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12_2
아무래도 제가 지금 깃들어 있는 곳이 본래의 제 몸이 아니라 그런 듯했다.
“후…….”
테오도르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돌아갈 방도는 보이지도 않고…….”
그때 그렇게 시공이 뒤흔들린 이후로, 이브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혹 저처럼 다른 시공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건 아닐까?
만약 그런 거라면 큰일이다.
저택에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에르빈과 오딜리아도 있었다.
부디 아이들이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그녀가 길을 잘 찾아 집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음?”
문득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테오도르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하늘의 대리인, 페르디난트가 있었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테오도르는 제 안에서 증오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지긋지긋한 페르디난트.
이곳에서마저 저 이름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레오브란테고, 페르디난트고 다 꼴도 보기 싫었다.
불쾌감을 견디지 못한 테오도르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려던 때였다.
멈칫.
테오도르는 그 자리에 멈추어 두 눈을 찌푸렸다.
‘뭐야, 저 새끼.’
새로운 사실을 알아차린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랑 똑같은 눈으로 이브를 보고 있잖아.’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벤야민 또한 항상 그런 눈으로 이브를 보았다.
그러다 결국엔 미쳐 버려서, 에르빈을 인질 삼아 이브를 속박하려 했었다.
“아냐, 에르빈은 지금쯤 체르니시아 저택에 안전하게 있을 거고…….”
애써 스스로를 안심시키려던 테오도르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나직한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에르빈이 보고 싶었다.
살랑살랑 속눈썹을 흔들며 두 눈을 깜빡이던 그 사랑스러운 몸짓이 보고 싶었다.
오딜리아도 보고 싶었다.
배시시 웃으며 주변을 환해지게 하는 오딜리아의 맑은 미소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브…….
자신을 기억하고 자신이 사랑했던, 그 이브가 보고 싶었다.
이브와 같은 영혼을 지닌 그녀의 전생 같은 게 아니라, 저와 같은 시간을 공유하였던 그 이브를…….
제게 쓰레기라며 욕하던 그 차가운 모습마저도 너무 그리워서, 테오도르는 울음을 삼키기 위해 소리 없이 가쁜 숨만 내쉬었다.
이브가, 너무 보고 싶었다…….
* * *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테오도르가 깃들어 있던 육신의 머리카락이 상당히 길어졌을 무렵.
테오도르는, 어쩌면 제가 벌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브의 그 어여쁜 눈동자에서 눈물을 흘리게 한 죄로, 더 이상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는 징벌을.
그녀와 같은 얼굴과 그녀와 같은 영혼으로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그녀를, 쓸쓸하고 초라하게 지켜봐야 하는 징벌을.
저와의 옛 기억들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는 이브의 앞에서, 차마 우리에게 그러한 시간들이 있었노라고 말하지 못하고 홀로 괴로워해야 하는 징벌을.
매일 밤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이브가 있는 세계로 돌아가길 소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매일 아침 무참히 깨지고 조각나 시간의 흐름 속에 너덜너덜해져 갔다.
어쩌면 영영 이루어지지 않을 바람인지도 모른다.
이브를 영영……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야. 방법이 있을 거야.’
테오도르가 애써 그런 불길한 생각을 떨치던 때였다.
“헉, 헉! 테네브리스 님! 큰일, 큰일 났습니다!”
사색이 되어 그를 찾아온 어린 소년의 외양을 한 마물의 이름은 제리코였다.
제리코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마물들이, 마물들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뭐……?”
마물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제리코처럼 생각하고 말을 할 수 있는 상급의 마물들과, 욕구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하급 마물들.
상급 마물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다른 개체들과 조화를 이루며 어울려 살아가며 하급 마물들을 지배했다.
인간들 또한 그들을 적으로 분류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일부 하급 마물들이 통제에서 벗어날 때가 있기도 했다.
그럴 때면 사도들이 마물들을 해치워 인간들을 보호했다.
그런데 제리코는 지금 그 하급 마물들뿐만 아니라 일부 상급 마물들까지 미쳐 날뛰고 있다고 전하고 있었다.
“대체 왜……?”
“페, 페르디난트! 페르디난트 그자가……!”
제리코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그자가 마물들에게 이상한 짓을 했습니다!”
“그자가 왜……?”
떨떠름하게 대꾸하던 테오도르의 머릿속에 문득 스치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제가 이브의 옆에 찰싹 붙어 있는 레오브란테를 보고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있을 때.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자의 눈으로 그를 쳐다보던 페르디난트.
“젠장.”
테오도르는 곧바로 제리코와 함께 움직였다.
그리고 레오브란테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위, 위험합니다, 테네브리스 님!”
기절한 레오브란테를 덮치고 있는 것은 상급 마물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마물이었다.
마물은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채로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당장, 멈춰.”
테오도르가 스산한 목소리로 위협했으나, 이지를 잃은 마물은 어떤 대화도 통하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먹히기 직전의 상태인 레오브란테를 보았다.
처음 본 순간부터 저자가 마음에 안 들었다.
[어리석긴. 내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다면, 난 그 남자를 죽여서라도 내 사랑을 쟁취할 거야.]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여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테오도르는 지금도, 저자가 없어지길 바랐다.
“젠장. 이 빌어먹을. 처음부터 저 새끼가 마음에 안 들었어.”
테오도르는 거친 욕설을 짓씹으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레오브란테가 죽으면 그녀가 울 것이다.
기실 이곳의 그녀, 체르니시아는 이브와 같은 영혼을 지녔지만 이브와 온전히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이브와 다른 성장 환경, 이브와 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 존재.
그렇지만 그럼에도 이브의 한 부분이기도 한 존재.
체르니시아가 운다 하여도, 제가 기억하는 시간대의 이브는 그 슬픔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테오도르는 이브의 한 부분인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
언제나 이브를 울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테오도르는, 그녀가 우는 것을 막기 위해 몸을 내던졌다.
테오도르가 지닌 어둠이 레오브란테의 몸을 붙잡아 멀리 피신시켰다.
그리고 그것에 집중해 있는 사이.
끼에에에에엑-!
마물이 포효하며 테오도르에게 달려들었다.
“윽…….”
급히 어둠을 펼쳤으나, 마물은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것에도 굴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크윽…….”
끼에에에에에에엑-!
이윽고, 테오도르의 어둠이 마물을 소멸시켰다.
“하…….”
털썩.
무릎이 바닥에 꺾였다.
너덜너덜해진 몸이 볼품없이 쓰러졌다.
“아프잖아…….”
육신을 덮친 고통이 그의 영혼에까지 전해졌다.
차라리 지금 당장 숨이 끊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프고 괴로웠다.
“짜증 나, 흐윽…….”
테오도르는 숨을 헐떡이며 자문했다.
이 육신 안에서 죽으면, 내 영혼은 어떻게 되는 거지?
다시 이브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껏 느껴 본 적 없는 공포가 그를 덮쳤다.
이브도, 에르빈도, 오딜리아도…….
제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는 거니까.
“윽, 흑…….”
그렇게 생각하니 슬퍼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하지만 이브는…… 이브라면 내가 없어도 괜찮을 거야.
아니, 어쩌면 내가 없어서 더 좋아할지도 몰라.
나는 늘 그녀를 화나게 하고 울게 만드는 존재였으니까…….
그리고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어차피 어려서, 조금 더 자라면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고.
[에르랑 리아두 데려가.] [리아가 아조씨 지켜 두리께요. 웅?] [에르가 아조씨 아야 하몬 다 치료해 주께. 우웅?]마지막으로 아이들을 보았던 것은, 그녀의 정신 속에서 나온 직후 체르니시아 저택에서였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았으나 여전히 선명하기만 한 아이들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흐릿한 미소가 입가에 피어났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브에게 에르빈이 성력을 발현시킨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 주지 못했다.
에르빈의 성력은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제 것과 달리 따뜻하고 사랑스러웠다.
아이가 제게 호- 하고 입김을 불어 주자 상처가 사라지던 게 생각이 났다.
저는 이브의 손목에 남은 그 작은 상처 하나를 치유해 주고자 긴 세월 연마하였는데, 에르빈은 그토록 쉽게 해냈다.
어쩌면 작은 상처를 없애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아이의 말마따나 아픈 것을 모두 없애는 경지에 이를지도 모른다.
게다가 검기까지 동시에 발현하였으니, 분명 자라 저보다 훨씬 더 뛰어난 어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오딜리아……. 이브를 그대로 복사해 낸 듯한 사랑스러운 오딜리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 애의 머리카락이 까맣게 물들어 있던 게 생각이 났다.
기실 그것은 검게 물든 것이 아니라 본연의 색을 찾은 거지만…….
오딜리아가 울지 않고 제 검은 머리를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제가 사라지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브가 오딜리아의 검은 머리를 감춘 건 어쩌면…… 저 때문일 테니까.
제가 사라진 세상에서 이브가 오딜리아를 향해 ‘네 머리는 밤하늘처럼 예뻐, 리아.’ 하고 속삭여 주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아이는 분명 정말이냐 물으며 기뻐할 것이다.
그럼 이브는 상냥하게 두 눈을 휘며 그 검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춰 주겠지.
그 아름다울 모습을 생각하자,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희미한 미소가 테오도르의 입가에 피어났다.
쿨럭.
입술을 타고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테오도르는 제 몸이 서서히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이 어른이 된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아버지로 인정받지 못해도 괜찮으니, 영원히 그들과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묶이지 못해도 괜찮으니…….
에르와 리아가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이미 저는 틀렸다.
그 모습을 영원히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이브는 이제까지도 혼자서 아이들을 잘 키워 왔으니까…….’
시야가 뿌예졌다.
‘앞으로도 잘 키우겠지.’
에르빈, 오딜리아, 그리고…… 이브.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만이 흐릿한 시야 위로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들이 저의 빈자리 같은 것을 느낄 틈은 없을 것이다. 왜냐면…….
욱신-
가슴이 저몄다.
일전에 그녀의 저택 앞에서 완곡한 축객령에 돌아서야 했을 때 보았던 광경이 떠오른 탓이다.
[삼쫀 쪼아! 삼쫀 집에 가지 말구 리아랑 살아요. 웅?] [에르도! 에르도 높이 올려 줘!]까르륵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틈에 어우러진 에르빈과 오딜리아, 그리고 이브와 에른스트.
[애들이 응석받이가 되면 네가 책임질 거야?] [뭐, 못 질 것도 없지.]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을 보며, 그때 이미 한 번 느껴서 알고 있었다.
그들의 틈에 제 자리는 없다고.
“울고 있네. 죽지도 않고.”
문득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오도르는 두 눈에 힘을 부릅 주었다.
그러자 흐릿한 시야 너머 자신을 내려다보는 페르디난트가 보였다.
“너…… 왜 이런 짓을…….”
“어라? 아직 말을 할 수 있잖아?”
페르디난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손끝에서 피워 낸 푸른 마기로 테오도르를 공격했다.
쿨럭-
테오도르는 다시 한번 검붉은 피를 토해 냈다.
“짜증 나게.”
그가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레오브란테, 체르니를 뺏어 간 그 새끼를 죽이려 했는데 네가 모두 망쳤어.”
‘이, 미친…….’
테오도르가 그를 향해 무어라 말하고자 하였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네가 망쳤으니, 네가 책임지는 걸로 하자.”
‘무슨, 짓을……’
페르디난트가 빙긋 웃는 게 보였다.
차츰 몸에 힘이 빠져 갔다.
눈앞이 가물가물해졌다.
테오도르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툭, 투둑-
테오도르는 제 얼굴 위로 떨어지는 뜨거운 기운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제가 누군가의 무릎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었고, 그리고 그 무릎의 주인은 저를 내려다보고…….
‘어…….’
이브가, 체르니시아가 울고 있었다.
“정말이야, 테네브리스? 네가, 네가 마물들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위협한 거야?”
소리 내어 서럽게 엉엉 울고 있었다.
“왜 그랬어? 왜, 왜 그런 짓을…….”
원망하는 걸까.
그래, 그런 걸지도 모른다.
저 때문에 그 남자가 다쳤다고 생각할 테니까.
조금 더 빨랐어야 했는데.
결국, 또 그녀를 울리고 말았다.
“네 영혼을 조각낼 거래. 일곱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 조각낼 거래.”
테오도르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가엾은 테네브리스. 이제 너의 영혼은 죽지도 못해.”
아니, 손을 뻗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나는 싫어. 네가 영원한 안식을 얻지 못하고 조각난 채 세상을 부유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그의 몸은 조금 전부터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힘겹게 깜빡이는 눈꺼풀 외에는.
“그래서 너의 ‘진짜’ 영혼을 분리해 낼 거야. 그들이 조각내지 못하게.”
그녀가 젖은 얼굴로 결연하게 말했다.
‘무슨…….’
그 순간 기이한 느낌과 함께 테오도르는 자신이 깃들어 있던 테네브리스의 몸에서 분리되었다.
“사람들은 너를 ‘여덟 번째’라 부르겠지만.”
“……!”
“네가 진짜 조각이야.”
체르니시아는 테네브리스의 몸을 끌어안고서,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정확하게는 육신을 갖지 못한 영혼 상태의 테오도르를.
“네 육신에 남은 건 사념뿐이니까, 조각난 사념은 절대 너를 이기지 못해.”
‘그게 무슨 소리야?’
테오도르가 입을 벙긋거렸으나, 그의 목소리는 알 수 없는 벽에 부딪혀 나오질 않았다.
당황하여 그녀를 향해 손을 뻗던 그는, 제 손이 그녀의 몸을 투과한 것을 보고 뒤늦게 깨달았다.
제가 있는 차원과 그녀가 머무는 차원은 서로 다른 흐름 속에 있다고.
“잠에 들자. 긴긴 잠에 드는 거야.”
‘잠깐만, 이브! 이브……!’
체르니시아는 사념만이 남았다는 테네브리스의 육신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테네브리스…….”
그 남은 사념마저도 애틋하다는 듯이.
“괜찮아. 외롭지 않을 거야. 네가 혼자 깨어나지 않도록, 나도…….”
‘그게 무슨 소리야! 너도, 너도 뭘 어쩌겠다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잦아든 탓에, 뒷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브……!’
그녀가 마지막으로 테오도르를 쳐다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나를 꼭 알아봐야 해.”
‘……!’
순간 아득한 감정이 들었다.
테오도르는 그녀를 처음 보았던 순간을 여전히 기억한다.
마르가라테 황후가 보낸 손님들을 처리하느라 기분이 썩 좋지 않았던 평범한 오후였다.
황후궁 후원에서, 한 여자아이를 만났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한순간 숲의 요정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예뻤던 여자아이.
그 얼굴을 본 순간 ‘쿵!’ 하고 일던 가슴의 설렘…….
우연히 만난 그 여자아이를 필연적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테오도르는 그게 꼭, 운명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새삼 의문이 든다.
어쩌면 나는, 이브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닐까.
무수한 시공을 건너 그녀를 찾아, 그녀를 다시 사랑하기 위해.
그걸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이후 도착한 사람들이 테네브리스의 사념만 남은 영혼을 조각내었다.
사념만 남은 영혼은 일곱 갈래로 조각이 나고, 그 사이사이 바스러진 영혼의 부스러기가 세상을 부유했다.
저 먼지처럼 하찮게 바스러진 영혼의 부스러기는, 이제는 악으로 규정될 흑마법의 산물에 깃들 것이리라.
테오도르는 테네브리스의, 자신의 조각이 나뉘어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내 여덟 번째 조각에게 자아를 주어 다시 태어나게 할 줄은 몰랐지.]실은 테네브리스가 여덟 번째를 언급하던 때에, 대강 눈치를 챘었다.
차츰 흐릿하게 되살아나는 육신의 기억이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저는 테네브리스의 육신에 들어와 그 몸을 차지한 게 아니었다.
시공을 건너 과거 자신의 몸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그러니까 진짜 테네브리스의 영혼은 바로 자신이었다.
에른스트라는 ‘그릇’을 빌려 그 안에 깃들어 있던 것은 일곱 갈래로 나뉘어 세상 속에 흩어졌던 고대의 사념이었고…….
그걸 눈치채고 있었음에도, 그 사념이 과거 자신의 조각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결국 그 사특한 마음이 이브를, 에르빈을, 오딜리아를, 이브가 사랑하는 세상을 모두 파괴할 테니까.
“이브가…….”
테오도르는 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울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브가, 보고 싶어…….”
그러나 차원의 벽에 부딪힌 목소리는 누구도 듣지 못했다.
후덥지근한 여름날의 공기 속 찌르르르 울리던 풀벌레 소리가 아스라이 흩어져 갔다.
그 푸릇푸릇한 여름을 배경으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던 어린 그녀의 잔상도.
기분이 좋을 때면 까르르 터져 나오던 사랑스러운 웃음소리도.
……모두 함께 흩어졌다.
그러고 나면 종내에 남는 것은 외딴 차원 속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저 자신이었다.
* * *
차라리 보지 못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떻게 된 거야, 체르니?”
언제나 그녀를 향해 다정하게 웃던 남자가 두 눈이 시뻘게져서 따졌다.
“분명 테네브리스의 육신에 남은 건 사념뿐인 영혼이었어!”
테오도르는 차원 너머에 갇힌 채로 체르니시아와 레오브란테의 갈등을 보았다.
“솔직하게 말해. 네가 빼돌린 거 아냐?”
“그렇다면?”
체르니시아는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녀가 본래 저렇게…… 저렇게 상대를 경멸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며 화를 내는 사람이었나.
“왜……? 아직도 그놈을 좋아하는 거야? 너도 들었잖아, 그놈이 나를 제거하려고……!”
“이제 충분하잖아!”
그녀가 레오브란테의 말을 끊어 내며 소리쳤다.
“테네브리스의 생명을 빌미로 이어진 관계를, 이제 어떻게 이어 가겠다고?”
협박으로 유지한 관계.
두 사람의 관계는 거짓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거대한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해졌다.
“그래서, 너는 그동안 한 번도 나를 정말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거야?”
“응, 한 번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누구였는지, 너는 알잖아. 그래서 자꾸만 그 애를 의식해 왔던 거잖아?”
레오브란테는 빛이었고, 테네브리스는 어둠이었다.
어둠은 4대 사도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힘이었으나…….
어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