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14_2
아르민은 불안한 낯으로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테오도르는 보통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 시간 전까지 업무를 다 끝내었다.
그래야 이브와 아이들을 만나러 갈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는 이브와 아이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라서, 당당하게 문을 두드리지 못하는 처지였다.
운이 좋으면 그들을 일찍 마주치고 돌아오는 날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은 날에는 오후 늦게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점심을 거를 때가 잦았고 식사 시간이 들쑥날쑥해졌다.
게다가 요새는 밤마다 찾아오는 암살자들로 인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거기다 스스로 미끼가 되겠다며 그들에게 살까지 내어준 탓에 몸이 아주 많이 상한 터였다.
4년 전, 이브 로웰린의 죽음으로 미쳐 버렸을 때.
그때에도 황제는 제 몸을 돌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보네를 다시 찾은 지금, 테오도르의 상태는 그때와 비교하여 아주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멀쩡하다고 여기는 것 같으나, 가장 측근에서 모시는 아르민과 린든만이 그 사실을 알았다.
“그자는?”
서류를 대강 훑으며 오후에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한 테오도르가, 짤막하게 물었다.
기민하게 그가 말하는 대상을 알아차린 아르민이 잽싸게 대답했다.
“린든 경이 심문 중입니다.”
“내가 가지.”
테오도르는 얼마 전 제 복부에 구멍을 내놓았던 암살자가 갇혀 있는 지하 옥사를 찾아갔다.
“폐하!”
마침 그곳에서 암살자를 심문 중이었던 린든이 테오도르를 향해 인사했다.
“실토했나?”
테오도르가 차가운 시선으로 암살자를 힐긋 눈짓하며 물었다.
오전에 이브의 앞에서 보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냉랭한 태도였다.
“아, 아직…….”
“비켜라, 린든.”
테오도르는 싸늘한 눈으로 암살자를 쳐다보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자박, 자박.
유독 음산하게 느껴지는 발소리에 암살자가 고개를 들었다.
“……!”
그러다가 테오도르와 눈이 마주치고는 숨을 홉 삼켰다.
암살자의 동공에 공포가 잔뜩 서렸다.
잠시간 암살자를 스산히 응시하던 테오도르가 히죽, 입꼬리를 비릿하게 말아 올렸다.
“안녕, 쥐 손님.”
비속어 하나 들어 있지 않은, 무척이나 나긋하고 상냥한 인사였다.
착한 강아지는 바르고 고운 말만 쓰는 법이다. 주인이 있는 곳에서도, 없는 곳에서도.
그러나 정작 그 착한 인사말에 암살자의 표정이 희게 질려 갔다.
아름답게 웃고 있는 테오도르의 주위로, 검은 어둠이 으스스하게 피어났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윽고, 처절한 비명이 이어졌다.
길지 않은 심문 끝에 테오도르는 썩 만족스러운 정보를 얻어 냈다.
“이렇게 조금만 겁주어도 실토할 것을.”
테오도르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암살자를 보며 혀를 쯧 찼다.
“너무 온건하게 심문한 것 아니냐, 린든.”
“제가 온건한 게 아니라, 폐하께서 과격하신…….”
린든은 조금 억울한 목소리로 중얼중얼 변명했다.
린든의 검을 뺏어 든 테오도르가 주저 없이 암살자를 베었다.
만약 그들이 노리는 상대가 제가 아닌 리아였다고 하더라도, 그 어린아이를 잔인하게 습격하였을 놈들이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테오도르의 검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벤야민 페르디난트의 신병은?”
“변함없습니다.”
“그의 처형이 일주일 남았던가.”
테오도르는 머릿속으로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쨍그랑-
검이 바닥에 부딪치며 내는 날카로운 쇳소리를 뒤로하며, 테오도르는 지하 옥사를 나섰다.
* * *
비가 그친 오후.
오전 내내 저택 안에 갑갑하게 머물던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아직 마르지 않은 잔디 위를 뛰어다니며 놀았다.
나는 창을 타고 넘어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테이블 위에는 테오도르에게 받은 젖은 꽃다발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차마 그대로 갖고 돌아가라고 할 수 없어서, 대충 치워 둔 것이었다.
무심코 그것을 쳐다보던 내게,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오래전.
테오도르에게 나의 진명을 밝히고, 그와 체온을 나눈 직후.
나는 그의 품 안에서 바스락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만 돌아가 봐야 해요, 폐하. 아니, 돌아가 봐야 해, 테오.]아직은 존대를 거두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게 조금 어색하던 때였다.
그만 돌아가려는 나를, 테오도르는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싫어, 이브.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 응?]그가 꼭 칭얼거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내 허리를 답삭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내 품에 파고들며 내 몸 이곳저곳에 입을 쪽쪽 맞추었다.
[사랑해, 이브.] [읏, 테오…….]그가 쏟아 내는 사랑에 정신 못 차리던 나는 이내 화들짝 그를 밀어냈다.
[자, 잠깐만!] [으응?]그러자 그가 둥글게 휜 두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일단 돌아가서 씻기도 해야 하고……!] [씻고 싶어서 그래? 그럼 여기로 목욕물을 가져오라고…….] [안 돼! 절대 싫어!]그럼 테오도르의 시종들에게 내가 그와 밤을 보낸 것을 알리게 되지 않는가.
[그러다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떡해?] [뭐 어때?]테오도르는 정말로 그게 무슨 문제가 되냐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며 다시금 내 몸을 와락 끌어안으며 속닥였다.
[가지 말고 나랑 놀자, 이-브] [뭐 어때가 아니야! 숨기기로 했잖아, 당분간은.] [황제궁의 사용인들은 모두 입이 무거우니까 괜찮아. 혹 입을 가볍게 떠들고 다니는 이들이 있으면, 내가 모두 죽여 버릴게.]테오도르는 킬킬 웃으며 실없는 소리를 했다.
우리가 관계를 숨겨야 했던 것은 순전히 나 때문이었다.
체르니시아의 딸임을 밝힐 수 없었던 내가, 성별마저 숨긴 채 그의 측근 호위 노릇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가뜩이나 흉흉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 테오도르에게 남색을 한다는 소문까지 더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여자라고 밝히는 것 또한 불가했다.
처음 그의 손을 잡고 황궁에 들어섰을 때는 알지 못했지만, 본래 황족의 측근 호위는 불미스러울 수 있는 스캔들을 피해 동성의 기사를 임명하는 게 원칙이라 했다.
테오도르는 황궁의 사용인들 몇몇이 알게 되는 것쯤이야 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의 흉악한 본성을 알지 못했던 당시의 나는, 그가 아무리 유능한 황제라 하여도 소문이 퍼지는 것을 아주 막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끝내 돌아가겠다는 나를 말리지 못한 테오도르는 무척 아쉬워하였다.
[그럼 이브, 가기 전에 우리 한 번만…….]그 예쁜 얼굴로 나와 떨어지기 싫어 울먹울먹하는 바람에, 결국 나는 새벽 동이 트기 직전이 되어서야 내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곧바로 출근하기 위해 몸을 씻으며 테오도르를 약간 원망하기도 했었다.
그가 내 몸 이곳저곳에 남긴 흔적들 때문에 조금 곤란했으니까.
출근을 위해 목깃을 빳빳하게 세운 채로 다시 황제궁에 찾아갔을 때.
복도에서부터 꽃향기가 피어났다.
나보다 일찍 나와 있던 기사들은 폐하가 또 미쳤다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에 의아해하며 집무실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집무실 안이 온통 꽃으로 뒤덮여 있는 게 보였다.
놀라 두 눈을 끔뻑이며 묻자, 마침 내 자리에 꽃잎을 한 장 한 장 뜯어 깔고 있던 테오도르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어제, 제대로 된 프러포즈를 하지 못했잖아.] [그러니까, 프러포즈를 위해 이렇게 요란하게 준비를 한 거라고?]불과 두어 시간 전까지 같이 있었는데, 언제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준비한 거지?
[사랑해, 이브.]테오도르가 내 눈앞에 꽃다발을 들이밀며 활짝 웃었다.
그럴 적에 그의 손톱 밑에 알록달록한 꽃물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보자 괜히 눈가가 뜨거워져서, 그의 품에 와락 안겨 들었던 기억이 난다.
순간 놀란 테오도르가 꽃다발을 손에서 놓쳤고, 우리는 온몸에 꽃향기가 배도록 꽃잎 위를 뒹굴었었다.
‘그때랑 같은 꽃이네.’
이후로 잊고 있었는데, 꽃을 보자 그가 매일같이 내게 사랑을 속삭이던 날들이 떠올라 기분이 기묘해졌다.
잠자코 테이블 위의 꽃을 응시하던 때였다.
“어머, 오늘은 꽃이에요?”
마침 주변을 정리하던 로라가 젖은 꽃다발을 발견했다.
“폐하도 참 대단하신 것 같아요. 어떻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렇게 찾아오는 걸까요?”
“그러게 말이야.”
“이건 버리실 거지요?”
로라가 테오도르의 꽃을 가리키며 물었다.
로라는 내가 혼자서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던 탓에, 유독 테오도르를 향한 감정이 좋지 못했다.
“이보네, 설마 황제의 이런 선물 공세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 아니지?”
옆에서 브리안도 한마디 거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네가 황제가 보는 앞에서 그가 네게 했던 짓들을 똑같이 되돌려 주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거든.”
“어머, 똑같이라니요, 브리안 님! 두 배, 아니, 세 배쯤은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요!”
브리안과 로라의 대화에 괜한 웃음이 피식 나왔다.
“둘 다 고마워, 내 편에 서서 그렇게 말해 줘서.”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정말 그렇잖아!”
“맞아요! 이건 편을 드는 게 아니에요!”
나를 위해 발끈해 주는 두 사람 덕에 조금 전까지 기묘하게 술렁거리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아무튼. 고마워, 두 사람 모두. 그리고 로라, 꽃은 바로 버리지 말고 며칠만 화병에 꽂아 두자.”
“다 젖은 꽃을요?”
“꽃을 잘못 관리해서 이렇게 만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애꿎은 꽃을 버리면 꽃이 불쌍하잖아.”
“으음…… 알겠어요.”
로라는 어쩐지 불만스럽다는 표정이었으나, 내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방으로 돌아온 테오도르는 자신의 셔츠에 피가 튄 것을 발견했다.
조금 전 암살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묻어난 것이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무심코 단추에 손을 가져다 대던 순간, 테오도르는 멈칫했다.
이브가 제 단추를 채워 주던 그 감각이 다시금 생각이 났다.
“아…….”
그의 잇새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너무…… 좋아.”
테오도르는 한 손바닥 위로 고개를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그럴 적에 그의 귓불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와 잠시 닿았을 뿐인데.
그것도 살결이 스친 게 아닌, 그저 이 자그마한 단추 끄트머리에 그녀의 손가락이 닿았던 것뿐인데.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의 향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셔츠를 갈아입지 않았다.
피 묻은 셔츠를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황궁을 활보하는 황제의 모습에, 황궁의 사용인들은 ‘또다시 황제의 기행이 시작되었구나.’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의사가 찾아와 붕대를 갈아야 한다고 하였는데도, 테오도르는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저녁이 되어 씻을 시각이 되어서도 테오도르는 옷을 벗지 않고자 했다.
[그렇지만…… 폐하께서 씻지 않는다는 사실이 혹 이보네 님께 알려지기라도 하면…….]아르민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린 말에, 그제야 테오도르는 꾸물거리며 셔츠를 벗었다.
이브에게 나쁜 놈에 더해 더러운 놈까지 될 순 없었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울적한 얼굴로 셔츠를 벗은 테오도르는, 셔츠의 단추를 모조리 뜯어 유리병에 모아 두었다.
그러고는 이전에 이브가 뿌린 소금을 모아 둔 유리병 옆에 두었다.
그러자 꼭……
“이브의 향이 느껴지는 것 같아…….”
테오도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실실 웃었다.
“미친 사람 같아요, 형님.”
어느 틈에 제 방에 찾아온 에른스트가 시비를 걸었다.
“황제의 침실에 함부로 드나드는 게 중죄라는 것을 잊었나?”
테오도르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죽어 간 놈들과 같은 꼴이 되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오는 거지?”
“우리 사이에 그런 무서운 말씀을.”
에른스트는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고는 겁도 없이 테오도르의 유리병을 만지작거렸다.
“이보네의 향이 나네요.”
“만지지 마.”
잔뜩 분노한 테오도르가 에른스트에게서 유리병을 낚아챘다.
감히 에른스트 따위가 이브의 향이 묻어나는 물건을 만진 게 화가 나서, 테오도르는 두 눈을 흉흉하게 치켜떴다.
어지간한 이들이라면 겁을 먹고 움츠릴 시선이었으나, 에른스트는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거 알아요, 형님? 이보네가 곧 결혼을 한대요.”
“뭐……?”
“결혼이요, 결혼. 이보네가 결혼을 할 거라고요.”
쿵!
순간 테오도르의 심장이 아래로 거세게 추락했다.
“뭐, 슬슬 그럴 때도 됐죠. 아이들도 이보네가 결혼하길 바라는 것 같고.”
“…….”
“아, 에르랑 리아가 제게 그랬거든요. 아빠가 갖고 싶다고.”
“…….”
에른스트가 재잘재잘 떠드는 동안 테오도르는 사색이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브가, 결혼을 한다고……?
아이들도 그걸 바라고……?
그러다가 한참 뒤에, 그가 겨우 입술을 달싹여 물어보았다.
“누구와……?”
이것을 물어보는 게 옳은지, 얼핏 망설임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글쎄요.”
에른스트는 빙긋 웃으며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이보네에게 직접 물어보시든가요.”
“…….”
테오도르는 두 주먹을 꾸욱 말아쥐었다.
이브가 결혼을 한다.
이브가 저를 두고 결혼을 한다.
이브가 저를 두고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
‘당연한 거야. 이상할 것 없어. 이브도 이제 자리를 잡았으니,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무심코 생각하던 테오도르는, 문득 제 생각의 오류를 알아차렸다.
‘아니. 나는 왜 아이들을 위한 거라고 합리화하는 거지? 꼭 아이들 때문에 이브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길 바라는 것 같잖아.’
스스로의 비겁한 마음을 알아차린 순간, 테오도르는 쓰게 인상을 썼다.
‘이브는…… 그런 이유로 배우자를 선택할 사람이 아니야. 분명 자신을 아껴 주고 사랑해 주는 이를 만나게 된 거겠지.’
비록 저는 그녀를 아프게 하기만 했지만, 그녀가 선택하였을 새 남자는 분명 그녀를 소중히 대해 줄 것이다.
초라하고 비참한 감정이 아닌, 밝고 좋은 것들을 그녀에게 알려 줄 것이다.
‘어쩌면…… 이브도 그 남자를 사랑할 테고…….’
어차피 이제 이브와 저는 되돌릴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나.
감히 그녀의 마음을 바라지 않고, 감히 그녀의 용서를 바라지 않기로 다짐하지 않았나.
‘잘된 일이야. 이브에게는, 분명 잘된 일이야.’
그러니 그녀의 결혼 소식에 마땅히 제가 하여야 할 것은, 그녀를 축하하고 응원하는 일이었다.
그녀가 걸어갈 길을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닦아 내고, 그 위로 꽃을 뿌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난……. 나는, 왜…….’
꾸욱, 말아쥔 손등 위로 핏대가 불룩 섰다.
이런 시답잖은 질투심을 닮은 감정은 그녀의 따스한 온정으로 용서받았던 제가 감히 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테오도르는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거세게 말아쥐었던 두 손을 천천히 펴며, 짧은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혈관을 쥐어짜는 듯한 괴로운 통각이 조금도 사라지질 않았다.
그런 테오도르의 모습에 에른스트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괴로우면 차라리 이보네를 찾아가 말하지 그래요? 아직 널 사랑하고 있으니까, 한 번만 봐달라고.”
“…….”
테오도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에른스트를 응시했다.
“에른스트.”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은 무시하며,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도와줄 일이 하나 있다.”
“으응? 제가요?”
“앞으로 일주일. 그 안에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황궁을 탈출할 거야.”
벤야민의 탈출을 이야기하는 테오도르의 얼굴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너는 벤야민 페르디난트의 뒤를 쫓아, 그들의 근거지를 알아내.”
이에 에른스트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형님은요?”
“…….”
테오도르는 대답 대신 침묵을 삼켰다.
* * *
테네브리스의 가호, 어둠.
오랜 시간 악으로 규정되어 온 그 힘에 반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은 일찍이 모두가 예상한 바였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그에 한 발짝 더 나아가, 이번 일을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무리가 있을 것이란 걸 짐작했다.
그러니까, 최근 제국 내에 있었던 일련의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인해 세력을 모두 잃어버린 페르디난트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마법사들 말이다.
테오도르의 짐작과 같이, 어둠에 대항하는 집단과 페르디난트의 추종자들이 손을 잡았다.
막상 마물 떼가 하늘을 뒤덮었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이들이, 어둠을 용납할 수 없다는 같잖은 명분으로 암살자를 보내 오는 게 퍽 우스웠다.
“테오도르 황제!”
로브를 뒤집어쓴 페르디난트의 추종자들이 동시에 테오도르를 공격했다.
푸른 빛이 이곳저곳에서 번쩍이며 테오도르의 어둠과 부딪쳤다.
“죽어라, 이 마물 같은 놈!”
“제국을 위협하는 어둠의 현신!”
테오도르를 공격하는 것은 마법사들만이 아니었다.
가호를 발현하지는 못했으나 뛰어난 실력을 지닌 암살자들이 어둠 속 곳곳에서 튀어나와 테오도르를 공격했다.
챙-!
챙강-!
테오도르는 열댓 명의 암살자를 홀로 상대하며 옅은 인상을 썼다.
벤야민의 처형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그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벤야민을 빼돌리고자 할 것을 알았다.
벤야민은 이틀 뒤의 처형을 위해 며칠 전 황제궁 서쪽 첨탑으로 신병을 옮겼다.
사형이 확정된 제국의 가장 악질적인 죄인들만을 다루는 서쪽 첨탑의 감옥 열쇠는 오직 두 명이 지니고 있었다.
한 명은 황궁 전체의 경비를 담당하는 린든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바로 테오도르였다.
그동안 밑밥은 충분히 뿌려 두었다.
테오도르는 그들이 간을 보듯 보내 온 암살자들에게 부러 당해 주었고, 공식 석상에서 몇 차례 쇠약한 모습을 연출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저들이 총공세를 해올 것이라 여겼다.
페르디난트를 추종하는 불온 세력들과 함께 어둠에 반발하는 이들을 한 번에 뿌리 뽑을 수 있는 다시 없을 기회였다.
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테오도르는 보다 확실한 미끼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최근 일주일, 매일 저녁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부러 호위를 물리고 홀로 산책을 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황궁 내에 잠입해 테오도르를 공격해 왔다.
기회를 노린 테오도르는 부러 느슨하게 틈을 벌리었다.
암살자의 검이 그의 어깨를 스쳤다.
“으윽…….”
테오도르는 어깨를 붙잡으며 주춤거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페르디난트의 마법사 중 하나가 그를 향해 술식을 펼쳤다.
‘뭐지……?’
익숙하면서 불쾌한 느낌에 테오도르가 멈칫, 하던 중.
순식간에 암살자들이 테오도르를 에워싸며, 여러 개의 검날이 테오도르를 겨누었다. 그리고,
“폐하!”
린든이 때맞춰 기사들과 함께 나타났다.
“이 무도한 것들, 당장 폐하의 곁에서 물러나라!”
기사들은 이를 바드득 갈며, 테오도르를 에워싼 습격자들을 노려보았다.
“서쪽 첨탑의 열쇠를 내놓으면 황제를 놓아주지.”
그들 중 하나가 감히 황제의 목에 검을 겨눈 채로 협상을 시도했다.
“젠장.”
린든은 욕설을 짓씹으며 그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전에 테오도르와 미리 협의된 바였으나, 습격자들은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의 뒤를 쫓거나 허튼짓을 하는 순간 너희 황제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테오도르를 향해 술식을 펼쳤던 마법사가 음산한 목소리로 위협하고는 동료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마침내 주위가 조용해졌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어깨를 조금 베인 것뿐.”
놀라 다가오는 린든을 향해, 테오도르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의 시선이 서쪽 첨탑 쪽으로 향했다.
조금 전 습격자들의 요구에 따라 첨탑 주변의 경비를 해제하였으나, 어둠에 몸을 숨긴 에른스트가 곧바로 저들의 뒤를 쫓을 것이다.
제가 직접 쫓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쉬웠다.
그렇지만 제게는 시간의 거울이 있으니 에른스트가 어둠을 펼치면 통로를 통해 곧바로 이동이 가능했다.
테오도르는 애써 아쉬움을 달래며 걸음을 돌렸다.
“제리코를 불러와라. 저들이 내게 어둠을 시전한 것 같으니.”
마법사가 술식을 펼친 순간 느껴지던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느낌은 분명 테네브리스의 어둠이었다.
어둠의 가호를 타고 나지 못한 이들이 펼칠 수 있는 건 ‘흑마법의 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 뿐이었다.
굳이 기록을 일일이 확인하는 수고를 들일 필요조차 없었다.
테오도르가 얼마 전 황궁으로 데려와 마물 관리직에 임명한 제리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사도들의 시대부터 살아온 제리코라면 이 불쾌한 술식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낼…….
“헉……!”
순간 테오도르가 생각을 멈추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갑작스레 눈앞이 흐려지며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파 왔다.
“윽, 으윽…….”
얼굴을 고통스럽게 일그러트린 테오도르가 돌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폐하!”
“폐하!”
놀란 기사들이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상처 때문, 아니, 설마 흑마법이……!”
“젠장, 제리코는 지금 어디쯤…….”
이때였다.
테오도르가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벌떡 들어 올렸다.
“아, 안 돼……!”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