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2_1
01. 검은 머리 황자님
이보네 체르니시아.
알브레히트의 가장 어린 검.
대대로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를 배출해 온 체르니시아 가문의 막내딸.
그것이 어린 시절의 나를 가리키는 수식어였다.
알브레히트 제국의 2황자 에른스트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문의 어른들끼리 미래를 약속한 사이이기도 했다.
당시의 나는 너무 어렸고, 그래서 어른들끼리 약속했다는 그 ‘미래’가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어른들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그들이 시키는 대로 종종 황궁을 방문해 에른스트를 만나야 했다.
그날도 나는 에른스트를 만나러 황궁에 방문하는 길이었다.
[잘 들어, 이보네. 황궁에 가면 테오도르 1황자와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오늘도 언니들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신신당부하였다.
언니들이 그렇게까지 붙잡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테오도르 1황자에 대한 소문은 나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1황자궁에서는 매일 시체를 치운다더라.] [피 냄새와 비명 소리가 끊이는 날이 없고…….] [살아 있는 사람을 과녁 삼아 유흥을 즐기는데…….] [순결한 짐승의 피로 목욕을…….]으으으…….
나는 공연히 드는 한기에 오싹하니 소름이 돋아 양팔을 문질렀다.
그러나 1황자에 관련된 이야기 중에서 가장 으스스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특히나 그 검은 머리카락이 아주 불길하기 짝이 없어…….]그가 지녔다는 검은 머리카락.
알브레히트 제국에서 검은색은 아주 불길하게 여겨졌다.
아주 오래전, 마물을 세상에 풀고 사람들을 위협한 ‘고대의 어둠’을 상징하는 색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는 전설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지만, ‘고대의 어둠’을 물리친 세 가문이 이끄는 제국에서는 여전히 검은색을 끔찍하게 생각했다.
고위 귀족가에서 검은 머리나 검은 눈의 아이가 태어나면 가문 밖으로 내다 버릴 정도였다.
그런데 황가에서 검은 머리카락의 아이가 태어나다니.
[있지, 이보네. 사실 테오도르 황자님은 ‘고대의 어둠’이 사람의 몸을 빌려 현세에 태어난 거래.]나는 언젠가 브리안 오빠가 해 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야! 그건 브리안 오빠가 지어낸 거짓말이야!’
짓궂은 막내 오빠 브리안은 나를 괴롭힐 때마다 ‘테오도르 1황자에게 시집보낸다’며 그와 관련된 무서운 소문들을 들려주곤 했다.
그러면 나는 으아앙 울며 리하르트에게 달려가 브리안의 괴롭힘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저런, 브리안이 또 이보네를 괴롭혔나 보네.]상냥한 첫째 오빠 리하르트는 브리안의 말이 거짓이라고 했다.
[괜찮아, 이보네. 그건 브리안이 널 놀리려고 지어낸 거짓말이야.] [정말? 정말 거짓말이야?]훌쩍이며 재차 묻자 리하르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너를 그런 악마 같은 황자에게 시집보낼 리 없잖아.] […….]그러니까 리하르트는 나를 1황자에게 시집보낸다는 브리안의 놀림이 거짓이라고 했지, 1황자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들을 부정한 게 아니었다.
‘어, 어차피 나랑은 마주칠 일 없는 사람이니까…….’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1황자에 대한 생각을 떨치기 위해 노력했다.
‘1황자궁은 황후궁이랑 멀리 떨어져 있으니 괜찮겠지?’
황궁 외진 곳에 궁전을 얻고 홀로 생활한다는 1황자와 달리, 내가 지금 만나러 가는 2황자 에른스트는 아직 나이가 어려 황후궁에 기거한다.
에른스트의 어머니인 마르가라테 황후와 전 황후 소생인 테오도르 1황자는 사이가 썩 좋지 못했다.
그러니 황후궁에 가면 1황자와 마주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나를 태운 마차가 어느덧 황궁의 정문을 넘어섰다.
“이보네!”
마차에서 내리자 에른스트가 방방 뛰며 내게 달려왔다.
“안녕, 에른스…… 으악!”
“보고 싶었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른스트가 나를 덥석 끌어안으며 외쳤다.
강한 포옹에 버둥거리던 나는 그를 밀어내며 째릿 노려보았다.
“숨 막히잖아!”
그러나 나의 매서운 눈길에도 불구하고 에른스트는 그저 생글생글 웃었다.
“어머니의 후원에서 놀자!”
“잠깐만, 황후 폐하께 인사를 먼저…….”
“괜찮아! 어머니는 지금 손님을 맞이하느라 바쁘시단 말야! 어서 따라와, 이보네!”
에른스트에게 막무가내로 끌려가는 나를 보며 황후궁의 사용인들이 쿡쿡 웃었다.
“있지, 있지, 이보네. 우리 소꿉놀이…….”
“숨바꼭질할래?”
소꿉놀이를 하자며 칭얼거리는 에른스트의 말을 끊으며 대뜸 물었다.
“숨바꼭질?”
새로운 놀이에 에른스트가 흥미를 보였다.
“규칙은 간단해. 술래가 눈을 감고 100까지 세는 동안 숨는 거야.”
에른스트가 그 화사한 백금발을 흩날리며 나를 향해 씨익 웃었다.
“그럼 술래는 내가 할래!”
무더운 날씨에 그날따라 움직이기 귀찮았던 나는 얕은꾀를 냈다.
에른스트가 눈을 감고 100까지 세는 동안, 정해진 공간을 슬금슬금 벗어났다.
척 보기에도 몸을 숨기기 좋아 보이는 커다란 나무를 발견한 나는 그 위로 올라타 시원한 나무 그늘에 몸을 숨겼다.
‘여기 있으면 한동안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겠지!’
나는 스스로의 재치에 감탄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탔던 나는 그렇게 나무 기둥에 기대어 그늘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멀뚱멀뚱 시간을 보내다가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끔뻑끔뻑 졸다가 다시 눈을 떴을 적에.
“……?”
내 위로 짙은 그림자 하나가 드리운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웬 남자아이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지?’
나와 비슷한 또래 같았는데도 키가 굉장히 크고 예쁜 남자애였다.
나무 그늘 아래 그 머리카락은 평범한 짙은 밤색처럼 보였으나, 흰 얼굴 위로 자리 잡은 눈코입이 무척 화려했다.
인형처럼 아름다운 이목구비에 홀린 듯 멍하니 쳐다볼 때였다.
“안녕.”
그 애는 나른한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
흘러나온 목소리가 그 얼굴만큼이나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러자 그 애는 즐겁다는 듯 두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왜 웃어!”
발끈, 성질을 내며 외치자 그 애가 내 앞에 무릎을 굽히며 시선을 맞추었다.
“그냥. 귀여워서.”
담담하게 흘러나온 말씨에 화르르 얼굴이 붉어졌다.
“어? 빨개졌네?”
“더, 더워서 그래. 여름이니까…….”
웅얼웅얼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맞받아치며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그 애는 더욱 예쁘게 웃었다.
“더워? 시원하게 해 줄까?”
그 애는 허락도 없이 내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아이답지 않게 길쭉한 손바닥으로 내게 손부채질을 해 주었다.
“어때? 시원해?”
솔직히 말하자면, 그 애가 해 주는 손부채질은 하나도 시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애가 베푸는 친절이 이상하게도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거짓말을 했다.
“응.”
그러자 순진한 그 애는 내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기뻐했다.
“그런데 넌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
“친구랑 숨바꼭질. 그러는 너는?”
나의 물음에 그 애가 그 예쁜 황금빛 눈동자를 사르르 휘며 웃었다.
“보물찾기.”
“보물찾기? 아, 그거 뭔지 알아! 해 본 적 있어! 그런데 보물 안 찾고 여기서 나랑 같이 있어도 되는 거야?”
그 애는 대답 대신 더욱 예쁘게 웃었다.
어쩌면 이 애도 나처럼 더위를 피해 여기로 온 건지 모른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애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다 보니, 어느덧 날이 서서히 저물어 갔다.
붉어진 하늘을 발견한 나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나 이제 가 봐야 해!”
큰일이다.
이렇게까지 오래 숨어 있을 생각은 없었는데, 지금쯤 에른스트가 나를 찾고 있을 것이다.
눈물 많은 에른스트가 울고 있지는 않을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나는 황후궁으로 가야 해. 너는?”
“1황자궁.”
그 애가 두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그럴 때마다 함께 흔들리던 그 애의 길고 촘촘한 속눈썹을 감상하던 나는 순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응?”
“1황자궁.”
“테, 테오도르 1황자의 궁전 말하는 거야?”
하마터면 너무 놀라 나무 아래로 떨어질 뻔한 순간, 그 애가 나를 와락 붙잡았다.
“괜찮아?”
졸지에 그 품에 안기다시피 하게 된 나는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그 애의 시선을 피하며 웅얼웅얼 답했다.
“으응, 괜찮아. 잠깐 놀라서…….”
한여름의 뜨거운 공기 탓인지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1황자궁은 어때? 황자님이 무섭지 않아?”
“……?”
조심스럽게 묻자 그 애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간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 순진한 모습에 나는 조금 답답해졌다.
“그…… 테오도르 1황자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알지만 목소리를 슬쩍 낮추어 물었다.
“조금만 심사가 뒤틀리면 사용인들의 목을 벤다며? 1황자궁은 매일같이 시체를 치운다던데, 정말 그래?”
“뭐?”
“1황자님은 시체를 장난감 삼아 논다고…….”
그 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다 헛소문이야. 순진하게 그런 걸 믿는 거야?”
“아, 아니야! 나도 그런 거짓말 하나도 안 믿었어!”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외쳤다.
그러자 그 애는 더욱 짙은 웃음을 머금으며 나를 보았다.
그렇게 웃는 그 애가 너무 예뻐서, 자꾸만 심장이 쿵쿵 뛰었다.
* * *
황후궁을 향해 바삐 걸음을 옮기는 이보네의 뒷모습을, 소년은 가만히 응시했다.
마침내 이보네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소년의 짙은 밤색 머리카락이 천천히 검은색으로 바뀌어 갔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소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이보네의 흔적을 좇으며 자그맣게 읊조렸다.
이보네가 이름을 밝히지 않았음에도 그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가 있지?”
순수한 의문이 뒤따르는 자리에 자그마한 열망이 함께 했다.
“예뻐…….”
느리게 고개를 돌린 그가 조금 전까지 이보네가 앉아 있던 자리를 보았다.
톡-.
하늘에서 붉은 핏방울 하나가 그의 뺨 위로 떨어졌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젖혀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성인 남자 두 명이 대롱대롱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흡사 시체와도 같은 처참한 몰골로.
남자들은 마르가라테 황후가 보낸 암살자였다. 입이 막힌 탓에 그들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테오도르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들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서렸다.
테오도르는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 흰 빛무리가 흘러나왔다.
쿵-!
묶여 있던 암살자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테오도르는 축축한 흙바닥 위에 엎어진 남자들의 위로 사뿐히 착지했다.
마르가라테 황후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 황후궁 근처까지 찾아온 터였다. 커다란 나무는 척 보기에도 무언가 숨기기 좋아 보였다.
수하들을 시켜 반시체가 되어 버린 남자들을 나무 위에 매달던 도중, 고요히 잠들어 있는 작은 소녀를 발견했다.
테오도르는 곧바로 암살자들의 입을 봉한 뒤, 수하들에게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그러고는 소녀를 구경했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은색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은색 빛깔을 띤 길고 하늘하늘한 속눈썹. 그 아래 눈을 감고 있음에도 오밀조밀 반듯한 이목구비.
소녀는 예뻤다. 꼭 인형처럼 예뻤다.
눈을 감고 잠든 모습이 너무 예뻐서 한동안 떠나질 못했는데, 잠에서 깨 눈을 뜬 모습은 더 예뻤다.
새하얗게 빛나는 은발과 싱그러운 녹음을 머금은 녹색 눈동자를 보며 한눈에 알아봤다.
이 여자애가 세간에 소문난 그 체르니시아의 막내딸이라는 걸.
“정말 예뻤어, 그렇지?”
테오도르는 온몸이 칭칭 묶인 채로 바닥에 나뒹굴던 암살자에게 말을 걸며 사르륵 웃었다.
그러나 입이 막혀 있던 암살자는 당연하게도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테오도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왜 대답을 안 해? 너는 그 애가 예쁘지 않았어?”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황금색 빛무리가 기다란 검의 형상으로 변해 갔다.
순간 남자들의 몸이 들썩였다.
그들은 불과 몇 시간 전, 소년이 저 검으로 자신의 동료들을 어떻게 난도질하였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마르가라테 황후가 저희의 배후라는 것을 밝히고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이 자리에서 입을 잘못 놀렸다가 생목숨을 잃을 순 없었다.
“그렇게 인형처럼 예쁜 애는 처음 보았는데…….”
작은 소년의 중얼거림에 남자가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거세게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쇄액-!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성력으로 만들어 낸 긴 검이 남자의 목을 베어 버린 것은.
“감히, 더러운 마음을 품고 있었군.”
테오도르는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서늘히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그 옆에서 공포에 질려 덜덜 떨고 있던 다른 남자에게 다가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 애, 정말 예뻤지?”
눈앞에서 동료의 죽음을 목도한 남자가 읍읍거리며 무언가 말을 해 보려 하였으나, 테오도르의 성력으로 봉해진 입은 어떤 소리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남자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거칠게 가로저었다.
조금 전 죽은 동료와 정반대의 답을 내어놓는 남자의 모습에 테오도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내 말을 부정하는 건가?”
그리고 그의 읊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쇄애액-!
아직 피가 마르지 않은 검이 남은 남자의 목을 마저 베었다.
쯧.
작게 혀 차는 소리가 공터를 울렸다.
한두 명 정도는 살려 자비로움을 보여 주고자 했는데, 모두 죽여 버리고 말았다.
테오도르는 손에 쥔 검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러자 황금색 빛무리로 형성된 검이 파스스 흩어지며 공기 중에 사라졌다.
테오도르가 뺨에 튄 핏방울을 손등으로 닦아 낼 적에, 기사복을 입은 남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남자는 혈흔이 낭자한 것을 보고 멈칫하더니, 이내 그 앞에 무릎을 꺾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 말씀하신 대로 황자궁에 잠입한 황후의 끄나풀을 모두 색출했습니다.”
“응, 저것들이랑 같이 황후궁으로 보내.”
테오도르는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남자들의 시신을 힐끗 턱짓하며 말했다.
“지금 말입니까? 황후궁이 조금 소란스럽던데요. 2황자의 손님이 사라졌다고…….”
“그래, 지금…… 아.”
남자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듣던 테오도르가 멈칫했다.
사라졌다는 2황자의 손님이 누구인지 알아 버린 탓이다.
“린든.”
테오도르는 조금 벅찬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
“네……?”
“첫눈에 반했다는 말이 뭔지 알 것만 같다.”
그러자 그의 호위 기사인 린든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의 표정으로 테오도르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사랑……?
세상에, 제 주인과 이렇게나 어울리지 않는 말이 있을까!
어떻게 그런 수줍고도 말랑말랑한 말을…….
그러다 그는 이내 싸늘해진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테오도르의 시선에 히이익 놀라며 고개를 땅에 박아야 했다.
* * *
어둑해진 시간.
황후궁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은 사라진 나를 찾느라 한바탕 발칵 뒤집혀 있었다.
나를 찾았다는 소식에 에른스트는 훌쩍훌쩍 울며 달려 나왔다.
“이, 이보네에…… 흐아아아아앙.”
퉁퉁 부은 두 눈과 새빨개진 코를 한 에른스트가 내게 쪼르르 달려와 포옥 안겼다.
“에, 에른스트?”
“나, 나는 네가, 네가 갑자기 안 보여서, 끕…… 그래서, 네가 잘못된 줄 알고…… 흑, 윽, 흐읍…….”
서럽게 우는 에른스트를 보니 조금 미안해져서 마주 안아 주었다.
몇 번 등을 토닥여 주자 에른스트의 울음이 서서히 멎었다.
‘에른스트는 왜 이렇게 애 같지.’
아이처럼 우는 에른스트를 보자, 조금 전까지 함께 있었던 그 애가 더욱 어른스럽고 남달리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네.’
그날 만났던 이름 모르는 아이와의 하루는 내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이후로도 나는 종종 그 애를 생각했다.
웃을 때마다 초승달 모양으로 예쁘게 접히던 황금빛 눈동자와 그 잔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상냥하고 포근한 말씨…….
그 잔상은 오래도록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에도, 공부를 할 때도, 그리고 리하르트 오라버니와 검을 휘두를 때도…….
“이보네!”
이크-!
귀청이 떨어질 듯 날카로운 목소리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어깨를 움찔 떨었다.
“또, 또, 또 검을 휘두르고 있었구나!”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그랜시 할머니는 가주인 군터 할아버지의 후처였다.
3년 전에 저택에 들어온 그녀를, 우리는 ‘노마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녀의 매서운 시선을 피해 리하르트 오라버니의 뒤로 쏘옥 숨었다.
그렇지만 그랜시 할머니의 잔소리를 피할 순 없었다.
“이렇게 쓸데없이 검을 휘두를 시간에 단장을 하고 2황자님을 찾아가라 하지 않았니!”
체르니시아의 가풍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랜시 할머니는 내가 검을 배우는 걸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녀는 내가 어른들끼리 약속한 에른스트와의 그 ‘미래’를 위해 얌전히 자수를 놓고 차를 우리며 그들이 생각하는 ‘좋은 숙녀’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나는 오라버니와 언니들처럼 검을 배우는 게 좋았다.
“쓸데없다니요, 노마님.”
“그렇지 않아요.”
시무룩해진 나를 대신해 나서 준 것은 리하르트 오라버니와 헬가 언니였다.
“우리 체르니시아는 오래도록 그 자긍심을 지켜 온 검술의 명가이자 알브레히트의 검. 남녀를 가리지 않고 검을 배워 왔습니다.”
리하르트 오라버니의 단정한 목소리에 그랜시 할머니의 두 눈이 샐쭉해졌다.
“맞아요, 노마님. 설사 이보네가 황자비가 된다 하더라도, 체르니시아의 딸이란 건 변함이 없으니까요. 이 애가 검을 배우는 걸 막으면 안 돼요.”
두 사람의 손이 내 어깨를 따스하게 감싸 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랜시 할머니의 앞에서 주눅이 들었던 나는, 이내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그런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차던 그랜시 할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돌아갔다.
“하여튼 그놈의 체르니시아…….”
구시렁거리는 그랜시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는 키득키득 웃었다.
오라버니와 언니들의 든든한 비호 속에서 나는 내가 체르니시아라는 사실이 몹시 뿌듯했다.
* * *
그러나 그해 여름의 끝물에 다다랐을 무렵.
나는 결국 노마님에게 붙들려 황후궁의 손님이 되어 한 달간 머물러야 했다.
에른스트와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다과를 먹고 있으려니, 황후궁의 사용인들이 묘하게 흐뭇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왠지 부담스러운 시선 속에서 문득 마지막으로 황궁에 방문했던 날 만났던 이름 모를 남자애가 생각이 났다.
“있지, 에른스트. 너 혹시 이만한 키를 가진 남자애 못 봤어?”
“응?”
“짙은 밤색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동자를 가졌고, 또 아주 예쁘게 생겼는데…….”
에른스트는 얼굴을 갸우뚱 기울이더니, 이내 전혀 모르겠다고 답했다.
‘하긴, 차기 황제로 거론되는 황자님께서 황궁에서 일하는 남자애를 어떻게 알겠어.’
나는 손에 쥔 포크로 접시 위의 케이크를 깨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알브레히트에는 제국을 수호하는 3대 가문이 있다.
대대로 훌륭한 검사를 길러 온 검술 명가 체르니시아.
뛰어난 마법사를 배출하였던 페르디난트.
경이로운 신성력으로 제국에 축복을 내리는 레오브란테.
1황자의 생모인 헤르멜린다 전 황후는 레오브란테 가문의 서녀였다.
자식이 없었던 레오브란테의 노마님은 남편의 사생아를 자식으로 입양해 황후로 만들었지만 끔찍이 미워했으며, 남편이 죽은 뒤에는 절연하다시피 했다.
정치적인 이해관계와는 별개로 그 존재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헤르멜린다 황후가 죽고, 페르디난트의 딸 마르가라테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마르가라테 황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황자를 순산했다.
그녀의 아들이 바로 에른스트였다. 에른스트는 페르디난트와 마르가라테 황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자랐다.
반면 외가인 레오브란테의 지지를 얻지 못한 테오도르는 끈 떨어진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가뜩이나 그를 둘러싼 흉흉한 소문 때문에 1황자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2황자 에른스트가 차기 황제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 울보 에른스트가 나중에 자라서 황제가 된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황자 전하, 이제 공부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