.
불현듯 선득한 공포가 일었다.
테오도르가 찾아와 울고 난리를 부린 이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와 나눈 대화를 하나씩 곱씹었다.
[다 거짓이었어. 너를 찾으려고 그 여자랑 거래를 했던 거야.] [그리고 그 여자의 임신도. 페르디난트에 잠입하려고 어쩔 수 없이 지어낸 거짓말이야.]그는 나를 아프게 했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라고 했다.
설움을 꾹꾹 누르며 참고 버텨야 했던 그 시간들 속에서 내가 보았던 것들이 모두 거짓이라 했다.
그의 말마따나 나를 상처 주었던 것들이 거짓이라 해도 화가 나고, 거짓이 아니라 해도 화가 났다.
테오도르가 남기고 간 말들이 무던했던 나의 감정에 파문을 일으켰다.
마치, 평온한 수면 위로 던져진 돌멩이처럼.
[나는 그 같잖은 사고로 널 잊어버린 게 아니야.] [벤야민 페르디난트, 그리고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그자들이 한 짓이야. 너랑 나를 갈라놓으려고, 흑마법으로…….]대화를 곱씹을수록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어몬니 기분 안 조아요?”
“어모니, 에르가 뽀뽀해 줄까요?”
그런 내 상태를 눈치 빠르게 알아챈 오딜리아와 에르빈이 양팔에 매달리며 귀엽게 애교를 부렸다.
내 손에 뺨을 비비적거리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니, 그 위로 착한 개새끼가 되겠다던 테오도르의 잔상이 떠올랐다.
아이들은 나를 닮았으면서, 동시에 테오도르를 닮았다.
언제나 부정하고 싶었으나, 이따금씩 이렇게 그와 비슷한 부분들을 발견할 때면 멈칫하고 만다.
“고마워, 에르.”
에르빈이 내 오른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러자 오딜리아가 참지 못하고 방방 뛰었다.
“리아두! 리아두 어몬니 뽀뽀해 드릴 거예요!”
오딜리아가 내 왼뺨에 쪽, 쪼옥- 하고 두 번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러고는 에르빈을 향해 턱 끝을 치켜들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에 잔뜩 샘이 난 에르빈이 씩씩 화를 냈다.
그 천진하고 개구진 모습들에 나는 그만 근심을 내려 두고 작은 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 * *
“있찌, 에르. 어몬니 기분 안 조으신 거 같지?”
오딜리아가 저 멀리 브리안 삼촌과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어머니의 표정을 힐끔 쳐다보며 에르빈에게 말했다.
“웅, 아무래도 그 아조씨 때문인 거 같아.”
에르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가 아조씨 혼내 주자!”
“나쁜 아조씨, 다시 나따나기만 해 바!”
비록 그 아저씨는 리아를 도와주었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기분을 안 좋게 만든 나쁜 사람이었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테오도르를 혼내 주기 위해 잔뜩 별렀다.
그러나 매일같이 찾아와 어머니를 기분 나쁘게 만들던 테오도르의 방문이 며칠 새 뚝 끊겼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무섭게 쫓아 버렸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근데 오늘은 아조씨 왜 안 오지? 에르가 혼내 조야 하는데.”
“있찌, 있찌, 에르. 리아가 그 아조씨 만나는 방봅(방법) 알아!”
“웅? 어케?(어떻게)?”
“리아도 잘은 모르겐눈데…….”
오딜리아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분명 이렇게 힘을 주면, 신기한 느낌이 들면서…….
“어, 어어……!”
손끝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기운에 오딜리아가 두 눈을 땡그랗게 뜨며 에르빈을 쳐다보았다.
“왜 구래, 리아?”
“에르! 리아 손 잡아!”
“우, 웅?”
에르빈이 얼떨결에 오딜리아의 손을 붙잡는 순간이었다.
조금 전까지 정원에서 노닥거리던 두 아이의 몸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 * *
한동안 테오도르는 황실 서고에 박혀서 고대 문헌을 조사하는 일에 몰두했다.
제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저를, 이브를, 그리고 저와 이브의 아이들을 노리고 있었다.
촤륵.
촤륵, 촤륵, 촤륵.
두꺼운 문헌의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점차 빨라졌다.
그 뒤는 글자가 지워져 있었다.
“뭐야.”
테오도르는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짜증스럽게 페이지를 휙휙 넘겼다.
그러다가 그가 궁금해하던 것을 찾았다.
그가 펼친 페이지에는 저주 의식에나 쓰일 법하게 생긴 흉물스러운 검은 거울이 그려져 있었다.
저와 오딜리아를 만나게 했던 바로 그 거울이었다.
“…….”
테오도르는 잠시 두 눈을 가늘게 좁혀 뜬 채로 들고 있던 책을 노려보았다.
“설마, 이게 끝?”
정보가 너무 빈약해서 울컥 화가 났다.
그렇지만 테오도르는 곧바로 책을 덮지 않고 인내심 있게 페이지를 넘기며 더 읽어 보았다.
그러나 서책에 담긴 것은 고대의 어둠을 깨우는 방법이라느니 하는 하등 쓸데없는 내용들뿐이었다.
그가 짜증을 내며 이대로 책을 덮으려던 때였다.
무심코 펼쳐진 페이지의 문장이 그의 시선을 당겼다.
“……강한 흑마력을 필요로 한다.”
서책 위에 적힌 다음 문장을 읊조리는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나직이 내리깔렸다.
* * *
에르빈은 처음 발을 디디는 낯선 공간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저택의 정원에서 오딜리아와 함께 어떻게 그 아저씨를 혼내 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공간에 오게 되었다.
“지짜루(진짜로) 요기 있으면 그 아조씨 나타나?”
“웅웅, 지쨔루!”
에르빈이 쉽게 믿지 못하고 재차 물을 때마다, 오딜리아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까지 늘 제 의지와 상관없이 이 이상한 공간으로 끌려오곤 했는데, 처음으로 제 의지로 이곳에 오게 된 게 퍽 뿌듯하였다.
“지짜, 지짜루 그 지지 아조씨 오는 거지?”
“웅! 구니까 우리 빤리 함종(함정) 만들자.”
“구래!”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테오도르를 괴롭힐 함정을 만들기 시작했다.
단풍잎처럼 자그마한 손으로 작은 구멍을 팠다.
“이케 한 담에…….(이렇게 한 다음에…….)”
그리고 그 안에 뾰족뾰족 가시가 돋아난 밤송이를 마구마구 파묻었다.
“아조씨 나타나몬 신발 벗고 요기로 지나가라고 하는 거야.”
오딜리아가 에르빈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구롬 아조씨 발 아야 해. 아야 하고 아조씨 울면 리아랑 에르가 혼내 주면 돼.”
“웅웅! 아조씨 울어도 호오 안 해 줄 고야!”
“어모니 기분 조아지면 그때 호오 해 주자.”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테오도르가 아프다고 잉잉 울어도 도와주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구론데 아조씨가 신발 벗기 싫다구 하몬 어캐?”
“우으음…… 구롬 리아가 아조씨 신발에 지지 묻치께!”
에르빈의 돌발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오딜리아는 이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방긋 웃으며 말했다.
“구롬 아조씨가 ‘에구 드러워’ 하몬서 신발 벗을 거야.”
“와아! 리아, 똑똑해!”
에르빈은 오딜리아의 의견에 물개 박수를 치며 동의했다.
이때였다.
자박-
맞은편에서 웬 발소리가 들려왔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테오도르 대신, 테오도르와 비슷한 느낌을 지녔으나 조금 다른 남자를 발견했다.
“체르니시아의 아이로군.”
남자의 붉은 눈동자가 아이들에게 향했다.
“아조씨는 누구야?”
“뭘 하고 있지?”
남자는 아이들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함종 만들었어.”
“지지 아조씨 혼내 줘야 해.”
“지지 아조씨가 어모니 개로펴써(괴롭혔어).”
“리아랑 에르는 어몬니 복수해 주는 거야.”
순진한 아이들은 남자가 묻는 것에 순순히 대답했다.
이에 남자가 아이들이 만든 작은 함정을 쳐다보았다.
“저런 것으로는 토끼 한 마리도 못 잡을 것이다.”
“우웅? 앗 따가 밤송이가 일케 마눈데?(따가운 밤송이가 이렇게 많은데?)”
“함정을 더 깊이 파는 게 좋겠군.”
“어케?(어떻게?)”
“도구를 쓰면 되지.”
“도구?”
“체르니시아의 아이가 검기도 쓰지 못하나?”
고개를 갸웃하던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남자의 조언을 받아 함정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에르빈이 나뭇가지로 바닥을 내리치자, 녹빛의 검기가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우와, 에르 체고(최고)야!”
오딜리아는 자신의 허리까지 오는 구멍을 보며 신기해했다.
두 아이는 뾰족뾰족한 밤송이를 더 많이 주워 와 함정을 가득 채우고, 넓적한 나뭇잎으로 그 위를 덮었다.
남자는 나뭇잎 사이로 뻔히 보이는 밤송이를 힐긋 쳐다보았다.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자라면 결코 저런 조잡한 함정에 걸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나, 그 이상 말을 보태진 않았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함정 근처에 있는 나무 기둥 뒤에 숨어서 테오도르를 기다렸다.
“구론데 리아, 아조씨 언제 와?”
“웅, 요기 기다리몬 와.”
“구니까 언제?”
“우웅, 쫌만 있으몬…….”
그러나 막상 테오도르가 나타나질 않았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하품을 하며 기다리다가 이내 머리를 맞대고 새근새근 잠들었다.
스르륵-
남자가 잠든 아이들 앞에 섰다.
무기질적인 시선이 오딜리아에게 닿았다.
“확실해. 내가 잘못 보지 않았어.”
남자가 오딜리아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나를 위한, 가장 완벽한 제물이야.”
이윽고 오딜리아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거리며 흘러나오더니, 남자의 손끝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검은 마력. 그것도, 이제껏 제게 바쳐진 그 비루한 마력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양질의 흑마력이었다.
남자가 잔뜩 심취한 표정으로 오딜리아의 흑마력을 흡수하던 때였다.
찌릿거리는 기운과 함께 그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아조씨 모야?”
어느덧 잠에서 깨어난 에르빈이 그를 노려보았다.
“리아한테 머 한 고야?”
남자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에르빈의 손끝에서 황금빛 빛무리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레오브란테?”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린 남자의 표정이 설핏 찌푸려졌다.
“거슬리게 됐군.”
본디 남자는 이런 작은 아이는 쉽게 제압할 만큼의 힘을 지니고 있었으나, 아직 완전히 부활하지 못한 탓에 여의치 않았다.
“뭐, 이 정도로도 충분해.”
남자는 흡수한 흑마력이 몸속에서 일렁이는 것을 느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향해 붉은 눈동자를 번득였다.
순식간에 두 아이의 몸이 시공의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아유, 두 분 여기 계셨군요! 옷이 엉망이잖아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로라가 말썽꾸러기 보듯 하는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로라?”
“대체 어디 숨어 계셨던 거예요? 한참 찾았다고요.”
“에르랑 리아는 나쁜 아조씨 혼내 주려고 구론 고야!”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조금 억울해져서 항변하였으나, 애석하게도 로라는 건성으로 흘려들었다.
“네, 네. 어서 들어가 씻어요. 벌써 점심 식사 시간이라고요.”
두 아이의 입술이 불룩 튀어나왔다.
아이들의 단순한 머릿속에는 조금 전 이상한 아저씨의 존재가 깨끗이 잊힌 뒤였다.
* * *
며칠 전, 테오도르의 병사들이 다녀간 뒤로 한껏 치솟은 벤야민의 불안감이 극에 달해 갔다.
그는 그날 곧바로 이브에게 간단한 안부 편지를 보냈으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설마, 이미 황제가 그녀에게 이상한 소리를 지껄인 건가?’
기다리다 못한 벤야민은 직접 그녀를 찾아갔다.
‘일단 그녀를 찾아가서…… 그런데, 그녀를 찾아가 무슨 말을 하면 좋지?’
덜컹덜컹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벤야민은 고요히 생각에 잠겼다.
오래전, 루돌프와 마르가라테를 죽인 것은 다름 아닌 어린 날의 벤야민이었다.
페르디난트의 후계자였던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두 사람이 하는 일을 대강 알고 있었다.
고대의 어둠, 테네브리스의 부활-!
그것을 위해 그들은 테네브리스의 영혼을 부활시킬 ‘그릇’을 만들고, ‘그릇’을 유지하기 위해 제물을 모아 바쳤다.
제물로 쓰일 만한 가장 좋은 사냥감은 브리힘 신의 가호를 받은 어린 생명들이었다.
사도의 힘을 깨운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테네브리스를 부활하기 위한 희생양이 되었다.
사람들은 레오브란테 가문에서 신성력을 발현하는 아이가 나오지 않은 것을 그저 힘이 끊긴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그 또한 모두 그들의 짓이었지.’
벤야민은 그들이 꼭꼭 숨기어 애지중지 보호하는 그 대단하신 ‘그릇’을 알지 못했다.
루돌프는 그에게 나중에 너도 크면 ‘그릇’을 만날 수 있을 거라 했지만, 딱히 관심은 없었다.
아마 평생토록 흑마법이니, 뭐니 하는 것에 관심 두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저택에 나타난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 이브 로웰린.
그 아이를 그들이 해치려고 하지만 않았더라면.
열 살이 되지 않은 체르니시아의 가호를 받은 아이.
‘그릇’의 제물이 되기에 딱 좋은 조건이었다.
벤야민은 그 예쁜 아이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을 죽였다.
살인 마법은 흑마법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질 낮은 것으로 분류되는 것이었다.
으레 따라오는 반작용 또한 거셌다.
벤야민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생과 사를 오가야 했다.
볼썽사나운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 줄 순 없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는 곳에 숨어 피를 토하며 그 시간을 버텨야 했다.
그리고 그는 페르디난트의 가주가 되었다.
가주가 되어 돌아온 저를 보고,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던 그녀의 얼굴은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