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5_1
04. 만나서 X같았고, 다신 보지 맙시다
황제가 이상하다.
그것이 황제의 보좌관 아르민 마이어가 최근 내린 판단이었다.
그의 상관 테오도르는 원래 조금 미친 황제였다.
-알브레히트 역사에 다시없을 개차반!
-분리수거도 되지 않는 예쁜 쓰레기!
그것이 그를 향한 측근들의 평가였다.
그저 심심하다는 이유로 뜬금없이 패악질을 부리기 일쑤였고, 조금만 수가 틀리면 아랫사람들에게 약간의 관용도 없이 잔혹하게 굴었다.
만일 그가 국정에서 보인 그 유능한 면모들이 아니었더라면, 가히 희대의 폭군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반년 전, 그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하나 더 늘어났다.
-간악한 내숭덩어리 인성 파탄자!
이브 로웰린은 테오도르 황제가 지난여름 갑작스럽게 페르디난트를 방문하더니 데려온 사람이었다.
그때는 정말로 황제가 미쳤다는 소문이 황궁 내에 파다하게 돌았다.
황제는 참 어울리지 않게도 상냥하게 웃고, 다정하게 말했으며, 이따금 귀여운 척도 했다.
이브 로웰린의 앞에서만.
물론 이브 로웰린은 모두가 깜짝 놀라 한 번씩 뒤돌아볼 만큼 눈에 띄게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긴 했다.
-이브 로웰린을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
그녀의 동료 기사들 중에서는 이런 말까지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비록 그녀가 매일 같이 황제와 붙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다가갈 수 없었지만,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테오도르 황제가 누구던가?
그는 결코 눈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에 현혹될 사람이 아니었다.
왕국 최고의 미녀라는 레이디나 누가 보아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기를 앞에 두고도 심드렁하던 남자였다.
‘변덕이라도 부리는 건가.’
처음에는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새로운 괴롭힘 방법을 찾은 건지도 모르지.’
‘순진한 젊은 기사에게 잘해 주는 척하며 농락하려고.’
‘가엾은 이브 경. 괴롭힘을 당하는 것도 모르고 폐하를 떠받들던데.’
그러나 황제의 변덕은 꽤 오래갔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 세 달, 네 달…….
그렇게 두 계절이 지난 뒤에야 모두가 인정했다.
어쩌면 황제가, 이브 로웰린을 정말로 마음에 들어 해서 곁에 두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그녀 덕분에 아르민은 조금 편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측근 호위로 붙어 있는 한, 그 간악한 내숭 덩어리 인성 파탄자가 매우 착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무자비하게 화를 내거나, 험악한 표정과 말투로 다른 이들을 공포에 떨게 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가 상냥하게 웃고 있는 것은 그 나름대로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아르민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아 끝나고 말았다.
낙마 사고 이후, 테오도르가 또다시 이상해진 것이다.
기억을 잃었다기에 그저 예전으로 돌아간 것인가 생각했는데, 무언가 미묘하게 어긋났다.
이브 로웰린의 존재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라면, 냉랭하게 쫓아내면 될 텐데 그러지 않았다.
물론 아르민이 그녀를 쫓아내지 말아 달라 수차례 권하고 그녀를 괴롭히지 못하게 훼방하는 중이라지만, 어디 황제가 그런 것에 굴하는 사람이던가.
어찌 됐든 이브 로웰린이 황제에게 특별한 존재인 것은 틀림없었다.
요새는 그를 직접적으로 쫓아내려고 괴롭히지는 않는데, 뭔가 분위기가 아슬아슬했다.
특히나 그 여자. 갑자기 황제의 연인이 된 카타리나 페르디난트의 등장 이후로.
두 사람의 약혼식이 보름 뒤에 있었다.
보통 황가에서는 이렇게 빠르게 약혼식을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아직 약혼식을 치르지 않았는데도, 모두가 그녀를 ‘황제의 약혼녀’라고 부를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키워 가고 있었다.
그 여자가 조금씩 힘을 불려 가는 게 눈에 훤히 보일 텐데도 황제는 그저 내버려 두었다.
정확히는 봐주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황제가 사랑에 빠져 미쳐 버린 걸까?
만약 그것이 정말이라면 테오도르는 또라이 황제치고는 생각보다 정상적인 연애를 하고 있었다.
아르민은 정말로, 테오도르가 이렇게 정상적인 연애를 할 줄 몰랐다.
황제의 호위단장인 린든 경은 테오도르를 가장 오랫동안 모셔 온 사람이다.
그가 황제가 된 직후 보좌관이 된 아르민과 달리, 린든은 그가 힘없는 1황자 시절부터 그의 사람이었다.
때문에 린든은 테오도르의 가장 은밀한 비밀까지도 몇 가지 알고 있었다.
그런 린든이 말해 주었다.
어렸을 적 테오도르 황제가 좋아하던 여자아이를 에른스트 2황자로부터 독점하기 위해 어떤 말도 안 되는 짓들을 벌였는지.
예를 들어, 배탈이 나는 약을 2황자의 우유에 슬쩍 뿌린다든가.(물론 이것을 행한 것은 린든이었다.)
또는, 거짓으로 황제의 부름이 있다며 멀리 보내 버린다든가.(이것 또한 린든이 행해야 했다.)
어떤 때는 그 시절 막 연마하던 신성력으로 잠을 재워 버린다든가.(이것이 유일하게 린든이 행하지 않은 것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그때마다 린든은 테오도르에게 물었다. 그럼 어린 망나니 폭군은 싸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네가 대신 당할래? 원한다면 영원히 잠재워 줄 수도 있어.]그랬던 테오도르가 그 여자아이를 영영 잃게 되었을 때.
그는 정말로 미쳐 버렸다고 한다.
그저 전해 들은 것을 떠올리는 만으로도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로 떨려서, 아르민이 고개를 홱홱 저으며 두려움을 떨칠 때였다.
“마이어 공! 일전에 부탁하신 내용을 조사해 왔습니다!”
“조사……?”
“체르니시아의 생존자의 향방을 조사해 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거.”
아르민은 부관이 건넨 조사 보고서의 첫 페이지를 스윽 넘겼다.
‘……그러고 보니 낙마 이후로 체르니시아를 복권하겠다는 말이 쏙 들어갔네.’
테오도르는 한동안 체르니시아의 복권을 계획하고 있었다.
비록 그 일이 쉽지는 않았으나, 아르민 또한 그를 돕기 위해 따로 부관을 시켜 체르니시아의 생존자가 있는지 찾는 중이었다.
군터의 후처였던 그랜시는 그 친정 가문의 구명 요청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체르니시아의 성을 버리는 조건으로.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살아남아야 했다.
“여전히 재취는 하지 않았고 친정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데, 병이 깊어져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런, 안됐군.”
아르민은 감흥 없이 대꾸하며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넷째 브리안과 다섯째 이보네는 여전히 행방이 묘연합니다.”
그 난리 속에서 브리안과 이보네 체르니시아는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고 홀연히 증발하였다.
대충 보고서를 훑어본 아르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울적하던 나를 달래 준 것은 다름 아닌 에른스트였다.
에른스트의 시종이 짧아진 머리카락을 예쁘게 다듬어 주었다.
“됐다, 이브. 단발도 예쁜데.”
그가 거울을 보여 주며 해맑게 웃었지만, 거울 속 짧아진 머리를 보는 내 얼굴은 웃지 못했다.
머리를 기른 건 순전히 테오도르의 권유 때문이었다.
[머리를 길러 보는 건 어때?]그렇게 말하며 내 짧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던 그가 생각이 나서 가슴이 욱신거렸다.
머리를 자르자 드러난 목덜미에는 희미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동안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그 상처는 그가 기억을 잃고 깨어난 그날, 내게 남긴 것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형님이 심술을 부린 거야?”
심술…….
그걸 심술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내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베어 내던 테오도르와 그것을 보며 즐거워하던 카타리나를 떠올렸다.
“……재수 없어.”
카타리나도 재수 없고, 테오도르도 재수 없었다.
“이, 이브?”
내 욕설에 에른스트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돌아봤다.
“왜?”
“너 원래 이런 말 안 썼잖아.”
“그건 10년 전이고.”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10년 전, 체르니시아의 딸이었던 나는 이런 거친 비속어를 몰랐다.
그러나 페르디난트에서 견습 기사들 틈에서 자라며 조금 거친 사람이 되었다.
테오도르가 내게 나쁜 말을 할 때마다 맞받아치지 않는 건, 그가 환자라는 것을 꾸준히 상기하며 참아 주는 거였다.
……물론 황제인 그의 권력이 무서워 비굴하게 참는 것도 있었지만.
아무튼 그가 없는 자리에서 이 정도 욕은 해도 되지 않나.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해서, 인성을 상실한 듯한 그의 행동들까지 사랑하는 건 아니니까.
“이보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에른스트가 두 눈을 글썽이며 나를 보았다.
“많이 힘들면 나랑 같이 나갈래?”
“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그가 내 손을 덥석 붙잡으며 설명했다.
“응. 이제 곧 있으면 테오도르 형님의 약혼식도 있으니까. 나도 슬슬 황궁을 떠나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테오도르가 황제가 된 뒤에도 에른스트는 황궁에 남을 수 있었다.
후사 없는 젊은 황제가 국혼마저 거부하는 바람에 만일을 대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곧 있으면 황제는 약혼을 할 테고, 약혼을 한 뒤엔 1년 안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게 알브레히트 황가의 관례였으니 황제의 허가만 떨어지면 에른스트는 황궁을 떠날 수 있었다.
“음…….”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테오도르는 내가 내 발로 떠나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원대로 해 주기에는 그가 잃어버린 기억 속 테오도르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하여 오기로 버티고 있었으나, 나도 슬슬 힘들어지던 참이다.
이따금 나도 울컥하고 감정이 치솟을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내게 머리를 길러 보라 했으면서, 이미 내게 선물한 것을 그 여자에게 주겠다고 강탈하기 위해 내 머리카락을 베어 낸 그를 생각하면 자꾸만 속이 쓰렸다.
어쩌면 나는 울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우는 순간 카타리나에게 지는 것만 같아 울지 않고 이렇게 뒤에서 그의 욕이나 하고 있지만.
“그리고 이브, 실은…….”
이때 에른스트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얼마 전에 이상한 편지를 받았어.”
“편지?”
나는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에른스트가 다른 이들과 무슨 편지를 주고받는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브. 이건 반드시 너만 알고 있어야 해. 있잖아, 내가 어떤 편지를 받았는데, 그 내용이…….”
그러나 이어진 말에 나는 두 눈을 번뜩 뜰 수밖에 없었다.
“뭐?”
순간 내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네게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자기가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라 했다고?”
* * *
나는 에른스트가 해 준 말을 한참 동안 곱씹었다.
[응. 조금 수상하잖아. 너는 이렇게 내 앞에 있는데, 자기가 생존자래. 그래서 내가 그 사기꾼의 편지를 그냥 찢어 버렸지.]자랑하듯 가슴을 내밀며 뿌듯하게 말하는 에른스트의 모습에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해졌다.
[이 바보! 그걸 그냥 찢어 버리면 어떡해!] [이, 이브……?]거칠게 그의 어깨를 움켜쥐며 흔들자 그가 화들짝 놀라 했다.
[아, 미안.]오랫동안 기사들과 생활했던 나는 잠시 그가 황궁에서 자란 귀한 황자님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편지를 보내 준 사람한테 다시 연락을 취할 순 없어?] [응……. 대신 그쪽에서 다시 연락을 취하겠다는 내용이 편지 말미에 있었어.]대체 누가 보낸 걸까. 그다음이 언제일까.
한참 에른스트의 편지와 관련된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다음 달에 사냥 대회가 있잖아요? 저도 함께 가고 싶어요. 그때가 되면 약혼식이 끝난 뒤니, 정당하게 테오의 약혼녀로서.”
“사냥 대회에? 위험할 것 같은데.”
“그럼 이브 경이 저를 호위해 주면 좋지 않을까요?”
“음…….”
“그날 하루만이라도요, 네?”
“…….”
“괜찮지, 이브 경?”
“…….”
“이브 경?”
나를 부르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어머나, 이브 경! 지금 내 말이 안 들리니?”
“방금 무슨 이야기를…….”
어리바리하게 서 있는 내게 그녀가 두 눈을 뾰족하게 치켜뜨며 다시 말했다.
“다음 달 사냥 대회 때 나를 호위하라고.”
그러니까 카타리나는 지금 나를 콕 지목해서 호위를 해 달라 하는 것이었다.
“불가합니다. 저는 폐하의 호위입니다.”
나는 정말로 카타리나를 호위하기 싫었다.
어렸을 때, 루돌프 페르디난트가 내 목줄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던 시절.
그때 그녀가 날 괴롭혔던 일들이 하나씩 생각이 났다.
지난번에 나더러 테오의 곁을 떠나라고 한 것도 그렇고, 결코 좋은 심산으로 내게 호위를 맡아 달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네 상관은 테오잖아? 테오가 분명 허락해 줄 거야. 그렇지요, 테오?”
“그날 하루뿐이라면 어려운 부탁도 아니지. 카타리나 양을 호위해라, 이브 로웰린.”
그녀의 칭얼거림에 테오도르가 나를 보며 눈매를 굳혔다.
“저는 폐하를 호위하기로 계약되어 있습니다. 아르민 마이어 공과 분명 그렇게 계약했어요.”
“카타리나 양은 나의 약혼녀이니 나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돼.”
“하지만……!”
“딱히 하는 일도 없지 않나.”
“…….”
물론 그동안 내가 나태한 측근 호위였던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체르니시아의 이름을 찾기 전까지는 내게 검을 들지 말라 했으면서…….
나는 황제의 측근 호위였으나, 검을 들지 않았다.
[네게 지켜지고자 널 데려온 게 아니야. 네가 다시 검을 든다면, 그건 네 이름을 되찾은 뒤에 당당히 세상에 나서는 순간이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럼 네 호위는 어떡해? 내가 싫으면 다른 사람이라도 들여야 하는 거 아냐?] [착한 이브, 날 걱정해 주는 거야? 측근 호위는 황실 예법 때문에 의무적으로 두는 것이지, 어차피 난 호위가 없어도 상관없으니까 괜찮아.]그렇게 말했으면서 이제 와 카타리나를 위해 다시 검을 들라 말하다니.
이건 너무…… 내게 잔인하잖아.
“황명에 불복하는 건가?”
상처받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자, 그가 재차 물었다.
“……아닙니다, 폐하.”
결국 물러난 나의 대답에 카타리나가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고마워요, 테오.”
카타리나는 테오도르의 팔에 팔짱을 끼며 까르륵 웃었다.
“산책하러 가지 않을래요? 테오가 일하는 걸 구경만 하려니 심심해요.”
“그래, 일어나지.”
테오도르는 일하던 것을 멈추고 일어났다.
하필이면 문가에 서 있던 나는 그가 카타리나와 다정하게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아야 했다.
불과 조금 전까지 내게 강압적으로 명령하던 그는, 내가 그곳에 서 있는 게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아주 작은 시선 하나도 내게 주지 않았다.
나는 그를 따르는 시종들과 기사들 틈에 섞여 두 사람의 뒤를 멀찍이 뒤따랐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떨어진 거리에서 그 뒤를 따르자니, 새삼 나의 처지가 실감되었다.
산책을 하던 두 사람은, 앙상한 나뭇가지에 피어난 잎사귀를 발견하고 신기해했다.
테오도르가 카타리나의 귓가에 초록 잎사귀를 뜯어 꽂아 주었다.
문득 저 장면이 익숙하다 생각할 무렵, 하늘에서 하나둘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꽃비가 내리는 것처럼 흩날리는 눈송이 사이에서, 테오도르는 카타리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
“괜찮아, 이브 경? 어디 아픈 건 아니야?”
나도 모르게 작게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료 기사의 물음에 나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나저나 저 인성 파탄 나신 우리 폐하께서도 연애를 하는데,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혼자 쓸쓸히 늙어야 하는지…….”
“하하, 에반 경, 그대의 얼굴과 폐하의 얼굴을 비교해 봐. 그런 말이 나오는지.”
“뭐야? 그럼 자네가 역으로 생각해 봐, 베니안. 자네가 여자라면 폐하와 연애를 할래, 아니면 나랑 살래?”
“오…… 둘 다 끔찍한데…….”
“그래도 심성 고운 내가 더 낫지 않나?”
“그대는 심성만 곱잖아. 심성만.”
“뭐, 이 자식! 말 다 했어?”
“아이고, 이제 보니 에반 경은 심성도 그닥…….”
동료들의 소소한 잡담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나는 내리는 눈송이를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그거 알아, 테오?
너는 내게 사랑을 속삭이던 시절, 한 번도 나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않았어.
항상 감추고 숨기었지.
하지만 그 시절 나는 네 그림자 속에서도 눈물 나게 행복했어.
왜냐면, 너는 언제나 네가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내게 쏟아 주었으니까.
미처 몰랐지.
네가 이렇게 온 세상이 떠들썩하게 사랑할 수 있는 남자라는 걸.
그때는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이제는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아.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저 여자가 조금 부러워. 아니, 많이 부러워.
모두의 앞에서 당당히 너의 연인이 된 저 여자가, 미치도록 부러워.
손바닥 위에 떨어진 눈송이가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풀벌레 소리가 찌르르르- 울리던 늦여름의 어느 날, 그는 내게 말했다.
[빨리 겨울이 왔으면 좋겠어, 이브. 너는 여름을 싫어하니까.] [내가 여름을 싫어한다고?]내가 여름을 싫어했나, 고개를 갸웃하며 한참을 생각해 보았으나 나는 여름을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야, 테오. 나, 여름 좋아해.] [더운 거 싫어하잖아.] [하지만 너를 만난 계절인걸.] [어…….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어? 감동인데.]내 말에 그가 예쁘게 눈가를 휘며 속삭였다.
[그럼 이브. 나도 여름이 제일 좋아. 하지만 가을도, 겨울도, 봄도 모두 좋아하고 싶어. 내가 나의 모든 계절을 좋아할 수 있도록, 네가 항상 함께해 줄래?] [그게 무슨 엉터리 같은 소리야?] [사랑해, 이브.]이따금씩 테오도르는 나를 사랑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세상 만물이 그에겐 나를 사랑하는 이유가 되곤 했다.
그렇게 말하며 내게 깊은 입맞춤을 남기던 테오도르는 이제 없었다.
다만, 저 멀리서 다른 여자의 두 뺨을 두꺼운 손으로 감싸 쥐며 입 맞추는 그가 있었다.
나는 이제 겨울이 싫어질 것 같았다.
이미, 겨울이 싫었다.
“젠장, 이제 떨어져.”
테오도르의 잇새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여자의 얼굴을 두꺼운 팔로 가리며 입 맞추는 시늉을 하던 테오도르는, 따르던 이들이 깊은 애정 행각에 하나둘씩 눈치를 보며 사라진 뒤에야 카타리나를 밀어냈다.
“방금 이브 로웰린을 보고 있었지요? 왜 그렇게 그 여자에게 신경 쓰세요?”
“네가 상관할 일 아니잖아. 너는 네 할 일만 하면 돼.”
“물론, 폐하께서 바라시는 이의 흔적을 찾아 물심으로 노력하고 있어요. 저는 그저 걱정이 되어서요. 폐하께서 혹시나 잊으셨을까 봐. 그 애는 벤야민이 심어 둔 아이인데.”
이브 로웰린이 얼마나 수상한지는 테오도르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리고 그녀를 눈앞에서 치우고 싶어 하면서도 치우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은 그녀보다 더욱 수상하다는 사실도.
테오도르는 카타리나를 남겨 두고 혼자 방으로 돌아왔다.
방 안에 있던 이들을 모두 물린 뒤에 가만히 서랍을 열어 보았다.
그날 이브 로웰린으로부터 빼앗아 온 어머니의 유품이 그곳에 있었다.
붉은 보석으로 세공된 자그마한 머리핀은,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황가에 시집올 적에 사용하신 물건이라 했다.
마땅히 제 반려가 될 여자에게 주고자 오래도록 간직해 온 물건이기도 했다.
[이거, 정말 저 주실 건가요?] [미친 건가? 꺼져.]뒤따라 나온 카타리나가 그것에 욕심을 보였으나, 테오도르는 단칼에 그녀를 쳐냈다.
카타리나는 쉽게 포기했다.
애초에 머리 장식이 탐났던 게 아니라, 그저 이브를 괴롭히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이리라.
같은 시각, 여전히 눈발이 흩날리는 정원에 서 있던 카타리나는 고요히 가라앉은 얼굴로 마차를 찾아갔다.
카타리나는 눈치가 빨랐다.
이브 로웰린을 신경 쓰는 황제에게 그저 그 애를 싫어하는 게 아닌 다른 미묘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두 사람이 어떤 감정을 서로 나누든 그녀와는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아직 벤야민을 밀어낼 힘도 갖추지 못했는데 이 때문에 자신의 계획이 어그러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브 로웰린…… 대체 뭐지?”
이브 로웰린에게 무언가 있다.
카타리나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테오도르 황제와 벤야민의 약점을 모두 움켜쥘 수 있는 열쇠일지도.
이브 로웰린에게, 확실히 무언가 있다.
* * *
이튿날, 사고가 났다.
발단은 사냥 대회에 참가하겠다던 카타리나가 테오도르에게 말 타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칭얼거리면서 시작됐다.
[어떡하지, 피앙세. 나는 오늘 무척 바쁜데.] [그럼 이브 경에게 부탁해도 되나요?] [그래, 물론.]테오도르는 자신이 바쁘다며 카타리나를 내게 떠맡겼다.
이제 와 내가 카타리나에게 주종 관계로 묶여 있던 때와 지금, 무엇이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언제는 나를 노예로 두려고 그곳에서 빼낸 게 아니라고 했으면서.
카타리나가 말에 올라타려다 떨어져 다친 것은 순전히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녀는 내 설명을 듣지 않은 채 멋대로 고삐를 잡아당겼고, 놀란 말이 움직이는 바람에 그대로 추락했다.
급히 황궁의 의사가 그녀를 치료했으나, 팔 위쪽에 남은 상처는 그녀의 약혼식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터였다.
“너 때문에 나는 약혼식 날 입을 드레스를 다시 준비해야 해! 이제 보름도 남지 않았는데!”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라고 속으로 꿍얼거릴 때였다.
“이쪽으로 와, 이브.”
카타리나는 씩씩 화를 내며 내 무릎을 꿇렸다.
“훈육 시간이야.”
그녀가 생긋 웃으며 내 손목을 홱 잡아당겼다.
설마, 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그녀의 입가에 머무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테오가 이미 너에 대한 모든 권한을 내게 줬어.”
“뭐라고요……?”
“왜 그래, 이브? 처음 있는 일도 아니잖아.”
그 순간 나는 오래전 카타리나의 패악질 속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무력하던 어린 이브 로웰린으로 돌아갔다.
카타리나는 사악하게 웃으며 내 소매를 걷었다.
“어머, 팔이 깨끗해졌네?”
“지금, 뭘 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