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10_6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지둥하는 그녀를 보며, 벤야민은 처음으로 뜨거운 충만감을 느꼈다.
제가, 그녀를 지켰다.
그 사실이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
한번 맛본 충만감은 쉽게 중독되어 그를 물들여 갔다.
벤야민은 영원토록 그녀를 지키는 단단한 벽이 되고자 하였다.
그래서 더럽고 지저분한 것들이 그녀의 주위에 엉겨들지 못하도록 막아 냈다.
그럴 때마다 뿌듯함은 날로 커져만 갔다.
그러나 이후로 그녀를 소유하려던 그의 계획은, 테오도르 황제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남자가 제게서 이브를 앗아 갔을 때.
벤야민은 그녀를 되찾기 위해 다시 한번 흑마법에 손을 댔다.
죽은 루돌프와 마르가라테는 그 힘을 굉장히 신봉하였으나, 벤야민에게는 되도록 쓰고 싶지 않은 힘이었다.
강한 힘이지만, 그만큼 반작용도 강했으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카타리나에게 그 힘을 써 보라 종용했다.
카타리나는 테오도르 황제의 기억에 손을 대는 데 성공했으나, 그 이상은 해내지 못했다.
마력이 빈약한 탓이다.
황제의 정신까지 뒤집어 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쯧.
결국 테오도르는 기억을 잃은 채로도 끝내 그녀를 놓지 않으려 했고, 벤야민은 스스로 나서서 그녀를 위해 허수아비를 만들었다.
무생물을 생물처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영역이었다.
그렇지만 벤야민은 어렵지 않게 해냈다.
그녀를 위한 일이었으니까.
마차가 멈춤과 동시에 벤야민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힐긋 차창을 내다본 그는 아직 마차가 체르니시아의 정문을 통과하지 못했음을 알아차렸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방문객을 알아보고 슬며시 열리더니, 저택의 사용인이 나와 그에게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벤야민 님. 가주님께서 당분간 손님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벤야민이 왔다고 전했는데도?”
“죄송합니다.”
사용인은 허리를 숙여 다시 한번 그에게 인사했다.
명백한, 거부였다.
그 순간 벤야민은 자신의 안의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 * *
벤야민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러잖아도 테오도르 때문에 심란했던 나는 아직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저, 가주님, 벤야민 님이 아직 저택 앞을 떠나지 않고 계신답니다.”
저택의 사용인이 안절부절못하며 내게 말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그냥 무시해.”
나는 냉담하게 대꾸했다.
벤야민은 오랫동안 나를 지탱해 주던 친구였다. 그러니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이 옳았다.
테오도르의 말이 정말인지, 그럼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혹은 어떤 오해가 있는 건지.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의 나는 그를 만날 기력이 없었다.
하필이면 바로 어제 저택을 찾아온 셀린느로부터, 벤야민이 브리안 오빠를 습격한 범인이라는 확증을 전해 들은 탓인지도 모른다.
[어제 황궁 마법진을 조사하러 신관이 다녀갔는데, 흑마법의 술식은 발견되지 않았어요] [그럼 벤야민의 짓이 아닌 거네요?] [술식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수정구가 반응했지요. 흑마법을 감지하는, 감지석으로 만든 수정구요.]그러니까, 누군가 브리안 오빠를 해치기 위해 분명한 흑마법을 자행했다.
대신전의 신관은 어지간한 사람들은 따라잡기 힘들 만큼 강한 성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대단한 신관이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자가 브리안 오빠를 해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대신전의 신관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자라면…… 다섯 손가락도 되지 않는다.
나는 참담한 목소리로 셀린느의 말을 이어받았다.
[가장 확실하게 알아보는 방법이 하나 더 있기는 해요. 폐하께서는 대신전의 신관보다도 강한 성력을 지니셨으니까, 직접 술식을 찾아내실 수도 있겠지요. 신관의 증언이 아니면 공신력은 얻지 못하겠지만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이미 답은 나왔으니까.
벤야민이 대체 왜, 하고 의문을 갖는 것마저도 머리가 아팠다.
“어몬니, 왜 베냐민 삼쫀 못 오게 해요?”
“어모니, 베냐민 삼쫀이랑 싸웠어요?”
내심 벤야민의 방문을 기다렸던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물었다.
“싸우는 건 나쁜 건데…….”
“어몬니 나쁜 아이야?”
“바보야. 어모니는 아이 아냐. 어른이야.”
“리아 바보 아냐!”
아이들은 씩씩거리며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잠잠히 지켜보다가 한마디 던졌다.
“에르, 리아. 지금 싸우는 거니?”
“아, 아니요.”
아이들은 혹여나 혼날세라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 앉아 언제 다퉜냐는 듯 방긋방긋 웃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내 나는 머리 아픈 생각은 모두 떨치고, 아이들과 손을 잡고 저녁 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
체르니시아 저택의 정문 앞에서, 벤야민은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나 굳게 닫힌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서서히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벤야민은 그녀가 제게서 마음의 문을 닫았음을 마침내 인정해야 했다.
“이브…….”
벤야민은 굳게 닫힌 문을 쳐다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널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데.”
느릿하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어둠 위로 흩뿌려졌다.
* * *
황제는 밤이 깊었는데도 황실 서고에 붙박여 나오질 않았다.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책이 여러 권 쌓여 있었다.
개중 일부는 금지된 도서들이었다.
갑작스럽게 무언가에 홀린 듯이 서고를 뒤지기 시작한 테오도르는, ‘테네브리스’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책들을 모조리 꺼내 읽는 중이었다.
“테네브리스는 체르니시아가 관장하는 땅을 자신의 어둠으로 뒤덮고 싶다는 욕망에 빠졌으며…… 조각난 영혼을 모아 영면에 들게 하였으니…… 끝내 소멸하지 못한 조각이…….”
미친 듯이 책의 내용을 읊조리며, 휘리리릭 책장을 넘기는 그의 모습에 궁정의 사용인들이 불안한 시선으로 힐끗거렸다.
얼핏 황제가 중얼거리는 말들 속에 ‘어둠’이니, ‘부활’이니 하는 것들이 들어 있었다.
미쳐 버린 황제가 이제는 정말로 고대의 어둠을 부활시키려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모두가 오싹한 마음을 감춰야 했다.
“폐하께서 전쟁을 끝내고 돌아와 이제 황궁이 조금 안정되나 싶었는데…….”
“잠깐 저러다 마시는 거겠지요? 정말로 고대의 어둠을…… 에이, 그런 건 아니겠지요?”
“모르는 일이지. 서쪽 대륙에서도 고대의 어둠의 흔적을 찾으셨다고 들었는데…….”
“얼마 전에 황궁에서 난 사고도 그렇고, 왜 이렇게 뒤숭숭한지…….”
“그나저나 에른스트 황자님은 아직도 깨어나질 못했다며?”
마침 에른스트의 약을 받아 가던 2황자궁의 시종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래도 의사 말이 체온도 맥박도 모두 정상이래요. 어서 깨어나길 바라야지요.”
황자궁의 시종은 다른 사용인들과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눈 뒤에 황자의 침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 위에 고요히 누워 있는 에른스트가 보였다.
그가 아직 일어나 스스로 약을 먹지 못하기에, 시종은 에른스트의 머리를 세우고 숟가락으로 약을 그의 입술 안쪽으로 흘려보냈다.
이후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 준 뒤 빈 약그릇을 챙겨 방문을 닫고 나갔다.
한동안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꿈틀.
내내 미동 없이 누워 있던 에른스트의 손끝이 자그맣게 움찔거렸다.
* * *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테오도르는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창을 타고 들어오는 햇살이 어느새 날이 밝았음을 알려 주었다.
탁.
그가 소리 나게 서책을 덮었다.
밤이 새도록 책을 읽은 탓에 눈이 발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탁, 탁, 탁, 탁-
그의 손끝이 연신 두꺼운 책 표지를 두드려 댔다.
“‘그릇’을 만들려면 순수한 영혼과 테네브리스의 영혼 조각이 필요하다고…….”
힐끗 시선을 내린 그가 흰 종이 위에 자신이 정리한 것들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문헌들을 살피며 테네브리스의 조각난 영혼이 담겨 있을 것으로 대강 추정되는 것들을 적어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 가짜였는데…….”
테오도르는 케르벨 왕국에서 보았던 테네브리스의 관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쩌면 누군가가 오래전에 가짜와 바꿔치기한 건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진짜는 어디에 있는 거지?
탁, 탁, 탁- 탁, 탁, 탁-
책 표지를 두드리는 손끝의 움직임이 보다 빨라졌다.
“영혼을 깨우려면 ‘그릇’은 이미 준비되었을 테고…… 어쩌면, 이미…….”
거기까지 중얼거리던 테오도르가 멈칫하며 자신의 서체를 노려보았다.
이것 참, 몹시 터무니없는 생각 같았으나…….
벌떡!
테오도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카타리나를 찾아갔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테네브리스를 부활시키려고 했나?”
“……!”
카타리나는 두 눈이 동그랗게 커져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어 버렸다.
그 모습에 테오도르는 가슴이 선득해졌다.
“확실하군.”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니 확실했다. 아니라면, 아니라고 할 테니.
‘젠장. 대체 누가?’
그러나 이것은 카타리나가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다만, 이 자리에서 테오도르 그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오딜리아가 위험해.’
정말로 테네브리스의 부활을 준비하는 무리가 있다면, 오딜리아가 위험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테오도르는 체르니시아를 향해 말을 달렸다.
* * *
이른 시각 테오도르가 찾아왔다.
“저, 가주님…… 손님이…….”
아직 아침 식사도 하지 않은 시각이었다. 손님이 찾아올 시간은 더더욱 아니었다.
“손님?”
“폐하께서…….”
의아해하며 묻자, 사용인이 내 눈치를 힐긋 보며 대답했다.
어제 벤야민을 그리 보냈던 것처럼 황제에게도 문전 박대를 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저, 황제 폐하께 돌아가시라고 하는 건…… 제가 직접 하기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얇은 카디건을 걸쳤다.
“그래, 내가 나가지.”
바깥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에 은은한 분노가 서렸다.
나는 당연하게도 테오도르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하러 왔을 거라 생각했다.
너는 정말 이기적이고, 말이 안 통하고, 변하질 않는다고.
이렇게 기별 없이 찾아오지 말라 하지 않았냐고.
불쑥 찾아온 네 이야기를 들어 준 건 그날로 족하지 않냐고.
억지로 용서를 받아 내야만 직성이 풀리겠냐고.
그런 주제에 네가 무슨 착한 강아지가 되겠다고 장담한 거냐고.
너는 구제 불능한 놈이라고.
네가 착한 개새끼가 되길 기대하느니, 바퀴벌레랑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될 거라고.
만나면 그렇게 대뜸 쏘아붙이고자 작정을 하였다.
“이브.”
그러나 막상 마주한 테오도르의 표정이 심상찮았던 탓에, 나는 하려던 말들을 밀어 넣고 그를 쳐다보았다.
다급히 말을 타고 온 것인지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안색이 창백했다.
“무슨 일이지?”
“리아는, 리아는 어디 있지?”
그가 평소의 여유가 사라진 얼굴로 내 어깨 너머를 두리번거렸다.
“갑자기 리아는 왜…….”
그러고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열린 대문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안이 벙벙하여 쳐다보던 나는 그가 의복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았단 것을 깨달았다.
평소 나를 만나러 올 때면, 아닌 척하면서도 은근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을 주던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심지어 지금 그가 신고 있는 신발은 외출용도 아니었다.
“뭐야?”
나는 의아한 마음을 품고서 그의 뒤를 따랐다.
“리아! 리아!”
그의 외침에 이른 시각부터 정원에서 놀던 오딜리아가 폴짝 뛰어나왔다.
“어? 아조씨?”
“아…….”
오딜리아를 발견한 테오도르가 그 자리에 멈추어 서더니, 이내 바닥에 무릎을 털썩 부딪치며 주저앉았다.
“다행이야…….”
안도한 듯한 그 목소리에 의아함이 더욱 거세어졌다.
뭐지? 혼자 악몽이라도 꾼 건가?
“대체 왜 그래?”
조심스럽게 다가간 내가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그러자 그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시, 이야기 좀 해, 이브.”
“…….”
“널 귀찮게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들의 안전이랑 관련된 거야. 네가 싫어하는 이야기 꺼내지 않을 테니까…….”
혹여나 내가 또다시 대화를 거부할까 봐, 그가 재빠르게 덧붙였다.
“그래.”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린든,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테오도르가 어느새 뒤따라온 자신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네, 폐하.”
황제의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보았다.
황명이 있긴 했으나 내가 저택의 주인이었기에, 나의 허락을 구하려는 것이다.
“저택이 위험하다는 거야?”
“일단, 내 말에 따라 줘.”
나는 마음이 찝찝해졌으나, 그의 기사들에게 아이들의 호위를 맡겼다.
* * *
“그러니까, 고대의 어둠을 부활시키려는 무리가 있고.”
“응.”
“그래서 리아가 위험하다고?”
“응.”
터무니없는 소리에 어이가 없어 한쪽 눈썹을 치켜떴으나, 테오도르는 퍽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잠깐만, 나 지금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
“고대의 어둠을 부활시키려면 강한 흑마력이 필요해. 그런데 리아가 그 조건에 부합해.”
“리아가……?”
“리아가 흑마법을 썼어.”
테오도르는 쉬이 믿지 못하는 내게 이제껏 제가 본 것들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테네브리스의 유물을 통해 리아와 세 차례 시공을 초월한 공간에서 만난 것.
그가 가장 마지막에 저택에 방문했던 날 리아의 손끝에서 찾은 흑마법의 술식.
그리고 그 끝이 검게 물들던 오딜리아의 머리카락.
“그래서, 이브. 리아의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만이라도 황궁에…….”
테오도르가 내 눈치를 힐끔 살피며 말을 이어 갈 때였다.
“꺄아악!”
“안 돼!”
“에르! 리아!”
바깥에서 난데없는 비명과 고함이 들려왔다.
\
고대 4대 사도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졌다는 테네브리스.
그의 흑마법은 때때로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따금씩 어떤 자들에게는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고서라도 염원하는 것들이 있었다.
루돌프와 마르가라테가 원하던 강한 힘이 그러했고, 테오도르가 바라던 죽은 이를 되살리기 위한 시간의 역행이 그러했다.
그리고.
그녀의 정신을 헤집어서라도 제 곁에 두고자 하는 벤야민의 소망이 그러했다.
“이브.”
고함 소리에 바깥으로 뛰쳐나온 이보네와 테오도르를, 의외의 인물이 맞이했다.
“벤야민? 너…….”
“왜 황제와 같이 나오는 거지? 이 시간에, 그런 차림으로?”
허공 위에 떠 있던 벤야민이 두 사람을 맹렬한 기세로 노려보았다.
하필이면 테오도르가 황궁에서부터 제대로 갖춰 입지 않고 흐트러진 차림으로 찾아온 탓에, 그가 무언가 오해를 한 듯싶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해명할 정신은 없었다.
“에르빈!”
이보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린든을 비롯한 황궁과 체르니시아의 기사들.
그리고…… 벤야민에게 붙잡힌 에르빈.
“우, 우으으…… 어모니이…….”
울먹울먹한 목소리와 함께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던 에르빈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에르빈을 붙잡고 있지 않은 벤야민의 반대편 손에 펄럭거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얼핏 마법 스크롤과 비슷하게 생긴 그것은 ‘흑마법의 서’였다.
오랫동안 루돌프가 모아 온 것들이었다.
단연 눈길 한번 주지 않던 것들이라, 벤야민은 제가 이것을 필요로 하는 날들이 올 줄은 몰랐다.
본디 흑마법을 다루는 것은 그에게 부여된 능력 밖의 일이어서, 페르디난트의 술식을 그릴 때와 달리 재료가 필요했다.
루돌프와 마르가라테를 죽일 당시에는 그들이 ‘그릇’을 유지할 제물로 모아 온 아이들의 생명을 희생했다.
테오도르의 기억을 지우던 때에는 카타리나의 피와 정신력을 재료로 썼다.
사람처럼 말하고 움직이는 허수아비를 만들 적에는 기꺼이 자신의 피와 3년의 생명을 바쳤다.
그리고 이번에 벤야민이 행하려는 술법은 이제껏 해 온 어느 것보다도 강력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그만큼 더 강한 반작용이 일어날지도 모르나, 그가 무엇보다 염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정신 조작.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옆을 지켜 왔지만, 그녀는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았다.
하여 벤야민은 그녀의 기억을 조작하고 정신을 헤집어 제 곁에 둘 생각이었다.
분명 어여쁠 것이다.
저를 보고 웃고, 안기며, 사랑을 속삭일 그녀는.
설사 그것이 거짓된 마음이라 할지라도, 벤야민은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위험한 어둠의 술법은 하나의 인격을 파괴할 만큼의 정신력을 필요로 했다.
벤야민은 제 생명을 바칠지언정, 제 정신을 파괴할 순 없었다.
파괴된 정신으로는 그녀의 무엇도 느끼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그녀의 아이를 재료로 사용할 참이다.
에르빈 체르니시아.
이 작은 남자아이가 검기를 발현하였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 그녀로부터 들은 것은 참 적절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이브. 금방 끝날 거야.”
“당장 에르를 내려놔!”
이보네가 검을 뽑아 들며 그에게 달려들고자 했다.
“조심해, 이브.”
그 순간 에르빈의 목덜미를 붙잡은 벤야민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사랑스러운 너의 에르가 다치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이보네는 멈칫하며 그 자리에 굳었다.
에르빈의 머리 위에 벤야민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술식이 빛나고 있었다.
“뭐야, 그 술식.”
테오도르가 벤야민을 향해 사납게 물었다.
“글쎄. 궁금하면 나를 더 도발해 보세요, 폐하.”
벤야민이 비죽 입꼬리를 말며 키득거렸다.
“혹시 모르지요. 모두가 재미난 광경을 보게 될 수도.”
“…….”
테오도르는 어금니를 바드득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술식의 정체를 알지 못하니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벤야민, 너, 대체 왜…….”
이보네가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브리안 오빠를 공격하고, 테오도르의 기억을 잃게 만든 것도 모두 정말 네 짓인 거야?”
묻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너무나 명확한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었다.
이보네의 얼굴 위로 짙은 배신감이 떠올랐다.
그것을 발견한 벤야민이 제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렸다.
정작 제 마음을 배신한 것은 그녀이면서, 어째서 그녀가 배신당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지 벤야민은 알 수 없었다.
“……괜찮아. 이제 곧 내 마음이 네 것이 되고, 네 마음은 내 것이 될 테니까.”
벤야민은 허공 위로 어둠의 술식을 죽죽 그려 나갔다.
그에게 붙잡힌 에르빈이 벗어나고자 버둥거렸으나, 그럴수록 에르빈을 붙든 그의 손에 힘이 거세어졌다.
‘에르를, 제물로 사용하려는 거야.’
간밤에 테네브리스와 관련된 것들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정독하였던 테오도르는, 금세 상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상대가 그리는 술식의 종류를 알지 못해, 에르빈의 무엇을 대가로 치르려는지 또한 알 수 없었다.
‘일단, 무조건 막아야 해.’
테오도르가 벤야민의 빈틈을 노리기 위해 그를 주시하던 때였다.
“베냐민 삼쫀 나뺘!”
어디 있었는지 모를 오딜리아가 튀어나와 벤야민을 향해 소리쳤다.
“에르 개로피지 마아아!”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오딜리아가 있는 힘, 없는 힘 다 끌어내어 외치던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구구궁-!
강한 진동과 함께 세상이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밝은 하늘 위로 그림자가 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이 해를 잡아먹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모두가, 심지어는 벤야민마저도 그 기이한 현상에 놀라 당황하는 사이.
“벤야민 페르디난트!”
테오도르가 벤야민을 향해 뛰어들었다.
툭-
그 바람에 벤야민은 붙잡고 있던 아이를 놓쳤다.
추락하는 아이의 몸을 이보네가 잽싸게 도약하며 붙잡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허공에 그려진 술식이 테오도르와 벤야민을 한꺼번에 덮쳤다.
이윽고 두 사람이 사라졌다.
* * *
[테네브리스.]여름날의 풀 내음처럼 싱그러운 목소리였다.
[또 늦잠이야? 어서 일어나. 이러다 베짱이가 되겠어.]꿀에 적신 듯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왜 그랬어? 왜, 왜 그런 짓을…….]오래오래 사랑하여 잊지 못할 목소리였다.
[가엾은 테네브리스. 이제 너의 영혼은 죽지도 못해.]오롯이 저를 위해 울어 주는 목소리였다.
[잠에 들자. 긴긴 잠에 드는 거야.]축축하고 서러운 자장노래를 들으며, 영면에 들었다.
[테네브리스…….]그리고 이제 다시 깨어날 시간이었다.
* * *
번쩍!
내내 잠들어 있던 에른스트의 눈꺼풀이 고요히 뜨였다.
스르륵-
에른스트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어? 황자 전하! 일어나셨습니까!”
마침 침구를 갈러 들어온 시종이 깨어난 그를 보며 밝은 표정으로 인사했다.
“몸은 괜찮으세요? 하도 일어나시지 않아 걱정했습니다.”
“…….”
괴팍한 성정의 테오도르와 달리, 에른스트는 황궁의 사용인들에게도 상냥한 편이었다.
그런 그가 평소와 달리 무심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이 조금 이상했으나, 시종은 그가 사고를 당했다가 막 일어나서 그런 것이라 여겼다.
“황자 전하께서 일어나시지 않아 걱정하던 이들이 많았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어서 빨리 이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려야겠어요.”
“…….”
에른스트는 재잘재잘 떠드는 시종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휴, 수척해지셨어요. 앗, 잠시만요, 전하. 여기 뭐가 묻었…….”
그러다 시종이 그의 옷에 달라붙은 실밥을 발견하고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쇄애액-!
검은 창살이 시종의 몸을 꿰뚫었다.
꺽, 꺽…….
숨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시종의 몸이 털썩 쓰러졌다.
에른스트는 죽어 가는 시종을 경멸하는 듯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더러운 인간이, 어딜 감히.”
꺼억, 꺽…….
이윽고 시종이 툭, 숨을 꺼뜨렸다.
동시에 시종의 몸을 꿰뚫던 검은 창살이 파스스 공기 중으로 스며들었다.
무감각한 시선으로 그 일련의 장면을 쳐다보던 에른스트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밝은 백금색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검은색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며 동시에 자라난 머리카락은 그의 발끝에 닿을 정도로 길어졌다.
남자는 에른스트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나, 그는 더 이상 에른스트가 아니었다.
느리게 몸을 돌린 그가 창밖을 보았다.
태양이 달에 가려지고 있었다.
차츰 태양빛을 잃으며 세상이 어두워졌다.
차박, 차박-
창가를 향해 걸어간 테네브리스가 손끝을 뻗어 유리창을 밀어뜨렸다.
창이 열리고, 바깥의 공기가 안쪽으로 후욱 들어왔다.
폐부를 잠식하는 익숙한 내음에 그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이건 어둠의 내음이었다.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마물들이 그의 부름에 하나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고대에 봉인되었던 네 번째 사도, 어둠의 집행관 테네브리스.
그가 부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