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11_2
그러자 반대편에는 또 다른 이브가 있었다.
검은 머리, 황금색 눈을 지닌, 어떻게 보아도 테오도르를 흉내 낸 자그마한 헝겊 인형을 바늘로 쿡쿡 찌르고 있는 이브가.
“으음…….”
그것을 발견한 테오도르의 신음 소리가 더욱 깊어졌다.
“게다가 이브는 너를 아주 울보 찔찔이에 형편없는 놈으로 생각하는 것 같군. 참 볼썽사납기도 하지.”
벤야민이 큭큭거리며 비웃었다.
그리고 그의 말마따나…… 이브와 함께 있는 자신은 하나같이 서럽게 흐엉헝 울고 있었다.
“흑, 흐윽…… 이브, 나, 버리지 마…….”
“착한, 바퀴, 끕, 아니, 착한, 개가 될게…….”
“이브, 미, 미안해, 내가, 잘못, 흑…….”
그러니까 저 한심하게 그녀의 발치에서 질질 짜고 있는 것들은 저를 흉내 낸 흑마법 따위가 아니라, 그녀의 의식 속에 있는 자신의 형상들인 것이다.
‘내가 이브 앞에서 울긴 울었는데.’
테오도르는 조금 억울해졌다.
그는 원래 저런 식으로 못나게 우는 남자가 아니었다.
저렇게 우는 건 에른스트 같은 울보들이나 하는 거였다.
그녀의 앞에서 운 건 딱 두 번이었다.
그녀가 너무 좋아서.
그녀에게 미움받는 자신이 싫어서.
살아 있는 그녀를 만난 게 그처럼 벅차서.
그녀에게 용서받지 못할 짓들을 저지른 과거의 자신이 죽도록 미워서.
그럼에도 그녀를 사랑하여서.
그녀를 사랑해서 울었다.
그런데 이브가 자신을 저렇게 기억하고 있다니…….
“이제 확실히 알겠지? 이브가 널 얼마나 싫어하는지.”
어두워진 테오도르의 표정을 보며, 벤야민이 조롱하듯 말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그녀의 의식 속에 발을 들였다가 알게 된 것이라곤, 저를 향한 그녀의 악감정이 얼마나 많은지뿐이었다.
저렇게 잘생긴 얼굴로 예쁘게 우는데도, 그녀는 차갑고 매정했으며 다소 폭력적이기까지 했다.
잠잠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테오도르가 다시 시선을 들어 벤야민을 보았다.
테오도르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벤야민이 자신을 도발하고 있었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테오도르가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네 말대로, 이브는 나를 조금 싫어하나 봐.”
“조금이 아니라 때려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해, 너를.”
벤야민이 태연한 목소리로 테오도르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그렇지만 테오도르는 그 도발에 넘어가는 대신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그런데 벤야민 페르디난트.”
테오도르가 패배자를 내려다보는 승리자의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이브는 네 생각을 아예 안 하는데?”
흠칫.
순간 벤야민의 얼굴 위로 실금 같은 균열이 그어졌다.
“이거 봐, 이브의 정신 속엔 오직 나뿐이잖아? 너는 있지도 않아.”
“이 찢어 죽일 레오브란테!”
그건 벤야민이 이브의 정신 속에 들어오면서부터 내내 외면하던 사실이기도 했다.
도발에 곧바로 걸려든 벤야민이 테오도르에게 달려들었다.
벤야민은 이곳에서 테오도르를 마주치기 훨씬 전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녀의 아이를 제물 삼아, 그녀의 정신을 조작하여 제게 종속시킬, 그런 파괴적인 생각까지 할 정도로.
퍼억-!
벤야민이 테오도르의 얼굴을 주먹으로 쳤다.
테오도르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테오도르의 얼굴 위로 미미한 분노가 서렸다.
제 몸에 손댈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이브뿐이었다.
밀가루를 빻은 것처럼 생긴 벤야민 페르디난트 따위가 감히 손댈 수 없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이 개자식이!”
퍽-!
테오도르가 벤야민의 멱살을 붙잡으며 반격했다.
애석하게도 이 공간에서는 두 사람의 성력과 마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손과 발을 동원하여 몸으로 치고받고 싸워 댔다.
* * *
쇄애액-!
“끼에에에에엑!”
슈욱-!
“꾸웨에에에에엑!”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체르니시아의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마물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죽어 갔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마물들과 싸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녹색 단복을 입은 체르니시아의 기사들이 내 지휘에 맞추어 움직였다.
오랫동안 브리안이 음지에서 훈련시켜 온 기사들은, 나와 함께 합을 맞추는 게 이번이 겨우 두 번째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일사불란했다.
그들이 마물들을 한곳으로 몰아주면, 내가 도약하여 해치웠다.
하늘을 뒤덮은 마물들이 조금씩 흩어졌으나, 여전히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네.’
뺨에 튄 마물의 피를 손등으로 닦아 낼 때였다.
“이보네 님!”
“이보네!”
브리안이 셀린느와 레오브란테의 기사들과 함께 도착했다.
마침 적절히 도착한 브리안에게 기사들의 지휘권을 넘긴 뒤, 셀린느와 함께 마물들을 향해 돌진했다.
혼자였을 땐 조금 벅찼는데, 지원군이 오니 훨씬 더 수월하게 마물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수도로 돌격하던 마물들은 주춤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단 급한 불은 끈 것 같아요.”
간신히 정리된 상황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황제 폐하와 벤야민 님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요. 두 사람은 어디 있는 거지요?”
셀린느가 둘의 행방을 물었다.
그에 대답할 말을 고르던 때였다.
번쩍-!
어두운 하늘을 뚫고 강한 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보다 짙은 어둠이 밀려왔다.
“저곳은…….”
“황궁 쪽이에요!”
셀린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저쪽에서 강한 흑마력이 느껴져요.”
* * *
황궁은 금세 정리되었다.
황궁의 사용인들은 돌연 나타난 검은 마물들에게 당하였으며, 개중 발 빠른 몇몇은 황궁 밖으로 달아났다.
황궁을 지키던 기사들 또한 황제와 기사단장이 없는 와중에 용기 있게 저항하긴 했으나…….
“이, 이 마, 마, 마, 마물……! 죽어라!”
시종일관 따분한 표정을 하고 있던 테네브리스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황궁 기사 몇을 쳐다보았다.
기사들은 용맹하게 달려들었으나, 바닥에서 치솟은 검은 가시들이 그들의 몸을 꿰뚫었다.
“흐음…….”
테네브리스는 무언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왼손을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테네브리스 님?”
옆에서 제리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테네브리스의 왼손이 파스스 검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
제리코는 놀라 펄쩍 뛰었다.
“테네브리스 님, 소, 손이……!”
“아직 힘이 불완전해.”
그러나 정작 테네브리스는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곧바로 그의 손이 다시 자라났다.
‘겨우 인간 몇 상대하는 것으로도 이렇게 약해지다니.’
테네브리스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오랫동안 그의 영혼을 담고 있던 그릇은 너무 약했고, 부활한 몸은 예전과 같지 못했다.
보다 완전해지기 위해 제물이 필요했다.
테네브리스는 잠시 체르니시아를 닮았던 그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역시, 그때 조금 더 힘을 흡수했어야 했는데.’
막아선 남자아이로 인해 방해를 받은 탓에 흑마력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
“제리코.”
테네브리스가 허공을 향해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검은 연기가 울룩불룩 뭉치며, 허공 위로 자그마한 여자아이의 얼굴 형상을 만들었다.
“제물이다. 데려와.”
“네, 테네브리스 님!”
자세한 설명이 없었음에도 제리코는 곧바로 말을 알아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허공에서 꾸물거리던 검은 연기가 어디론가 이동했다.
제리코는 연기를 쫓아 밖으로 나갔다.
제리코가 떠난 뒤, 혼자 남은 테네브리스는 조금 전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체르니시아는?] [네?] [그녀는 어디에 있지?]그 물음에 제리코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두 눈을 끔뻑거렸다.
[테네브리스 님께서 영면에 드신 동안 세 분의 사도님들 모두 소멸했습니다. 체르니시아 님을 포함해서요.] [소멸……했다고?] [네, 벌써 수천 년도 더 지났는걸요. 이제는 고대 사도님들의 이름을 딴 가문들만 남았지요.] […….] [그들이 저희를 얼마나 박해했는지, 테네브리스 님께서도 아셔야 하는데!]이어진 제리코의 설명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가 잠들어 있던 사이, 체르니시아가 소멸했다.
수천 년 만에 다시 눈뜬 세상은, 그녀가 없는 세상이었다.
* * *
제리코는 검은 연기를 쫓아 체르니시아 저택 앞에 섰다.
검은 연기는 저택 안쪽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제리코는 저택의 담을 넘어 살금살금 안쪽으로 걸어갔다.
훌쩍거리는 아이들의 소리가 그의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다.
“히잉, 에르, 어몬니 갠찬게찌?”
“나도, 훌쩍, 나도 몬라(몰라).”
“몬루면 어캐!(모르면 어떡해!)”
“리아두 몬루쟈나!(모르잖아!)”
“하찌만…….”
이제 겨우 세 살 남짓, 서로를 꼭 닮은 자그마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훌쩍이며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오호라, 테네브리스 님께서 말씀하신 제물이 저 여자아이구나!’
제리코가 오딜리아를 발견하고 기뻐할 때였다.
벌떡-!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에르빈이 코를 킁킁거렸다.
“지지 냄새…….”
그러더니 이내, 정확하게 제리코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
‘흐익? 들킨 건가?’
당황한 제리코가 멍청하게 굳어 버렸다.
홰액-!
제리코가 자랑스러워하는 탐스러운 꼬리가 에르빈의 손에 붙잡혔다.
꼬리째로 거꾸로 들린 제리코를 쳐다보며 에르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모야, 이 지새꾸(쥐새끼)는?”
“이고(이거) 지새꾸 아냐, 에르! 이고 다람찌쟈나!”
어느새 훌쩍임을 그친 오딜리아가 에르빈의 옆에 찰싹 붙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제리코를 쳐다보았다.
“다랑지? 구롬(그럼) 이고 다랑지 욘싸(용사)야?”
“요기 바 바. 꼬리랑 줄무니. 다람찌야.”
“군데(그런데) 왜 다랑지 욘싸한테서 기분 나뿐 냄새 나지?”
“냄새?”
오딜리아는 제리코를 향해 코를 킁킁거려 보았다.
그러나 오딜리아는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했다.
“암 냄새두 안 나눈데?(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몬라(몰라). 이고 기분 나빠.”
에르빈이 가느스름하게 좁혀 뜬 눈으로 제리코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찌만 이고 기여운 다람찐데…….”
“리아 냄새 안 나?”
“웅, 안 나.”
두 아이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제리코는 도망칠 틈을 노렸다.
그러나 제 꼬리를 쥐고 있는 에르빈의 손힘이 어찌나 센지, 아무리 바둥거려 보아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가만 이써, 지새꾸.”
“아이참, 에르. 지새꾸 아니구 다람찌라니까.”
“시러, 이고 다랑지 아냐. 다랑지는 지지 냄새 안 나.”
“구롬 다람찌 리아 주면 안 대?”
오딜리아가 귀여운 표정으로 에르빈에게 부탁했다.
“리아는 다람찌가 가꼬(갖고) 시포.”
에르빈은 오딜리아가 그런 표정을 지으면 언제나 꼼짝 못 하곤 했다.
“윽…… 아라써, 리아. 지지 다랑지 리아 가져.”
“와아-!”
오딜리아가 신이 나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며 에르빈에게서 제리코를 건네받았다.
“꺄아, 에르, 이고 바! 다람찌가 너무 기요워!”
오딜리아가 제리코를 가슴에 포옥 안았다.
제리코는 대놓고 제게 불쾌한 기색을 보이던 에르빈에게서 벗어난다는 사실에 한시름을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패착이었다.
“다람찌야, 이름이 모야?”
“…….”
“웅? 다람찌, 말 몬태(못해)?”
“…….”
“에르, 이 다람찌 쫌 이상해.”
제리코가 답이 없자 오딜리아가 에르빈을 향해 말했다.
“왜 말을 몬타지(못하지)? 바보 다람찐가?”
“바, 바보라니! 이 제리코 님을!”
말 못하는 진짜 다람쥐 흉내를 내던 제리코는 바보란 소리에 발끈해서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어어?”
“헙!”
오딜리아의 눈이 솔방울처럼 커졌다.
제리코는 뒤늦게 짧은 두 앞발로 입을 가려 보았으나, 이미 늦었다.
“에르! 방금 바써? 말하눈 다람찌야!”
“수상한 다랑지야. 이거 다랑지 아닌 고 아냐?(이거 다람쥐 아닌 거 아냐?)”
에르빈의 표정은 더욱 험악해졌다.
“지지 냄새 나구, 말도 하구……. 이고 구냥 다랑지 아닌 고 가타.”
“마쟈! 구냥 다람찌 아니구 말하눈 다람찌야!”
오딜리아는 손뼉을 치며 신나 했다.
되도록 조용히 일을 처리할 생각이었던 제리코는 계획이 비틀린 것을 느꼈다.
‘젠장, 정체를 들킨 이상 이 자리에서 해치워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제리코가 마기를 끌어 올렸다.
검은 기운이 그의 주위로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했다.
‘감히 이 제리코 님에게 냄새난다고 한 저 남자아이부터…….’
한데 뭉친 마기가 에르빈을 향해 날아갔다.
“웅? 모야, 이고?(뭐야, 이거?)”
그러나 위협적으로 날아가던 검은 마기는, 에르빈이 손을 뻗은 순간 곧바로 흩어졌다.
“기분 나빠.”
“……!”
제리코는 경악하고 말았다.
비록 귀여운 다람쥐 모양새를 하고 있으나, 그는 테네브리스가 영면에 들던 그 긴 세월을 살아온 마물이었다.
그런데, 고작 세 살배기 남자아이의 앞에서 무력해지다니!
“지지 다랑지. 너 방곰(방금) 이상한 짓 해찌?”
에르빈이 표정을 무섭게 찡그리며 물었다.
제리코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에르, 다람찌한테 나뿌게 말하지 마.”
이때, 오딜리아의 다정한 목소리가 제리코를 구원해 주었다.
“착하게 말해야지. 에르는 착한 아이자나. 그치?”
오딜리아가 제리코의 탐스러운 꼬리를 쓰다듬으며 에르빈을 타일렀다.
“구치만(그렇지만), 방곰 저 다랑지가 수상핸는데…….”
“헤헤, 구로지 말구 다람찌랑 화해 해. 왜냐몬(왜냐면) 다람찌 이제 리아 부하거든.”
오딜리아에게 찰싹 안겨 있던 제리코가 의아한 얼굴로 두 눈을 끔뻑였다.
“……?”
제리코와 눈이 마주친 오딜리아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말하눈 다람찌! 너는 이제 리아의 부하야!”
“네, 부, 부하요?”
얼결에 존댓말이 나왔다.
“이고 비밀인데, 리아는 사실 다람찌 욘짜(용사)야. 다람찌 욘짜 젤리꼬야.”
오딜리아는 속닥속닥 귓속말을 했다.
“……!”
흠칫, 제리코의 몸이 굳으며 눈이 땡그래졌다.
“깜짝 놀라찌? 리아는 불도 뿜을 수 있고, 하늘도 날 수 이써. 왜냐몬 다람찌 욘싸 젤리꼬니까.”
최근 아이들에게 유행하는 다람쥐 용사 제리코 이야기는, 그가 만들어 뿌린 것이었다.
긴 시간 테네브리스의 부활을 기다리던 그가 가진 유일한 취미가 바로 갖은 설화들을 만들어 사람들 사이에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만든 이야기 속 다람쥐 용사 제리코는 당연히 불도 뿜지 못하고 하늘도 날지 못했다.
왜냐하면, 다람쥐니까.
“욘싼님(용사님)에겐 부하가 필요해. 리아가 특별히 부하 삼아 주께.”
“와아, 리아 부하 생겨써?”
“웅, 요 다람찌가 리아의 부하야!”
졸지에 제리코는 오딜리아의 부하가 되고 말았다.
“다람찌! 저기 가서 도또리 주워 와!”
“네? 도, 도토리요?”
“웅, 도또리. 다람찌가 도또리도 몬라?”
내내 상냥하던 오딜리아의 얼굴이, 조금 전 에르빈의 것처럼 험악해졌다.
“다람찌가 어캐(어떻게) 도또리를 몬룰(모를) 수 이찌?”
오딜리아가 무섭게 제리코를 쳐다보았다.
“이고 다람찌 아닌 고 아냐?”
“에르가 이고 지지 냄새 나구 수상하다 해짜나.”
“아, 아니, 도, 도토리는 아는데…….”
“구롬 빤리(빨리) 주워 와! 빤리, 빤리!”
지금은 도토리를 찾기 힘든 봄이었다.
할 수 없는 것을 시키는 오딜리아로 인해 제리코는 조금 억울해졌으나, 일단 알았다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력으로 가짜 도토리를 만들어서 저 여자아이를 붙잡아야겠군. 그다음에 테네브리스 님에게 데려가면 완벽한 계획이야.’
제리코는 근처에 있는 나무둥치로 걸어가 도토리를 찾는 척하며 생각했다.
“빤리 몬태?(빨리 못해?)”
“아, 네, 네! 지금 주워 갑니다!”
제리코는 가짜 도토리를 만들어 오딜리아에게 뛰어갔다.
그러다 바닥에 난 커다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데굴, 데굴, 데구루루-
그가 흑마법으로 만들어 낸 가짜 도토리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리고 이내,
펑-!
도토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졌다. 하필이면 이브가 아끼는 꽃나무 앞에서.
“…….”
“…….”
순간 두 아이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어모니가 아끼시는 꼰나무(꽃나무) 망가져써…….”
“저 다람찌 때무네…….”
에르빈과 오딜리아의 차가운 시선이 제리코에게로 향했다.
으스스한 시선에 제리코는 몸을 움츠렸다.
살기등등한 기운은 세 살짜리 아이들이 내뿜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흉흉하고 험악했다.
제리코는 이렇게 흉악한 기운을 풍기는 사람을 딱 한 명 알고 있었다.
‘꼭…… 테네브리스 님 같잖아!’
특히나 기분이 안 좋은 듯 한쪽 눈썹을 치켜뜰 때의 표정이 그와 꼭 닮았다.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팔짱을 끼고서 어머니가 아끼는 꽃나무를 망가뜨린 이 무례한 다람쥐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때였다.
바깥에서 사람들의 도착 소리가 들려왔다.
이보네를 선두로 브리안과 셀린느, 그리고 두 가문의 기사들이 함께였다.
“앗, 어모니 오셔따!”
“어몬니 다뇨셔쪄요(다녀오셨어요)?”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곧바로 이보네에게 달려가 안겼다.
“어모니 아야 한 데 엄써요?”
“리아랑 에르가 저택 씩씩하게 잘 지켜써요!”
“에르랑 리아랑 안 울었어요. 울몬(울면), 어모니 속쌍하니까.”
“리아랑 에르랑 착한 아이에요.”
그럴 적에 아이들의 표정과 말투는 조금 전 제리코를 향해 보이던 것과 무척 상반되었다.
이보네의 앞에서 세상 착한 천사처럼 행동하는 아이들의 이중적인 면모에 제리코는 당황했다.
“그래, 어머니가 없어도 씩씩하게 울지 않고, 정말 대단해 우리 에르, 리아.”
이보네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헤헤 웃음을 터뜨렸다.
무척 사랑스럽고 귀엽고 무해한 웃음이었다.
‘험악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이중인격이잖아?’
그런 그들의 모습에 제리코의 안색이 점점 안 좋아졌다.
이때였다.
“어머, 이건 마물이에요!”
제리코를 발견한 셀린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제리코에게 돌아갔다.
제리코는 제게 쏟아진 시선들에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마물이라고요? 다람쥐가 아니라?”
“체르니시아 저택에는 다람쥐가 살지 않아, 이보네.”
이보네와 브리안이 각기 한마디씩 던졌다.
“흑마력의 기운이 느껴져요.”
“그럼 죽여야 하나요?”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제리코는 점점 사색이 되어 갔다.
“어몬니, 어몬니.”
위기 속에서 제리코를 구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오딜리아였다.
“이케 기요운데 죽여야 해요?(이렇게 귀여운데 죽여야 해요?)”
오딜리아가 무척 귀엽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이보네를 쳐다보며 물었다.
“다람찌, 리아 부한데…….”
“하지만 리아, 이 다람쥐는 마물이라잖아. 괜히 옆에 두었다가 위험할 수도 있어.”
“구리고 다람찌, 말도 잘 드러요. 구치, 다람찌?”
제리코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이보네가 삐딱하니 팔짱을 끼고서 제리코를 들여다볼 때였다.
“이보네 님!”
린든이 심각한 표정으로 찾아왔다.
“린든 경?”
“아, 셀린느 님도 함께 계셨군요. 마침 잘됐습니다.”
“무슨 일이죠? 아니, 그보다 폐하는 찾았나요?”
그녀의 물음에 린든의 표정이 침통하게 가라앉았다.
“어디서도 폐하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페르디난트의 가주도 마찬가지고요.”
“신관들은 만나 봤나요? 벤야민이 흑마법의 서를 들고 있었어요. 흑마법에 연관된 게 틀림없어요.”
“네, 일단 최근 제국에 들어온 신관들에게 협조를 구해 둔 터입니다.”
“…….”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그분이 어디 가서 그렇게 쉽게 죽을 분은 아니잖습니까.”
걱정스러운 이보네의 표정에 린든이 서둘러 덧붙였다.
“폐하께서는 이보네 님을 찾으려고 서쪽 대륙에 전쟁까지 일으키신 분입니다. 이렇게 이보네 님이 돌아오셨는데, 억울해서라도 쉽게 죽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 말이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는지, 이보네의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그보다…… 지금 황궁이 점령당했습니다.”
“네? 점령당하다니요?”
“지금 황궁이 마물들에게 점령당해…….”
“마물이요?”
그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황궁 쪽 하늘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