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4_1
03. 기억과 인성의 상관관계
테오도르가 말에서 떨어졌다. 내가 감기 기운에 해롱거리느라 그의 옆을 지키지 못한 사이에.
갑작스러운 낙마 소식에 놀란 나는 사색이 되어 그의 침실로 달려갔다.
“이브 경……!”
“괜찮아? 감기가 심하다고…….”
침실 앞에 서 있던 기사들이 나를 보고 알은체했다.
“폐하께서, 폐하께서 낙마를 하셨다고 들었어. 괜찮으신 거야?”
숨을 헐떡이며 묻자, 그들이 미묘한 표정으로 서로 눈짓을 했다. 이에 나는 덜컥 불안해졌다.
“왜 그래?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거야?”
“음, 그게…….”
“크게 다치진 않으셨어. 다행히 금방 일어나기는 하셨는데…….”
이윽고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나의 테오가 지금…… 머리를 다쳤다고……?
겉보기엔 멀쩡한데, 조금 이상해졌다고……?
나는 그대로 닫혀 있던 문을 열고 유독 적막하게 느껴지는 침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침대 위에 앉아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그가 보였다.
머리를 다쳐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잘생긴 얼굴은 여전했다.
멀쩡하게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 나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었다.
“폐하.”
옆에 있는 그의 보좌관을 의식하여 그렇게 부르자, 내내 고개를 숙인 채 미간을 찌푸리던 그가 두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며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그 표정에 순간 나는 당황했다. 많이 아픈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더욱 걱정이 밀려왔다.
“많이 다치신 건…….”
그때였다.
홰액-!
돌연 내 손목을 움켜쥔 그가 나를 홱 잡아당겼다. 며칠째 감기로 비실거리던 내 몸이 그대로 그에게 끌려갔다.
“폐하, 왜, 왜…….”
나는 당혹스러워 말을 더듬었다.
이곳은 그와 나만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비록 테오도르는 때와 장소를 모르는 짐승이었지만, 언제나 다른 이들의 눈이 없는 곳에서만 한정된 일이었다.
체르니시아의 복권 문제가 매듭지어질 때까지는 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지 않다는 내 의견을 그가 존중해 주었기 때문이다.
“넌…….”
그가 나를 보며 황금빛 눈동자를 가늘게 흔들었다.
* * *
테오도르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후두를 강타하는 강한 충격이었다.
“윽…….”
뒤통수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둔탁한 것으로 아프게 얻어맞은 듯 아렸다.
“폐하, 정신이 드십니까!”
옆에서 들린 다급한 목소리는 보좌관 아르민의 것이었다.
“닥쳐. 머리가 울리잖아.”
한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고 나직한 욕설을 뇌까리는데, 문득 주위가 고요해졌다.
그 기이한 기류에 테오도르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자, 아르민이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에 그는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눈구멍이 왜 그 모양이야? 아픈 사람 처음 봐?”
“……죄송합니다, 폐하. 그저 놀라워서.”
그 이상 시선을 마주쳤다가는 눈알을 도려낼 것만 같은 흉흉한 눈빛에 아르민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
그러자 테오도르가 무슨 뜻이냐는 듯 이맛살을 구기며 그를 노려봤다.
고개를 숙였음에도 느껴지는 매서운 기세에 아르민이 재빨리 대답했다.
“폐하의 욕설을 들으니 몹시 그리운 느낌이 들어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한동안 바르고 고운 말만 사용하셨으니까요.”
“……?”
테오도르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더욱 짙어졌다. 별 시답잖은 개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며, 그가 무심코 고개를 돌릴 때였다.
순간 창밖을 바라본 테오도르의 눈이 자그맣게 커졌다.
“눈…….”
“말에서 떨어지셨습니다. 다행히 머리의 상처 말고는 크게 다치신 곳이 없다고 합니다만, 혹 불편한 곳이 있으시다면…….”
“아르민 마이어.”
테오도르는 아르민의 설명을 끊고 믿기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 계절에 눈이 내리는 거지?”
“네……?”
그러자 당황한 것은 아르민이었다. 그는 혹시 황제가 또 난처한 질문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지난여름 이후로 이상하게 유순해졌으나, 황제는 종종 괴상한 질문으로 아랫사람을 괴롭히는 취미를 지녔으니까.
“그야 당연히 이 계절이니까 눈이 내리는 거겠지요……?”
아르민은 최대한 테오도르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이래 봬도 그는 호위단장 린든과 더불어 황제를 가장 오래 모셔 온 사람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누구보다 성격 더러운 상사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남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테오도르의 얼굴은 눈에 띄게 험악해졌다.
“지금 나와 말장난을 하는 건가?”
“폐, 폐하……?”
아르민은 겉으로는 두려운 시늉을 하며, 속으로는 ‘아, 이 새끼 또 시작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설움을 삼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잘…….”
“한여름에, 눈이 내린다고? 그게 당연해?”
“네? 한여름이라니요, 지금은 겨울인데…….”
아르민은 이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여름이라 여기는 건지 알 수 없어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테오도르 또한 아르민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는지, 돌연 사납게 물었다.
“지금이, 겨울이라고?”
그러며 그는 자신의 침실 안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깔린 두툼한 카펫과 두꺼운 재질의 커튼. 그리고 지금 그가 앉아 있는 침대 위의 침구는 몇 번을 다시 보아도 겨울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오랜 기억 속의 소녀가 유독 싫어하였던 더운 여름이었는데.
혹 누군가 질 나쁜 장난이라도 하는 걸까?
하지만 누가?
누가 감히 저를 상대로 이딴 짓을 벌인단 말인가?
목숨이 열한 개쯤 되는 게 아니고서야…….
테오도르는 이 질 나쁜 장난질의 주동자를 찾아내기만 하면 열 가지의 방법으로 상대를 반복해서 죽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황궁의 모든 이들이 황제의 그런 잔혹함을 알았다.
“……내가 말에서 떨어졌단 말이지.”
테오도르는 듬성한 기억을 더듬었다. 마지막 기억 속의 그는 과연 말을 타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 볕 아래, 말을 타고 가던 그는…….
“사과…… 분명 사과가 머리 위로 떨어졌는데…….”
누군가 먹다 만 사과 조각을 그에게 던졌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고개를 들었다가…… 눈이 부시게 내리쬐는 햇살 사이로…… 오랜 그리움의 얼굴을…….
“윽…….”
애석하게도 거기까지 생각하는 순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테오도르는 한 손으로 아픈 이마를 짚으며 아르민을 노려보았다.
“그럼 내가 사과를 맞고 말에서 떨어진 것이냐?”
“네?”
아르민은 점점 더 황제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졌다.
조금 전까지 한여름 타령을 하더니, 갑자기 사과는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폐하께서는 신년 행사에 참석하시던 중이었습니다. 본래 다른 일로 바쁘시어 행사 참여를 기피하셨으나, 신년제이니만큼 빠지지 못하고 참석하시었고…….”
“신년제? 그럼 오늘이 신년 첫날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
잠시 입을 꾸욱 다물던 그가 섬뜩하게 벼려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당장 의사를 불러와라.”
이에 불과 몇십 분 전에 황제의 몸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던 의사가 다시금 부랴부랴 달려왔다.
의사의 진단은 가히 절망적이었다.
황제의 기억이 끊겼다. 대단하신 알브레히트 황제께서 기억상실증에 걸리신 것이다.
황제의 보좌관도, 황궁의도 모두 황송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적막한 고요가 방 안에 흘렀다.
“별 X같은 병을…….”
욕설을 지껄이던 테오도르가 지끈거리는 두통을 이기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문을 열고 안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폐하.”
자신을 부르는 조금 쉰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리던 테오도르는 문득 멈칫했다.
입고 있는 행색을 보아하니, 분명 저의 측근 호위인 것 같은데…….
홰액-!
그가 낯선 기사의 손목을 움켜쥐고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누가 보아도 당황한 것에 틀림없는 기사의 얼굴이 눈앞에 가득 담겼다.
“넌…….”
그 얼굴을 응시하는 테오도르의 두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테오도르는 이 얼굴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어린 날, 지긋지긋한 황궁에서 찾아낸 저의 보물.
정말 이보네인 걸까? 어떻게 그녀가 이곳에…….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다. 마지막 기억 속에서도, 그는 이보네를 찾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문득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는 그대로 잡은 손을 뒤집어 그녀의 손목을 보았다.
기사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깨끗한 손, 그리고 마찬가지로 작은 상처 하나 없는 새하얀 손목…….
테오도르는 이보네의 손을 기억한다. 그녀의 손은 이렇게 깨끗하지 않았다.
그녀의 가장 아픈 약점이었던 흉터가 이 손목에 있었고, 10년 전 테오도르는 그곳에 자신의 신성력을 심어 두었다.
그 애가 어디로 사라지든, 다시 찾을 수 있게.
비록 그 족적이 체르니시아의 몰락 이후 페르디난트에서 끊겼으나, 만약 페르디난트의 종자들이 마력으로 뒤덮은 것이라면 이 흰 손목에 작은 마기나마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목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누구보다 그녀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보네가 아니다.
이보네를 흉내 낸 가짜…….
이보네를 응시하는 테오도르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테오도르는 한동안 나의 손목을 붙들고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폐하……?”
“…….”
테오도르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나를 담고 있는 황금색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떨고 있는 건 시선뿐만이 아니었다. 내 손목을 움켜쥔 굵은 손도 함께 떨고 있었다.
정말로, 많이 아픈 건가……?
그의 머리를 감싼 흰 붕대 위로 붉은 얼룩이 져 있었다. 퍽 아파 보이는 핏자국에 마음이 상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붙들리지 않은 반대편 팔을 뻗었다. 그 위로 달라붙어 있는 검은 머리카락에 손끝이 닿을 때였다.
홰액-!
별안간 그가 팔을 휘둘렀다. 그에게 손목이 붙잡혀 있던 탓에, 몸이 휘청거렸다.
요 며칠 지독한 몸살로 앓느라 힘이 빠진 내 몸은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아…….”
아프게 바닥에 부딪힌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알알한 몸을 매만졌다.
왜 그러느냐고 묻고자 고개를 들어 올리려던 순간이었다.
스르릉-
서늘한 검날이 목덜미에 겨누어졌다.
“……?”
무심코 고개를 들려던 나는 순간 내리쬐는 찌를 듯한 살기에 섬찟 몸을 굳혔다.
“아르민, 네가 대답해. 이건 뭐지?”
서늘한 목소리에 담긴 것은 확연한, 살의였다.
“……이브 로웰린 경입니다. 폐하께서 친히 데려와 옆에 두었던 폐하의 측근 호위지요.”
“호위?”
불쾌함이 가득 실린 목소리가 보좌관에게 반문했다.
“명색이 황제의 호위라는 자가 저렇게 비실거린다고?”
“아, 그건 최근 이브 경이…….”
“측근 호위라면서, 내가 낙마할 땐 뭘 하고 있던 거지?”
“이브 경의 몸이 좋지 않아…….”
“영 수상한 일이 아닌가.”
아르민이 무어라 설명하려 하였으나, 테오도르는 단 하나도 제대로 듣지 않고 제멋대로 말을 끊어 버렸다.
그러고는 내 목에 드리운 검날을 더욱 바싹 세우며 스산하게 명령했다.
“고개를 들어.”
“…….”
나는 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폐…….”
“X발.”
그리고 이어 흘러나온 욕설에 나는 화들짝 놀라 토끼처럼 똥그래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몇 번을 감았다 떠 보아도 내 앞에 있는 것은 분명 테오도르였다.
“빌어먹게도 닮았군.”
그가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폐…….”
방금 그건, 역시 내가 잘못 들은 거…….
“읏…….”
다시 그를 부르고자 했으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그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연 순간, 그가 날카로운 검날을 내 살갗 위로 세웠기 때문이다.
숨을 꼴깍 삼키며 그를 쳐다보자, 일순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검신이 부르르 떨렸다.
챙그랑-
검을 내던진 그가 살벌하게 나를 노려보며 윽박질렀다.
“당장, 꺼져.”
“…….”
황망한 마음에 나는 입 한번 벙긋하지 못하고 그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그러자 보다 못한 아르민이 내게 다가와 일으켜 주었다.
“이브 경, 지금 폐하의 상태가 썩 좋지 않으니, 일단 나가시지요.”
“폐하께서 많이 편찮으신 건가요?”
“네, 뭐…… 아니, 그런데 폐하보다는 경이 더 아파 보이는군요. 빨리 가서 치료를 해요.”
그가 손수건으로 내 목덜미를 꾸욱 눌러 준 다음에야, 나는 내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욱신-
뒤늦은 아픔에 지혈을 하며, 나는 테오도르를 힐긋 보았다.
그는 정말로 많이 아픈 건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양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그러다 돌연 나를 노려보는 흉흉한 시선과 마주칠 적에, 아르민이 나를 밖으로 떠밀었다.
“마이어 공, 정말로…… 정말로 폐하께서 괜찮으신 것 맞지요?”
“제가 나중에 찾아가겠습니다. 일단은 나가요.”
결국 그에게 등이 떠밀린 나는 다시 복도로 퉁 나오게 되었다.
“……말도 안 돼.”
닫힌 침실 안에서 겪은 일들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X발이라느니…… 꺼X라느니…….
하지만 나의 테오가 그렇게 상스러운 말을 그 예쁜 입에 담을 리가 없잖아?
설마, 테오도르의 탈을 뒤집어쓴 가짜인 건가? 그렇다면, 해치워야 하는데…….
“세상에, 이브 경! 이 피는 뭐야?”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넋이 나가 있잖아? 이브 경,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혼란스러워하는 내게 다가온 기사들이 시끄럽게 말을 던졌다.
나는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폐하께서…… 비속어를 사용하셨어.”
그리고 모두를 놀라게 할 나의 이야기에, 일동 침묵했다.
“……?”
“……?”
“……?”
하긴, 다들 충격적이겠지.
어리둥절한 그들의 표정을 보며, 나는 안색을 어둡게 굳히며 자리를 떴다.
* * *
한편, 이보네를 내보낸 테오도르는 점점 선명해지는 기억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기억이 끊긴 지점은 이보네를 추적하기 위해 페르디난트에 걸음하던 날이었다.
이보네에게 남긴 흔적은 페르디난트에서 끊겼고, 그곳을 주시하던 중 그쪽에서 먼저 혼담을 제의했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그것을 빌미로 페르디난트를 파헤치기 위해 방문했다. 호위단장 린든과 함께.
당연히 혼담 따위는 이보네를 찾기 위한 부수적인 과정 중 하나였을 뿐, 그 찝찝한 페르디난트의 딸과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린든은?”
“몇 달 전 폐하께서 비밀리에 임무를 주시고 멀리 보내셨습니다. 임무의 내용은 제게도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
테오도르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하필이면 그날 자신을 가장 지척에서 보좌하였을 린든이 자리를 비웠다니.
그는 조금 전 보았던 이브 로웰린을 떠올렸다.
그녀는 한눈에 보아도 여자임을 알 수 있는 어설픈 남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굉장히…… 예뻤다.
당연했다. 이보네와 착각할 만큼 닮아 있었으니까.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통제를 벗어난 심장이 두근, 두근- 뛰어 댔다.
껍데기만 뒤집어쓴 가짜에게 반응하는 심장이 역겨워 도려내고 싶을 정도였다.
“페르디난트를 방문하였던 날, 그 이후로 기억이 끊겼다.”
“정확히 반년의 기억이 소실되었군요.”
“혹 내가 그날 특별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던가?”
“린든 경과 함께 페르디난트를 방문하셨던 그날이라면…… 본래의 목적과 달리 카타리나 양을 만나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어찌 된 일이냐 여쭈었더니 더 이상 혼담을 이어 갈 필요는 없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아르민이 반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난데없이 측근 호위를 위협하여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굳이 새 호위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 하셨고요. 그 일로 린든 경이 근심이 많았는데, 다행히도 폐하께서 바로 이튿날 페르디난트를 방문하여 이브 경을 손수 데려오셨습니다.”
“내가 그놈을 페르디난트에서 데려왔다고?”
“네, 폐하.”
테오도르의 눈가가 더욱 가늘어졌다.
이브 로웰린. 기억 속 이보네를 닮은 얼굴을 하고서, 제 주위를 맴도는 수상한 여자.
그런데 페르디난트에서 데려왔다니, 더욱 수상했다.
그곳은 이보네의 족적이 끊긴 곳이 아닌가.
테오도르는 페르디난트의 젊은 가주를 떠올렸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도무지 무슨 꿍꿍이를 지녔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의문스러운 작자였다.
문득 테오도르는 어쩌면 이브 로웰린은 그자가 보낸 첩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르디난트의 가주와 자리를 만들어라. 그를 일단 만나 보아야겠군.”
“네, 폐하.”
아르민은 피로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다른 측근 호위를 구해.”
“다른…… 호위요?”
그러다 이어진 황제의 명령에 멈칫했다.
“다른 호위라니, 갑자기 왜…….”
그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명령을 들었다는 사람의 표정으로 토를 달자, 테오도르가 그를 스윽 한 번 쳐다보았다.
“…….”
그 무언의 시선에 놀란 아르민은 히끅 딸꾹질을 삼켜야 했다.
* * *
그날 오후, 아르민 마이어는 약속대로 내게 찾아왔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정말 괜찮은 것인지 재차 묻는 내게 그의 상태에 대해 몹시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폐하께서는 근 반년 사이의 기억을 잃으셨습니다.”
“…….”
기억 상실이란다. 마치 통속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말에 나는 아주 잠시 말을 잃었다.
테오가 기억을 잃었다고…….
그래서 지난 반년을 기억하지 못하고,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라고…….
나는 아주 잠시 그 말을 납득할 뻔했다가,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리 기억이 사라진다고 해서, 사람의 성격까지 그렇게 바뀔 수는 없지 않나?
“그러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브 경. ……뭐, 별다를 건 없습니다. 그저 폐하께서 그 수상한 가식을 내던지고 본래의 성격으로 되돌아가신 것뿐이니까요.”
“아니요, 그 사람은 폐하가 아니었어요. 폐하는 절대 그렇게 상스러운 욕설을 하며 상대를 위협하는 분이 아니세요.”
“후후, 그야 이브 경은 그렇게 생각하시겠지요. 여태껏 그분의 내숭만 보아 왔으니…….”
나는 반년 전, 나를 카타리나로부터 구해 주었던 테오가 그 여자에게 협박을 하고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기억한다.
내가 영 수상해하며 생각을 곱씹을 적에, 아르민이 내 옷자락을 붙잡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부탁입니다, 이브 경. 부디 폐하의 곁을 떠나지 말아 주세요.”
“떠나다니요?”
“이제껏 이만큼이나 오래 그 자리를 버틴 이는 이브 경밖에 없었습니다.”
“걱정 마세요, 저는 폐하의 곁을 떠날 생각이 없으니까요.”
“하, 그게…….”
아르민이 한숨을 푹 내쉬며 설명했다.
“폐하께서 또 무슨 변덕이신지, 새 측근 호위를 구하라 하십니다.”
“새 측근 호위요?”
“만약 폐하께서 이브 경을 쫓아내겠다고 마음을 먹으셨다면, 분명 아주 심술궂고 고약한 방법으로 경을 괴롭힐 거예요.”
테오가 나를 쫓아내고 다른 사람을 옆에 두려 한다고?
역시 수상했다. 내가 아는 테오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다.
일단은 그가 정말 나의 테오가 맞는지 확인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 * *
이튿날 아침.
나는 짧았던 병가를 끝내고 테오도르의 집무실로 출근했다.
아직 열이 완전히 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일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집무실 안쪽으로 한 발짝 내디딘 순간, 날 선 목소리가 날아왔다.
“저건, 뭐야?”
그 물음은 보좌관인 아르민에게 향했으나, 흉흉한 눈빛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어제 말한 것을 전하지 않았나?”
“아, 물론 전했습니다. 그런데 새 호위를 구하기가 어려워서요. 기존의 기사들도 다들 폐하의 측근 호위 자리를 두려워하고…….”
“…….”
그 말에 테오도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최대한 빠르게, 새 호위를 구해.”
그는 냉랭하게 말하고 내게 관심을 거두었다.
‘정말로 나를 못 알아보네.’
어제와 변하지 않은 모습에 나의 마음속에 품은 의심이 더욱 커져 갔다.
그를 힐끔힐끔 관찰하던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미지근한 찻주전자를 발견했다.
테오도르는 내게 시선 하나 주지 않고 책상 위의 서류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아직 미지근한 찻물이 담겨 있는 주전자를 들고서 그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놓인 그의 빈 찻잔에 찻물을 따르는 척하다가 손을 비틀며 그에게 쏟아 버렸다.
“앗……!”
어색한 비명과 함께 촤르륵- 하고 찻물이 그의 셔츠를 적셨다.
“…….”
“…….”
집무실 안에 있던 아르민과 시종들은 턱이 빠질 듯 입을 턱 벌리며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고, 짧은 침묵이 방 안에 맴돌았다.
뚝, 뚝-
주전자에 남은 찻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이젠 별 같잖은 짓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테오도르의 잇새로 음산한 중얼거림이 새 나왔다.
“이게, 무슨 짓이지?”
무시무시한 시선이 내게 향했다. 그렇지만 내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손이 미끄러져서.”
“그러니까 네가 왜 내 찻잔에 손을 대냐는 소리다.”
“폐하의 다과를 담당하는 게 본래 제 역할이었던지라.”
뻔뻔하게 대꾸하자 그가 눈을 희번득 뜨며 아르민에게 물었다.
“이 말이 사실인가?”
“……아, 네, 폐하. 폐하의 간식은 늘 이브 경이 챙겼지요. 폐하께서도 이브 경의 간식을 살뜰히 챙기셨고…….”
아르민이 반 박자 느리게 답하다가 테오도르의 무시무시한 시선에 말끝을 흐렸다.
테오도르는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갈아입을 옷을 가져와.”
화를 꾹꾹 참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의 명령에 시종 하나가 재빠르게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테오도르는 젖은 옷이 불편했던지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헤쳤다.
나는 유심히 그 모양을 훔쳐보며, 셔츠 깃 아래로 숨어 있던 그의 목덜미와 단단한 살결을 훔쳐보았다. 그리고 그는…….
정말…… 테오도르가 맞네…….
어떻게 알았냐고? 다 방법이 있다. 어른들의 사정이라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아무튼 그는 정말로 나의 테오였다. 그렇다면 나의 테오가 왜 저렇게 변해 버린 거지? 역시 머리를 다쳐서…….
“미쳤나? 어딜 훔쳐보는 거지?”
이때 그가 단추를 풀다 말고 나를 대뜸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아, 음……. 몸이 좋으시네요. 절로 시선이…….”
홰액-!
그의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찻잔이 그대로 내게 날아왔다.
물론 나는 아주 쉽게 그것을 피할 수 있었다.
“당장 꺼져.”
결국 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복도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성과가 영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그가 나의 테오라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그의 기억의 공백을 메워야 했다.
머리를 다치며 성격까지 이상해진 모양이지만, 기억이 돌아오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하다못해 내가 어릴 적의 이보네 체르니시아라는 사실만 알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사랑하는 여자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나는 문득 서러워졌다. 그때는 바로 알아봤다고 했으면서, 이번에는 왜…….
“거짓말쟁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이 일순 치솟았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일부러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니고, 다쳐서 그리된 것 아닌가.
게다가 그가 다친 이유에는…….
[말에서 떨어지다니, 한 번도 그런 실수를 해 본 적이 없으신 분인데…….]그의 보좌관은 그가 그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가 그날 아침까지 무려 일주일이나 나를 병간호하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측근 호위 기사였던 내가 고작 감기에 걸렸다는 이유로 그의 곁을 지키지 못했던 사실도…….
그러니까 그를 원망하지 말아야지.
어서 말끔하게 나아서 다시 예전의 테오로 돌아오도록 도와야지.
그렇게 결심한 나는, 어째서 그가 나를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가 깨어난 직후에 찾아갔을 때, 테오는 나를 보고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그때 그는 분명…….
“내 손목을 살폈었는데. 설마 상처가 없어져서 그런 건가?”
나는 깨끗해진 내 손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굳은살과 물집과 흉터가 가득했던 손은 그를 만난 뒤에 깨끗해졌다.
그의 신성력이 닿았던 손목의 상처는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사라진 채였다.
검기가 담긴 상처라 신성력이 아니면 없어지지 않는 것이라지만, 본인이 치료해 주었으면서 그 사실마저 홀라당 잊어버리다니.
“어쨌든 내가 이보네라는 사실을 알리기만 하면 돼.”
한참 동안 인상을 쓰며 생각에 잠기던 나는, 마침내 결론을 냈다.
일단 테오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방금 막 그의 집무실에서 쫓겨난 처지라 어떡하면 좋을지 망설이던 참이었다.
마침 반대편에서 그의 시종이 갈아입을 옷을 들고 오는 게 보였다.
“그거 이리 주세요. 제가 폐하께 대신 가져다 드릴게요.”
가타부타 설명 없이 옷 바구니를 냉큼 뺏어 들자 시종은 기뻐했다.
나는 다시 문을 열고 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분명, 꺼지라고 했는데.”
“옷 바구니를 들고 오던 시종이 오다가 복도에서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제가 대신 왔습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답하자, 그가 가차 없이 중얼거렸다.
“쓸모없는 놈이군.”
나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평가하는 그가 너무 어색해서 빤히 쳐다보았다.
“뭘 하나? 당장 갈아입을 옷을 내놔.”
“아, 여기 있습니다.”
바구니의 새 셔츠를 내밀자, 그가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그가 옷 갈아입는 것을 가만히 구경했다.
매일 밤 보아도 질리지 않던 그 탄탄하게 짜여진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꼴깍-
나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음흉한 시선을 던지다가 그의 눈총을 받고 재빨리 시선을 거뒀다.
‘쳇.’
조금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치사하긴.
물론 내 시선이 조금 음흉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의 잘못도 있다.
내가 그 몸을 좋아하게 만든 것은 전적으로 테오도르였으니까.
졸지에 치한 취급을 당한 게 억울해서, 올망졸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뽀송한 새 셔츠에 팔을 꿰고 단추를 잠그던 그가 내 시선을 힐긋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폐하,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
그러나 나는 굴하지 않고 그에게 말을 붙였다.
그에게 내가 이보네 체르니시아라는 사실을 알려야 했으나, 하필이면 방 안에 아르민과 다른 시종들이 함께 있어 말하기 쉽지 않았다.
그들의 눈치를 보던 나는 간절한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주위를 물려 주신다면…….”
“뭐? 주위를 물려? 단둘이 있는 틈을 타서 날 공격할 셈인가?”
“네? 제가 왜 그런 짓을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