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3_5
바스락-
풀 잎사귀 스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낯설면서도 익숙한 인영이 눈앞에 우뚝 멈추어서 나를 보고 있었다.
“아……!”
햇살에 반짝이는 화사한 백금발과 고양이를 닮아 슬쩍 올라간 눈꼬리. 그리고 꼭 울 것 같은 탄성.
나는 금세 그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아아, 에른스트.
나를 살려 내고 지옥으로 떠민 잔학한 나의 구원자.
데리러 오겠다고 했으면서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거짓말쟁이.
“이보네……. 이보네 맞지?”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그가 물었다. 그러더니 돌연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차마 내게 다가오지 못하고 서럽게 우는 에른스트를 보며, 나는 묵은 원망마저도 꺼내지 못하고 도로 집어넣어야 했다.
“미안해, 미안해, 이보네. 약속을…… 너와 약속을…….”
“울지 마, 거짓말쟁이.”
그 말에 그가 목청을 높여 흐느꼈다.
나는 그를 달래 주는 대신 그저 가만히 지켜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너는 눈물이 많구나, 에른스트…….
그가 우는 것을 계속 쳐다보려니 이상하게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울고 싶지 않아서 부러 쌀쌀맞게 말했다.
“난 이보네가 아니야.”
“너 맞잖아, 이보네 체르…… 흡.”
내 진명을 소리 내어 부르려는 에른스트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조심해. 그 이름 잘못 부르면 넌 죽어.”
내 경고를 위협이라 생각했는지, 에른스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히끅히끅 딸꾹질을 했다.
“이브 로웰린. 그게 내 이름이야.”
“으, 응…….”
에른스트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굳이 루돌프의 술식에 대해 부연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체르니시아, 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오래전부터 금기되었으니까.
조금 진정이 된 에른스트와 나는 풀밭 위에 나란히 앉아 해묵은 이야기를 꺼내었다.
“계속, 흑,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그는 나를 만나러 오려고 수차례 시도를 했으나, 마르가라테 황후와 루돌프 페르디난트에게 막혀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계속 널 생각했어.”
“카타리나와 약혼하려 했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하고 싶었던 게 아니야! 약혼을 하면 너를 만나게 해 준다고 했어.”
문득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와 루돌프 삼촌이 동시에 그렇게 가 버리고 약혼도 없던 이야기가 됐는데, 그 뒤로는…….”
그 뒤로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마르가라테 황후와 루돌프 페르디난트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 후 에른스트가 지지 기반을 잃은 사이, 갑자기 치고 나선 테오도르가 황태자위에 올랐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되었다.
에른스트가 황위에 욕심이 없다는 것과 테오도르가 얼마나 선하고 고운 심성을 지녔는지와는 별개로, 에른스트는 그 존재만으로도 언제든 황위에 위협이 될 수 있었기에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처지에 과거 역모죄로 얽힌 친구를 찾아 나설 수 없었겠지.
“됐어. 다 지난 일이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대화를 돌렸다.
“그나저나 용케도 알아봤네. 이렇게나 자라고, 모습도 많이 변했는데.”
단발 길이로 짧아진 은색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중얼거리자니, 문득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테오도르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는데…….
“내가 널 알아보지 못할 리 없잖아.”
에른스트와 이런저런 옛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을 터뜨릴 때였다.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이가 보이지 않아 걱정했더니.”
잘 벼린 검날처럼 첨예한 목소리가 나와 에른스트를 가르며 날아들었다.
“폐하……?”
“형님……!”
나와 에른스트는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테오도르가 처음 보는 딱딱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주 나태하군. 근무 시간에 호위해야 할 대상을 떠나 외간 이와 한가롭게 노닥거리고 있고.”
“폐하, 그게…….”
“따라와.”
무언가 변명을 하고자 하였는데, 그는 조금의 여지도 없이 화를 내며 먼저 몸을 돌렸다.
“…….”
“…….”
그의 집무실까지 따라가는 내내, 우리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화가 아주 많이 난 것 같았다.
이제 근무를 태만히 했다고 혼이 나는 걸까?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그가 차갑게 굳은 눈으로 내려다봤다.
“그곳에서 뭘 하고 있었지?”
나는 그의 서늘한 눈빛과 냉정한 목소리가 너무 속상해서, 가족들이 죽은 이후 처음으로 서러운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브……?”
소리 없이 우는 내 모습에 놀란 착한 그는 나를 질책하던 것도 잊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달래 주었다.
“우, 울지 마, 이브. 나는 그대를 울리려던 게 아니라…….”
울지 않으려 두 눈에 힘을 주어 보아도, 자꾸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막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달은 참이다.
나는 테오도르를 좋아한다.
……내가, 테오도르를 좋아한다.
* * *
그날 이후로 테오도르는 다시금 상냥한 본래의 그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나는 몹시 울적해졌다.
일단 그는 황제이고, 나는 그의 호위 기사였다. 그 전에 역모죄로 몰락한 가문의 사람이었고, 무엇보다도 그는 내가 여자인 줄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혼란스러워져, 우울한 얼굴로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자 정원을 걸을 때였다.
“이브……!”
조심스러우면서도 반가운 기색이 묻어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다름 아닌 에른스트였다.
지난번의 만남 이후로 처음 마주친 것이었는데, 그는 착실하게 내가 알려 준 가명으로 나를 불렀다.
그는 루돌프가 내게 해 온 구체적인 폭력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고, 나도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 그걸 알려 주면, 이 마음 약한 배신자는 울며 자책할 테니까.
“그날은 괜찮았어?”
내게 쪼르르 다가온 에른스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날 우리의 만남은 갑작스럽게 화를 낸 테오도르 때문에 그대로 끝나고 말았다.
“응, 뭐.”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다지 테오도르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있잖아, 이브.”
에른스트가 주위를 휙휙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체르니시아의 복권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
순간 나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체르니시아는 이제 알브레히트 제국에서 잊혀진 이름이었다.
이제는 유일하게 나를 아는 친우로부터도 불릴 수 없게 된 저주받은 이름이 아닌가.
“형님이 직접 꺼낸 이야기야.”
테오도르가, 체르니시아의 복권을 직접 입에 담았다고?
“그게 정말이야?”
“응, 정말이야.”
에른스트가 전해 준 놀라운 소식에 가슴이 설렜다.
비록 나를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체르니시아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어린 시절의 비밀 친구도…….
체르니시아가 복권된다 하더라도 나의 처지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루돌프의 저주가 있으니 그 이름으로 불리지 못할 테니까. 그렇지만…….
‘살아 있다는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를 만나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가슴이 두근- 하고 뛰었다.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평생 진명으로 불리지 못하고 체르니시아의 그림자로 살아가도 좋았다.
* * *
그날 저녁, 황제의 집무실에서 테오도르를 호위(라는 명목으로 관찰)할 적에, 그가 유독 더욱 사랑스러워 보였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꼭 사랑에 빠진 소녀의 눈빛이야.”
나의 뜨거운 시선을 알아차린 걸까?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살피던 테오도르가 나를 돌아보더니,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소녀라니요, 실례되는 말씀이에요.”
나는 뜨끔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삐죽이며 외려 딴소리를 했다.
“저는 소녀가 아닙니다, 폐하.”
“그래. 그럼 그냥 사랑에 빠진 눈빛 정도로 할게.”
테오도르는 짓궂게 웃으며 일어나 내가 앉아 있는 소파를 향해 다가왔다. 긴 다리 덕인지 몇 발짝 걷지 않았는데도 그는 금세 내 앞에 섰다.
그가 소파 팔걸이와 등받이를 각기 양손으로 짚으며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 바람에 나의 시야 안에 가득 찬 미려한 얼굴에 나는 숨을 꼴깍 삼켜야 했다.
“나를 사랑하는 거야, 이브?”
그가 유혹하듯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럴 리가요. 폐하는 제 이상형이 아닌걸요.”
부디 목소리가 떨리지 않길 바라며 단호하게 잡아뗐으나, 이미 내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으음.”
그가 나른한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정말 아니야?”
그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하노라니, 정원에서 함께 꽃비를 맞던 그 밤의 일이 다시 생각났다.
“어떡하지.”
그가 난처하다는 듯, 그러나 전혀 난처하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 같은데.”
“……!”
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라 굳어 있는 사이, 테오도르는 사르륵 두 눈을 접으며 내게 입을 맞췄다.
촉-
그의 입술이 내게 닿았다가 부끄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사랑해, 이브.”
“저, 저는…….”
황망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적에, 그가 다시 한번 내게 초옥- 입을 맞췄다.
그러다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횡설수설했다.
“이, 이건 뭔가 잘못됐어요. 저는 일단 남자이고.”
“여자란 건 이미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
두 번째 충격이었다.
내가 여자란 걸 알고 있었다고? 언제부터?
그러나 나는 놀랄 틈도 없었다. 그가 이어 세 번째 충격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가.”
스윽 손을 뻗어 온 그의 손이 까칠한 나의 뺨을 스쳤다. 깊고 그윽한 시선이 내 얼굴로 향했다.
“나의 오랜 기억 속 이보네라는 것도…….”
“안 돼요!”
순간 화들짝 놀란 나는 재빨리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나를 알아보았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보다 공포가 먼저 나를 덮쳤다.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 이보네.”
그가 웃으며 내 손목을 감싸 쥐었다.
“나는, 괜찮아.”
“그게 무슨…….”
그곳에는 오래전 나의 친부가 남긴 상처가 남아 있었다. 루돌프의 저주와도 같은 술식이 남은 상처이기도 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
테오도르는 말릴 틈도 없이 나의 진명을 읊으며 그 위로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늘한 기운이 나를 감싸며, 동시에 손목의 상흔이 사라졌다.
“어떻게…….”
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깨끗해진 나의 손목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에게 남다른 힘이 있다는 것은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벤야민마저 알아보지 못한 루돌프의 술식을 단박에 파악하고 해체할 줄은…….
“페르디난트의 망령은 모두 지워 냈으니.”
그가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리며, 다시 한번 내 입가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 너를 사랑해도 될까?”
“…….”
“너도 나를 사랑해 줄래?”
“…….”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소 깊고 진득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 * *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그의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나는 이불로 몸을 돌돌 싸매고 있었는데, 테오도르는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테오도르가 나를 기억한다.
내게 남겨진 저주를 해체하고,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한다.
……테오도르가 나를 사랑한다.
나는 이 모든 게 꿈만 같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내 손목에 입술을 지분거리는 그를 느끼며 이게 꿈이 아니란 것을 새삼 깨달았다.
“언제부터 아셨어요?”
나는 문득 물었다. 입을 맞추기 전에 해야 했던 질문이었다.
“응?”
“제가, 이보네라는 걸…….”
“아아.”
그가 다정하게 웃으며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다시 만난 순간부터.”
그러고는 내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예고 없이 뒤통수를 감싸 당겨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실은, 처음 본 날부터 단 한 번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지. 정말 오랜 기간 찾았어, 이보네.”
내 이마에서 슬며시 입술을 떼어 낸 그가 다시 콧잔등과 입술 위로 입을 쪽쪽 맞추었다.
거침없고 노골적인 그의 애정에 황송할 지경이었다.
“저는 당연히 폐하께서 저를 기억 못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랑하는 여자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
흔들림 없이 꺼낸 그 말에 기쁨이 샘솟았다.
“그럼 왜 처음부터 아는 척하지 않으셨던 거예요?”
“네가 도망갈까 봐. 내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사라질 것 같았거든.”
그의 대답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어떻게 알았지?
물론 그 당시에는 그가 나를 알아보는 순간 튈 준비를 하고 있었다만…….
“사실은 조금 더 천천히 다가가려고 했는데, 날 보는 네 눈이 너무 예뻐서 참을 수가 없었어.”
“그럼 이, 이건 어떻게 한 거예요? 분명 루돌프 페르디난트가 제게 술식을 걸었는데…….”
궁금한 게 무척 많았던 나는, 질문을 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보는 테오도르의 눈동자에는 셀 수 없이 무수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신성력이야.”
그가 내 손에 깍지를 끼더니 제 쪽으로 당겼다. 그러고는 손등 위로 자신의 뺨을 비비며 대답했다.
“신성력이요?”
“레오브란테의 힘이 내게로 넘어왔을 줄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겠지.”
문득 오래전 율리아 언니가 해 주었던 제국의 3대 가문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대대로 훌륭한 검사를 길러 온 검술 명가 체르니시아.
뛰어난 마법사를 배출하였던 페르디난트.
그리고 경이로운 신성력으로 제국에 축복을 내리는 레오브란테.
테오도르의 친모는 레오브란테의 딸이었다.
“레오브란테의 늙은 여자가 이걸 알면, 얼마나 분해할까.”
그가 말하는 레오브란테의 늙은 여자란, 그의 의붓할머니였다.
“신성력과 술법은 본질적으로 같은 근원에서 시작되지.”
테오도르가 이제는 깨끗해진 내 손목의 과거 흉터가 있던 자리를 꾸욱 누르며 설명했다.
“모두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에서 기인해. 다른 점이 있다면 페르디난트의 술법이 약점을 파고드는 것과 달리, 레오브란테의 신성력은 아픔을 치유한다는 거야.”
“…….”
“네 상처를 처음 본 날부터, 치유해 주고 싶었어. 그래서 다시 만날 때에는 내 힘으로 없애 주려고 열심히 연습했는데…….”
그는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나는 그 뒷말을 알 것 같아.
10년 전의 여름. 나는 그에게 흉터를 보였고, 우리는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네가 죽었다는 말, 안 믿었어.”
10년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었던 나를, 그는 홀로 오랜 기간 찾아 헤맸다고 했다.
정작 나는 나의 슬픔과 우울에 함몰되어 그를 생각하지 못했는데…….
가슴이 두근두근 벅차올랐다.
“폐하께서 체르니시아의 복권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어요.”
“응. 네 가문을 복권시킬 거야. 그리고 그 이후에 너를 나의 부인으로 맞이할게.”
“…….”
“그러니 조금만 더 참아 줘.”
그가 내 손등과 손목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나는 잠시간 쏟아지는 그의 애정 속에서 숨을 삼키다가 간신해 대답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폐하.”
나는 그와 입을 맞춘 이후 처음으로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나의 웃는 얼굴이 이상했던 걸까.
그는 마주 웃어 주는 대신 그저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돌연 못마땅하다는 듯 이맛살을 좁혔다.
“그런데 왜 계속 내게 존대를 하는 거야?”
“폐하?”
“그렇게 부르지 마.”
그가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테오도르. 내 이름을 불러 줬잖아, 예전에는.”
“아……. 그렇지만…….”
이제는 그와 나의 처지가 달라지지 않았나. 그런데 어떻게 감히 그렇게 부른단 말인가.
내가 머뭇거리며 쉬이 답하지 못하고 있자, 그가 깍지 낀 내 손가락 하나하나 입을 쪽쪽 맞추며 사근거렸다.
“테오. 이제는 그렇게 불러 줄래?”
그의 입술은 나의 열 손가락에게 공평히 사랑을 나누어 주었으나,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두 눈동자는 오롯이 나만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으응?”
그는 내가 대답을 할 때까지 조르겠다는 듯,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칭얼댔다.
“테오…….”
결국 그에 이기지 못한 내가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테오도르의 얼굴 위로 화사한 웃음이 번져 나갔다.
단언컨대 나는 남자가, 아니, 사람이 그렇게 예쁘게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사랑해, 이브.”
그가 내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서랍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오더니, 작은 머리 장식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이야. 어머니가 황가에 시집올 적에 쓰셨던 거래. 받아 줘.”
작지만 척 보기에도 귀해 보이는 보석과 화려한 세공이 유독 눈에 띄는 머리핀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짧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망설였다.
페르디난트에서 지낼 적에 아무렇게나 싹둑 잘랐던 머리카락은 어깨에도 닿지 않을 만큼 짧은 단발 길이였다.
“머리는 금방 자랄 테니까.”
그가 내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생긋 웃었다.
“머리를 길러 보는 건 어때? 지금도 예쁘지만, 머리를 예전처럼 길러도 예쁠 거야.”
머리를 다시 기르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이야기하니 꼭 기르고 싶어졌다.
“그래.”
“아…… 이브…….”
수줍게 대답하자 그가 돌연 앓는 소리를 내더니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느 부분에서 그가 흥분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의 그에게 밤을 내어 주어야 했다.
그리고 그 밤을 기점으로 나와 그의 사이가 변했다.
내가 그의 측근 기사였기에, 당연하게도 우리는 늘 붙어 있을 수 있었다.
우리는 점점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점점 대담해졌다. 사람들의 눈이 없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사랑을 나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 * *
체르니시아의 복권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지지부진한 복권 문제로 머리가 아픈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내색하지 않았기에, 나 또한 그저 기다려 주었다.
나는 그사이 머리가 상당히 길었다. 그가 선물해 준 머리핀으로 머리를 장식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어울려, 이브.”
테오도르는 뿌듯한 얼굴로 내 머리카락을 쓸었다.
“감기는 어때?”
“나아 가고 있어.”
나는 쉰 목소리로 콜록거리며 답했다.
지난 주말, 그와 정원을 산책하다가 밤을 홀딱 새워 버렸다.
덕분에 나는 심한 감기에 걸렸고, 이렇게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테오도르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양 절절맸는데, 어느 정도는 그의 잘못이 맞았기에 내버려 두었다.
그가 그 어둠 속에서 입을 맞추지만 않았어도, 추위를 잊은 채 애정을 나누지는 않았을 것이다.
감기는 생각보다 독해서 빠르게 낫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휴가를 내고 황궁의 숙소에서 자리보전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하루도 빠짐없이 내 옆에 꼬옥 붙어 밤새 간호해 주었다.
지난밤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내 곁을 지켜 준 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피로가 가득했다.
그의 호위라는 명목으로 황궁에 붙어 있으면서 오히려 그의 간호를 받는 상황이 조금 미안해졌다.
“미안, 이브. 오늘은 일정이 있어 가 봐야 해.”
“같이 갈까?”
“으음, 마음 같아서는 아주 작게 만들어서 주머니에 담아 가고 싶지만.”
그가 열이 남은 내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괜찮아, 이브. 너는 푹 쉬고 어서 나아서 내가 돌아올 때 안아 주면 돼.”
“하지만…….”
“사랑해, 이브.”
그렇지만 괜찮다는 말과 달리 테오도르는 아쉬움이 가득 남은 자잘한 입맞춤을 내 얼굴 곳곳에 남긴 뒤에야 몸을 돌렸다.
며칠간 그가 나를 간호하느라 제대로 자지 못했음을 알았기에 괜한 걱정이 들었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약 기운에 스르륵 잠이 들었다.
* * *
막 첫사랑에 빠져들었던 어린 나는 그가 내게 쏟아 주는 애정에 홀려 모든 마음과 몸을 다 내주었다, 어리석게도.
불행은 소리 없이 다가왔다.
아침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사랑을 나누던 그가 생전 처음 보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차가운 목소리로, 누구냐고 물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