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11_5
그리고 지금 막 그 생각은 확신이 되었다.
‘그 인간 황자랑 친구였었지.’
쓸데없이 유약해서 툭하면 눈물을 흘리던, 저를 담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라던 하찮은 인간 황자.
테네브리스는 자신의 영혼이 막 ‘그릇’ 안에 움트던 순간을 떠올렸다.
고목이 자라던 페르디난트의 안뜰은 과거 테네브리스가 봉인당한 장소였다.
승리를 기념하여, 페르디난트의 후손들은 경사가 있을 때 그곳에서 축복을 했다.
그 전통이 조금씩 변화하여 임신한 부부가 그곳에 와 축복을 비는 관습이 자리 잡았다.
긴 영면 속에 고요히 눈 감고 있던 테네브리스는, 어느 날 어떤 예고도 없이 문득 눈을 떴다.
그 또한 이유를 알 수 없을 만큼 갑작스러운 기상이었다.
그러나 그를 담을 ‘그릇’이 없던 탓에 테네브리스는 형체 없이 세상을 부유해야 했다.
강한 힘을 좇아 그를 깨우고자 하는 이들은 수천 년에 걸쳐 주욱 있어 왔다.
루돌프와 마르가라테 또한 그들 중 하나였다.
황제의 아이를 임신한 마르가라테는 페르디난트의 오랜 관습에 따라 축복을 위해 고목 앞에 섰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배 속에 잉태된 가장 순수한 어린 영혼을 재료로 바쳐 ‘그릇’을 만들었다.
그때 희생된 에른스트의 진짜 영혼은 수년간 테네브리스의 양분이 되어 서서히 말라 갔다.
그리고 그들은 그간 찾아낸 세 개의 영혼 조각을 ‘그릇’ 안에 담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테네브리스가 완전히 깨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를 유지하기 위해 제물이 필요했고, 마르가라테는 제물을 유지하기 위해 가호를 받은 자들의 생명을 바쳤다.
매일 밤, 황궁에서 시체가 나왔다.
테네브리스의 ‘그릇’을 유지하기 위해 바쳐진 제물들이었다.
차츰 황궁 내에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어느 순간 사람들은 검은 머리를 타고난 테오도르 1황자를 소문 속 주인공으로 지목했다.
물론 여기에는 마르가라테의 뒷공작이 있었다.
마르가라테는 ‘보호’라는 이름으로 에른스트 2황자를 꼭꼭 감추어 사람들 앞에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를 차대 황제로 옹립하고자 루돌프와 함께 힘을 썼다.
대륙을 호령하는 제국 알브레히트.
장차 그것을 통째로 테네브리스에게 바치기 위해.
테네브리스는 에른스트라는 ‘그릇’ 속에서 조금씩 힘을 키워 갔다.
과거, 세상을 창조하였던 브리힘 신은 자신을 모시는 네 명의 종을 두었다.
빛의 길잡이, 레오브란테.
하늘의 대리인, 페르디난트.
땅의 인도자, 체르니시아.
어둠의 집행관, 테네브리스.
그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브리힘 신의 섭리를 펼치며, 여러 신도들을 거느렸다.
그리고 그들의 힘은 그 명성에 비례했으니, 그들을 좇는 자들이 많을수록 그 세력도 더욱 커졌다.
그러나 현세대에 악으로 규정되어 ‘고대의 어둠’이라 불리는 테네브리스의 이름을 당당하게 내세우는 자는 없었기에.
음지에서 자행되는 흑마법은 그를 깨우기에 너무나 미약했다.
루돌프와 마르가라테가 흑마법을 발동시키기는 하였으나, 테네브리스에게는 부족한 수준이었다.
위기의 순간 또한 있었다.
군터 체르니시아, 그와 마주친 순간 그의 검집에 박혀 있던 푸른 에메랄드가 제게 반응했으니까.
본래 제 영혼의 조각이기도 하였던 그 보석을 그들이 나누어 가진 건, 혹시나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는 저를 감지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당신, 정체가 무엇입니까!] [왜, 왜 그러는 거야……?] [당장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나, 나는 2황자 에른스트…….]이 비루한 몸뚱이는 울먹이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내버려 두면 애써 자리 잡은 ‘그릇’이 이대로 부서질 판국이라, 테네브리스는 직접 움직이는 것을 택했다.
그가 그려 낸 술식에 걸려든 군터는 황제를 자신으로 착각했고, 끝내 황제의 몸에 검을 쑤셔 박았다.
그 순간 뒤늦게 술식이 해제되며 정신을 차렸으나, 이미 그가 황제를 시해하려 한 정황을 모두가 보고 난 뒤였다.
그 여파로 테네브리스는 한동안 힘을 잃고 ‘그릇’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툭하면 눈물을 흘리는 유약한 어린 황자의 영혼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단단하였다.
이보네, 그러니까 지금 제 목에 검을 들이밀고 있는 저 여자를 향한 기다림이 그의 영혼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어진 루돌프와 마르가라테의 죽음으로 인해 그 영혼이 동요하지 않았더라면, 테네브리스의 영혼은 볼품없게도 하찮은 ‘그릇’ 따위에게 먹혔을지 모른다.
그리고 다시 만난 이보네의 죽음으로 ‘그릇’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벤야민의 흑마법이 테네브리스를 다시 깨웠다. 물론 벤야민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후로 테네브리스는 완벽한 부활을 위해 움직였고…….
테네브리스가 한참 그러한 과거를 되짚고 있을 때였다.
“그래.”
돌연 눈앞에서 들려온 단호한 목소리가 그의 생각을 멈추게 했다.
테네브리스는 멈칫하며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가 언제 동요했냐는 듯 곧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검날을 세웠다.
“필요하다면 너를 죽일 거야, 얼마든지.”
“윽…….”
검날이 닿는 자리의 살갗이 찢어지며, 그 사이로 검은 기운이 새 나왔다.
검을 쥔 손에 힘이 꾸욱 들어갔다.
나는 내 눈앞에 있는 에른스트…… 아니, 에른스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알 수 없는 존재를 노려보았다.
‘에른스트가 아니야.’
핏빛처럼 선명한 붉은 눈동자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를 죽일 거야, 이보네?]에른스트와 닮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던 순간에 조금 흔들리긴 했으나, 이자는 결코 에른스트가 아니었다.
에른스트라면 절대 지을 리 없는 표정과 목소리.
조금 전, 나와 셀린느를 공격하기 위해 곳곳에서 우수수 피어난 수십 개의 검은 가시들.
그리고 사람이라면 마땅히 피를 흘려야 하는데, 검날에 찢긴 살갗에 새 나오는 것은 붉은 피가 아닌 검은 연기였다.
‘그럼 대체 뭐지?’
마물이라기에는 훨씬 더 고등한 생명체 같았다.
[어둠…… 가장 깊고 위험한 어둠이에요!]셀린느는 그를 가리켜 가장 깊고 위험한 어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혹 이 남자가…….
“고대의, 어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남자를 보며 그렇게 읊조렸다.
그러자 에른스트의 얼굴을 한 남자가 비릿한 웃음을 내지었다.
그 순간 그가 에른스트와 다른 존재라는 게 강하게 느껴졌다.
“고대의, 어둠이라.”
키득키득.
남자의 잇새로 조소가 터져 나왔다.
“그래, 이 세대의 사람들은 날 두고 그렇게 부른다지.”
“……!”
순순히 인정하는 말에 나는 멈칫하며 그를 보았다.
“나의 진명은 테네브리스.”
나른하게 입매를 비틀어 올린 남자가 나긋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순간 발을 딛고 서 있는 땅 위로 미세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브리힘 신의 가장 뛰어난 종이자 어둠을 다스리는 집행관.”
남자의 주위로 피어난 검은 기운들이 일렁거리며 주변을 새까맣게 물들였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윽…….”
그러나 내가 검날을 세우는 순간 남자의 여유가 곧바로 깨졌다.
“당장 저거 치워.”
나는 검을 고쳐 잡으며 금방이라도 그의 목을 베어 낼 듯 무섭게 위협했다.
“젠장.”
남자가 욕설을 내뱉으며 검은 기운을 없앴다.
‘말도 안 돼. 테네브리스라면 악으로 규정된 고대 사도 중 하나잖아. 고대의 사도가 어떻게…….’
나를 노려보고 있는 차가운 붉은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보며 생각할 때였다.
“이보네…….”
갑자기 그가 서글픈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가 울먹울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에른스트의 얼굴이었다.
“이보네, 나 아파…….”
에른스트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의 목에 겨눠진 검날을 맨손으로 쥐었다.
“이보네, 이거 치워 줘. 무서워.”
그의 손바닥이 찢어지며 그 사이로 검은 기운이 새 나왔다.
‘흔들리면 안 돼. 저건 사람이 아니야.’
나는 피 대신 흐르는 검은 기운을 쳐다보며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나, 나란 말야, 에른스트.”
그가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채로 훌쩍훌쩍 울었다.
“이제 내가 싫어진 거야?”
“너, 에른스트의 흉내를 내는 건 당장 그만…….”
“왜? 내가 테오도르 형님보다 못나서 그래?”
그의 입에서 테오도르의 이름이 나온 순간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래서 날 속이고 사라졌던 거야?”
서러운 목소리로 에른스트가, 아니, 에른스트를 흉내 내고 있는 고대의 어둠이 물었다.
“허튼소리 말고…….”
“좋아해.”
이어진 그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멈칫하고 말았다.
“내가 널 좋아했던 거, 너도 알고 있잖아.”
“……!”
순간 당황하여 사고가 정지되었다.
“하지만 너는 그걸 어린 날의 지나가는 감정이라 생각했지.”
“무슨…….”
“테오도르 형님만 널 좋아한 게 아니야. 나도 널 좋아했어.”
남자는 마치 자신이 정말 에른스트라도 된 것처럼 울며 고백했다.
“좋아해, 이보네.”
“…….”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내가 굳어 있는 사이 그의 주위로 검은 기운들이 다시 피어났다.
그것들이 검은 가시의 형태로 변해 가는 무렵이었다.
쿠과과과과과과과광-!
요란한 굉음과 함께 주위가 흔들렸다.
“에른스트, 이 미친 새끼! 어디서 이브에게 개수작질이야!”
퍼억-!
별안간 뒤쪽에서 뛰어 들어온 남자가 테네브리스의 멱살을 움켜잡고 밀어 넘어뜨렸다.
검은 뒤통수만으로도 잘생긴 저 남자는…….
“테오도르?”
테네브리스의 위에 올라타 그를 제압한 남자는 다름 아닌 테오도르였다.
“폐하!”
“폐하, 어딜 가셨다가 이제 나타나신……!”
바깥에서 마물들을 막던 린든과 기사들도 뒤따라 들어섰다.
“젠장, 이건 또 뭐……. 레오브란테?”
테오도르의 아래에 깔린 테네브리스가 그의 황금색 눈동자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흉악한 기운을 가진 레오브란테가 있다고?”
테네브리스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느새 그가 풍기던 검은 기운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테오도르가 등장한 순간부터.
“테오도르? 어떻게 된 거야?”
“구하러 왔어, 여신님.”
그가 나를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그 말에 소름이 돋았다.
“미쳤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경악하여 되묻자, 그는 더욱 짙게 웃었다.
“별론가? 그럼 정정할게. 테오가 도우러 왔어요, 주인님.”
그러고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테오는 착한 개새끼니까.”
나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끔찍하단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는 그의 아래에 깔려 있던 테네브리스마저.
“미친 인간인가…….”
“형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에른스트.”
테오도르가 곧바로 고개를 홱 돌려 테네브리스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황궁이 아주 난장판이 되었던데.”
그가 비식 웃으며 사납게 물었다.
“에른스트, 네 짓인가?”
“테오도르! 네 아래에 있는 거, 에른스트가 아니야. 에른스트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다른 존재야.”
“다른 존재?”
테오도르는 테네브리스의 붉은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테네브리스?”
“나를 바로 알아보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에른스트를 흉내 낸 밝은 백금발이 새까맣게 물들며 길어졌다.
분명 에른스트의 이목구비가 남아 있었으나, 그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분위기 때문인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테오도르는 그런 테네브리스를 내려다보며 으르렁거렸다.
“부활했으면 곱게 있을 것이지, 감히 내 얼굴도 아니고 에른스트 따위의 얼굴로 나의 이브에게 수작질을 부려?”
“저자가 황궁의 사람들을 죽이고 마물들까지 불러일으켰습니다!”
린든의 보고에 테오도르의 표정이 더욱 안 좋아졌다.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건진 모르겠지만, 내가 이곳까지 오면서 본 것처럼 그 또한 보았을 것이다.
고작 반나절 사이에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마물들로 뒤덮인 황궁의 모습을.
순간 테오도르의 주변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주위로 수십 개의 황금색 빛무리가 피어나더니 일제히 단검의 모양을 띠었다.
‘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무심결에 의문이 하나 들었다.
‘이제 보니…….’
아까는 생각지 못했는데, 조금 전 테네브리스가 수십 개의 검은 가시를 피워 내던 모습과 조금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이놈을 죽이면 되는 건가.”
테오도르가 테네브리스를 향해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테오도르의 등장 이후로 아주 작은 힘도 쓰지 못하던 테네브리스가 두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나를 죽이면, 저 여자가 아끼는 그 인간 황자가 죽을걸?”
“뭐?”
“그 황자는 나를 유지하는 ‘그릇’이었으니까.”
순간, 아까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게 생각이 났다.
[내 그릇을 만드는 데 소모된 하찮은 인간 황자가 아닌가.]테네브리스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그릇’을 만드는 데에, 인간 황자가 소모되었다고.
그리고 그가 말하는 인간 황자는 틀림없이 에른스트일 것이다.
나는 참지 못하고 검을 쥐고서 다가갔다.
그러고는 테오도르의 아래 깔린 테네브리스를 향해 검 끝을 겨누었다.
“말해, 에른스트를 어떻게 한 거야? ‘그릇’이니 뭐니, 그건 무슨 소리지?”
녹색 검기를 두른 검 끝이 테네브리스의 가슴을 금방이라도 찌를 듯 위협했다.
황궁의 기사들은 에른스트가 마물이 되었다고 그랬다.
에른스트가 마물이 되어, 황궁을 점령했다고.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에른스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얼굴만 흉내 낸 게 아니었다.
나를 향해 울먹이던 표정, 목소리, 에른스트 본인이 아니라면 꺼낼 수 없던 말들…….
“말 그대로. 이 몸은 나를 깨우려던 이들이 내 영혼을 담기 위해 만든 ‘그릇’이다. 이 육신 안에 있던 본래의 순수한 영혼은 어미의 배 속에 잉태되었을 때부터 나를 위해 바쳐졌지.”
“뭐……?”
아주 잠시,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곱씹을 때였다.
“젠장. 그러니까 사랑스러운 내 이복동생이, 사실은 고대의 어둠을 깨우기 위한 ‘그릇’이었다는 거잖아?”
테오도르가 아주 잘 아는 이야기를 하듯 이를 바드득 갈며 말했다.
“호오, ‘그릇’에 대해 아나 보네, 인간?”
테네브리스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테오도르를 올려다보았다.
“순수한 영혼이라는 게 설마…….”
“세상의 빛을 만나지 못해 때 묻지 않은 배 속의 영혼 말이야.”
테네브리스는 키득키득 웃으며 설명했다.
테오도르의 얼굴이 완벽하게 구겨져다.
“마르가라테…… 그 미친 여자가 그딴 짓을 벌인 건가. 하, 아버지도 불쌍하시지. 인간도 아닌 것을 황궁에서 기르고 있었군.”
“맞아, 그 비루한 인간 황자의 영혼은 나의 양분이 되어 말라비틀어졌지. 내가 완전히 부활하는 날, 완벽하게 소멸할 거야.”
그들의 대화를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테오도르,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마르가라테가 배 속에 있던 에른스트를 제물로 바쳐 저자를 깨울 ‘그릇’을 만든 거야.”
“배 속에 있던……?”
“그래. 그러니까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에른스트는 인간이 아니라 저것의 ‘그릇’이었다고.”
“……!”
나는 충격받은 얼굴로 테네브리스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그 얼굴 위로 얼핏 남아 있는 에른스트의 이목구비를 좇았다.
어지간한 남자들은 다 밀가루라던 눈 높은 오딜리아가 유독 예쁘다며 좋아했던, 겁 많은 고양이 상의 얼굴…….
“그럼 저자를 죽이면…….”
“에른스트도 죽는 거지.”
테오도르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검을 쥔 내 손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에른스트가…… 죽는다고?
[이보네!] [그럼 술래는 내가 할래!] [이, 이보네에…… 흐아아아아앙.] [이보네! 내가 꼭 다시 너를 데리러 올게! 체르니시아의 억울함도 풀어 주고, 너의 가족들 모두 찾아서 데리러 올 거야!] [미안해, 미안해, 이보네. 약속을…… 너와 약속을…….] [많이 힘들면 나랑 같이 나갈래?]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뭐, 못 질 것도 없지.]나의 착하고 눈물 많은 친구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죽이지 않으면…….’
빛을 잃은 태양과 어두워진 세상, 하늘과 땅을 뒤덮은 마물들, 그리고 이곳에 오면서 보았던 죽은 사람들.
짧은 반나절 사이에도 막심한 피해가 일었다.
고대의 어둠, 테네브리스를 죽이지 않으면 세상은 더 큰 피해를 볼 것이다.
무엇보다 내게는 체르니시아의 가주로서 그를 없애야 할 의무가 있었다.
‘에른스트…….’
울컥, 밀려오는 감정에 목구멍이 따끔따끔 아파 왔다.
나의 친구는 어머니의 배 속에서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고대의 어둠을 깨우기 위한 ‘그릇’이 되기 위해 희생되어 왔다고 했다.
에른스트를 희생시킨 이는 다름 아닌 그의 생모였던 마르가라테 황후…….
그녀의 의지로 인해 에른스트는 세상을 위협하는 존재로 태어나 길러져야 했다. 그 스스로도 사실을 모른 채로.
알게 된 사실이 나의 친구에게 너무나 잔인했다.
그리고, 또한 내게도.
[고대의 어둠을 물리치고 마물로 뒤덮여 있던 세상을 구한 세 명의 사도 중 하나가 바로 체르니시아야. 우리는 그녀의 유지를 이어받았고.] [알겠니, 이보네? 약자들을 보호하는 게 체르니시아의 의무란다.] [네가 체르니시아라는 사실을 언제든 잊으면 안 돼.]‘하지만 내가 어떻게 에른스트를 없애?’
생각만으로 몸이 후들후들 떨려 왔다.
‘에른스트는…… 에른스트잖아. 무엇으로 태어났든, 에른스트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에른스트를…….’
끔찍했다.
도무지 머릿속이 진정되질 않았다.
짧은 심호흡을 하고서 다시 테네브리스를 보았다.
에른스트의 흉내를 내는 건 완전히 포기한 듯, 그는 차갑고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쥐고 있는 검 끝이 그의 심장을 노리고 있음에도.
“정말 나를 죽이려고?”
테네브리스는 비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황자님만 불쌍하게 됐네. 좋아하는 여자애도 형님에게 두 번이나 빼앗겼는데, 이제는 그 여자애의 손에 죽는 거잖아.”
“닥쳐.”
킥킥거리며 말하는 그 모습에 화가 났다.
“에른스트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모른 척하고 싶나 보군. 하지만 정말이다. 내가 몸 담고 있는 ‘그릇’의 감정도 모를까 봐.”
“…….”
“이 황자님은 널 좋아했어. 어렸을 때도, 다시 만난 뒤에도, 그리고 지금도.”
말문이 턱 막혔다.
어린 날의 소꿉친구였던 에른스트.
그가 어렸을 때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던 걸 알고 있다.
언니들에게 종종 눈치가 없다는 소리를 듣던 나마저도 알아챌 만큼, 티가 나게 나를 좋아했었다.
하지만 다시 만난 에른스트는 한 번도 내 앞에서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재미있는 거 알려 줄까?”
테네브리스는 남 이야기를 하듯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그 인간 황자의 영혼은 죽지 않았어. 내가 완벽하게 부활할 때까지 사용될 나의 양분이니까. 생명력을 잃고 말라 갈 뿐이지, 죽지 못하거든.”
일순 그가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그런데 그 인간 황자가 지금 이 대화를 모두 듣고 있어. 이 안에서.”
“……!”
“부끄러운가 봐. 내가, 자신의 비밀을 말해서.”
테네브리스가 눈꼬리를 가늘게 휘며 말했다.
“그냥 죽여 달래. 널 괴롭게 하고 싶지 않다고.”
저 말을 모두 믿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저 말이 정말이든 아니든…….
욱신-
마음이 아팠다.
나도 모르게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주륵, 뺨을 타고 내려온 눈물이 턱 끝에 아롱져 아래로 떨어졌다.
그것을 본 테네브리스의 얼굴 위로 더욱 짙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러니 네 손으로 직접 이 가엾은 황자님의 소원을 들어주는…… 윽…….”
퍽-!
큭큭거리며 웃던 테네브리스의 얼굴을, 테오도르가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브가 닥치라잖아.”
“인간 황제 따위가……!”
퍼억-!
으르렁거리는 테네브리스의 반대편 얼굴을, 테오도르가 다시 한번 내리쳤다.
“이브, 내가 할게.”
허공 위로 둥둥 떠다니던 황금빛 단검들이 하나로 뭉치는가 싶더니 길쭉한 장검이 되었다.
테오도르가 성력으로 만들어 낸 황금빛 검을 손에 쥐었다.
“테오도르……?”
“착한 강아지가 되기로 했지만, 딱 한 번만 나쁜 개새끼 할게. 나중에 혼내 줘.”
“하지만……!”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 것과 달리 테오도르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차라리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에른스트는 네게도 가족이잖아.”
“…….”
그 말에 테오도르가 잠시 침묵했다.
“알잖아, 이브. 나는 인성이 못돼 처먹은 놈이라는 거.”
그러더니 이내 나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네 말마따나 난 쓰레기고.”
“…….”
“쓰레기가 쓰레기 짓 하는 거야. 너는 그냥 나를 욕하면 돼.”
후득, 후드득-
그 말에 안심이 되기는커녕, 눈물만 더 거세졌다.
에른스트가, 이제는 내 유일한 친구인 그 애가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너무 잔인했다.
* * *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가 버린 테오도르 때문에 잔뜩 토라져 있었다.
어찌나 토라졌는지, 다람쥐처럼 빵빵한 양 볼이 제리코의 것보다 더욱 부풀었다.
“지지 아조씨 믿으면 안 됐어.”
“함종(함정)을 더 크게 파서 혼내 조야 해.”
테오도르는 벤야민의 신병을 브리안에게 넘기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케 그럴 수가 있지. 리아가 기엽게 눈 깜빡핸눈데.”
오딜리아는 제가 두 눈을 앙증맞게 깜빡이며 부탁했는데 들어주지 않는 사람은 이보네 제외하고 처음 보았다.
“어케 그럴 수가 있지. 에르가 기엽게 머리 비비 핸눈데.”
에르빈 또한 제가 팔에 매달려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렸는데 들어주지 않는 사람은 이보네를 제외하고 처음 보았다.
“다람찌, 넌 이게 말이 된다구 생각해?”
“네, 말도…… 안 되지요.”
제리코는 해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