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13_1
12. 초라한 마음
테네브리스가 황궁을 점령하였던 그날의 참변은, 다행히도 만 하루가 지나기 전에 끝이 났다.
테오도르가 황궁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테네브리스는 소멸하였다고 한다.
하늘을 뒤덮던 마물 떼도 흩어지고, 황궁 내의 상황도 천천히 안정되었다.
다행히도 나와 셀린느가 사전에 마물들을 처리하였고, 또 테오도르가 늦지 않게 돌아와 수습한 덕에 황궁 밖까지 사고가 번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황궁 정리로 인해 테오도르는 무척 바빠졌다.
테네브리스로 인한 황궁 내의 사망자가 스무 명이 훌쩍 넘었다.
가엾이 죽은 이들의 시신을 거두고, 가족들을 위로하였다.
자세한 전말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번 사고를 마물들의 급작스러운 폭주라 여기었다.
이후, 황제의 직속 휘하에 마물들을 관리하는 직책이 만들어졌다.
4년 전부터 갑작스럽게 범람하였던 마물들은 잠잠해졌고, 사람들은 차츰 평화를 되찾았다.
그리고 시간이 꽤 흘렀다.
그사이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제국 내의 가장 큰 변화는 바로 페르디난트의 실각이었다.
벤야민은 황제를 시해하려 하였다는 죄목과 황궁 마법진을 망가뜨리고 일반인이었던 브리안을 습격하였으며, 또한 어린아이인 에르빈을 해치려 한 죄목으로 재판정에 서야 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모두 시인하였고, 사람들은 경악하였다.
동시에 황제가 카타리나와 세기의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페르디난트의 비리를 밝히기 위해 그녀와 계약을 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황제는 치밀하게도 보좌관에게까지 그 사실을 숨기었는데, 카타리나와 작성했던 계약서를 재판부에 증거 자료로 제출하였다.
그리고 그간 계약에 따라 카타리나가 황제에게 보낸 편지들에, 밝혀지지 않았던 벤야민의 추가 죄증이 드러났다.
이를테면 그가 흑마법을 사용하여 루돌프 페르디난트와 마르가라테 황후를 살해했다든가, 하는…….
카타리나 또한 벤야민과 함께 테오도르의 기억을 조작한 정황이 알려지게 되었으나, 지난 참사 때 이미 죽은 그녀는 재판정에 오를 수 없었다.
대신 금지된 술법으로 황제를 시해하려 한 죄로 벤야민과 함께 거리에 효수될 예정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벤야민을 만나러 갔다.
한때 페르디난트의 귀공자로 불리던 남자가, 볼품없이 두 손을 결박당한 채 불려 나왔다.
테오도르와 함께 보았던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를 보았다.
그가 나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루돌프와 마르가라테 황후를 죽인 것을 보았다.
나의 탈출을 도와주기 위해 자신의 피와 생명을 바치는 것도 보았다.
모두 나는 알지 못했던 그의 희생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희생이 고맙기보다는…… 소름이 돋았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합리화하여 다른 이들을 망설임 없이 해칠 수 있다는 게…….
그리고 그의 그런 살의가 에르빈에게까지 닿았다는 게…….
[벤야민.]나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벤야민을 쳐다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게 할 말 없어?]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입을 꾸욱 다문 채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 […….]한동안 말없이 그를 응시하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나왔다.
그게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마물들의 폭주로 한바탕 난리가 났던 황궁은 이제 수습이 다 되었다.
밝혀진 몇 가지 사실들에 사람들은 의문을 품었다.
[그럼 카타리나를 사랑해서 그런 게 아니라면, 황제는 왜 미쳐서 전쟁까지 벌인 거지?] [그 여자랑 손을 잡는 것도 끔찍해했다던데…….] [역시…… 그냥 원래 조금 미친 사람이라 그랬던 건가.]테오도르는 내가 부탁했던 것을 들어주었다.
내 이름이 언급되어 내가 피곤해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나름의 배려를 보여 준 것이다.
그렇게 내가 삐딱하니 턱을 괸 채로 창가에 앉아 생각을 곱씹을 때였다.
“아이참, 삼쪼온……!”
창밖에서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힐긋,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잔뜩 신이 나서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화사하게 웃고 있는 에른스트가 있었다.
에른스트는 죽지 않고 살았다.
그날, 아이들을 저택 안에 얌전히 집어넣은 뒤 곧바로 황궁으로 다시 달려갔다.
날뛰던 마물들은 모두 정리가 되어 있었고, 아직 채 수습되지 않은 황궁에서 죽은 듯 고요히 누워 있는 에른스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테오도르! 에른스트는……!] [아직 살아 있어.]에른스트의 머리맡에 서 있던 테오도르가 조금 피곤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죽지 않고 잠들어 있는 거래.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이브.]믿을 수 없었다.
분명 심장에 검이 관통하는 것을 보았는데…….
[레오브란테의 가호는 본래 순수한 것을 보호하고, 악한 것을 물리치는 힘입니다.]나의 의문을 풀어준 것은 셀린느였다.
[폐하의 성력이 ‘순수한 영혼’의 상태로 그릇 안에 봉인되어 있었던 에른스트 황자님을 죽이지 못한 것 같아요.] [아…….]그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는 내내 무섭고 괴롭던 마음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테오도르는 사람들을 내보내고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말없이 옆을 지켜 주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이 운 날은 처음이었다.
‘참 다행이야. 에른스트가 죽지 않아서.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볼 수 있어서.’
창밖에 아이들과 놀아 주고 있는 에른스트의 모습이 보였다.
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던 에른스트는, 며칠 전에 다시 눈을 떴다고 한다.
그러고는 아직 병색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굳이 체르니시아를 방문했다.
[에른스트? 너 여긴 어떻게……?] [에르랑 리아랑 약속했단 말야. 같이 도토리 모으러 가기로.] [이 계절에 무슨 도토리야! 너 몸도 아직 다 안 나았으면서……!] [어어?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나 아직 아픈데…….]사르르 눈웃음을 치며 그렇게 말하는데, 차마 다시 돌아가라고 내쫓을 수도 없었다.
마침 에른스트를 발견한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쪼르르 달려와 그의 양팔에 매달리는 바람에 더욱 그러했다.
[어? 에룬쑤뜨 삼쫀?] [삼쫀이다! 삼쫀 왜 이렇게 늦게 와써!] [마쟈! 삼쫀 나빠! 삼쫀이 안 와서 리아랑 에르랑 둘이서 도또리 모았짜나!] [에르, 리아. 삼촌을 힘들게 하면…….] [괜찮아, 이보네. 나 그 정도로 아픈 건 아니란 말야.]그리고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아이들과 함께 정원으로 나가 버렸다.
‘뭐, 정말 몸이 많이 안 좋은 거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만…….’
그렇지만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심장에 검이 찔려 죽어 가던 모습을 보았는데, 어떻게 걱정하지 않겠는가.
‘다행이야. 정말, 정말 다행이야.’
창가에서 몸을 일으키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정말, 다행이라고.
에른스트가 죽지 않아서.
내 손으로 그를 해쳐야만 했던 순간의 기억이 아직도 아찔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인간 황자가 지금 이 대화를 모두 듣고 있어. 이 안에서.] [그냥 죽여 달래. 너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다고.]어렸을 때부터 배워 온 체르니시아의 가르침에 따라 마땅히 그를 베어야 함을 알면서도, 나는 망설였다.
차마 내 손으로 에른스트를 죽일 수 없어서…….
그리고 무엇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던 나를 대신해 나서 준 이는 다름 아닌 테오도르였다.
[이브, 내가 할게.] [착한 강아지가 되기로 했지만, 딱 한 번만 나쁜 개새끼 할게. 나중에 혼내 줘.]테오도르는 얼핏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으나, 얼굴 위로 떠오른 괴로운 빛깔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모르고 지나치기에는, 내가 그를 너무나 잘 알았다.
[알잖아, 이브. 나는 인성이 못돼 처먹은 놈이라는 거.] [네 말마따나 난 쓰레기고.] [쓰레기가 쓰레기 짓 하는 거야. 너는 그냥 나를 욕하면 돼.]그 순간, 왜 그리도 가슴이 아팠던지.
문득 찌르르- 울려 오는 그때의 감각에, 나는 느리게 숨을 내쉬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때에는 에른스트가 죽을지도 모른단 생각뿐이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 보니 내 눈물의 원인에 그 또한 함께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를 위해서, 나를 대신해 에른스트를 죽이겠다던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자꾸만 생각이 났다.
테네브리스의 소멸과 함께 시공을 건너 과거로 보내지면서, 지나간 시간 속에서 테오도르가 나를 정말로 많이 사랑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와 함께한 과거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보는 내가, 서글플 정도로.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테오도르는 끊임없이 내게 큰 사랑을 쏟아 주었다.
테오도르가 내게 주는 마음의 크기는 언제나 넘치도록 컸으나, 사실 나도 못지않게 그를 참 많이 좋아했었다.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왠지 그때도 그를 조금 좋아했었던 것 같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그를 볼 때마다 유독 얼굴 위로 열이 올랐다.
더운 걸 싫어하는데도, 얼굴 위로 홧홧하게 오르는 그 열기가 싫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는 게 좋았다.
어린 날의 짧고 강렬했던 인연이었다.
이후 내 삶을 뒤흔든 여러 가지 일들로 그를 잊고 지냈지만, 이따금씩은 그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는 했었다.
카타리나의 괴롭힘이 유독 심한 날에는 혼자 꺼내어 보았다가 슬그머니 미소 지으며 다시 집어넣곤 하는, 그런 소중한 기억이었다.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내게 다시없을 큰 사랑을 알려 주었다.
그런 사랑은 누구에게도 받아 본 적 없었다.
나를 아껴 주었던 가족들도 그만큼이나 나를 사랑해 주지는 않았다.
그 당시의 테오도르는 매일매일 나를 사랑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그 시절이 그립지 않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우리는 결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노라,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래, 용서할게. 그런데 사랑은 못 하겠어.]너를 용서하겠다고.
그렇지만 사랑은 할 수 없다고.
‘아니. 그 반대야.’
그러나 그 의연한 거절은 그에게 초라함을 들키기 싫었던 나의 방어기제였다.
사실은 그 반대였다.
‘테오도르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용서를 못 하는 거야.’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 그를 사랑하게 된 이후로, 단 한 순간도 그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심지어는 그가 기억을 잃고 나를 냉대하던 때조차도 그를 사랑했다.
만일 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미련하게 그 옆에 계속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그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 기억이 돌아와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해 줄 거라고, 그렇게 굳게 믿으며.
[미안해, 이브. 내가, 내가 정말 미안해……. 내가, 내가…….]끝내 기억을 되찾은 테오도르는 내 앞에서 미안하다며 울었다.
차마 삼켜 내지 못한 울음을 끅끅 터뜨리던 그의 잔상이 내 마음속에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그와 나 사이에 타인의 악의로 비롯된 오해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이후, 나도 모르게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상상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런 내 모습 속에서 천천히 깨달았다.
그를 사랑했던 마음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었구나…….
온전히 도려내지 못했구나…….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 시절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고 마는구나…….
그리고 여전히 그를 향한 마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나를 이처럼 초라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초라해지고 싶지 않은 나의 마음이 그를 사랑한다고 인정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용서는 하는데, 사랑은 못 하겠다고.
사실은 그 반대면서.
내게 상처 주었던 그를, 용서하지 못하는 거면서.
그를 용서하는 순간, 다시 내가 초라해질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처럼 연약한 마음을 세상에 들킬까 두렵고 겁이 났다.
체르니시아의 가주가 알고 보니 이런 겁쟁이라니.
피식.
괜한 헛웃음이 새 나왔다.
“어머, 가주님. 정원에 나가 보시려고요?”
1층으로 내려오자, 마침 트레이에 딸기 주스를 내오던 로라와 마주쳤다.
“응, 그거 이리 줘. 내가 가져갈게.”
로라에게서 트레이를 건네받고서 정원으로 나갔다.
그러자 풀밭 위에 앉아 있는 에른스트와 그의 몸에 매달린 아이들이 보였다.
“세상에……! 에르, 리아!”
나는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에른스트 삼촌 그만 괴롭혀. 삼촌은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단 말야.”
“괴롭히는 거 아녜요!”
“삼쫀이랑 같이 노는 거란 말예요!”
에르와 리아가 억울한 얼굴로 항변했다.
그러자 에른스트가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보네. 우리는 그냥 같이 노는 거야.”
“……무리하지 마. 걱정된단 말야.”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트레이 위의 딸기 주스를 발견한 아이들이, 그제야 에른스트의 몸에서 내려와 내 쪽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고마워.”
에른스트가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묘하게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나는 그에게 딸기 주스 한 잔을 내밀었다.
그가 아이들 틈에 섞여서 빨대를 쪽쪽 빨아 먹었다.
천진한 그 모습 위로 문득 나를 좋아해서 미안하다고 울던 그가 생각이 났다.
다시 깨어난 그가 그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기에, 나 또한 언급하지 않으며 서로 모른 척했다.
황궁으로 돌아가는 에른스트를 배웅하기 위해 현관으로 나갔을 때였다.
“어어?”
에르빈이 누군가를 가리키며 외쳤다.
“지지 아조씨다!”
절로 그쪽을 향해 시선이 돌아갔다.
테오도르가 와 있었다.
“지지 아조씨 또 왔네?”
“아조씨, 안농!”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테오도르를 향해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테오도르를 보며 삐딱하게 팔짱을 꼈다.
그의 옆에는 검은 말 한 마리가 푸르릉 콧김을 뿜고 있었다.
‘오늘도 말을 타고 온 건가.’
최근 테오도르가 그날 이후로 여러 가지 뒤처리를 하느라 무척 바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 와중에도 매일같이 이렇듯 체르니시아 저택을 찾아왔다.
나는 그의 옷차림을 힐긋 훑어보았다.
장식 하나 없는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흔한 보석이나 장신구 하나 걸치지 않은 채였다.
얼핏 보면 저택에서 일하는 이들처럼 수수한 차림새였다.
문제는 수수한 옷차림 때문에 잘생긴 얼굴이 더 부각되어 보인다는 것이었지만…….
평소 나를 만나러 올 때면 항상 신경 쓰지 않은 척하면서도 은근히 공작새처럼 휘황찬란하게 꾸미고 오던 것을 생각하면, 그답지 않은 일이다.
자신의 잘생긴 얼굴을 이용해서라도 내 마음을 돌리려 하던 그가 아닌가.
“안녕, 에르, 리아.”
테오도르는 아이들을 향해 몸을 수그려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러고는 빙긋 웃으며 자그마한 선물 상자를 건넸다.
“어머니 말씀 잘 들으며 지냈어?”
그는 자신이 왔다는 걸 알리지도 않고 이렇게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우연히 마주치면 기쁘게 웃으며 편지와 꽃과 선물 등을 건넸다.
오늘 그가 가져온 선물은 커다란 보석이 박힌 장난감 단검이었다.
“우와! 이거 에르랑 리아 주는 거예요?”
“감사함미다!”
어떻게 아이들의 취향을 그렇게 쏙쏙 맞추는지, 아이들은 테오도르가 주는 선물을 신이 나서 받아 갔다.
“테오도르.”
나의 부름에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응, 이브.”
“잠깐 이야기 좀 해.”
나는 그를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따로 불러냈다.
“용서했다고 했잖아.”
“응, 용서를 구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
“그런데 왜 이렇게 용서를 구하는 죄인처럼 찾아오는데?”
“내가…… 이래야 할 것 같아서.”
테오도르는 내 눈치를 힐끔 살피더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너는 나를 용서했어도, 나는 나를 아직 용서 못 해서.”
“…….”
“그래서. 그래서 그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그가 잠시 말을 골랐다.
그러고는 최대한 내 기분이 상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네가 그랬잖아. 내 옆에 있으면 초라해지는 것 같다고. 초라해지는 게 싫다고.”
멈칫.
꾸욱 다물려 있던 내 입술이 미미하게 벌어졌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거 알려 주려고.”
“…….”
“너는 전혀 초라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려 주려고.”
“…….”
“네가 실은 누구보다 빛나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 주려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유였다.
“내가, 네 앞에서 더 많이 초라해질 테니까…….”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제대로 상대도 해주지 않는데 매일같이 구질구질하게 찾아와 초라하게 나를 기다리겠다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너랑 불행 싸움을 하고 싶은 게 아니야. 누가 더 초라한지 그런 걸 겨뤄서 뭐 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하자 테오도르가 빙긋 웃었다.
“그걸로 네가 조금이나마 알아주면 좋을 것 같아서. 네가 전혀 초라하지 않다는 걸. 너는 정말 멋있는 사람이라는 걸.”
“……네가 이러지 않아도 알아. 나 멋있는 사람이란 거.”
괜한 허세를 부리며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의 연약함을 들킬까 두려워했던 주제에, 쓸데없는 만용이었다.
“그래? 정말 다행이다.”
테오도르는 환하게 웃었다.
선량해 보이는 얼굴로 안 하던 짓을 하는 그를 보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어쩌면 그는, 내가 그를 정말로 용서하지 못했다는 걸 아는 걸까?
“아무튼, 이제 이렇게 찾아오는 거 그만해. 나는 이미 널 용서했고…….”
“널 방해하지 않을게.”
그가 다급하게 나를 붙잡았다.
“귀찮게 하지도 않을 테니까…… 그냥…….”
혹시나 내가 안 된다고 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그 모습을 보자, 솔직히…….
‘조금, 속이 시원한 것 같아.’
나쁜 마음가짐이라는 걸 아는데, 왜 이렇게 통쾌한지.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테오도르가 한 짓에 비해 내 마음이 아주 풀릴 만큼 사과를 받은 것도 아니잖아.’
오락가락하는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다.
이성적으로는 그를 돌려보내야 함이 옳음을 알았다.
그는 알브레히트의 황제였고, 근래 그에게 닥친 업무량이 얼마나 많은지 또한 들어 알고 있었다.
요 몇 주 동안 쌓인 업무로 인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지.
나에게 쏟는 시간만 줄인다면, 테오도르도 훨씬 편해지리라.
게다가 어차피 나는 더 이상 그를 용서하니 마니 하며 감정을 소모할 생각도, 그를 다시 받아 줄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 그가 이렇게 나를 찾아오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이미 나는 그에게 그를 용서하겠다는 말로 관계의 끝맺음을 선언하였고, 우리는 이제 타인이 되어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면 될 터였다.
이렇게 그가 날 찾아와 불쌍한 모습을 보여 봤자, 내 기분이 조금 통쾌해진다는 것 빼고는 이득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힘든 건 너지, 내가 아니니까.”
그렇지만 나는 비겁하게도, 그에게 여지를 남기고 말았다.
“고마워, 이브.”
그런 나의 비겁함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는데, 테오도르는 내게 고맙다며 부드럽게 웃었다.
“…….”
그 순간 몹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그의 이런 모습이 속 시원하지도, 통쾌하지도 않았다.
가슴이 조금 먹먹하고 시큰한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조금 전, 차마 에른스트를 죽이지 못하고 울던 나를 대신해 나서 주던 그를 떠올릴 때 느끼던 것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한순간에 뒤집힌 내 감정을 나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이보네.”
이때, 에른스트가 우리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아, 에른스트. 아직 안 갔어?”
“응, 형님이랑 같이 가려고.”
에른스트는 생긋 웃으며 테오도르를 돌아보았다.
“같이 가요, 형님.”
“…….”
살가운 그 목소리에 테오도르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에른스트와 사이가 좋아지나 했더니, 아닌가?’
에른스트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는 걱정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더니, 막상 깨어난 에른스트와는 그다지 살갑게 지내지 않는 듯했다.
“어? 이브, 여기 뭐가 묻었어.”
에른스트가 내 뺨을 스윽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아, 그래? 고마워.”
“아 참, 에르랑 리아가 나를 보러 놀러 오고 싶다는데 괜찮아?”
“놀러 오다니? 어디로? 설마 황궁에?
“응.”
“그냥 저택도 아니고 황궁에 아이들이 놀러 가는 건 조금…….”
“뭐 어때. 너도 어렸을 때 많이 놀러 왔잖아.”
“그야, 그건 어른들이…….”
에른스트와 대화를 이어 가다가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을 때.
테오도르가 입을 꾹 다문 채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왜 저런 표정이야?’
무척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 * *
말을 타고 왔던 테오도르는 에른스트의 마차를 타고 함께 돌아갔다.
그의 시선이 한동안 창가에서 떠나질 못했다.
더 이상 이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네가 이러지 않아도 알아. 나 멋있는 사람이란 거.]그렇게 말할 적에 이브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딱딱한 것을 눈치챘다.
이브는 저랑 있던 그 시간 내내 제 옆에서 스스로가 초라하다고 느꼈다 하였다.
그렇다면 저는 그보다는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그녀의 옆에서 초라함을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나.
그녀의 머릿속에 정말 초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될 때까지.
그녀가 아주 작은 불편함도 없이, 웃으며 스스로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제가 주었던 상처들이 더 이상 그녀에게 상처가 아닐 때까지.
초라한 테오도르 따위가 준 과거의 상처쯤은 무심하게 흘려보낼 수 있을 때까지.
그를 위해서라면, 아직 이 정도로는 택도 없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힘든 건 너지, 내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