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11_1
10. 테네브리스의 부활
“우윽, 흐윽, 읍, 끕, 어모니이…….”
품에 안긴 에르빈이 내 어깨에 고개를 묻고서 서럽게 울어 댔다.
에르빈의 작은 몸을 꼬옥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여전히 철렁했다.
‘벤야민, 대체 왜…….’
테오도르의 말이 사실이었다.
브리안 오빠를 공격한 것도, 테오도르의 기억을 조작한 것도 모두 그의 짓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에르빈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
“어모니이…… 흡, 으읍…….”
“괜찮아, 괜찮아, 에르.”
“그치만, 그치만 베냐민 삼쫀이…… 끄읍, 지지 아조씨가…….”
에르빈은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벤야민은 아이들이 막 태어나던 때부터 교류를 해 왔던, 아이들에게는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런 벤야민에게 무서운 일을 당할 뻔했으니, 이렇게 놀라 우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어디로 사라진 거지……?’
테오도르가 벤야민을 밀쳐 낸 동시에 그가 허공 위로 그리던 술식이 두 사람을 덮쳤다.
그리고 두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에르빈을 위험에서 구해 낸 건 참 다행인 일이었으나, 두 사람의 생사를 알 수 없어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나는 고개를 들어 위를 힐긋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어두워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달이 태양을 절반쯤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이한 광경에 나뿐만 아니라, 저택의 사람들이 모두들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꺼번에 닥친 일들에 머리가 조금 어지럽다고 느끼던 찰나.
“우, 우흑, 으흑…….”
밑에서 오딜리아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딜리아가 내 바지 자락을 붙잡고서 으엉헝 울음을 터뜨렸다.
“어몬니, 흑, 리아, 리아 모리카랑(머리카락)이…….”
“……!”
반짝이는 은색이었던 오딜리아의 머리카락이 완전한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벤야민의 술식이…… 풀린 건가?’
이전에도 한 번, 아이의 머리칼 끄트머리가 검게 물든 적이 있긴 했다.
그러나 이처럼 완벽하게 검은색으로 변한 것은 처음이었다.
“어몬니, 리아 어케요(어떡해요), 으아앙……!”
“으아앙……!”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동시에 목청 높여 울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울음 속에서 나는 테오도르의 말을 떠올렸다.
[리아가 흑마법을 썼어.]조금 전 오딜리아가 벤야민에게 소리쳤을 때, 미묘한 기운이 느껴졌었다.
‘어쩌면 그게…….’
나는 오딜리아를 향해 무릎을 굽히며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리아, 어머니에겐 솔직하게 말해 줘야 해.”
“모, 모룰요?(뭐를요?)”
아이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하자, 오딜리아가 조금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리아, 혹시…… 흑마법을 썼니?”
“흐, 흑마봅?”
“조금 전에, 벤야민 삼촌에게 소리쳤을 때.”
“모, 몬라요(몰라요)!”
오딜리아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리아는 암것두(아무것도) 몬라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니?”
“구냥, 구냥 손끝에서 찌리찌리한 느낌 나몬서(나면서)…….”
주절주절 설명하던 오딜리아가 이내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으엉헝, 리아 때무네, 끄흑, 흡…… 아조씨랑 베냐민 삼쫀, 리아 때무네 죽은 거예요?”
오딜리아는 혹시나 저 때문에 두 사람이 잘못된 걸까 봐 서럽게 울었다.
“리아, 울지 마, 으아앙…….”
잠시 울음을 그쳤던 에르빈도 오딜리아와 함께 다시 소리 높여 울었다.
“하찌만, 하찌만 리아 때무네…….”
“아니야, 리아. 벤야민 삼촌이 나쁜 짓을 해서 아저씨가 잠깐 혼내 주러 간 거야.”
“저, 정말이요……?”
“그럼.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이들을 달래 주기 위해 대충 둘러댔다.
그러나 나 또한 생사를 확인하기 힘든 두 사람으로 인해 불안함이 밀려왔다.
테오도르를 원망했지만, 그가 이렇게 휘말려 위험해지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또한 에르빈을 위협한 벤야민에게 느낀 강한 분노와 배신감과는 별개로, 이유를 묻고 싶었다.
‘괜찮을 거야. 둘 다, 이렇게 쉽게 죽을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니까.’
이때였다.
“이보네……!”
브리안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창백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게…… 저게 대체 뭐지?”
심상찮은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검게 물들어 가는 하늘이 보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조금 전 보았던 하늘이 어두워지는 현상의 연장선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저건…….”
브리안이 가리키는 것들의 정체를 알아본 순간, 가슴이 선득하게 내려앉았다.
“마물…….”
마물이었다.
그것도 그냥 마물이 아니라…….
“마물 떼가…….”
수백, 수천 마리의 마물들이 커다랗고 넓적한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가히 엄청난 수였다.
가호를 끌어내야만 식별 가능한, 평범한 육안으로는 구별하기 힘든 먼 거리에 있음에도 하늘을 어둑어둑하게 물들일 정도로.
그중 일부가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정확히 알브레히트 제국의 수도를 향해.
“젠장.”
나는 욕설을 짓씹으며 벌떡 일어났다.
가뜩이나 마물들을 상대할 3대 가주 중 하나인 벤야민도 없었고, 테오도르 또한 그와 함께 사라진 채였다.
그들 없이 저것들을 처리할 수 있을까?
“브리안 오빠.”
나는 허리에 찬 검을 단단히 쥐고서, 브리안에게 부탁했다.
“셀린느 님에게 연락을 해 줘. 그리고 로라, 에르랑 리아를 부탁해.”
그러자 화들짝 놀란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내 양쪽 바지 자락에 매달렸다.
“어모니……!”
“어몬니, 어디 가세요?”
“어모니, 가찌 마세요, 에르랑 리아랑 이써요.”
“흑, 흐윽…… 가찌 마세요, 리아 무서워요.”
“에르도, 끕, 에르도 어모니랑 있꼬 시포요.”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들의 눈가가 발갰다.
그렇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걱정 마, 에르, 리아. 어머니가 금방 돌아올게.”
나는 아이들의 이마에 각기 입을 맞춰 준 뒤, 검을 잡고 몸을 돌렸다.
일단은 하늘을 뒤덮고 있는 저것들부터 처리해야 했다.
* * *
알브레히트 황궁.
한때 에른스트 2황자였던, 지금은 완연히 다른 존재가 된 남자가 복도를 거닐었다.
발끝까지 길어진 검은 머리카락,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
얼핏 에른스트 시절의 이목구비가 남아 있긴 했으나, 에른스트라면 절대 지을 리 없는 냉랭한 표정 탓인지 전혀 다른 이처럼 느껴졌다.
차박, 차박.
느리게 황궁을 거니는 그의 주위로 검은 빛으로 만들어 낸 수백 개의 검은 가시들이 피어났다.
“어? 에른스트 황자님?”
“에른스트 황자님이라고?”
“황자님 분위기가 조금…….”
에른스트의 궁전에서 나오는 그를 발견한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그에게 다가가고자 하였다.
“황자님 머리카락이 왜…… 꺄아악!”
“으, 으아아아아악!”
그러나 순식간에 날아온 검은 가시들이 몸을 꿰뚫은 탓에, 그들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졌다.
죽어 가는 사람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황궁을 뒤덮었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 테네브리스는 무심하게 걸었다.
그의 발길이 닿는 지면에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검은 연기들이 꽁꽁 뭉치더니, 자그마한 다람쥐 형상으로 변했다.
“테네브리스 님!”
검은 다람쥐가 테네브리스의 뒤를 쫓으며 경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이고, 막 깨어나셨으면서 걸음이 왜 이렇게 빠르십니까? 테네브리스 님! 테네브리스 님!”
그러나 테네브리스는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에도 돌아보지 않고 그저 무심하게 걸을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난리에 이리저리 달아나는 사람들 틈에 카타리나가 있었다.
“허억……! 테네브리스 님!”
부활한 테네브리스를 발견한 카타리나가 그에게 달려와 몸을 엎드렸다.
“이, 이제, 저, 저는 사, 살려…….”
카타리나의 손이 그의 옷자락에 닿는 순간.
푸욱-!
검은 가시가 그대로 카타리나의 몸을 꿰뚫었다.
테네브리스는 짜증스럽게 눈가를 찡그렸다가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다.
황궁의 기사들과 사용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마침내 테네브리스의 걸음이 닿은 곳은 테오도르의 궁전이었다.
테오도르가 없는 황궁을 점령한 그는 황제의 권좌에 앉아서 따분한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헉헉거리며 뛰어온 검은 다람쥐 형체의 마물이 그의 앞에서 숨을 골랐다.
“아이고, 헥헥……. 테네브리스 님, 이 제리코 그동안 테네브리스 님께서 다시 깨어나시길 기다리며…….”
“왜 그딴 모양을 하고 있는 거지?”
테네브리스가 불쾌하다는 듯 묻자, 제리코가 탐스러운 꼬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이래 봬도 제가 요새 대륙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동물로 불리고 있습니다.”
검은 마물 같던 제리코의 몸이 서서히 진짜 다람쥐의 색깔로 변했다.
제리코는 테네브리스가 잠든 사이 자신이 이룩한 업적에 대해 설명하고자 거만하게 턱 끝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테네브리스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대신 그는 다른 것을 물었다.
기나긴 영면 속에서 고독에 질식하여 타락의 존재가 되어 가면서도 잊지 못했던 이름의 주인.
“체르니시아는?”
“네?”
달빛을 받을 때마다 반짝거리던 사랑스러운 은색 머리카락.
사르르 눈웃음을 내지을 때마다 초승달 모양으로 휘던 어여쁜 녹색 눈동자.
땅의 인도자, 체르니시아.
“그녀는 어디에 있지?”
* * *
한편, 테오도르는 낯선 공간에 홀로 뚝 떨어졌다.
“젠장, 여긴 어디지?”
온통 새하얀 공간 속에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또 시공을 넘어온 건가…….”
테오도르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우선 에르빈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빈틈을 노려 벤야민에게 달려들었는데 낯선 곳에 떨어지고 말았다.
에르빈이 벤야민의 손에서 벗어난 것까진 확인하였는데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브가 함께 있으니까, 에르는 무사할 거야.”
테오도르는 부러 스스로에게 장담하듯 중얼거렸다.
이때, 그의 눈에 저 멀리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어? 이브……!”
이브였다.
그런데 이브는 혼자 있지 않았다.
다른 놈이랑 같이 있었다.
“뭐야, 저건?”
테오도르는 불쾌한 듯 눈가를 찡그리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짜악-!
이브가 오른손으로 맞은편에 있던 남자의 뺨을 때렸다.
그 바람에 남자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꺾여 돌아갔다.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테오도르의 표정이 멍청하게 변해 갔다.
이브에게 얻어맞은 남자는 다름 아닌…….
‘저거, 나잖아?’
테오도르, 자신이었다.
‘뭐지?’
테오도르는 두 눈을 가늘게 좁혀 뜨며 이브에게 얻어맞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 황금색 눈동자, 조각같이 아름다운 이목구비.
어떻게 보아도, 테오도르 자신이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저렇게 완벽하게 잘생긴 남자가 저 외에 또 존재할 리 없었으니까.
‘설마, 또 흑마법 같은 게 날 흉내 낸 건가?’
그런 의심이 불쑥 솟은 순간, 테오도르는 참지 못하고 달려 나갔다.
“저리 비켜!”
이브에게 얻어맞아 흐느끼는 남자를 밀쳐 낸 그가 외쳤다.
“이브! 저건 가짜야! 내가 진짜야!”
그러자 이브가 무서운 표정으로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이건 또 뭐야?”
그녀의 어여쁜 녹색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흡사 ‘테오도르가 둘이나 있다니! 너무 끔찍해!’ 하는 표정이었다.
이때, 밑에서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흑, 흐윽…….”
조금 전 테오도르에게 밀려난 남자가 바닥에 엎어져 울고 있었다.
“이, 이브, 흐윽…… 끕…….”
남자는 그녀에게 얻어맞은 뺨을 한 손으로 감싸 쥔 채, 고개를 슬쩍 올렸다.
눈물에 젖은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미, 미안해. 난 바퀴벌레야……. 흐읍, 끄윽…….”
남자는 울고 있었다.
다분하게, 그녀를 신경 쓰며, 가장 예쁜 각도로.
“그렇지만 나는, 흑, 세상에서 제일, 제일 잘생긴 바퀴벌레니까, 끄읍, 그러니까 너무 미워하지, 으흑, 미워하지 말아 줘, 이브…….”
‘저 새끼가 미인계를 쓰고 있잖아?’
테오도르의 얼굴이 단박에 험악해졌다.
“속지 마, 이브! 저 새끼, 지금 아프지도 않으면서 우는 척하는 거야!”
“넌 뭐야?”
테오도르를 발견한 남자가 이를 바드득 갈며 쏘아붙였다.
“왜 나랑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흑마법이라도 쓴 건가?”
남자는 뻔뻔하게도 테오도르를 가짜로 몰아가려 했다.
테오도르는 그를 가뿐히 무시하며 이브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생각해 봐, 이브. 이렇게 솜털처럼 사랑스러운 손에 맞아서 아파 울 리가 없잖아.”
그러면서 그녀의 손등에 입을 쪽 맞추었다.
그러자 밑에서 울고 있던 남자가 테오도르를 희번덕한 눈으로 노려보며 외쳤다.
“네가 뭘 알아! 그리고 당장 이브의 손에서 더러운 주둥이 치우지 못해?”
“저것 봐, 이브. 저 교활한 놈이 두 눈 부릅뜨고 날 노려보고 있어. 하나도 아프지 않았던 게 뻔해.”
“흐읍, 끅…… 아, 아니야, 이브……. 흐으윽…….”
남자는 테오도르의 지적에 곧바로 ‘끄읍, 흐읍, 흐으윽’ 하며 울어 댔다.
‘찌질하기는.’
테오도르는 속으로 남자를 비웃었다.
아이처럼 질질 짜는 게 아주 꼴사납기 그지없었다.
“솜털……?”
이때, 이브가 테오도르의 손에 붙잡힌 자신의 손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강한 분노와 함께 그의 손을 쳐 냈다.
“지금, 체르니시아의 가주에게 솜털이라 한 건가?”
“어, 이브……?”
순간 그녀의 손바닥에서 녹색 빛무리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짜악-!
그녀가 테오도르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건 검기가 실린 손바닥이었다.
얻어맞은 뺨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다.
“으윽, 이, 이브…….”
그러나 테오도르는 아픔을 참으며 이브에게 말했다.
“그래, 차라리 나를 때려. 저건 가짜니까.”
“아니야! 나를 때려! 젠장, 이건 뭐지? 대체 뭔데 나타나서 날 방해하는 거야? 바퀴벌레 같은 자식.”
바닥에 엎어져 흐느끼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 테오도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역시, 조금 전까지 그 애처롭던 모습은 이브 앞에서 보인 연기임에 틀림없었다.
테오도르는 자신을 흉내 낸 가짜를 향해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지금 내게 바퀴벌레라고 했나? 이브는 바퀴벌레랑 친구가 되고 싶다 했어.”
“뭐라고……?”
“그러니까 당장 이브 앞에서 꺼져.”
테오도르의 도발에 남자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이 미친 것들…….”
그리고 이브는 두 명의 테오도르를 끔찍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둘 다 내 앞에서 꺼져 버려!”
그녀의 독설에 테오도르와 남자가 동시에 처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잠깐, 이브.”
“꺼지라니…….”
그러나 이브는 매정하게도 몸을 홱 돌리며 반대편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이브……!”
테오도르가 그녀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을 때였다.
사아아-
“어……?”
순식간에 이브의 모습이 사라졌다.
제 멱살을 붙잡고 있던 저와 똑같이 생긴 남자도.
“뭐지?”
테오도르는 두 눈을 끔뻑였다.
“설마, 그 자식이 이브를 데려간 건가.”
그가 흉흉한 기운을 내뿜을 때였다.
퍽!
둔탁한 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이번에는 웬 남자가 이브에게 검집으로 두들겨 맞고 있었다.
“이브……!”
테오도르는 재빨리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남자를 때리던 이브가 아주 무서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 지긋지긋한 테오도르는 또 뭐야?”
쿵-!
순간 테오도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지긋지긋해……?”
그가 목소리를 가늘게 떨며 물을 때였다.
“흑, 끄읍, 흡……. 지긋, 지긋하다고, 흑, 읍, 흐윽……. 하지, 마, 이브, 흑, 내가, 으으읍, 내가 미안해, 흐윽…….”
그녀의 발아래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있던 남자가 흐느끼며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난입한 남자를 향해 고개를 내리던 테오도르는 다시 한번 멈칫하고 말았다.
눈물에 온통 젖은 서러운 얼굴마저 고대의 남신처럼 잘생긴 저 남자는 틀림없는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 잘생긴 얼굴은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했는지, 이브에게선 냉랭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질질 짜지 마, 듣기 싫으니까.”
“으으윽, 흑…….”
테오도르와 똑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이브의 발치에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테오도르는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짧은 사이, 그녀와 저를 닮은 남자가 사라졌다.
“대체…… 이게 뭐지?”
테오도르가 멍하니 중얼거릴 때였다.
“뭐긴 뭐야. 이브가 널 때려죽이고 싶어 한단 거지.”
뒤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홰액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조금 맛이 간 눈을 하고 있는 밀가루 같은 자식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그를 발견한 테오도르의 표정 또한 살벌하게 가라앉았다.
저자가 에르빈을 흑마법의 제물로 사용하려고 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강한 살의가 치밀어 올랐다.
“네놈이 에르빈을…….”
“아쉽게 됐지. 그 걸리적거리는 애새끼도 치우고, 이브도 가질 수 있었는데.”
벤야민은 무엇이 그리 재미난지 배를 잡으며 키득키득 웃어 댔다.
황제를 향한 공대 따위도 모두 잊은 채였다.
“미친 건가?”
테오도르가 불쾌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벤야민이 두 눈을 번득이며 외쳤다.
“그래!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어! 이브가! 10년을 넘게 세상으로부터 숨겨 온 나의 이브가, 기어이 내 손을 벗어나겠다는데!”
“이브를 페르디난트에 가두고 고립시킨 게 너지?”
“고립?”
벤야민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근사한 표현이군. 세상에서 오직 그녀와 나, 단둘만 남는 거야.”
“에르빈과 이브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글쎄. 무슨 짓을 하려고 했을까?”
벤야민이 두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사르르 웃었다.
“말장난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테오도르는 이를 바드득 갈며 쏘아붙였다.
“너, 에르빈을 제물 삼아서 흑마법을 쓰려 했잖아.”
그러자 벤야민이 미친 자처럼 큭큭댔다.
“그래. 그 애새끼를 제물 삼아서 이브의 정신을 조작하려고 했지. 나만을 보고, 내게만 웃고, 내 품에 안겨서, 사랑을 속삭이게끔. 그렇게 몸과 정신까지 모두 내게 종속되도록.”
“뭐……?”
“완벽하잖아! 그녀의 모든 것이 내 소유가 되는 거야! 이것보다 더 완벽한 형태의 사랑이 어디 있어?”
“미쳤어? 그런 짓을 했다간 에르의 정신이……!”
“파괴되겠지. 그런데 그게 뭐?”
벤야민은 정말로 문제 될 건 하나도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이 쓰레기 같은 놈.”
테오도르가 경멸의 눈으로 벤야민을 보았다.
진심으로, 벤야민을 죽이고 싶어졌다.
벤야민 또한 같은 눈으로 테오도르를 보았다.
“네가 할 말인가? 난 그래도 이브를 대놓고 상처 준 적은 없어.”
“뒤에서 음습한 짓거릴 꾸미는 네놈보단 낫지.”
테오도르가 어금니를 바드득 갈며 맞받아쳤다.
“글쎄. 이브도 그렇게 생각할까?”
벤야민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
의미심장한 그의 표정에 테오도르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여긴 이브의 정신 속이고, 이브는 널 싫어해.”
벤야민은 단정적인 어투로 말했다.
“여기가, 이브의 정신 속이라고?”
“그래. 그중에서도 의식의 층인 것 같군.”
테오도르는 고개를 휙휙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발을 딛고 있는 곳이 이브의 정신 속이라고 생각하자, 이 공간이 갑자기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럴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네놈이 달려들지만 않았어도 완벽한 술식을 완성할 수 있었는데!”
벤야민이 원통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도 덕분에 한 가지 확실한 걸 알게 됐지. 이브는, 널 싫어한다고.”
씩씩거리며 화를 삼켜 낸 벤야민이 턱 끝으로 어딘가를 힐긋 가리켰다.
“저기 봐 봐. 이브가 쓰레기 같은 널 저주하고 있잖아?”
테오도르의 고개가 그를 향해 돌아갔다.
그러자 그곳에는 이브가 무심한 표정으로 다트를 던지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초상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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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테오도르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