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4_2
공격이라니. 어떻게 하면 사고가 그렇게 흐를 수 있지?
당혹스러워 두 손을 내젓자, 그가 몹시 수상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훑었다.
“그럼-.”
이에 그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덮치기라도 하려고?”
“아니요, 폐하. 저는…… 절대…….”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고혹적인 음색에 순간 홀려 버린 나는 다시 한번 꼴깍 숨을 삼키며 마지막 단추를 채우고 있는 그의 손끝을 쳐다보았다.
그런 음흉한 생각은 아주 조금도 하고 있지 않다고 대답해야 하는데, 아주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런 내 상태를 알아차린 그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두 눈을 부릅뜨며 내게 축객령을 내렸다.
“당장, 나가!”
결국 나는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그에게 또다시 쫓겨나고 말았다.
벌써 세 번째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생각해도 쫓겨날 만했다.
내가 그의 몸을 음험한 시선으로 본 것은 사실이니까, 그도 놀랐겠지.
하지만…….
[저런, 이브. 왜 그렇게 음흉한 눈으로 나를 보는 거야? 잡아먹고 싶게.]……예전에는 내 음흉한 시선이 귀엽다고 그랬으면서.
나는 괜히 속상해진 마음에 입술을 삐죽 내밀며 터덜터덜 돌아갔다.
테오도르는 어깨를 축 내려뜨리며 밖으로 나가는 이브의 뒷모습을 보며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저 미친 여자가…….”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중얼거림에 방 안의 사람들이 다들 그의 눈치만 살폈다.
“저, 폐하…… 정말로 이브 경을 쫓아 버리려는 것은 아니지요?”
그런 테오도르 때문에 아르민은 정말로 불안했다.
그나마 이브가 있었기에 지난 반년간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궁에 사람 하나 들락거리는 것도 몹시 절차가 까다로운데, 이브 로웰린이 떠나 버리면 이제 또 매일같이 새 사람을 구하느라 쓸데없는 힘을 빼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그는 한 가닥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는 황제는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직접 위협해서 쫓아냈지, 이처럼 관대하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폐하, 그래도 이브 경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젊은 기사가 근면하고 책임감 있고, 또 성격도 좋아서 서임식이 반년이나 미뤄졌는데도 서운해하지 않고…….”
아르민이 이브를 향한 칭찬을 좌르르르 쏟아 냈다. 가만히 듣던 테오도르가 코웃음을 쳤다.
“서임식을 미룬 게 아니라 받을 수 없던 거겠지. 여자의 몸으로 황제의 기사가 되었다가 추문에 휩싸일 수도 있으니까.”
“네? 이브 경이 여자란 말씀입니까?”
아르민이 놀라 물었다. 그런데 한번 의혹을 품자마자, 곧바로 스스로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아, 그래요. 분명 여자로군요. 그 얼굴, 그 자태는…….”
이브 로웰린은 여자였다. 망막 위로 드리우던 장막이 한 꺼풀 벗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왜 이제까지 알아보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마치 마법에 걸렸다가 풀려난 것 같군요.”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아르민의 모습에 테오도르의 안색이 다소 심각해졌다.
“마법이라……. 페르디난트의 술법이라면 성별을 감추는 것쯤은 크게 어렵지 않았겠지. 하지만…….”
제아무리 페르디난트의 술식이 새겨져 있다 한들, 저를 속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 또한 그녀를 보자마자 여자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보았을 테다.
그런데도 반년 동안이나 옆에 두었다니.
혹…… 이보네와 닮은 그 얼굴에 현혹되었던 걸까?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녀가 수상하다 여기면서도, 냅다 목을 베지 못하고 참고 있으니까.
이보네와 닮은 그 어여쁜 푸른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할 때면……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수상해. 내게 의도적으로 접근을 하는 것 같아. 게다가 방금 그 시선, 꼭…… 치한 같았어.”
테오도르는 몸을 부르르 떨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감히, 황제의 몸을 그딴 추잡한 눈으로 훑다니……. 당장 경을 쳐도 모자란데…….”
잠자코 그 중얼거림을 한 귀로 흘려듣던 아르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테오도르의 귓불이 붉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 시선을 즐기고 있는 건가?’
아르민은 뜨악한 표정으로 테오도르를 보았다.
어쩌면 자신의 상관이 변태인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물씬 들었다.
그것도 그냥 변태가 아니었다.
그가 모시는 황제는 인성 파탄 또라이라고 정평이 나 있는 이였다.
그러니 그의 상관은 그냥 변태가 아니라 또라이 변태가 되는 것이다.
‘저런 또라이 변태를 상관으로 모셔야 하다니, 아이고 내 신세야. 그러고 보니 상대를 괴롭히며 반응을 즐기는 변태들이 있다고 했는데…….’
한편 테오도르는 그런 보좌관의 속마음은 전혀 알지 못한 채 계속해서 이브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의 목적은 이보네의 얼굴을 하면서 자신을 현혹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점차 확신이 굳어 갔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분명 사주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벤야민 페르디난트의 방문일이 언제라고 했지?”
테오도르는 조만간 만나게 될 페르디난트의 젊은 가주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 * *
테오도르가 기억을 잃은 지도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 그는 나와 단둘이 있는 시간을 극도로 경계했다.
나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어제부터는 아예 내 말을 무시하고, 없는 사람 취급을 시작했다.
“폐하.”
“어디서 개가 짖는군. 개 소리가 들리지 않나, 아르민?”
“폐…….”
“정무 회의 시간이군. 가지.”
탁- 소리 나게 서류를 덮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쫄래쫄래 뒤를 쫓았다.
그러자 내가 쫓는 것을 아는지 그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멀어져 가는 그를 보며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치사해.’
기억을 잃은 테오도르가 이렇게 치사한 사람이 되어 버릴 줄이야.
덕분에 그와 단둘이 대화를 하려던 나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내가 체르니시아의 딸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할 수도 없고…….
고심하던 나는 숙소로 돌아와 그에게 편지를 썼다.
말로 전하는 건 다른 이들의 시선 때문에 조금 어려우니까, 대신 글로 전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편지를 쓰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긴장이 되기도 했다.
그가 편지를 보고 내 말을 믿어 줄까? 걱정되는 마음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나는 막 회의장에서 나온 그에게 수줍게 편지를 내밀었다.
“폐하, 제가 드릴 게 있습니다.”
“…….”
그는 무심히 내가 내민 편지를 건네받았다.
드디어 그에게 전달되었다는 생각에 내 얼굴이 밝아지려던 찰나.
찌익- 찌이익-
그가 눈앞에서 그것을 찢어 버렸다.
“볼 가치도 없는 쓰레기 따위를.”
북북 찢긴 편지가 촛불에 그을리며 재가 되어 갔다.
“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앓는 듯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가슴이 싸해져 어떤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야, 속상해할 것 없어. 테오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잖아.
테오는 지금 아픈 거니까……. 조금 아파서 그러는 거니까…….
그러니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며 그를 쳐다볼 때였다.
문득 그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그가 자그맣게 욕설을 뇌까렸다.
“젠장.”
그가 잘생긴 얼굴을 온통 일그러뜨리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러니까 방금 내가 한 짓은…….”
그가 내게 무언가 말을 걸려던 때였다.
“폐하!”
아르민이 황급히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도착했습니다.”
“……?”
“일전에 말씀하신 새 측근 호위 말입니다.”
그의 곁에는 낯선 얼굴의 기사가 서 있었다.
“…….”
테오도르는 입술을 꾸욱 닫았다. 그러더니 이내 내게서 고개를 홱 돌렸다.
“이브 경.”
아르민이 내게 어서 나가 보라며 눈짓했다.
나는 울적한 마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테오는 나와 대화하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고, 이제 그는 정말로 다른 호위를 들여 버렸다.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이브 경, 괜찮습니까?”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며 우울해할 적에, 뒤따라 나온 아르민이 내게 물었다.
“아무래도 폐하의 표정이 심상찮아 말려야 할 것 같았는데…… 도움이 되셨나요?”
“방금 일부러 새 호위를 내세웠다는 거예요? 그럼 저는 이제 폐하의 곁에 있을 수가 없잖아요.”
당황하여 되묻자,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내지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하루 정도 짧은 휴가를 얻었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그의 의미심장한 웃음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정말로 다른 사람을 데려온 아르민이 미웠다.
그러나 기쁜 소식은 채 반나절도 되지 않아 들려왔다.
* * *
아르민은 머쓱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이브 경. 하루 정도 푹 쉬게 해 드리려고 했는데, 도무지 새로 온 사람이 폐하의 성격을 견디지 못해서…….”
기쁘게도, 아니, 애석하게도 새 호위가 반나절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둔 것이다.
나는 기쁘게 본래 나의 자리였던 그 빈자리를 찾아갔다.
“오늘만이다.”
테오도르가 험악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새 호위가 오면 두 번 다시 너 같은 놈은 볼 일 없어.”
“네.”
나는 그저 싱글벙글 웃으며 답했다.
테오도르는 그런 나를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다시금 그를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관찰)하며, 가만히 생각에 빠졌다.
그는 나와 대화를 거부하고, 편지조차 받지 않고 찢어 버렸다.
그에게 내가 이보네라는 사실을 전할 수 없으니, 대신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붕대를 풀어 이제는 다쳤다는 게 실감 나지 않는 그의 머리통에 힐끗 시선이 갔다.
‘낙마를 할 때 머리를 크게 다쳤으니까, 다시 머리를 다치면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
오래전에 읽었던 통속 소설의 내용이 생각이 났다.
딱히 통속 소설을 즐겨 읽지는 않았으나, 페르디난트에서 지낼 적에 카타리나가 그것을 좋아했다.
황후가 되길 꿈꾸었던 그녀는 주로 여주인공이 황후가 되는 이야기를 읽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그녀를 향해 혀를 비죽 내밀었다.
‘백날 읽어 봐라. 그런다고 황후가 되나.’
그러며 곁눈질로 슬쩍 구경한 통속 소설 중에는 등장인물이 기억을 잃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은 강한 충격을 받고 다시 기억을 되찾았다.
그러니 어쩌면 테오도르도 강한 충격을 받으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강한 충격…….’
문득 테이블 위에 놓인 화병이 눈에 들어왔다.
‘저걸로 맞으면 무척 아프겠지.’
나는 가만히 그것을 들어 보았다. 그리고 화병과 테오의 뒤통수를 번갈아 보았다.
‘힘 조절을 할 수 있을까?’
한 손으로 화병을 든 채로 위아래로 흔들던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테오도르는 아르민과 머리를 맞대고 사이좋게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다가가는 것에는 작은 결심이 필요했다.
‘미안해, 테오. 하지만 이건 우리 모두를 위한 거야.’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를 향해 화병을 높이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뭘 하는 거지?”
“…….”
마침 뒤를 돌아본 그의 물음에 나는 뻘쭘히 화병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팔 근육을 단련하고 있었습니다.”
어색한 정적 끝에 답하자, 그가 또다시 묘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 * *
테오도르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르민이 새 호위를 구해 왔으나, 나름 상냥하게 대해 주었는데도 병든 닭처럼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반나절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이브 로웰린을 다시 불러온 그는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보좌관과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정책을 논의하던 중이었다.
“이 정책은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거지?”
“아, 그건 제가…….”
“미치도록 훌륭한 정책이군. 너무나 감탄스러워서 박수가 절로 나올 정도야.”
“죄, 죄송합…….”
테오도르의 시선은 손에 든 보고서에 박혀 있었으나, 온 신경이 아까부터 그 여자에게 가 있었다.
이브 로웰린.
기억이 없는 동안 옆에 두었다는 수상한 여자.
‘하필이면 그따위로 예쁘게 생겨서는, 쯧.’
그가 속으로 그녀에 대해 생각할 때였다.
문득 뒤편으로 그림자가 지는 게 느껴졌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홱 돌려 뒤를 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뜬금없이 화병을 높게 들고 있는 이브 로웰린이 있었다.
“……뭘 하는 거지?”
그 의심쩍은 모양을 보며 묻자, 그녀가 말없이 화병을 아래로 내렸다.
잠시 저걸로 제 뒤통수를 내려치려 한 것인가 의심이 들었다.
자세가 딱 그런 모양이었기에 의심하기 좋았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곧바로 의심을 거두었다.
그녀에게서 아무런 살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그런 마음을 품었더라면 분명 제가 먼저 느꼈을 것이다.
‘그럼 정말 팔 근육을 단련 중이었던 건가?’
이브 로웰린을 응시하던 테오도르의 두 눈이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참 이상한 여자였다.
이보네가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 괴로웠다.
하여 멀리 쫓아 버리고자 자그마한 눈길 하나에도 화를 냈고, 인격을 짓밟는 말들을 수시로 내뱉었다.
그러나 그녀는 굳건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작정하고 못되게 구는데도 더러운 성정을 견딘다는 게.
오랫동안 옆을 지켜 온 아르민이나 린든보다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성격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잘 인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나쁘게 대했다.
그들이 뒤에서 제 욕을 숙덕거리는 것을 알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저를 향한 그들의 두려움이야말로, 그가 가장 즐기는 시선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유독 이브 로웰린, 그 여자에게는 그게 잘 안 됐다.
못된 말을 하고 윽박지르다가도 그 얼굴을 마주할 때면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 만다.
단순히 얼굴 때문인 걸까?
테오도르는 이브의 얼굴 위로 어린 날 제가 좋아했던 여자아이의 얼굴을 겹쳐 떠올려 보았다.
같은 사람이라 해도 믿을 만큼 닮은 얼굴…….
‘아니. 이보네는 저것보다 훨씬 더 밝고 사랑스러운 얼굴이었어.’
테오도르는 애써 두 사람이 닮았다는 것을 부정하고자 했다. 그 순간이었다.
“윽…….”
테오도르는 문득 밀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싸맸다.
“폐하? 괜찮으세요? 의사! 의사를……!”
챙그랑-
놀란 그녀가 들고 있던 화병을 내던지며 화급히 그의 상태를 살폈다.
고통에 찬 신음을 터뜨리던 테오도르는 고개를 들었다가 멈칫했다.
‘어라?’
이브 로웰린이 사색이 된 얼굴로 의사를 찾았다. 그리고 걱정이 되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머, 머리가 아프신 거예요? 어디가 어떻게 아파요? 혹 낙마 사고의 후유증인 건…….”
“…….”
테오도르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깨달았다.
‘뭐야. 이거 지금…….’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홱 잡아당기자, 그 몸이 그대로 딸려 왔다.
놀란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파르르 떨리는 녹색 눈동자.
살풋 달아오른 두 뺨.
그 와중에도 숨기지 못하고 있는 저를 향한 걱정과…… 애정…….
‘나를, 좋아하잖아.’
두근-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기분이 나빠 심장이 뛰었다.
두근, 두근, 쿵쾅, 쿵쾅-
“불결하게…….”
테오도르는 아랫입술을 꾸욱 베어 물며 중얼거렸다.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멀리 쳐내자, 그녀가 영문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았다.
그러다가 곧 들어온 의사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의사의 질의를 건성으로 답하며, 테오도르는 속으로 고심했다.
이브 로웰린, 저 수상한 여자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는…….
“음…….”
내내 굳어 있던 그의 입매가 비스듬히 말려 올라갔다.
상대를 괴롭히고 상처 주는 것은 매우 쉬웠다.
적어도 그에게는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심지어 상대가 제게 호감을 품고 있다면, 더욱더.
테오도르는 천사처럼 아름다운 외양과 달리, 누구보다 사람 괴롭히는 법을 잘 알았다.
의사를 내보낸 뒤, 그는 아르민을 불렀다.
“새 호위를 구해 오라는 명령은 철회하지.”
“네? 정말입니까, 폐하?”
반색하는 아르민과 그 너머로 두 눈을 끔뻑이고 있는 이브 로웰린을 보며 테오도르는 사르륵 눈꼬리를 접어 내렸다.
“물론.”
저 여자가 제풀에 지쳐 떠나는 것을 볼 생각이었다.
* * *
테오도르의 기억은 전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나를 향한 싸늘한 태도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 그는 어느 날을 기점으로 갑자기 여러 여자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여 노닥거리기 시작했다.
“안녕. 그러니까…… 실베니아 양?”
“아이참, 폐하. 세실리아예요.”
“아, 미안. 그대의 호수처럼 아름다운 눈동자에 홀려, 내가 잠시 착각을 했지 뭐야.”
낯선 여자들을 향한 달콤한 눈웃음과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느끼한 사랑의 밀어들.
“어머나, 어떻게 그런 부끄러운 말씀을.”
“정말이야. 그대의 미모에 나는 눈이 멀 것 같아. 아니, 이미 멀어 버렸지.”
하하 호호 웃는 남녀의 모습을, 나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속이 메슥거리는 게 저 느끼한 대사들 때문인지, 아니면 속이 상해서인지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몹시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차차 나는 이것 또한 현실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저게 본모습이었던 거야.
그러고 보니 나한테 접근할 때도 심상치 않았지.
[예쁜 걸 생각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잖아.] [응, 그래, 예뻐.] [어떡하지.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 같은데.]그때는 마냥 설렜는데…….
내 마음을 농락당한 것 같아 새삼 억울했다. 동시에 화가 났다.
조용히 숨어 살던 내게 사랑을 알려 준 것은 그였고, 그 사랑이 얼마나 달콤한지 알려 준 것 또한 그였다.
나는 그가 기억만 되찾으면 흠씬 두들겨 패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주먹을 꾸욱 말아 쥐었다.
그러나 정작 나의 현실은 그의 여자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신세였다.
“저런, 차 맛이 별로인가?”
“네? 아니요, 향이 정말 좋…….”
“오, 이런, 나의 아기 새! 방금 X같다고 했나?”
“네, 네……?”
“젠장, 대체 누가 그대에게 X같은 향이 나는 차를 올린 거지?”
“아니요, 폐하, 향이 좋…….”
“너무 낙심하지 마. 이 X같은 차는 당장 치우고 새것으로 가져오라 할 테니. 이브 로웰린, 네가 다녀와.”
테오도르는 응접실 내에 무수한 시종들을 두고서 굳이 나를 콕 집어 잔심부름을 시켰다.
“네, 폐하.”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여자의 화장품 자국이 남은 찻잔과 찻주전자를 치웠다.
새삼 서러워진 처지에 복도를 걸었다.
테오도르가 하루가 멀다 하고 상대를 바꿔 가며 여자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인 이후, 나는 그에게 내가 이보네라는 것을 알릴 기회가 더욱 없어졌다.
차라리 그가 잠을 잘 때 몰래 침입할까?
‘그래, 좋은 생각이야.’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그의 방에 불이 꺼진 것을 확인한 뒤 소리 없이 움직였다.
희미한 촛불이 주위를 밝히는 어두운 복도에는, 낯익은 얼굴의 기사들이 졸음을 참고 있었다.
“어, 이브 경?”
“쉿.”
나는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대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폐하께서는 주무셔?”
“어, 음…… 응. 폐하를 뵈려고?”
“응.”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이 결연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브락-
쿵-!
이때, 저 안쪽에서 무언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테오?”
나는 놀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혹 그에게 위험한 일이 일어난 건 아닌가?
그러나 막상 침실 안쪽에서 그를 발견하였을 때, 나는 그만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테오도르는 혼자가 아니었다.
낮에 보았던 입이 거친 여자가 테오도르와 함께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고, 그 거친 입을 테오도르의 굵은 손바닥이 아프게 틀어막고 있었다.
어두운 침실……. 낯선 여자…….
여자는 눈물을 찔끔 흘리고 있었다.
문득 나는 밤의 그가 얼마나 난폭하고 짐승 같았는지 떠올렸다.
그러니까, 설마 이건…….
“아…….”
입 밖으로 터져 나온 짧은 탄식이 정적을 깼다.
“뭐지?”
그가 인상을 왈각 찌푸리며 물었다.
놀란 나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후다닥 바깥으로 도망쳤다.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뛰고, 또 뛰었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롱아롱 고여 있던 울음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결국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한참을 서럽게 울던 때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브? 무슨 일이야! 괜찮아?”
“에른스트……?”
“산책을 하는데, 울음소리가 들려서…….”
에른스트는 내 앞에 쭈그려 앉아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속상한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누가 널 힘들게 했어?”
상냥한 위로에 나는 더욱 서러움이 밀려와 더 큰 소리로 울었다.
당황하던 에른스트는 이내 토닥토닥 내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울다 지친 나는 에른스트의 어깨에 머리통을 콩 기대고 밭은 숨을 내쉬었다.
차츰 울음도 가쁜 호흡도 함께 잦아들 무렵, 바스락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테오도르가 있었다.
“…….”
“…….”
“…….”
그가 나를, 그리고 에른스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오래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그때의 테오도르는 처음으로 내게 버럭 화를 냈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화를 냈어?] [그때?] [에른스트랑 같이 있었을 때. 화를 냈잖아.] [아, 그거.]내가 그날에 대해서 물었을 때.
테오도르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질투가 나서. 네가 에른스트와 단둘이 있는 게.] [뭐? 하지만 에른스트는 네 동생인걸?] [나는 앞으로도 네가 그 애와 단둘이 있는 걸 보면 화를 낼 거야.] [나와 에른스트의 사이를 의심하는 거야?] [의심하는 게 아니라 질투하는 거야. 나는 질투가 아주 심하거든. 그러니 조심해야 해, 이브.]테오도르는 그렇게 말하며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질투라는 게 그토록 사랑스러운 감정이라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나는 그날의 대화가 생각이 나, 조금 긴장되었다.
같은 장소, 같은 사람들, 비슷한 상황…….
숨 막힐 것 같은 정적이 흘렀다.
그러고 그는 이내 관심 없다는 듯 그냥 지나쳤다.
아, 이제는 더 이상 질투도 하지 않는구나.
가슴이 서걱서걱 시리게 가라앉았다.
* * *
테오도르는 그 엉뚱한 여자가 오늘쯤에는 사고를 칠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만큼은 그 이브 로웰린이 움직이길 바랐다. 그러지 않으면 또 시답잖은 여자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이는 수고를 해야 했으니까.
그는 오후에 불렀던 실베…… 어쩌고 하는 여자를 일부러 보내지 않고 침실로 데려왔다.
“폐, 폐하……? 저, 집에는 언제 갈 수 있는…….”
“닥쳐 봐.”
요 며칠 테오도르는 이브 로웰린 때문에 한껏 예민해진 상태였다.
낮에 막 황궁을 방문하였을 때만 해도 수줍은 표정을 짓던 여자는, 이제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두려움에 달달 떨어 댔다.
기실, 이 여자뿐만 아니라 요 며칠 황궁을 방문하였던 모든 여자들이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제게 겁을 먹는 바람에 매일 갈아치우는 귀찮음을 무릅써야 했다.
지나치게 겁을 준 게 잘못이었을까.
침실 문이 열리는 기척을 느끼고 계획한 장면을 연출하고자 하였을 때.
실비아…… 어쩌고 하는 여자는 제가 다가가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가 그대로 바닥에 쿵 넘어지며 나뒹굴었다.
테오도르는 간신히 손을 뻗어 놀라 비명을 지르려는 여자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무슨 오해를 한 건지 이브 로웰린은 상처받은 얼굴로 자신을 보더니 그대로 달아났다.
분명 계획하에 연출한 것이었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새하얗게 질리던 그 얼굴에 괜히 마음이 쓰였다.
“젠장.”
결국 그는 나지막한 욕설을 내뱉으며 그녀가 사라진 흔적을 쫓아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애써 찾은 그녀는 하필이면 제가 제일 싫어하는 이복 아우와 함께 있었다.
테오도르는 에른스트가 싫었다. 아주 어린 날부터 그랬다.
제 어미의 뒤에 숨어 순진한 눈동자를 끔뻑이던 남자애.
동생이란 이름으로 친한 척 말을 걸어오던 그 애를 무섭게 쫓아낸 뒤로, 그 애는 두 번 다시 제 곁에 얼씬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더 자라 그가 이보네와 가문 간에 미래를 약속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더 싫어하게 됐다.
[너도 알고 있었어, 에른스트? 너와 내가 결혼을 할 거래!]우연히 그 대화를 엿듣고 난 이후로는 그 애로부터 이보네를 독점하기 위해 물심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보네와 닮은 얼굴로 에른스트와 함께 있다니.
꼴도 보기 싫었다.
화가 난 테오도르는 그 둘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대로 몸을 홱 돌려 침실로 돌아왔다.
돌아온 침실에는 실버…… 어쩌고 하는 여자가 혼자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덜덜 떨며 울고 있었다.
“폐, 폐하, 이, 이제 집에 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