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3_4
그런 너저분한 감정이 가슴 한구석을 갉아먹던 순간, 내 시야에 끝이 뭉툭한 식기가 띄었다.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남들에게는 평범한 포크일지라도, 체르니시아의 손에 들린다면 언제든 다른 용도로 변질될 수 있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알브레히트의 가장 어린 검.
오래전 나를 따라다니던 ‘알브레히트의 검’이라는 칭호는 그저 검을 다루는 이들에게 붙여지는 것이 아니었다.
검기를 발현한 이들에게만 붙여지는 칭호로서, 체르니시아가 몰락하기 이전에도 제국에 단 세 명밖에 받지 못한 칭호였다.
손에 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이내 푸른 빛깔이 그 주위를 에워쌌다.
그대로 그것을 높게 들어 올리던 순간이었다.
대뜸 뻗어 나온 손이 그것을 홰액 낚아채 갔다. 벤야민이었다.
[두 번 다시…… 이런 짓은 하지 마.]그날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나를 막아선 벤야민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아마 그때 죽었을지도 모른다.
[말리지 마. 나는 죽어야 하는 사람이야.] [네가 왜 죽어?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도 죽지 않고 살아 도망쳤다는데, 네가 왜?] [뭐……?]체르니시아를 떠나온 이후 처음으로 듣는 가족들의 소식에 나는 벤야민을 붙잡고 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라고? 누구?] [나도 자세한 건 몰라.]그러나 그는 더 이상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들 중 누군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나는 죽지 못했다.
석 달이 지나 낡은 3층 방을 탈출한 나는 견습 기사의 신분으로 또래들과 생활을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쉽사리 그 무리에 끼지는 못했다.
하긴, 다들 나를 싫어하는 게 당연했다.
당시에 나는 아무렇게나 싹둑 자른 머리카락에 볼품없는 옷차림을 하고서 매양 말없이 음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게도 먼저 말을 걸어 준 친구가 있었다.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있던 아이였다.
그 애는 내게 간식거리를 주면서 친구가 되자고 했다.
[좋은 일 있어, 이브? 표정이 평소랑 달라.]그 순간만큼은 나도 무척 설레어서, 그날 밤 나를 찾아온 벤야민에게 신이 나 그 사실을 자랑했다.
[있지, 벤야민. 나 오늘 새 친구가 생겼어. 이거 봐. 맛있겠지? 재키가 준 거야. 아, 그 애 이름이 재키인데…….] [으응, 친구가 생겼구나. 축하해.]그러나 슬프게도 재키라는 이름의, 나처럼 유독 더위를 많이 타던 아이는 다음 날부터 나를 무시했다.
내 인사에 표정을 굳히고 등 돌려 쌩하니 가 버리는 그를 보고, 나는 그게 말로만 듣던 따돌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체르니시아에서는 한 번도 겪지 못한 일이었다.
[왜 그런 얼굴이야, 이브?]너무 속상하고 창피해서 벤야민에게 그 사실을 숨기려 했다. 그러나 나를 걱정하는 벤야민의 목소리에 눈물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브. 다른 친구 같은 건 만들 생각 마. 내가 너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줄 테니.]그렇게 나는 페르디난트에서 지내는 지난 10년간 벤야민 외의 다른 또래와는 교류 없이 지냈다.
어느 날 갑자기 저택에 나타난 카타리나가 나를 종자로 부려 먹겠다고 데려간 뒤로는, 삶이 더 팍팍해졌다.
카타리나는 종종 나를 때리고 괴롭혔다.
몸에 상처가 늘어났으나, 별생각 없이 방치했다.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된 벤야민은 몹시 화를 냈다.
늘 감정의 변화가 적던 벤야민이 그렇게 화를 낼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벤야민은 내게 은인과도 같은 친구였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버팀목이 되어 준 벤야민이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페르디난트는 늘 내게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다.
물론 그곳을 벗어나 무엇이 되고 싶다는 건 딱히 없었다.
막상 페르디난트를 벗어난 지금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까지 나는 당연하게도 평생 카타리나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페르디난트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런 내가 테오도르를 만나 황제의 측근 기사가 되었다.
이제는 황궁에 머물게 되었으니까 그저 가족들의 생사라도 알 수 있으면 좋겠는데.
살아 있다면 소식이라도.
죽었다면 무덤이라도.
그리고 그다음엔…….
‘어렸을 때의 난 뭘 하고 싶었지?’
무려 10년 만에 갖게 된 자유는 나를 헤매게 했다.
어렸을 때의 나는 체르니시아의 막내딸로 태어나 그저 검을 잡고 뛰어다닌 것 말고는 한 게 없었다.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은 내 역할이 아니었다.
언니들을 따라 기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랜시 할머니는 내게 에른스트와 결혼하여 황자비가 될 것을 강요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하다.
마르가라테 황후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해도 차기 황제로 거론되던 것은 에른스트였다.
그러니 황자비로 내정되었던 나는 별다른 이변이 없었다면 자연스럽게 황후가 되었을 것이다.
카타리나만 해도 그렇다.
체르니시아의 몰락 이후, 루돌프는 에른스트의 짝으로 키울 소녀를 방계에서 데려왔다.
어린 카타리나가 페르디난트에 입적되자마자 혹독하게 황후 교육을 받았던 게 기억난다.
그런데 왜 군터 할아버지는 마찬가지로 에른스트의 짝으로 점찍어져 있던 내게 황후 교육을 시키지 않았던 걸까?
-따위의, 불과 몇 주 전이었더라면 하지 않았을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던 중이었다.
“그렇게 계속 서 있으면 다리 아프지 않아, 이브?”
괴롭히는 카타리나가 없고 배가 따스우니 별별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중, 테오도르의 나긋한 목소리가 그 지난한 생각의 꼬리를 뚝 잘라 주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
나는 군기가 바짝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있는 곳은 테오도르의 집무실이었고, 황제의 측근 기사로 임명된 나는 그의 지척에 서서 그를 지키고 있었다.
“으음…….”
읽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뗀 테오도르는 몹시 불만족스러운 눈동자로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나는 편하게 앉아 있는데 그대만 이렇게 서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아파.”
응? 하지만 나는 그의 측근 호위 기사이고, 앉아서 호위를 할 수는 없는 노릇…….
“황명이야.”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테오도르가 나의 두 팔을 단단히 붙잡고서 소파로 안내했다.
“여기 편하게 앉아서 쿠키를 먹어라, 이브 로웰린.”
“하지만 저는 폐하를 호위해야 하는데…….”
“앉아서 하면 돼. 이제껏 그대가 오기 전에 나의 측근에서 호위를 맡았던 이들도 모두 한 번씩 이 자리에 앉았으니까. 그렇지 않나, 아르민?”
테오도르가 엄청난 두께의 서류를 들고 보고하던 자신의 보좌관에게 동의를 구했다.
“……물론 그들은 그랬지요.”
황제의 보좌관 아르민 마이어가 나를 힐끔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지, 이브?”
테오도르는 생긋 웃으며 나를 억지로 소파 위에 앉혔다.
……그렇구나. 앉아서 호위를 할 수도 있는 거구나.
나는 미심쩍어하면서도 그가 앉히는 대로 소파 위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아까부터 자꾸만 눈이 가던 쿠키를 슬그머니 집었다.
눈치를 슬쩍 보며 쿠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편하게 앉아 테오도르가 일하는 것을 힐끔힐끔 구경했다.
황제의 측근 기사가 된 이후로 나는 틈이 날 때마다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
뒤에서 욕하던 기사들의 말과 달리 막상 내가 지켜본 그는 친절함 그 자체의 사람이었다.
그는 집무실로 찾아오는 대신들에게도 몹시 친절했고.
[재무대신의 혜안이 굉장히 놀랍군. 이렇게 훌륭한 일 처리라니, 몹시 흡족해. 그대에게 친히 포상을 내리고 싶은데……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으니 이제 아주 길고 깊은 안식을 가져 보는 건 어떤가?]황궁의 사용인들에게도 친절했고.
[이 디저트를 만든 게 너라지? 아주 굉장한 솜씨더구나. 그 잘난 입을 한번 벌려 보는 게 어떠니? 내가 손수 먹여 줄 테니까. 자, 맛이 어때? 맛있지? 어디 한번 맛있다고 말해 보렴.]심지어는 그를 뒤에서 욕했던 기사들의 복지까지 돌보아 줄 정도로 친절했다.
[기사단의 일이 힘들지 않나? 호위 인력을 줄일 것이다. 앞으로 저녁 시간 이후로 곧바로 귀가하도록. 걱정하지 말거라, 내게는 훌륭한 측근 기사가 있으니까. 그대들은 더 이상 내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어.]테오도르는 한결같이 상냥하게 그들을 대했으나, 이상하게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그 모습에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를테면 안식은 필요 없다며 울부짖는 대신이라든가.
디저트를 먹여 준다는데 바닥에 머리를 콩콩 찧으며 죽여 달라 하는 사용인이라든가.
혹은 사색이 되어 말을 잇지 못하고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기사라든가.
“정말 이상하네…….”
소파 위에 앉아 편한 자세로 쿠키를 오독오독 씹어 먹던 나는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천사처럼 선량한 테오도르의 얼굴을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왜 다들 폐하를 두려워하는 거지…….”
이때, 보좌관을 향해 방긋방긋 웃으며 서류에 무언가를 휘갈기던 테오도르의 손이 멈칫했다.
이내 보좌관이 나가고 나와 테오도르, 둘만이 남게 되었을 때.
“하아…….”
돌연 그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양손으로 얼굴을 싸맸다.
“폐하……?”
“힘들어.”
“불편하신 곳이라도……?”
혹여나 몸이 아픈 건 아닌가 걱정되어 묻자, 몹시 울적한 낯을 한 테오도르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대가 나를 위로해 줄래?”
“……?”
“손을 잡아 줘, 이브.”
내 옆자리에 폭삭 앉은 그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손이요?”
고개를 갸웃하며 시선을 내리자 파르르 떨고 있는 그의 손이 보였다.
다시 만난 테오도르는 자주 손을 떨었다.
수전증이 있는 건 아닐까?
“그대도 보았지? 다들 나를…… 두려워하는 거.”
“아…….”
그도 느끼고 있었나?
하긴, 모를 수 없었을 테다.
그렇게 다들 확연하게 두려운 티를 내는데.
“황제라는 자리 때문에…….”
신이 빚어낸 것처럼 아름다운 그의 두 눈동자가 상처받은 모양으로 휘늘어졌다.
“모두가 나를 어려워하고, 두려워해. 하지만 나도 가끔은 위로를 받고 싶은데…….”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거 알아, 이브? 아주 오래전 돌아가신 어머니와 그대뿐이야, 이제껏 내 손을 잡아 준 건…….”
테오도르는 두 눈을 추욱 내리뜨며 말끝을 흐렸다.
기다란 속눈썹이 그의 얼굴 위로 그늘을 만들었다.
나는 그런 테오도르가 무척 안쓰러워서 가만히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런데, 나도 어렸을 때 손을 잡아 줬는데……. 이제 이보네 체르니시아는 기억 못 하는 걸까?’
어쩌면 그가 더 이상 어린 날의 비밀 친구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조금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워낙 옛일인 데다가 아주 어렸을 때이기도 하고, 지금도 날 알아보지 못하니까…….’
“무슨 생각 해?”
테오도르가 까칠한 내 손을 조물조물 만져 대며 물었다.
“아닙니다, 아무 생각도…….”
“그래? 그건 좀 속상하네.”
“네……?”
“그대가 내 생각을 하고 있길 바랐는데.”
테오도르는 언제 그렇게 울적했냐는 듯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종종 그대 생각을 하거든.”
“폐하께서, 제 생각을요……?”
당혹스러워 되묻자 그의 두 눈이 더욱 예쁜 호선을 그리며 접혔다.
“예쁜 걸 생각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잖아.”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되지 않아 두 눈을 끔뻑일 적에, 그가 푸스스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그대는 예쁘고. 내가 태어나 본 것들 중 가장 예뻐, 이브.”
테오도르의 말에 당황한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멍해졌다.
예쁘다니…….
생각해 보면 그는 옛날에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내가 태어나 본 것들 중 네가 가장 예뻐, 이보네.]그냥 모든 사람들에게 저런 말을 하는 걸까?
하지만 지금 나는 남장을 하고 있잖아?
“눈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입도 예쁘고, 손도 예쁘고…….”
핑글핑글 도는 내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생긋 눈웃음을 치며 꼬옥 깍지를 꼈다.
나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느껴지는 굵은 손마디를 힐긋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전히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숨이 절로 꼴깍 넘어갔다.
“놀리지…… 마십시오, 폐하.”
“음…….”
“예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 저는 남자인데…….”
그렇게 항변할 적에 말을 조금 더듬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 기울이며 내게 물었다.
“그럼 예쁜 걸 뭐라고 해야 하지?”
그가 두 눈을 깜빡일 적마다 기다란 속눈썹이 느리게 흔들렸다.
누가 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그 아름다운 자태에 나는 다시 한번 말을 잃고 말았다.
새삼 깨달았다.
남자도 예쁠 수 있다는 걸…….
“그대의 서임식은 한동안 미룰 생각이야.”
테오도르는 곧바로 화제를 전환해 버렸다.
“황궁 내의 일이 많아 여유가 없어서. 혹 서운하거나 그러진 않지?”
그리고 그에 홀라당 넘어가 버린 나도 금세 조금 전의 껄끄러운 대화는 잠시 미뤄 두고 새로운 화제에 응답했다.
“네, 폐하. 저는 이렇게 그곳에서 저를 데리고 나와 주신 것만으로도…… 아, 그러니까, 제가 그곳에 있었더라면 평생 견습 기사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을 테니까…….”
횡설수설하는 내게 그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으응, 그렇게 말해 줘서 기뻐, 이브.”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내내 그는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 손길에 이상하게 몸이 노곤해져서, 나는 나도 모르게 또다시 스르륵 잠들어 버렸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그의 집무실 소파 위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조금 전까지 그가 걸치고 있던 겉옷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아…….”
테오도르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측근 호위의 본분을 잊고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와중에도 그가 내게 보인 배려가 고마워서, 나는 그의 겉옷을 꼬옥 움켜쥐고 황망히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복도에 있던 기사들이 나를 발견하고 우르르 몰려왔다.
“괜찮아, 이브 경?”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
“무슨 일이라니요?”
갑작스레 쏟아진 관심에 멀뚱멀뚱 묻자 내 몸을 샅샅이 훑던 그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혼자 나오시기에 경이 그 안에서 잘못된 줄 알았어.”
“우리는 혹여나 이브 경이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혀서 큰일이 난 줄 알고 걱정이 돼서…….”
“시체가 아니라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그러잖아도 요새 폐하께서 자꾸 그대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잖아?”
“우리에게 사실대로 말해도 돼, 이브 경. 혹시 그 인성 파탄자, 아니, 그러니까 폐하께서 그대를…….”
테오도르를 향해 쏟아지는 험담 속에서 조금 전 황제의 자리가 외롭다고 울적한 표정을 짓던 안쓰러운 그의 얼굴이 생각났다.
테오도르가 얼마나 착하고 좋은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렇게 상관의 욕을 하는 그들이 얄미웠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폐하는 그런 분이 아니에요. 그러니 다들 폐하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씩씩거리며 외치는데, 복도 끝에서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의 주인을 알아챈 기사들이 동시에 고요해졌다.
유유히 웃으며 걸어온 이는 다름 아닌 테오도르였다.
“무슨 일이야, 이브?”
복도에 흐르는 미묘한 기색을 알아차린 그가 주위를 스윽 훑더니 내게 물었다.
“아닙니다, 폐하. 아무것도.”
“흐응…….”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 동료들을 향해 씩씩대던 내 얼굴은 아마도 아주 조금 붉어져 있지 않을까.
“이브, 나 지금부터 산책을 할 건데.”
그러니까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열기는 결코 그의 잘생긴 얼굴이 코앞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같이 가자.”
생긋 웃으며 건넨 제안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도중에 뒤를 돌아보며 그를 험담하던 이들에게 매서운 눈빛을 쏘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테오도르를 따라 건물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몇 발짝 뒤에서 테오도르의 뒤를 따르던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우리의 오랜 옛 약속의 장소가 있던 바로 그 정원이었다.
[앞으로 매일 오후 두 시 정각에 이곳에서 만나는 거야. 에른스트 몰래, 너와 나 둘이.]순간 어린 날의 기억이 물씬 밀려와서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그를 쫓아 종종거리며 뛰어갔다.
그런데 문득 걸음을 멈춘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내 귓가에 꽃송이 하나를 꽂아 주었다.
“예쁘네.”
그 말에 나는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나, 낮에도 말씀드렸지만 예쁘다는 말은…….”
“응, 그래, 예뻐.”
낮에 어물쩍 넘어갔던 화제를 조금 더 확실하게 매듭짓고자 하였으나, 테오도르는 내 말은 듣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더 이상 감히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을 만큼 단호하면서도 나긋한 목소리로.
“…….”
“…….”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를 보는 테오도르의 시선이 유독 깊고 짙었다.
솨아아-
불어오는 바람에 꽃나무 가지에 달린 어여쁜 꽃잎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꼭 꽃비가 내리는 것 같은 그 광경을 배경으로 한 채, 테오도르는 그 자리에 박힌 것처럼 나만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둥글게 휘어 있던 그의 두 눈에서 차츰 웃음기가 사라져 갔다.
“이-브.”
그가 나의 이름을 길게 늘어뜨리며 나른한 음색으로 읊조렸다.
“…….”
대답을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테오도르의 얼굴이 서서히 내게 기울었다.
질끈-!
나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
두근두근, 쿵쾅쿵쾅. 그 짧은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스윽-
문득 머리 위로 닿는 감각에 눈꺼풀을 찔끔 들어 올리자, 그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폐하……?”
“…….”
흡사 입을 맞출 것처럼 다가왔던 그는 그렇게 내 머리카락을 헝클이고서 다시 물러났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생긋 웃었다.
“머리에 나뭇잎이 떨어져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그의 손에는 나뭇잎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두 눈을 끔뻑이는 나를 향해 그가 눈가를 아름다이 휘며 웃었다.
달빛에 반사된 그의 얼굴은 마치 옛 전설 속에 등장하는 요정들의 것처럼 요요하고 고혹적이었다.
눈앞에 흐드러진 꽃잎 사이에 화사하게 웃는 그의 얼굴만이 머릿속에 유독 강하게 각인되었다.
* * *
나는 한동안 그날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잠시만 생각을 느슨하게 하면, 흐드러지게 웃던 그의 얼굴이 뭉실뭉실 생각이 났다.
멍하니 있다가 실수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거, 먹는 게 아닌데.”
평소와 같이 소파 위에 앉아 쿠키를 집어 먹던 중이었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건넨 테오도르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헉!”
그리곤 내가 쿠키가 아닌 화병에 꽂혀 있던 꽃을 씹어 먹는 중이란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쿠키 맛이 별로였던 거야, 이브? 꽃을 대신 씹어 먹을 만큼?”
테오도르가 킥킥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안 되겠네. 주방장을 불러 혼을 내야겠어. 이런 형편없는 쿠키를 내오다니. 그자의 목을 베어 네게 선물해 줄까?”
“그 무슨 폭군 같은 말씀이세요.”
어느새 정신을 차린 나는 그의 짓궂은 장난에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몇 번 이런 장난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더니, 그는 때때로 나를 놀리듯 말도 안 되는 농담을 건넸다.
“당연히 장난이지, 이브. 내가 그런 폭군 같은 짓을 저지를 리 없잖아.”
그가 푸스스 눈웃음을 내지으며 내 입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기, 묻었어.”
굵은 손끝이 내 입술 주위를 뭉근하게 매만졌다.
“……!”
순간 나는 꼼짝도 못 하고 얼어붙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내 입가에서 떼어 낸 꽃잎을 들고 눈앞에서 흔들었다.
덕분에 나는 창피해서 온 얼굴에 열기가 화악 끼쳤다.
그 모습을 보며 생긋 웃는 그는 꼭 이런 내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았다.
결국 그 자리를 버티다 못한 나는 잠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가 조금만 덜 예뻤더라면 나도 이렇게까지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예쁘게 웃을 수 있는 거지.’
나는 또다시 그날 흐드러진 꽃잎 사이로 웃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를 피하기 위해 도망치듯 나왔으나 애초에 나는 황궁에 아는 곳이 많이 없었다.
그러다 내가 발을 들인 곳은 어린 날의 내가 종종 찾아왔고, 불과 며칠 전에 그와 함께 거닐었던 바로 그 정원이었다.
‘젠장.’
나는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욕지거리를 속으로 짓씹었다.
이곳에 오니 눈앞에 아른거리던 그 예쁜 얼굴이 더욱 짙어졌다.
이대로 다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푸욱 내쉬던 찰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