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4_3
“썩 꺼져.”
테오도르는 화를 버럭 내며 여자를 쫓아 버렸다.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그는 시종을 불러 술을 찾았다.
홀로 술병을 기울이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밤, 성질을 박박 내는 테오도르로 인해 황제궁이 발칵 뒤집혔다.
* * *
부은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고 숙소로 가는 길이었다.
“이브 경……!”
호위단의 기사 하나가 다급한 얼굴로 나를 불러 세웠다.
“폐하께서 지금 주무시지 않고 계시는데…….”
“나도 알아.”
나는 잠긴 목소리로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그게, 경이 지금 가 줘야 할 것 같아서…….”
“내가?”
그는 황제가 아닌 밤중에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데, 매우 난폭해서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한다고 전해 주었다.
그나마 그 패악질을 견디는 아르민마저 퇴근을 하고 없었고, 린든 경은 몇 달 전부터 황궁을 비운 터였다.
“그래도 경은 우리 중 폐하의 고약한 성격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잖아.”
동료는 거듭 내게 황제의 옆을 지켜 달라 부탁했다.
시종장마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니, 별수 없었으나 이해는 갔다. 기억을 잃은 테오도르는 정말 성격이 이상해졌으니까.
닫힌 침실 문을 열기까지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조금 전 보았던 충격적인 장면이 아직 가시질 않은 탓이다.
“그런데 아까 그 여자는…….”
“여자? 아, 레이디 세실리아? 진작 도망갔지. 대체 왜 멀쩡한 레이디들을 한 명씩 불러들여서 하루가 멀다 하고 괴롭히고 울리시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괴롭혀 울리다니…….
그럼 침실에 여자를 들인 게 그 여자가 처음이 아니라는 걸까?
꾸욱-
손잡이를 움켜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어찌 됐든 더 이상 그 여자가 없다는 말에 안으로 들어가자, 예상과는 달리 그의 침대 위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침대 버릇을 생각하자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나 싶을 정도로 깔끔했다.
‘내가 착각을 한 건가?’
안쪽으로 들어가자, 겁에 질려 달달 떨고 있던 시종들이 나를 보고 반색했다.
그러더니 내게 자리를 맡기고 한 명씩 슬금슬금 사라져 버렸다.
테오도르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연거푸 술잔을 들이켜고 있었다.
스르륵-
고개를 들어 올린 그가 나를 보며 불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빛이 불손해.”
“…….”
“한 잔 마실 텐가?”
그가 내게 술잔을 내밀며 물었다.
“……괜찮습니다.”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그가 피식- 하고 한 번 웃더니, 그대로 제 입에 알싸한 액체를 털어 넣었다.
술을 마시는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문득 지금 이 자리에 그와 나 둘만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내가 이보네라는 사실을 알릴 절호의 기회였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
차가운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는 한 손에 술잔을 쥔 채로 나를 삐딱하니 응시했다.
너 따위가 내게 감히 무슨 말을 건네려는지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는 듯한 그 시선이 유독 서늘하여 살갗이 아려 왔다.
그렇지만 내가 말을 걸려고 할 때마다 무시로 일관하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관대한 아량을 베푼 것이었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이보네 체르니시아를 아시죠?”
나는 혹여나 그의 마음이 바뀌어 또다시 대화를 단절하기 전에, 재빨리 입을 놀렸다.
“계속 찾았잖아요. 내가 이보네예요. 반년 전에 폐하가 페르디난트에 왔을 때…….”
챙그랑-!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아래로 떨어졌다.
두서없이 주절주절 늘어놓던 나는, 문득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의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급기야 창백한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폐하……?”
“으, 윽…….”
“폐하? 폐하!”
나는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크으윽…….”
고통스레 일그러진 얼굴로 머리를 싸매던 그는 정신을 잃으며 테이블 위로 머리를 쿵, 박았다.
“의사! 의사를 불러와!”
나는 경련하는 그의 몸을 붙들며 복도를 향해 외쳤다.
늦은 시각에 뛰어온 의사는 간신히 그를 진정시키며 몸을 진찰했다.
“휴우…… 폐하께서는 괜찮으십니다.”
“괜찮다고요? 조금 전까지 굉장히 고통스러워하셨어요! 당신, 돌팔이 아니에요?”
“돌팔이라니요! 어떻게 그런 심한 말씀을!”
의사는 태어나서 가장 무례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얼굴이 시뻘게져서 씨근덕거렸다.
“그럼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폐하의 몸에 큰 문제가 아직 남아 있는 건……!”
“폐하의 몸에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낙마 때 입은 상처도 모두 다 회복했다고요! 혹시 이브 경이 폐하의 기억을 억지로 건드린 건 아닙니까?”
역으로 묻는 의사의 질문에 순간 내가 멈칫하고 말았다.
“기억을 건드리다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되묻는 내 목소리가 살풋 떨리었다.
나는 테오도르가 쓰러지기 직전, 그에게 나를 알리려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낙마 직후, 그가 나를 보고 극렬한 두통을 느꼈던 것도…….
문득 불안한 감각이 엄습했다.
‘설마…… 아닐 거야.’
그러나 의사는 냉정하게도 나의 불안에 쐐기를 박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폐하께선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실 때마다 두통을 호소하셨습니다.”
“폐하의 두통이…… 기억 때문이라고요?”
“네, 이게 참 의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일인데…… 허허…….”
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어 말했다.
“거꾸로 말하자면 폐하의 기억만 건드리지 않으면 두통을 호소할 일도 없다는 뜻입니다.”
“…….”
그간 테오도르가 내 앞에서 두통을 호소한 적이 몇 번 있기는 했다.
단순히 낙마의 후유증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모두 잃어버린 기억과 관련이 있었다니.
“이브 경을 볼 때마다 유독 머리가 아프다고 하시는 것도 아마 같은 맥락일 겁니다. 이브 경은 폐하가 기억을 잃은 그 반년 사이에 만난 새 인연이니까요.”
나는 내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머리가 아프다며 험상궂은 표정을 짓던 테오도르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그건 심술궂은 괴롭힘 따위가 아니었다.
나를 보는 게, 그리고 나와의 기억을 떠올리는 게, 그에게는 정신을 잃을 만큼 끔찍하게 아프고 괴로운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참 슬프고 잔인한 일이었다.
“그럼 폐하의 기억은 어떡하지요? 영영 못 찾는 거예요?”
“그건 나도 모르겠습니다. 뭐, 기다릴 수밖에요. 기다리면 언젠가는 기억이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
“아무리 낙마를 하셨다 해도, 어떻게 그렇게 반년간의 기억만 싹둑 잘려 나간 건지. 허, 참…….”
의사가 나간 뒤, 적막한 방 안에서 나는 말을 잃은 채로 멍하니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테오.”
고요히 잠든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괴로워 보였다.
아프고 속상한 건 난데, 왜 그가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의 기억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의 앞에서 이보네의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가 침대 위로 급히 옮겨진 몸은 이불을 깔고 있었다.
나는 그가 이불을 덮고 따뜻하게 잤으면 했지만, 잠든 그의 몸은 꿈쩍도 않았다.
결국 나는 이불 대신 입고 있던 겉옷을 펼쳐 그의 몸 위로 덮어 주었다.
“사랑하는 여자도 기억하지 못하는 바보는 아니라며.”
옅은 원망을 담아 속삭였으나, 잠든 그는 듣지 못했다.
나를 잃어버린 그가 미웠고,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의 기억이 얄궂었다.
나는 땀에 젖어 이마 위로 달라붙은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넘겨 주며 생각했다.
기억을 찾으면, 내게 한 행동들을 미안해할까?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며 사과를 하더라도, 내 마음이 풀릴 때까지 절대 받아 주지 않을 거다.
낯선 여자와 함께 있던 건 내가 오해한 거라 할지라도, 그가 내게 보인 차가운 모습과 내 편지를 읽지도 않고 찢던 순간의 속상한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절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러나 조금 전 아파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린 순간, 곧바로 마음이 약해졌다.
“그렇지만 넌 내가 사랑했던 남자니까, 특별히 용서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빨리 기억을 되찾아, 테오.”
나는 한참 동안 잠든 그의 머리맡에서 속삭이다 자리를 떴다.
* * *
이튿날 아침, 내가 그의 집무실로 출근을 하였을 때, 그는 돌연 성질을 내며 내게 옷을 던졌다.
“누가 이딴 걸 달랬나?”
어젯밤 잠든 그의 위로 덮어 주었던 나의 겉옷이었다.
담담히 그것을 받아든 나는 이제 알 것 같았다. 어째서 다들 그의 호위가 되기를 꺼려 했는지.
어쩌면 이제까지 내 앞에서 보였던 상냥한 모습은 다 내숭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격 파탄자…….”
그가 들리지 않도록 아주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방금 뭐라고 했지?”
그러나 예민한 그는 그 작은 소리도 알아듣고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나를 위협했다.
“아, 아닙니다.”
비굴하게 둘러대며,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들추는 그의 옆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젯밤에 내 앞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때, 시종이 들어와 그에게 고했다.
“폐하,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응접실로 모실까요?”
손님이란 말에 나는 귀가 쫑긋했다.
오늘도 손님이 오기로 했나?
설마 또 여자를 부른 걸까?
“가지.”
테오도르는 거만하게 고개를 까딱이며 일어났다.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던 나는 응접실에 도착해 있는 반가운 얼굴을 보았다.
‘벤야민……!’
무려 반년 만에 만나는 벤야민이었다.
그도 나를 발견한 듯, 내 쪽을 보며 작게 눈인사를 했다.
반가워하던 나는 그 옆에서 테오도르를 향해 인사를 하는 카타리나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카타리나가 왜 여기 온 거지?
공연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리고 기분 나쁜 나의 예감은 적중했다.
“하여, 페르디난트는 황실에 끊겼던 혼담을 다시 제의하고자 합니다.”
혼담이라니.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나는 홀로 넋 나간 표정으로 그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도중 테오도르와 카타리나가 둘이서 자리를 비웠다.
“이브.”
자리에서 일어난 벤야민이 내게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그가 내 손목을 감싸 쥐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벤야민.”
“잘 지냈어?”
“응, 뭐.”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내리자, 그가 내 손목 위를 엄지로 뭉근하게 쓸어내렸다.
오래전에는 자연스러웠던 그의 접촉이 유독 거북스럽게 느껴졌다.
“너는?”
손을 비틀어 빼내며 묻자, 그가 멈칫하더니 이내 잔잔하게 웃으며 답했다.
“잘 못 지낸 것 같아. 네가 보고 싶어서.”
“음…….”
짐짓 장난스럽게 건네는 말에도 나는 웃지 못했다.
아까 혼담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가슴이 울렁거리고 속이 메슥거려서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벤야민에게는 무척 미안했지만.
“머리를 길렀네.”
“이상해?”
“아니, 잘 어울려.”
“…….”
그 말에 내 표정이 흐려졌다. 내게 머리를 길러 보라 권유했던 남자는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이브? 표정이 왜 그래?”
그런 내게 벤야민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마른 뺨 위에 그의 손이 닿는 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고 테오도르와 카타리나가 돌아왔다.
나갈 때와는 달리, 몹시 살갑게 팔짱을 끼고서.
다정한 그 모습에 나는 그만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았다.
* * *
테오도르는 제 팔에 매달린 여자가 무척 거추장스러웠다.
다행히 여자는 똑똑해서, 대화가 금방 통했다.
[대화를 하지.] [저와…… 단둘이 말입니까?]은은한 두려움이 감돌던 여자의 눈동자는 이어진 말에 차츰 흥미로운 빛깔이 번져 갔다.
[찾는 사람이 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10년 전 사라진 체르니시아 가문의 막내딸. 페르디난트에서 족적이 끊겼다.] [10년 전이라면 제가 페르디난트에 입적되기 전이에요.] [그렇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찾을 수 있겠지.] [물론 폐하께서 제게 그만한 힘을 실어 주신다면요.]여자는 비릿하게 웃으며 욕심을 내비쳤다.
[황후 자리를 원해요. 그걸 약속해 주시면 저도 말씀하신 사람을 찾아보도록 할게요.] [그건 줄 수 없어. 대신 다른 것을 주겠다.]감히, 황후 자리라니.
테오도르는 대놓고 불쾌한 낯으로 거부했다.
단호한 어조에 카타리나는 차마 다시 황후 자리를 언급하지 못하고 고민했다.
[그럼 페르디난트를 제게 주세요.]카타리나는 욕심이 많았으나, 처음부터 가질 수 없는 것은 딱 잘라 포기하는 성미였다.
[대신 폐하께서 제가 페르디난트 내에 입지를 다질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 해요.] [좋아. 그렇지만 페르디난트의 가주를 처리하는 것까진 내가 해 줄 수 없어.] [괜찮아요. 폐하께서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벤야민은 제 선에서 처리할 테니까.]거래는 빠르게 끝이 났다.
[그리고 이브 로웰린, 그 여자에 대해 알고 싶은데.]그 물음에 카타리나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브 로웰린이 여자라고요……?] [설마, 몰랐나?] [아니요, 몰랐을 리가요. 다만 폐하께서 그걸 알고 계실 줄은 몰라서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은밀한 거래를 마치고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을 때, 방 안의 분위기가 기묘했다.
페르디난트의 젊은 가주가 이브 로웰린의 뺨을 쓸다가, 제가 돌아온 것을 보고 손을 뗐다.
‘뭘 하고 있던 거지?’
카타리나는 두 사람이 본래 각별한 사이였다고 말했다.
[벤야민이 그 애를 특별히 아꼈지요. 나도 건드릴 수 없을 만큼 싸고돌았으니 말 다 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아끼던 아이를 폐하께 보낸 것은 저도 조금 의아했어요.]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내게 보낸 거라고?] [저는 정말로 벤야민이 그 출신 모를 여자애를 정부로 앉힐까 봐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무슨 심경인지 그 애를 황궁에 보내고서 태평한 게 영 수상쩍어…….]카타리나의 말을 떠올리자 괜히 더 울컥해졌다.
그저 얼굴에 뭐가 묻어서 떼어 줬을 수도 있고, 정말 별것 아닌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괜히 그쪽에 신경이 쓰였다.
“대화는 잘 마치신 것 같군요.”
벤야민이 사이좋게 팔짱을 낀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네, 벤야민 님. 덕분에요.”
카타리나가 활짝 웃으며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녀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던 순간 표정을 굳히며 시선을 피해 버린 이브 로웰린이 신경 쓰여서.
괜히 거슬리고 거북해서.
다른 말은 하나도 귀에 들리지가 않았다.
꼭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꺼칠한 기분이 들었다.
테오도르는 그 불쾌한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벤야민을 향해 말했다.
“페르디난트가의 혼담, 받아들이지.”
* * *
[페르디난트가의 혼담, 받아들이지.]그날, 벤야민을 향해 그렇게 말하던 테오도르의 얼굴은 내가 이제껏 보았던 그 어느 때보다도 낯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디난트의 딸이 황후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황궁 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소문을 접한 모두가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
테오도르 황제와 경쟁 구도였던 에른스트 2황자의 어머니 마르가라테 황후가 페르디난트 가문의 사람이었다.
때문에 테오도르 황제와 페르디난트의 사이가 무척 좋지 않다고 공공연히 알려진 바였기 때문이다.
하여 사람들은 만일 테오도르 황제가 결혼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2대 가문인 페르디난트나 레오브란테가 아닌 다른 가문의 딸을 황후로 맞이할 것이라 여겼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소문을 믿지 않던 사람들도 이내 믿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서 펼쳐진 황제와 카타리나의 애정 행각이 너무나 적나라했기 때문이다.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 그대를 위해서라면 알브레히트를 통째로 바칠 테니.”
“저는 이렇게 폐하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걸요.”
카타리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황궁을 방문했다. 그러곤 테오도르의 팔에 매달려 그와 함께 사랑을 속삭였다.
사람이 있는 곳에서도, 없는 곳에서도.
“폐하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너무 슬퍼요.”
“나도 마찬가지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대를 황궁으로 데려오고 싶어.”
“저를 위한 궁전을 내어 주시면 안 되나요? 그럼 매일 같이 폐하의 옆에 있을 수 있을 텐데.”
“오, 그대를 아무 궁전에나 머물게 할 수 없지. 조금만 기다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을 그대에게 바칠 테니까.”
“아니요, 그럼 시간도 돈도 많이 들잖아요. 저는 지금 당장…….”
“괜찮아. 그대는 나의 유일한 여자이니,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어.”
테오도르는 카타리나를 위해 마르가라테 황후가 사용했던 궁전을 뒤집어엎으며,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첫눈에 반했다는 게 뭔지 알 것 같군. 내 시간이 둘로 나뉘는 것 같아. 카타리나를 알기 전의 시간과 알고 난 후의 시간.”
“아이참, 폐하.”
까르륵 웃으며 품 안으로 파고드는 카타리나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테오도르는 막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처럼, 마치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이라도 하듯 그 사랑을 온 천하에 과시했다.
그의 사랑은 이제까지 소소하게 여자들을 불러들여 티타임을 가졌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그에게 내가 이보네라는 것을 알릴 수 없는 나는 그 떠들썩한 연애를 가만히 지켜보아야만 했다.
누구보다 그와 가까운 거리에서.
* * *
“폐하, 정말 페르디난트의 딸과 결혼하실 겁니까?”
아르민이 영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아르민에게 속으로 동조하며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결혼하지 못할 이유라도.”
테오도르는 무심히 답하며 시계를 힐긋 볼 뿐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카타리나 양이 곧 도착할 시간이군. 준비하지.”
카타리나를 만나기 위해 응접실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어머, 폐하!”
“저런, 언제 왔지? 내가 먼저 그대를 기다리려고 했는데.”
그가 몹시 다정한 목소리로 카타리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이제 알았다.
그의 다정함이 굉장히 특별하다는 것을. 모두에게 향하는 다정함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이제 그의 특별함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폐하가 뵙고 싶어 조금 일찍 왔어요.”
하하 호호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본 나는 배알이 꼴렸다.
‘많고 많은 여자들 중 하필이면 카타리나라니. 쟤가 얼마나 성격이 더러운데.’
괜히 보고 있으면 울적해지기만 해서,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군. 금방 올 테니 기다려, 나의 피앙세.”
테오도르는 카타리나의 손등에 입을 맞추곤 자리를 비웠다.
그사이, 카타리나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 이브. 너 사실 여자라며?”
“…….”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으나, 그다지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발끝만 내려다봤다.
“폐하께서 그러시던데, 꼴사납게 남장하고 주위를 알짱거리는 모습이 아주 같잖다고.”
그러나 카타리나는 어떻게든 내게 시비를 걸고 싶었나 보다.
굳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 다가와 속닥거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있지, 이브. 내가 경고 하나 할게. 되도록 빨리 폐하의 곁을 떠나. 나는 네가 너무 거슬리거든.”
“…….”
“너도 봤지? 폐하께서 내게 푹 빠져 계시는 모습.”
움찔.
반응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괜히 못 볼 꼴 보지 말고…….”
계속되는 그녀의 시비를 끊어 준 것은 테오도르였다.
“두 사람, 뭘 하고 있는 거지?”
나와 카타리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테오도르가 굉장히 험악한 표정으로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화를 내고 있었다.
왜 화가 난 거지? 설마 기억이 돌아온 건가? 그래서, 나를 괴롭히는 카타리나에게 화가 난 건가?
나는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폐하……!”
이때, 카타리나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겨 들었다.
테오도르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나를 노려봤다.
“이브 로웰린, 네가 내 약혼녀 될 여자를 건드렸나?”
그가 화를 내는 상대는 그녀가 아니라 나였다.
아주 잠시 설레었던 가슴이 툭 떨어지며, 무척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 번 다시 카타리나 양에게 무례하게 행동한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당장 나가.”
그는 화를 내며 나를 쫓아냈다.
가슴이 싸르르 아픈데, 이상하게 점점 익숙해지고 무뎌지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정말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사랑한다던 남자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이제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그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그래, 성격 파탄자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
억울한 마음에 속으로 분을 터뜨리며 내 방에 돌아왔는데, 문득 그가 선물해 주었던 머리핀이 눈에 띄었다.
그의 어머니의 유품이기도 한 물건이었다.
[사랑해, 이브.]테오는 내게 저것을 주며 사랑을 고백했다.
“…….”
나는 그가 주었던 머리핀을 손에 꽈악 쥐며 생각했다.
기다리자.
테오는 죽은 사람이었던 나를 10년이나 찾아 헤맸어.
그러니까 나도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자.
* * *
이튿날 오전. 나는 부러 그가 선물하였던 머리핀을 하고서 그의 집무실로 출근했다.
이 머리핀을 보면, 그가 날 기억해 주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른 오전부터 보기 싫은 얼굴이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하필 아침부터…….’
카타리나가 그의 집무실 소파에 제 자리처럼 앉아 쿠키를 집어 먹고 있었다.
원래 저 자리에 앉아 디저트 따위를 먹으며 일하는 그를 관찰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와 멀찍이 떨어진 문 앞에 서서, 그와 그의 여자를 지켜보아야 하는 처지였다.
카타리나는 보란 듯이 그에게 쿠키를 먹여 주었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거절하지 않고 그녀가 주는 쿠키를 받아먹었다.
참 눈꼴 시린 광경이었다.
“아이참. 이브 경, 이것 좀 치워 봐.”
바닥에 쿠키를 떨어뜨린 카타리나가 대놓고 나를 부려 먹었다.
나는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그들의 앞에 떨어진 것을 치우고자 다가갔다.
이때 테오도르가 내 머리 위에 꽂힌 머리핀을 발견하고 반응했다.
“너, 그 머리핀은…….”
“폐하께서 제게 주셨던 거예요.”
담담하게 대꾸하며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어머나, 예쁜 머리핀이네.”
잠시를 참지 못하고 끼어든 것은 카타리나였다.
“정말인가요, 테오? 테오가 이브 경에게 이 머리핀을 준 거예요?”
테오?
순간 말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 이름은 오직 내게만 허락된 애칭이었는데, 언제부터 카타리나가 그를 테오라고 부르게 된 거지?
심지어 나조차도…… 둘만 있는 곳에서만 그를 그렇게 부를 수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깍듯이 폐하라고 부르지 않았나.
“예쁘다. 나 이거 갖고 싶은데, 그래도 되지요, 테오?”
“싫어요.”
그 ‘테오’라는 애칭에 불쑥 화가 치솟은 나는 대뜸 표정을 굳히며 사납게 말했다.
그러자 카타리나가 샐쭉해진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홱- 고개를 돌려 테오도르에게 칭얼댔다.
“테오, 나 저 머리핀이 갖고 싶어요. 내게 주세요, 네?”
“…….”
잠자코 있던 테오도르가 내게 명령했다.
“머리핀을 카타리나 양에게 넘겨.”
“줄 수 없습니다. 이건 폐하께서 제게 주신 거예요.”
이 머리핀은 그의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라고 했다. 동시에 그가 내게 건네준 사랑의 증표였다.
결코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지금 내 말을 거역하는 건가?”
내가 한사코 완강히 버티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자박자박 내게 다가왔다.
“…….”
“…….”
그의 시선이 내 머리 위에 장식된 머리핀으로 향했다.
절대 내놓을 수 없다는 태도로 한 발짝 물러나려던 때였다.
쇄액-
돌연 내 쪽으로 상반신을 수그린 그가 내 허리춤에 장식처럼 매달려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후드득-
내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그 순간 오래전 체르니시아 저택이 불타고 마르가라테 황후의 사람들에게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던 그날의 기억이 겹쳐지며, 나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짧아진 머리카락에 고정이 풀린 머리핀이 바닥으로 퉁-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허리를 숙인 그가 바닥에 떨어진 머리핀을 주워들었다.
“이제 장식할 머리카락이 없으니, 머리핀은 필요 없겠군.”
“테오,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테오도르는 그대로 집무실 밖으로 나가 버렸고, 카타리나가 기뻐하며 그 뒤를 따랐다.
아르민과 시종들 사이에 남겨진 나는 바닥에 떨어진 은색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수군거리는 목소리와 동정의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마치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해 왔다는 그의 애정 같아서 서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