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14_4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인지, 이브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달래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라지지 않을게.”
“……응.”
그 말에 묘하게 안심이 되어, 테오도르는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뉘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꼬옥 잡고서 다시금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잠든 그를 내려다보며 이브는 얇은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네…….’
그녀의 미간이 야트막하게 찌푸려졌다.
린든의 부탁에 따라 체르니시아 저택으로 그를 데려왔다.
만일의 일이 생길 경우 곧바로 대처할 수 있도록, 제 방과 같은 층에 있는 손님방에 그를 재운 터였다.
잠든 그가 걱정되어 복도에 나왔다가, 헐떡이는 숨소리에 그가 잠들어 있는 손님방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리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악몽을 꾸고 있는 테오도르를 발견한 것이다.
[안 돼, 이브…… 이브……! 이브……!]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브…….]다행히도 제가 살아 있다는 것을 곧바로 인지하고서 다시금 고요히 잠이 들었지만…….
이브는 불규칙적인 숨소리를 내쉬는 테오도르의 얼굴을 멀거니 들여다보았다.
유독 또렷한 이목구비가 며칠 새 수척해져 있었다.
병색마저 묻어난 그 창백한 얼굴빛에 자꾸만 가슴이 시리게 가라앉았다.
이브는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적시고 있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슬픔이었다.
테오도르가 아파하는 게 슬펐다.
테오도르가 저를 찾으며 우는 게 슬펐다.
테오도르가 제가 남긴 상처로 괴로워하는 게 슬펐다.
테오도르가 과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있는 모습이 슬펐다.
그리고 그중 가장 슬픈 것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에게, 차마 나도 아직 너를 조금 사랑하는 것 같다고 대답하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그렇게나 단호하게, 아주 작은 여지도 없이 관계의 종결을 선언하였는데.
어째서 너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 걸까.
왜, 너는 나 때문에 이렇게 아파하는 걸까.
“바보 같아…….”
이브는 자그맣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꼬옥-
그러나 테오도르가 붙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
조금 전, 제가 사라질까 두려워 눈을 감지 못하던 그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브는 꼭 저 자신이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울컥거리고, 코끝이 시큰한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쩌면 테오도르가 괴로워하는 모습에 제가 이렇게 울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에르가 감기에 걸려 온종일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끙끙 앓았을 때.
리아가 넘어져 무릎에 커다란 상처를 달고서 눈물을 뚝뚝 흘렸을 때.
그때에도 이브는 꼭 지금처럼 마음이 아팠다.
제가 대신 아프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해 뜨거워지려는 눈가를 꾹꾹 눌러야 했다.
왜냐하면…….
사랑하니까.
에르와 리아를 사랑하니까.
그래서, 그렇게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저는 에르와 리아를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테오도르를…….
“…….”
이브는 두 눈을 꾸욱 내리감았다.
툭, 후드득-
그러자 감긴 눈가를 타고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 * *
“으헉, 헉! 사, 살려 주…….”
컥, 하는 소리와 함께 발치에 매달려 있던 남자가 고개를 꺾으며 쓰러졌다.
에른스트는 따분한 표정으로 발끝을 툭툭 털었다.
“죽음을 불사한다더니.”
에른스트는 혀를 쯧, 차며 뺨에 튄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애석하게도 번져나간 핏자국은 그의 얼굴에 붉은 자국만 만들어 냈다.
허공에서 피어난 검은 창살이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몸을 꿰뚫었다.
꺽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숨을 거두었다.
[페르디난트를 따르던 이들이 어둠에 대항하는 무리와 합세하였다. 그들은 이미 죽음도 불사르고 있어.]죽음을 불사르네, 마네 하며 황제를 공격하기까지 하였으면서.
막상 죽을 때가 되니 제 바짓자락을 붙잡고 목숨을 구걸하는 꼴이 우스웠다.
[듣자 하니, 어둠에 물든 알브레히트 황가를 무너뜨리고 벤야민 페르디난트를 구출하여 새 왕으로 세울 거라더군.]벤야민 페르디난트에 대한 기억은 무척 듬성듬성하였으나, 그럼에도 그를 향한 분노만큼은 선명했다.
그의 영혼에 얼룩진 테네브리스의 부스러기는 먼지처럼 작았으나, 그 안에 깃든 페르디난트를 향한 분노는 온 세계를 삼킬 만큼 극렬했으니까.
“벤야민 페르디난트는, 어디에 있지?”
에른스트가 나른하게 고개를 젖히며 물었다.
그의 주위로 피어난 어둠이 아직 죽지 않은 이들을 위협하듯 너울거렸다.
이에 모두가 숨을 삼키며 몸을 움츠렸다.
조금 전까지 저 새까만 어둠이 동료들을 어떻게 학살하였는지, 모두가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들 입을 꾸욱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버티는 그 모습들에 에른스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너울거리던 어둠은 사방에서 검은 가시의 형태로 뭉치기 시작했다.
“흐익……!”
누군가가 괴상한 숨소리를 내며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쾅!
콰앙!
쿠과과과광!
수십 개의 검은 가시들이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근거지를 알아낸 다음에는요?] [살려 두면 언젠가 리아를 위협할 놈들이다.]테오도르의 짤막한 답에는 그들을 전부 멸살해도 좋다는 무언의 허락이 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제가 형님을 도와 그자들을 완벽하게 뿌리 뽑아 드리지요.]에른스트는 거침없이 어둠을 개방했다.
그의 안에 억눌려 있던 난폭한 어둠이 신이 나 날뛰었다.
그러나 죽어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에른스트의 얼굴 위로 점차 짜증이 어리었다.
이만한 소란에도 불구하고, 벤야민 페르디난트의 머리털 하나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벤야민 페르디난트는 대체 어디 있는 거지?’
* * *
테오도르는 한참이나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그의 귓가에 ‘또다시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이제 놓아줘.’ 하고 속삭인 순간, 마법처럼 스르륵 손이 풀렸다.
땀에 젖어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준 뒤, 복도로 나왔다.
잠이 오지 않았다.
습관처럼 아이들이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걸음을 옮길 때였다.
휘이잉-
문득 불어오는 바람에,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내가 창을 열어 뒀었나?’
열린 창을 닫고자 창가로 다가간 순간.
멈칫.
창밖으로 보이는 인기척이 나를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리게 만들었다.
“벤야민…….”
벤야민이 새하얀 달빛을 받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 이브.”
그가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순간 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실례할게.”
그리고 그사이, 벤야민이 창 안으로 훌쩍 넘어왔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피투성이의 남자가 복도 위를 굴렀다.
“테오도르 황제가 흑마법에 걸려서 미쳐 버렸다면서?”
내가 그쪽을 힐긋 쳐다보자, 벤야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인 거지?”
“내가 시전자를 데려왔어. 이자의 피가 있으면 황제에게 발동된 흑마법의 술식을 지워 낼 수 있을 거야.”
그는 나른한 웃음을 흘리며 설명했다.
“뭐……?”
“이자를 넘길게.”
벤야민은 대뜸 내게 제안했다.
“내가 이자를 넘길 테니까, 넌 나한테 와.”
곧바로 드러낸 그 속내에 나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테오도르의 술식을 해제하는 대가로, 널 용서하고 네 곁에 있으라고?”
명백한 조롱 조의 반문에, 둥글게 휘어 있던 벤야민의 눈매가 서서히 굳어 갔다.
“……용서하지 않아도 좋아. 그냥 내게 오기만 해.”
“내가 그딴 협박에 응할 것 같아?”
“…….”
벤야민은 잠시간 입술을 꾸욱 깨문 채로 나를 쳐다보았다.
원망의 빛깔이 담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가 한참 뒤에 입술을 열었다.
“응. 너 아직 좋아하잖아, 테오도르 황제.”
그가 웃음기가 싸악 가신 목소리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무슨…….”
“네 무의식 속에는 온통 그자뿐이지. 이미 봤어. 널 차지한 게 누군지.”
순간 당황한 나를 향해, 그가 감정의 고저가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알면서도 외면한 사실을 들먹이며 그자가 날 도발했을 때, 어찌나 죽이고 싶던지. 너는 절대 모를 거야. 평생이 가도 알지 못할 거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리는 그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벤야민이 입꼬리를 비릿하게 말아 올렸다.
“참 가엾지. 네가 죽은 시간에 갇혀 버린 테오도르 황제 말이야. 아, 내가 일전에 말한 적 없었나? 네가 그 가짜 허수아비를 남기고 남쪽의 섬으로 달아나 있는 동안, 테오도르 황제가 어떻게 미쳐 버렸었는지.”
벤야민은 큭큭 웃으며 내가 떠난 시간의 테오도르에 대해 주절주절 이야기했다.
“그 작자에게서 네 허수아비를 빼앗아 불태웠어. 네 뼛가루라도 내놓으라면서 검은 재만 남은 흙바닥 위를 뒹구는 그 볼썽사나운 모습을 네가 봤어야 했는데!”
“…….”
물론 나 또한 이미 보아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내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가 조급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너는 어차피 테오도르 황제를 용서할 생각 없잖아, 이브?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 줄 수 있는 거잖아.”
“미쳤어, 벤야민?”
나는 어이가 없어서 차가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내가 테오도르를 용서하고 말고와 그건 별개의 문제야.”
“……!”
“나는 테오도르를 용서할 수 없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너를 용서하지 못해.”
“왜……! 어째서!”
벤야민이 버럭 역정을 내었다.
“나도 널 사랑하는데!”
그가 씩씩거리며 발갛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보았다.
“테오도르 황제 못지않게, 그렇게 오래전부터 너를 사랑해 왔는데! 어째서, 나는……!”
“뭐? 사랑?”
감히 그가 내놓은 그 단어에 내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사랑.
벤야민은 끔찍하게도,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추악한 감정을 포장하였다.
내가 페르디난트 저택에 갇혀 지내온 그 십여 년의 시간 동안 나를 고립시킨 것도 그에겐 사랑이었고.
카타리나의 학대를 묵인하고 내가 저택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내버려 둔 것도 그에겐 사랑이었으며.
하루아침에 기억을 잃은 연인이 다른 여자와 떠들썩한 사랑을 나누는 걸 지켜보도록 종용한 것마저 그에겐 사랑이었다.
참을 수 없는 역겨움에 속이 울렁거렸다.
나를 독점하기 위해 나의 모든 불행을 초래한 남자가, 이제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나는 테오도르가 내게 알려 주었던 사랑을 떠올렸다.
비록 테오도르는 인성이 못난 망아지 같은 남자였지만, 그는 언제나 내 행복을 빌어주었다.
말로는 나를 독점하고 싶다 하면서도, 그는 나의 이름과 가족들을 찾아주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틈에서 웃을 수 있게.
모두의 앞에 인정받으며 이보네 체르니시아라는 이름으로 나설 수 있게.
마치 나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인 양, 그는 그러했다.
평화롭던 나의 행복을 흔든 것은 바로 벤야민이었다.
그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지금은 그 이유를 안다.
그러니까 그가 ‘사랑’이라고 감히 이름 붙인, 나를 향한 그 역겨운 감정 때문에.
그로 인해 나는 하루아침에 연인을 잃었고, 에르와 리아는 아버지 없이 자라야 했다.
기억이 돌아온 테오도르는 나를 잃은 채 스스로의 목을 졸랐고, 다시 만난 테오도르는 아이들의 앞에 아버지로 나서지도 못한 채 그저 희생을 감수했다.
그 모든 비극을 초래한 이가 다름 아닌 벤야민이었다.
그런 주제에.
내가 누릴 수 있었던 모든 평화를 다 깨부순 주제에.
“감히, 사랑이라고?”
뻔뻔하게 사랑을 입에 담은 벤야민이 마치 징그러운 벌레처럼 끔찍하게 느껴졌다.
테오도르가 내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 저 결과를 빚어낸 장본인이 바로 벤야민 아닌가.
“이브……?”
나의 분노에 그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벤야민.”
나는 그를 향해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에게 아이들을 건드린 존재가 받아들여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
그가 내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그가 이해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그런 일들을 자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너와 나의 악연을 정리하자.”
나는 곧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게 네 선택이야……?”
벤야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그를 차갑게 노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벤야민의 목울대가 야트막하게 일렁거렸다.
그가 천천히 푸른 마기를 끌어냈다.
페르디난트의 가호였다.
그가 마기를 펼치는 모습에 검을 더욱 강하게 고쳐 잡던 때였다.
“……!”
순간 눈 앞에 펼쳐진 예기치 못한 상황에 내 두 눈이 놀라 커졌다.
그의 마기가 공격한 것은 내가 아니라 바닥에 엎어져 있던 남자였다.
아까부터 입이 틀어막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던 피투성이의 남자가 두 눈을 부릅뜨고 버둥거렸다.
“너, 무슨 짓을……!”
“본디 시전자를 죽이면 남은 술식은 사라져야 마땅하지만.”
벤야민이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홰애액-
이내 푸른 마기가 남자를 덮쳤다.
“죽이지 않고 존재 자체를 세상에서 지워 내면, 술식은 망자의 저주가 되어 영원토록 존속하게 되지.”
“……!”
남자를 덮친 푸른 마기가 천천히 허공 속에 흩어져 사라졌다. 남자와 함께.
쿨럭.
벤야민이 창백한 얼굴로 피를 토했다.
“젠장, 반작용이 벌써…….”
“너, 설마…….”
나는 입술을 깨물며 그를 보았다.
조금 전 그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 것만 같았다.
오래전, 벤야민은 루돌프를 죽이기 위해 다른 이들의 생명을 제물로 흑마법을 사용했었다.
루돌프가 흑마법에 당해 죽은 탓에 그가 내 손목에 남긴 술식은 사라지지 못했다.
만일 그가 그것과 같은 원리로 조금 전의 남자를 제거한 거라면…….
“네 생명을, 제물 삼은 건가?”
벤야민은 희미한 미소를 얼굴 위로 띄우며 대답했다.
“네가 내게 오지 않겠다며.”
“……!”
“내가 어떻게 설득해도, 내게 오지 않을 거잖아.”
조금 전에 그가 제거한 남자는, 테오도르에게 어둠의 술식을 시전한 자라고 했다.
그 남자의 피만이 그를 괴롭히는 술식을 지울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벤야민은 지금, 테오도르를 어둠에서 꺼낼 유일한 수단을 제거한 것이다.
“내가 널 가질 수 없다면, 테오도르 황제도 마찬가지야.”
“……멍청한 소리.”
스으윽-
내 손에 들려 있던 검 끝이 벤야민의 목을 겨누었다.
그러나 벤야민은 피하지 않았다.
그저 느리게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다시 뜰 뿐이었다.
나는 그런 벤야민을 잠잠히 노려보며 말했다.
“테오도르는, 한 번도 나를 가지려 한 적 없었어.”
테오도르는 단 한 순간도, 나를 소유하려 한 적이 없었다.
도리어 내게 소유되길 바라던 남자였다.
“그게 너랑 테오도르의 차이야.”
“……!”
순간 벤야민의 눈이 커지며,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테오도르는 매 순간 내게 어여쁨을 받고자 안달이 난 사람 같았으나, 단 한 번도 내게 그러한 감정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나의 뜻을 먼저 존중해 주었다.
내게 버림받을까 전전긍긍하면서도, 내가 결코 애정을 돌려주지 않을 것을 선언한 뒤에도, 그는 그러한 자신의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네가 나를 향해 품은 마음이 사랑이 아닌 이유이기도 하고.”
“아니야, 난…….”
그가 내게 무언가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내가 쥐고 있던 검날 주위로 녹색 검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한때 친구라 믿었던 이를 베어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으나,
‘벤야민을 살려 두면…… 또다시 아이들과 테오도르를 위험에 빠뜨릴지 몰라.’
그러한 생각이 나의 결심을 더욱 단단하게 해 주었다.
“그러니까, 벤야민.”
한 번 표적으로 삼은 것은 절대 놓치지 않는 체르니시아의 녹색 검기가 벤야민의 몸을 칭칭 감았다.
나는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내 결심을 알아차린 그가 제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꼿꼿하게 힘주어 뜬 벤야민의 두 눈가가 붉게 물들어 갔다.
그리고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 울어?] [네 집으로 돌아가. 여긴 너처럼 작은 여자애가 있을 만한 곳이 못 돼.] [난 벤야민이야.] [어…… 울리려던 건 아니었는데…….]벤야민은 가족들을 잃고 혼자가 되었던 내 옆을 채워 준 유일한 친구였다.
삭막한 페르디난트에서 버틸 수 있었던 단단한 지지대였다.
그렇지만 그가 벌인 죄악들을 모두 알게 된 지금은 모두 퇴색된 과거일 뿐이다.
“두 번 다시 보지 말자.”
“…….”
주르륵.
벤야민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랜 세월 알고 지냈으나, 벤야민이 우는 것은 처음 보았다.
느리게, 내 손에 들린 검이 그의 몸을 베어냈다.
“윽…….”
털썩.
벤야민이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이브…….”
바닥에 엎어진 그가 희미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읊조렸다.
“나의, 이…….”
그러나 꺼질 듯 희미하던 그 작은 읊조림은 금세 바스러지고 말았다.
죽어가는 눈동자가 끝까지 나만을 좇다가 툭, 감기었다.
질긴 악연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한참이나 같은 자리에서 이제는 더이상 친구라 부를 수 없는 옛 인연을 지켜보다 몸을 돌렸다.
* * *
날이 밝기도 전에 황궁으로 사람을 보냈다.
벤야민 페르디난트를 즉살하였다고.
에른스트와 린든을 비롯한 황궁 사람들이 곧바로 저택을 찾아왔다.
벤야민은 본래 내일이면 처형될 제국의 가장 극악한 범죄자였다.
제국을 위협한 중죄인을 즉살하는 것은 제국을 보호하는 3대 가주로서의 권한이자 동시에 마땅한 의무였다.
황궁에서 나온 기사들이 벤야민의 시신을 옮겨 갔다.
죽은 그는 카타리나와 함께 효수될 것이다.
“이보네, 괜찮아? 혹시 그자가 네게 위험한 짓을 한 건…….”
에른스트는 걱정되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물었다.
“나는 괜찮아, 에른스트.”
순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는 에른스트의 모습에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는 너야말로 괜찮은 거야? 네가 직접 황궁의 습격자들을 쫓았다면서. 위험한 일은 없었어?”
“으, 응……. 괜찮아.”
에른스트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대답했다.
‘어?’
문득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린든이 옆에서 해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꼭…… 오래전에 아르민 경이 나와 테오도르를 볼 때 짓던 표정이랑 비슷한데.’
그러나 그러한 것에 신경 쓸 틈은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린든 경. 벤야민이 술식의 시전자를 제거했어요.”
나는 린든을 붙잡고 초조하게 물었다.
술식을 해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없어졌다.
“술식을 해제할 다른 방법이 필요해요.”
그렇지만 방법이 영 없는 것은 아니리라.
[그럼 이, 이건 어떻게 한 거예요? 분명 루돌프 페르디난트가 제게 술식을 걸었는데…….]나는 오래전, 테오도르가 내 손목에 남아 있던 루돌프의 술식을 해제해 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신성력이야.]테오도르는 술식을 해제한 힘이 레오브란테의 가호라고 하였다.
그가 내게 남아 있던 술식을 해제해 주었던 것처럼, 어쩌면 그를 괴롭히는 술식을 해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
“오래전에 테오도르가 신성력으로 술식을 해제한 걸 본 적이 있어요. 레오브란테에 부탁을 하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아…… 네, 이보네 님. 그렇다면 제가 바로 레오브란테를 찾아가…….”
내 말에 린든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 올라타려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