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3_1
02. 재회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슬픔 속에서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체르니시아의 이름은 세상에서 잊혀졌고, 에른스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내가 페르디난트에 몸을 의탁한 지도.
그사이 나는 어엿한 청년이 되었으나 페르디난트의 젊은 가주는 내가 기사 서임을 받길 원치 않았다.
때문에 나는 여전히 견습 기사의 신분이었다.
나이 많은 견습 기사의 삶은 퍽 한가하고 여유로웠다.
누군가는 불명예스럽다 여길지 모르나, 오래전 체르니시아의 이름을 상실할 적에 명예와 같은 것은 함께 버렸다.
오전의 할 일이 남아 있었지만 대충 도망친 나는 어느 커다란 나무 위에 올라 한적하게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솨아아-
불어오는 바람결에 나뭇잎이 한들한들 흔들렸다.
더위를 피하는 데에 이곳만큼이나 제격인 곳도 없었다.
나무 위에 앉아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고 있노라면, 10년 전의 여름이 떠오르곤 한다.
아주 잠시 내 삶을 스쳐 지나갔던 상냥한 어린 황자님. 오후 두 시의 비밀 친구.
최근 들어 그의 이름이 이곳 페르디난트까지 들려오는 일이 잦았다.
검은 머리의 황제, 잔학한 폭군 테오도르.
그의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나는 두 귀를 닫고 자리를 떴다.
어차피 두 번 다시 내 인생에서 마주칠 일 없는 남자였다.
‘조금, 씁쓸하네.’
공연히 울적해지려는 기분을 누르며,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아삭 베어 먹었다. 마치 훈련장의 여느 사내놈들처럼, 품격 없게.
기실, 벤야민을 제외한 페르디난트의 모두가 나를 남자로 알았다.
체르니시아의 사라진 막내딸이 살아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이러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랜시 할머니가 살아 이 모습을 보았더라면, 놀라 기절초풍하셨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키득키득 흘러나왔다.
그러다 불현듯 웃음이 뚝 멎었다.
왜 그 시절엔 몰랐을까.
그랜시 할머니의 잔소리마저 그리워지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입맛이 뚝 떨어진 나는 먹다 만 사과를 아래로 던졌다.
그때였다.
툭-!
아래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소란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자, 커다란 흑마에 올라탄 남자가 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던진 사과에 머리를 맞은 모양이다.
남자의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사과를 던진 이를 찾겠다며 이를 박박 갈았고, 남자는 무표정하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바스락-
나도 모르게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싱그러운 녹색 잎사귀 하나가 아래로 포스스 떨어졌다.
정면을 바라보던 남자가 무심결에 고개를 들어 떨어지는 나뭇잎을 한 손으로 잡았다.
순간,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
나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었다.
10년이 지났어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테오도르, 상냥하고 다정한 어린 날의 비밀 친구.
기억 속의 어린 황자님은 어느덧 어엿한 알브레히트의 젊은 황제가 되어 다시 나타났다.
뎅- 뎅-
오후 두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초록 이파리가 아래로 하늘하늘 떨어졌다.
“…….”
“…….”
꼴깍, 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나와 그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며 대치하였다.
그가 나를 알아보았을까?
[누구든 네 정체를 알아보고 진명을 부르는 이가 있거든, 피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10년 전, 루돌프 페르디난트의 저주와도 같은 마법이 아직 내 몸에 남아 있었다.
외양도, 성별도, 이름도, 출생도 모두 바꾼 채 살아가고 있지만.
혹시나…… 아주 혹시나 그가 나를 알아본다면…….
루돌프의 술식이 발동하는 조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 상대가 나를 ‘이보네 체르니시아’로 인식할 것.
둘, 상대가 나의 진명 ‘이보네 체르니시아’를 소리 내어 부를 것.
그러니 만약에라도 상대가 나를 알아봤다 싶으면 그 귀족적으로 긴 이름을 모두 읊기 전에 때려눕히고 도망치면 되는 것이었다.
괜스레 전전긍긍해진 나는 여차하면 그를 기절시키고 도망칠 심산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이었다.
나를 올려다보던 남자가 두 눈을 느른하게 휘더니, 잽싸게 몸을 날려 나무 위로 도약했다.
“폐, 폐하……!”
“폐하, 어딜 가신 겁니까!”
“폐하께서 사라지셨다!”
“폐하를 찾아라!”
아래에서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오는 와중, 내 가슴은 콩닥콩닥 세차게 뛰어 댔다.
두꺼운 손바닥이 내 입가를 막고 있던 탓에, 나는 아주 작은 비명 하나도 꺼내지 못했다.
“안녕.”
두근-
귓가로 듣기 좋은 저음이 부드럽게 흘러들어 왔다.
동시에 내 입을 막던 손바닥이 느리게 떨어져 나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두근두근-
테오도르는 어린 날과 마찬가지로 인형처럼 빼어난 이목구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내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오랜 기억과 다르지 않은 따스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그 다정한 음성을 들으며 나는 짧게 탄식했다.
기억, 못 하는구나…….
참 다행이다,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해서.
그런데 왜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걸까.
“응? 안 알려 주는 거야?”
“……이브 로웰린입니다.”
간신히 입술을 떼자 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으응, 이브 로웰린. 이브 로웰린이라고…….”
테오도르는 내가 꺼낸 그 거짓 이름을 단조롭게 읊조렸다.
“그래, 안녕.”
길쭉하고 아름다운 눈꼬리가 반달 모양으로 파스스 휘었다.
홀린 듯이 그를 쳐다보던 나는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우리는 더 이상 어린 날의 비밀 친구가 아니었다.
그는 알브레히트의 황제이고, 나는 황제의 머리 위로 무엄하게 먹다 만 사과를 투척한 무뢰한이었다.
어서 사과를 해야 했다.
“저…… 방금 그 사과는 일부러 던진 게 아니라…….”
“내가 지금 많이 피곤해서 쉬고 싶은데.”
그러나 그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내 말을 끊어 냈다.
“그때까지 내 옆을 지켜 줄래?”
그가 화사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아당겼다. 그러며 투박한 내 손에 자연스레 깍지를 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서늘한 감각에 몸이 움찔 떨렸다.
나는 이 감각을 잘 알았다.
오래전, 체르니시아의 마지막 여름이었던 그해.
황궁 후원에 있던 우리만의 그 비밀 장소에서.
[더워?]유독 더위를 많이 탔던 내게 그 애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고.
[또 손부채질을 해 주려고?] [음…….]내심 먼젓번의 만남을 떠올리며 묻자 그 애는 슬그머니 웃었다.
[손을 줘 봐, 이보네.]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 애는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우리는 비슷한 또래였음에도, 손가락 길이가 한 마디보다도 더 많이 차이가 났다.
[장갑, 벗겨도 돼?] [자, 장갑은 왜?]나의 작은 손이 그의 손안에서 화들짝 놀라 꼼지락거렸다.
그것을 본 그가 눈매를 가늘게 휘며 웃었다.
[신기한 거 보여 줄게.]무척 창피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선량하고 아름다운 그의 눈웃음에 매료된 나는 그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장갑을 벗자 작고 투박한 손이 드러났다.
내가 항상 장갑을 끼고 다니는 건 검을 잡느라 여기저기 박인 굳은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건 뭐야?]테오도르가 내 손목의 상처를 보며 두 눈을 깜빡였다.
[아니야, 아무것도…….]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맙게도 그 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테오도르가 내 손에 깍지를 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느껴지는 그 애의 굵은 손마디에 다시 한번 얼굴이 화끈 더워지던 때였다.
[어……?]나는 고개를 들어 그 애를 보았다. 테오도르는 화사하게 눈꼬리를 접으며 흐드러져라 웃었다.
[어때? 시원하지?]그 애의 손을 타고서, 시원한 감각이 넘실넘실 밀려왔다.
더위에 지쳐 있던 몸이 차츰 활력을 찾아갔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 잘못 보았나 싶을 정도로 희미한 빛이 맞잡은 손 위로 일렁였다.
[어떻게 한 거야?] [으응, 비밀.]테오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눈을 찡긋거렸다.
그 애가 내 손목의 비밀을 캐묻지 않았던 것처럼, 나도 그 애의 비밀을 더 파헤치지 않았다.
대신 두 손을 꼬옥 맞잡고서 재잘재잘 떠들다가 어느 틈에 스르륵 잠이 들곤 했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옛일이었는데…….
“내가 쉬는 동안 옆에 있어 줘. 그럼 사과를 던진 것에 대해선 넘어가지. 어때?”
재차 묻는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깨웠다.
대답 없이 맞잡은 손만 쳐다보고 있자, 그가 붙잡은 손에 힘을 주어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덕분에 내 몸이 그에게로 기울었다.
“싫어?”
나른하게 묻는 얼굴은 애초부터 거절은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여유롭고 당당했다.
그는 어린 날 그랬던 것처럼 엄지로 맞잡은 손바닥을 개구지게 간질였다.
어린 날의 그는 내 손을 만지는 걸 무척 좋아했다. 예쁘지도 않은 손인데.
울컥한 감정이 샘솟았으나 볼썽사납게 눈물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그저 잔잔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빙그레 웃으며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댔다.
천천히 감기는 그의 눈꺼풀을 보며,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예쁘장한 이목구비는 여전했는데, 10년 전보다 훨씬 더 남성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부드럽게 감긴 눈꺼풀과 그 끝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기다란 속눈썹. 곧고 높은 콧날과 새근새근 숨소리를 자아내는 붉은 입술…….
나는 그것들을 눈으로 훑으며, 한참이나 더 그 옆을 지켰다.
* * *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슬쩍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잠들었네…….”
이보네가 잠든 뒤, 슬그머니 눈을 뜬 테오도르는 잠든 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보네…….”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 어디에서도 방금 자다 일어난 사람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부터 잠든 적이 없었다.
아니, 어떻게 잠들 수 있을까.
오래도록 찾아온 이를 목전에 두고서.
“역시, 살아 있었어…….”
그의 입꼬리가 흐리게 말려 올라갔다.
두근두근-
맞잡은 손에서부터 시작된 심장의 울림이 온몸을 뒤흔들 듯 세차게 흔들렸다.
테오도르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목 안쪽을 확인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던 자그마한 화상 자국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이제 괜찮아, 이보네. 내가 널 찾았으니까.”
그가 이보네의 손목을 엄지로 뭉근하게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러다 돌연 그의 입가에 남아 있던 희미한 미소가 딱딱하게 굳었다.
“어째서 망자의 저주가 남아 있는 거지.”
손목의 상처에서 풍기는 불쾌한 기운에 테오도르는 잘생긴 얼굴 위로 인상을 썼다.
“설마 그자가…….”
테오도르는 페르디난트의 젊은 가주를 떠올렸다. 기분이 퍽 나빠졌다.
“폐하.”
이때 그의 수하 하나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지셔서 다들 당황했…….”
“목소리를 낮춰라.”
황제의 수석 호위 기사 린든은 자신을 지그시 노려보는 살기등등한 테오도르의 눈을 보고서 흠칫했다.
조금 전, 난데없이 하늘에서 툭 떨어진 먹다 만 사과를 맞고 황제가 사라진 일로 호위단은 비상이 되어 그를 찾고 있던 터였다.
사라진 황제가 걱정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황제에게 실수로 사과를 떨어뜨리고 만 가엾은 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막상 찾아낸 황제는 낯선 청년을 소중히 보듬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하였으나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영특한 린든은 그것을 묻지 않았다.
대신 눈동자를 데루룩 굴리며 황제의 살벌한 시선을 피했다.
“어…… 음…… 카타리나 양이 폐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나러 가지 않으시렵니까?”
목소리를 낮추어 묻자, 황제는 어울리지 않게도 온화한 눈빛을 했다. 조금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이제 필요 없다. 이보네를 찾았으니까.”
“네? 그럼 이분이 바로 그…….”
그 말에 린든이 화들짝 놀라 황제의 옆에 기대어 잠든 낯선 청년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얼핏 보이는 행색은 영락없는 평민 사내였으나, 유독 하얗고 또렷한 이목구비는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눈을 가리던 장막이 걷히며, 황제에게 기댄 청년이 남자가 아니라 남장을 한 여자임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마법에 걸렸다 깨어난 것처럼.
“체르니…….”
“조심해라.”
린든이 이보네의 이름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 테오도르가 그를 막았다.
“망자의 저주가 남아 있다.”
자세한 설명이 없었음에도, 린든은 테오도르가 말하는 저주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느낌이 왔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페르디난트뿐이었다.
“그렇다는 건…… 역시 체르니시아의 몰락에 페르디난트의 개입이 있던 거로군요.”
“하지만 이상하단 말이지.”
테오도르는 두 눈을 가늘게 좁혀 뜨며 중얼거렸다.
“누가 루돌프 페르디난트와 마르가라테 황후를 죽였을까. 그리고 왜 망자의 저주가 사라지지 않고…….”
이보네의 손목에 남은 불쾌한 기운은 분명 루돌프 페르디난트의 것이었다.
그러나 시전자의 죽음과 동시에 사라졌어야 할 저주와도 같은 술식은, 여전히 남아 이보네를 꼭꼭 감추고 있었다.
문득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페르디난트의 견습 기사, 이브 로웰린에 대해 조사해 와.”
“네, 폐하.”
짤막하게 명령한 그는 다시 이보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불편해 보이는 머리통을 제 무릎 위에 눕히자 잠든 이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이보네…….”
테오도르는 뭉근하게 풀린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짧아진 은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오래전의 그녀는 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고수하였는데, 지금은 턱선을 조금 넘는 짧은 단발을 하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파스스 흩어지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마저도 미칠 듯이 사랑스러웠다.
“보고 싶었어, 나의 이보네.”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음색에 잠자코 지켜보던 린든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테오도르 레온느 알브레히트.
그가 누구인가.
알브레히트 역사에 다시없을 개차반, 무도하고 잔인한 그 폭군이 그런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을 리가 없…….
“나의 보물…….”
린든이 애써 고개를 저으며 자신이 들은 것을 부정하려 할 적에 테오도르는 다시 한번 애처로운 음색으로 읊조렸다.
그러다 돌연 고개를 들어 아직까지 그 자리에 있던 린든을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뭐 하고 있지? 너, 지금 설마 이보네를 훔쳐보고 있는 건가?”
마치 품에 안은 이를 허락 없이 담은 버릇없는 수하의 눈알을 도려낼 것만 같은 스산한 분위기가 그의 주위로 감돌았다.
“아, 아닙니다, 폐하!”
“꺼져.”
“네, 넵! 당장 꺼지겠습니다!”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낀 린든은 재빠르게 대답하며 도망쳤다.
린든이 떠난 곳에 테오도르와 이보네, 둘만이 남았다.
솨아아-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결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테오도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조금 전 여름 공기가 스쳐 간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주 작은 실바람 한 줄기마저 그녀에게 닿는 게 싫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는 오래전 그 삭막했던 황궁에서, 제가 찾아낸 저만의 보물이었다.
오로지 저만이 알고 저만이 닿고 싶은 보물이었는데, 오랫동안 그녀를 잃어야 했다.
치미는 분노에 저도 모르게 손끝에 힘을 주자, 그녀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아…….”
놀란 테오도르는 황급히 손에 힘을 뺐다. 다행히 그녀는 깨지 않았다.
“미안, 이보네. 놀랐어?”
그가 몸을 기울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동시에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하얀 빛이 이보네의 몸을 감쌌다.
찌푸려져 있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금 평온해졌다.
테오도르는 빙긋 웃으며 잠든 그녀의 얼굴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러다 그가 시선을 내려 맞잡은 손을 보았다.
천천히 깍지 낀 손을 놓으며,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리고 일순,
홰액-!
손목까지 오던 그녀의 소매를 어깨 바로 아래까지 걷어 올렸다.
새하얀 팔뚝 곳곳에 희미한 흉터가 남아 있었다. 분명한 학대의 흔적이었다.
그것을 발견한 테오도르의 입매가 기묘하게 뒤틀렸다.
“그 X같은 페르디난트의 것들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어, 그렇지?”
그의 손끝이 그녀의 팔을 쓸어내릴 때마다 황금색 빛무리가 살갗 위로 스며들며 흉터가 하나씩 사라져 갔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이보네.”
느리게 내려오던 손이 그녀의 손목 부근에서 멈추었다. 그곳에는 다른 것들보다 다소 크고 짙은 흉터가 있었다.
“내가 다 처리해 줄 테니까.”
스산하게 웃으며 속삭인 테오도르는 이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목 위로 입을 맞추었다.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가 그 나무 위에서 까무룩 잠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하늘은 어둑어둑 저물어 있었고, 내 손을 맞잡고 있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잠든 거지?’
낭패라는 생각에 얼굴을 찌푸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별채 앞을 지나가는데, 한바탕 난리가 나 있었다. 패악질의 주인공은 카타리나 페르디난트였다.
카타리나는 아주 못된 악마 같은 여자였다. 아마도 모두가 내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녀는 저택의 모든 사람들을 싫어하는 것 같았지만,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싫어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마녀.’
괜한 사용인들에게 화풀이하고 있는 카타리나를 향해 입술을 비죽 내밀며 속으로 중얼거리던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카타리나가 나를 발견한 뒤였다.
“이브 로웰린.”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른 순간, 나는 조금 전의 실수를 통감했다.
카타리나는 딸이 없는 루돌프 페르디난트가 방계에서 직접 골라 데려온 여자였다.
한때 – 그러니까 체르니시아의 이름이 세상에서 지워지고 난 뒤에 – 카타리나가 2황자 에른스트와 약혼을 할 거라는 소문이 저택 내에 흉흉하게 돌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차기 황제로 가장 유력한 이는 테오도르가 아니라 강성한 외가를 둔 에른스트였다.
그러나 루돌프 페르디난트의 사후, 두 사람의 혼담이 깨졌다.
그리고 카타리나는…….
“이쪽으로 와.”
카타리나가 나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너, 방금 날 보면서 뭐라고 중얼거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