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13_2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은근슬쩍 제 시선을 피했다.
눈꺼풀을 두어 번 깜빡이며 눈동자를 굴리는 건, 그녀가 조금 민망할 때 하는 행동이었다.
이브는 아마 그 말을 스스로 비겁하다 여기고 있을 터였다.
아닌데…….
그녀는 비겁한 게 아니라, 상냥한 건데…….
그녀가 정말 비겁한 사람이었더라면, 제가 지닌 죄책감을 어떻게든 이용하려 했을 것이다.
용서니, 사랑이니 하는 말로 선을 긋는 것 또한 애초에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비겁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상냥한 사람이었다.
무시해도 그만일 저 같은 걸 온전히 외면하지 못하는.
그리고 동시에 아직 상처가 아물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녀를 흠집 낸 상처들은 모두 테오도르, 과거의 제가 그녀에게 남긴 것들이었다.
마땅히 제가 다시 치유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너는 저렇게 나를 사랑했으면서 왜 내게 그렇게 상처를 주었던 거야?]지나간 과거의 흐름을 보며 그녀가 흘리던 눈물을 기억한다.
[또 그런 일이 반복되면, 이제는 상처받는 게 나뿐만이 아닐 거야.] [그래서 나는 그냥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네 기억이 없어지면서 함께 사라진 거라고 생각하려고.] [낙마하면서 그 사고로 세상을 떴다고 생각하려고.]그녀가 품고 있는 불신과 두려움을 마주친 순간.
테오도르는 그녀의 용서를 바라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저를 용서했다고 했지만…….
‘이브가 너무 착하고 상냥한 거야. 나 같은 쓰레기를 그렇게 쉽게 용서하면 어떡해.’
감히 제가 바라면 안 되는 용서라는 걸, 알아 버린 탓이다.
하여, 테오도르는 그녀의 용서를 바라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더 이상 과거를 떠올려도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
스스로를 초라하다 여기지 않기를 바랐다.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으로 환하게 웃기를 바랐다.
테오도르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봤어요, 형님? 에르랑 리아가 나한테서 안 떨어지려고 하는 거.”
이때, 에른스트가 돌연 시비를 걸어왔다.
“조만간 나를 보러 황궁에 놀러 올 거래요. 형님 말고 나를 보러요.”
“…….”
테오도르의 시선이 천천히 맞은편에 앉은 에른스트에게로 향했다.
“하긴 이보네도 어렸을 때 형님이 아니라 나를 보러 온 거였는데.”
에른스트는 생글생글 웃으며 약을 올렸다.
그리고 그렇게 말할 적에 에른스트의 눈동자는 선혈처럼 붉게 변해 있었다.
마치, 테네브리스의 것처럼.
“미친놈.”
테오도르가 살벌하게 욕을 했다.
그러자 에른스트의 눈꼬리가 더욱 둥글게 휘었다.
“젠장.”
그 웃는 얼굴을 보며 테오도르가 제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원래도 에른스트를 마냥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변해 버린 에른스트는 더 싫었다.
에른스트가 이상해진 것은, 한동안 병석에 누워 있던 그가 다시 깨어난 직후였다.
[폐하, 에른스트 황자님이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그 말에 테오도르는 업무를 보다 말고 황자궁으로 찾아갔다.
에른스트의 방 앞에 사용인들이 기쁜 얼굴로 서 있었다.
[에른스트는?] [2황자 전하께서는 막 깨어나시어 지금 방 안에 계십니다.] [혼자 있고 싶으시다 하여 자리를 비워 드렸…….]테오도르는 사용인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곧바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에른스트가 침대 위에 반듯이 앉은 채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테오도르가 멈칫 굳어 있을 때에.
기척을 알아차린 에른스트가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창을 타고 들어오는 햇살에 에른스트의 백금발이 부드럽게 흩어졌다.
그가 테오도르를 향해 싱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형님.]나긋한 그 목소리에 무언가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에른스트에게서 그런 이질감을 받은 적이 이전에도 한 번 있었다.
오래전,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은 직후 미친 자처럼 황궁 안을 헤매며 돌아다닐 적에.
마주쳤던 에른스트에게서 조금 이상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때에도 에른스트는 이렇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형님. 고대의 어둠이 남긴 성물을 찾고 있다면서요?]온화한 웃음기마저 머금은 채로.
꼭 지금과 같이.
당시에는 저로 인해 이브가 죽었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실수였다.
아우의 몸에 이상한 것이 깃들었다는 것을 그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너…….]테오도르는 두 눈을 가늘게 좁혀 뜬 채로 에른스트를 뜯어보았다.
[아, 이거 참.]그러자 에른스트가 두 눈을 가느다랗게 휘며 웃었다.
[이래서 눈치가 빠른 사람은 싫어요.]순간 에른스트의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
테오도르는 곧바로 에른스트에게 달려들었다.
[너, 뭐야!] [앗, 콜록, 콜록.]에른스트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으며 다그치자, 그가 기침을 하며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테오도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갑자기 붙잡으면 아파요, 형님.] [허……?]테오도르는 기가 차서 에른스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겁 많은 고양이 상의 눈꼬리에는 심지어 눈물마저 찔끔 매달려 있었다.
테오도르가 스르륵 손을 놓자, 에른스트가 슬쩍 말아 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형님이 아는 ‘그 에른스트’가 맞으니까.] [내가 아는 ‘그 에른스트’라고?]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돌아오는 말이 가관이었다.
[네, 형님을 죽여 버리고 싶다는 것만 빼면.] [뭐……?] [아, 죄송해요, 형님. 다시 눈을 뜬 이후로 자꾸만 감정이 들쭉날쭉해서요.]에른스트는 당혹스러워하는 테오도르를 앞에 두고 돌연 산뜻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두 눈을 사납게 빛내며 비속어를 내뱉었다.
[그러니까 이만 내 눈앞에서 꺼져.] [……죽었다 살아나더니, 완전히 미쳐 버렸군.]셀린느를 불러 에른스트를 살피게 했다.
[정말로, 테네브리스의 사념이 에른스트의 몸에서 사라진 게 맞아?] [테네브리스의 사념은 확실하게 사라졌어요. 다만…….] [다만?] [사념이 흩어지며, 그 부스러기 중 일부가 2황자 전하의 영혼에 튀어 버린 것 같습니다.]사념의 부스러기니, 영혼에 튀었니, 하는 말들이 알쏭달쏭하게만 들렸다.
테오도르는 험악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그러니까 이분은 에른스트 전하가 맞습니다. 그저 좋지 않은 것에 물들어 인격이 갈라지신 것뿐이에요.]테네브리스의 사념은 소멸하였으나, 그 부스러기가 영혼에 물든 탓에 에른스트는 이중인격이 되었다.
이브의 앞에서 내내 순한 모습을 보이던 에른스트는 테오도르와 단둘이 남자마자 이상하게 변해 버린 성격을 드러냈다.
‘이런 걸 이브 옆에 두어도 되는 걸까?’
테오도르는 조금 심각해진 얼굴로 고민했다.
그렇다고 단순히 성격이 이상해졌다는 이유로 그를 해치울 수도 없고…….
참 난감했다.
“지금 저한테 욕한 건가요?”
에른스트가 사르르 웃으며 물었다.
“착한 개새끼가 되기는 글렀네요. 이보네가 알면 슬퍼할 거예요.”
협박하듯이 덧붙이는 말에 테오도르의 인내심이 흔들렸다.
“입 닥쳐.”
“와.”
그가 욕을 내뱉자 에른스트가 기뻐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이제 제게는 착한 개새끼 시늉도 안 하는 거예요?”
“너도 마찬가지잖아? 내 앞에서는 그 이상해진 성격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형님이 이보네도 아니고, 제가 형님한테 잘 보여서 뭐 해요.”
에른스트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테오도르는 주먹을 불끈 말아 쥐며 인내력을 끌어 올렸다.
‘저놈은 환자다. 저 새끼는 환자다.’
속으로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되새겨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간신히 살려 낸 에른스트를 다시 죽여 버릴 것 같았다.
테오도르는 에른스트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다시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는 에른스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꿋꿋하게 무시할 때였다.
“그런데, 형님.”
또다시 에른스트가 말을 걸어왔다.
“황궁 내에 소문이 하나 돌던데. 형님이 뭔가를 하려고 한다고.”
그 말에 반응한 테오도르가 다시금 에른스트와 시선을 맞추었다.
“……누가 네게 그 소식을 전해 줬지?”
에른스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거, 리아 때문에 그러는 거죠?”
* * *
손님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
“있지요, 어머니. 에룬쑤뜨 삼쫀이 놀러 오라 했어요.”
“삼쫀 보러 놀러 가도 돼요?”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에른스트를 보러 놀러 가고 싶다고 조르기 시작했다.
“삼쫀이 꼭 어머니랑 같이 놀러 오라 했어요.”
“웅, 웅! 리아랑 에르는 아가니까요. 어머니가 데려가 줘야 해요!”
평소에는 어엿한 세 살이라 주장하면서, 이럴 때만 저희가 아기라고 한다.
“삼쫀이랑 숨바꼭질할 거야.”
“삼쫀이랑 달리기할 거야.”
“삼쫀네 집에는 커다란 호수도 있대.”
“호수에 오리도 있다고 했어.”
“리아는 오리가 되고 싶어.”
아이들은 에른스트를 만나러 갈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다.
특히나 알브레히트에 와서는 저택에 호수가 없다고 많이 아쉬워했기에, 황궁에 있을 호수가 기대되는 모양이다.
아이들의 손에는 황궁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이 들려 있었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이렇게 공식적인 초대장을 받은 게 처음이었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손에서 도무지 떼지를 않았다.
초대장은 번쩍번쩍 금테두리가 둘러 있었고, 앙증맞은 리본도 붙어 있었다.
‘황궁이 어수선한 것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지만…… 내가 시간을 내기 힘들 것 같은데.’
3대 가주 중 하나였던 페르디난트의 공석으로 인해 나와 셀린느에게 업무가 더욱 과중된 터였다.
그렇지만 저 반짝반짝한 눈빛을 못 본 척할 수도 없고…….
“미안, 어머니는 너무 바빠. 대신 브리안 삼촌한테 부탁하자.”
슬며시 브리안에게 아이들을 떠맡겼다.
그러자 아이들이 침울한 얼굴로 식사하는 브리안을 쳐다보았다.
브리안은 이번 사태로 인해 셀린느와 결혼식이 미뤄져서 슬퍼하고 있었다.
“삼쫀!”
“브리안 삼쫀!”
“삼쫀, 같이 가 줄 거지?”
“리아랑 에르는 아가라서 삼쫀이 필요해.”
브리안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래.”
그 모습에 괜히 키득키득 웃음이 났다.
“다행이야, 브리안 오빠가 있어서.”
“그러게. 내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브리안이 한숨을 포옥 내쉬며 내 말을 받아쳤다.
그간 브리안이 체르니시아 저택의 안살림을 도와준 덕분에, 나도 한결 수월하게 가주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오빠가 결혼해 버리면, 그땐 어떡하지.”
그렇지만 그가 셀린느와 결혼을 하고 나면, 가문의 안살림을 도맡아 줄 다른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너도 결혼을 하는 건 어때?”
브리안이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결혼? 누구랑?”
“뭐, 누구든. 네 마음에 차는 남자가 있다면…….”
“됐어.”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딱히 생각 없어.”
오래전에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예식장에 들어서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 때도 있었지만…….
[응. 네 가문을 복권시킬 거야. 그리고 그 이후에 너를 나의 부인으로 맞이할게.]내 손에 입을 맞추며 그렇게 속닥거리던 남자는, 이제 없으니까…….
나는 결혼을 하고 싶어서 그와 사랑했던 게 아니었다.
그를 사랑했기에 그와 예식을 올리는 내 모습을 상상했었다.
만약 그가 아니었더라면, 평생 결혼이란 거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굳이 결혼을 위해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냥, 지금이 좋았다.
‘또다시 그만큼이나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도 없고.’
괜히 쓴웃음이 나와 물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왜? 설마, 그…….”
브리안이 내게 무언가를 물으려 할 때였다.
초롱초롱한 시선에 브리안과 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느 틈에 식사를 멈추고 귀를 쫑긋하며 나와 브리안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보였다.
“…….”
“…….”
브리안과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른 오전.
황궁에 가기 위해 일찍부터 준비했다.
얼마 전, 알브레히트 제국 내의 대귀족 가문들을 모두 소집하는 황명이 떨어졌다.
‘무슨 일이지.’
테오도르는 회의 당일까지도 그 이유를 비밀에 부쳤다.
자못 궁금하였으나, 조금 뒤에 회의가 시작되면 알게 될 터였다.
“어머니 예뻐.”
“세상에서 쩰루 예뻐.”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녹색 정복을 갖춰 입은 나를 보며 두 눈을 반짝였다.
“아이, 고마워라.”
나는 자그맣게 웃으며 아이들의 뺨에 뽀뽀를 해 주었다.
“있지요, 어머니. 에르는 꿈이 바꼈어요.”
“으응?”
“에르는 다람쥐 용사 말구 커서 어머니가 될 거예요!”
에르빈이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고 외쳤다.
그러자 옆에 있던 오딜리아의 두 눈이 땡그랗게 커졌다.
“안 대!”
오딜리아는 그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안 대, 안 대! 절대 안 대!”
“안 대?”
“에르는 남잔데 어케 어머니가 돼!”
“왜 안 대?”
“구니까…… 구니까…… 구냥 안 대! 절대 안 대!”
오딜리아는 이유를 묻는 에르빈에게 설명하지 못하고 그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리아 질뚜해?”
에르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질뚜?”
“리아 질뚜하네. 내가 어머니 될까 봐 질뚜하네.”
“아냐! 질뚜 아냐!”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툭탁툭탁 싸우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아이들은 말을 더 잘하게 되었는데, 그와 비례되게 말싸움도 더 잘하게 되었다.
“에르, 리아.”
잠시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잠잠히 아이들을 불렀다.
“오늘 에른스트 삼촌을 만나러 가는 날이라고 했지? 자꾸 그렇게 싸우면, 둘 다 삼촌을 만나러 못 갈 거야.”
“……!”
“……!”
그 말에 놀란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양손으로 입가를 ‘합’ 가리며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았다.
“아, 안 싸웠어요.”
“리아랑 에르랑 사이좋아요.”
곧바로 얌전해진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어머니 일하러 다녀올 테니까, 싸우지 말고 잘 놀아야 해. 브리안 삼촌 말씀도 잘 듣고.”
머리를 쓰윽쓰윽 쓰다듬어 주자, 아이들이 두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네, 네! 말씀 잘 들을 거예요!”
“리아랑 에르는 사이좋은 남매예요!”
의젓하게 외치는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어쩐지 든든했다.
아이들을 뒤로하고 현관으로 나왔다.
그러자 그곳에 못 보던 것이 있었다.
“웬 마차지?”
“황궁에서 보내 준 마차입니다, 가주님.”
“황궁에서?”
나는 떨떠름한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마침 오늘은 가문의 마차 대신 말을 탈 생각이었다.
아이들이 에른스트를 만나러 황궁에 놀러 가는 날과 겹쳤던 탓이다.
본래 체르니시아에는 마차가 여러 대 있었다.
그러나 지난번 황궁에서의 참사 이후, 사망한 피해자들의 시신을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기 위해 가문의 마차를 한 대만 남기고 모두 지원한 터였다.
수레를 사용하여도 될 일이었으나, 구태여 레오브란테와 함께 나서서 마차를 지원했다.
가호의 힘을 발현한 자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이들을 보호하지 못해 일어난 참사였으니까.
수레가 아닌 마차를 사용함으로써 가엾이 죽어 간 이들에게 예우를 다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군터 할아버지로부터 교육받았다.
땅의 인도자, 체르니시아.
그녀의 유지를 이어 받은 우리 가문의 가풍에 대해.
가호의 힘은 군림이 아닌 보호를 위해서만 사용하여라.
지배하는 자가 아닌 인도하는 자로서, 위로는 나라를 받치고 아래로는 제국민을 이끌어라.
교만한 마음을 버리되, 마땅한 도덕적 의무를 다하여 약한 이를 보호하라.
3대 가문의 가풍에 따라 셀린느와 함께 먼저 솔선수범을 보이자, 그 아래의 귀족들도 뜻에 따랐다.
그래서 저택에 마차가 한 대밖에 남지 않았다.
황실에서도 테오도르와 에른스트의 마차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원했다고 들었는데…….
‘테오도르의 마차네.’
사용인 하나 없이 달랑 마부 한 명만 조용히 딸려 보내다니.
언제나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찾아오는 테오도르답지 않다고 생각하며 무심코 마차 위로 올라타려던 때였다.
‘응?’
순간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어 두 눈을 끔뻑여 보았다.
그러나 몇 번을 다시 감았다 떠 보아도…….
‘테오도르……?’
어쩐지, 마부석에 망토를 눌러쓰고 앉아 있는 남자의 실루엣이 묘하게 잘생겼다 싶더라니.
물끄러미 쳐다보는데도 테오도르는 내 쪽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나름 정체를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잠시 그를 불러 세워 뭐 하는 짓이냐고 물어보려다가, 모른 척하고 그냥 올라탔다.
‘사람을 보내면 될 걸, 왜 직접 와서 이런 고생을 한담.’
테오도르가 모는 마차는 승차감이 아주 훌륭했다.
덕분에 나는 직접 말을 모는 수고로움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테오도르가 잘 이해 가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이런 노동이 기꺼운 걸까?
어느덧 마차는 황궁에 도착했다.
부드럽게 굴러가던 마차 바퀴가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테오도르가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고는 마차 앞에 다소곳이 서서 내가 내리길 기다렸다.
“대체 왜 이런 괴상한 짓을 하는 거야?”
“……오늘 에르랑 리아가 황궁에 놀러 오는 날이라며. 그럼 마차가 부족할 거 아냐.”
물끄러미 쳐다보며 묻자 그가 주섬주섬 변명을 했다.
“괜히 사람을 보냈다가, 네가 내가 보낸 마차는 싫다고 하면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돌아올 것 같아서……. 그럴 바에는 내가 직접 가는 게 널 설득하기도 좋을 것 같고…….”
“그럼 왜 그렇게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건데?”
“그게…… 네가…… 나를 보고 마차를 타기 싫다고 할까 봐…….”
테오도르는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자신 없게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야, 당연히……”
그가 아주 잠시 괴로운 듯 눈가를 찡그렸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표정을 폈다.
“네가 날 싫어하니까.”
얼핏 담담한 듯 말하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 끝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그 태도에 괜한 한숨이 새 나왔다.
“말했잖아. 널 용서했다고.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
테오도르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더 캐물으면 울 것 같았다.
회의 시간까지 20분도 남지 않았는데, 황제를 울릴 순 없었다.
‘초라해지겠다더니.’
테오도르는 정말로 초라한 모습을 유지했다.
참, 꿋꿋하게도.
‘그렇지만 황궁 사용인들이 보는 데서까지 이럴 줄은 몰랐는데.’
이곳은 체르니시아 저택이 아닌 황궁이었다.
어느 곳보다도 황제로서의 위엄이 가장 필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사용인들의 눈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내 앞에서 고개를 푹 숙그렸다.
꼭…… 주인에게 혼나는 강아지처럼.
“그래, 알겠어.”
굳이 너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위로의 말 따위를 건네지는 않았다.
이만 회의장으로 가 보겠다고 말하려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