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5_2
뒤늦게 정신을 파드득 차린 내게 그녀에게서 팔을 빼내고자 손목을 비틀었다.
“나만 흉터를 갖고 있을 순 없잖아? 너도 똑같이 흉이 나야 공평하지!”
“그게 왜 공평이에요?”
“닥치고 얌전히 팔을 내밀어. 그러지 않으면 테오를 부를 거야.”
“폐하를 부른다고 내가 얌전히 당신 말을 따를 것 같아?”
“테오가 보는 앞에서 그의 시종들에게 붙들려서 내게 훈육을 당하고 싶진 않잖아, 너도?”
멈칫.
키득키득 웃으며 터져 나온 말에 나는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머, 정말로 얌전해지는 것 좀 봐. 너 혹시 테오를 좋아하니? 여자로서?”
“…….”
“가엾어라. 주제를 알아야지.”
그녀의 조롱에 입술을 꾹 앙다물고 그저 노려볼 때였다.
“다쳤다고 들었는데.”
달칵- 문이 열리고 느긋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테오도르였다.
설마, 카타리나가 다쳤다고 여기까지 온 걸까?
“테오!”
카타리나는 돌연 불쌍한 척을 하며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그가 방 안의 광경을 느리게 훑어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브 경이 저를 다치게 했어요.”
카타리나는 울먹이며 테오도르에게 달려가 매달렸다.
그러자 그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휘감아 안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런, 다친 곳은 괜찮아?”
“상처가 남았어요. 약혼식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거래요.”
카타리나가 그의 가슴팍에 머리통을 비비적거리자, 테오도르의 손바닥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속상하겠군.”
“네, 너무 속상해요. 드레스도 새로 맞춰야 한다고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황궁 재단사를 보내 줄게. 금방 새 드레스를 맞출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카타리나가 반색을 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정말인가요?”
“그래. 그러니 기분 풀어, 피앙세.”
그가 카타리나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고마워요, 테오. 역시 내겐 당신뿐이에요. 그런데…….”
카타리나의 손가락이 테오의 가슴팍을 나른하게 쓸어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나요. 부주의하게 굴어서 나를 다치게 한 이브 경 때문에.”
“…….”
그녀의 고자질에 테오도르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해 갔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나는 괜히 주눅이 들 것 같았다.
“그래서 질책을 하려고 했는데,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잖아요?”
“정말인가?”
테오도르가 내게 물었다. 나는 정말로 억울했다.
“제 부주의가 아니라, 카타리나 양이 설명을 듣지 않고 멋대로 행동한 거였어요.”
“어머나, 저것 봐요! 또 나를 모함하고 있어요!”
카타리나가 씩씩거리며 나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테오, 내가 당신의 약혼녀로서 이브 경을 징벌해도 될까요?”
그녀의 물음에 테오도르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도록 해.”
“감사해요, 테오.”
카타리나는 까르르 웃으며 테오도르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내 쪽으로 다시 다가왔다.
“당신도 원한다면 구경해도 좋아요.”
“일이 바빠서. 이브 로웰린의 징계는 그대에게 모두 일임하지. 안녕, 피앙세.”
그는 카타리나를 향해 생긋 눈웃음을 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아, 아쉬워라. 테오에게 보여 주고 싶었는데.”
그가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던 카타리나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나를 돌아봤다.
“들었지? 이브 로웰린을 내 앞에 제대로 꿇려.”
테오도르가 나의 징계를 그녀에게 일임한 탓에, 시종들이 곧바로 그녀의 명령에 따라 나를 붙잡아 바닥에 꿇렸다.
뾰족한 구두 굽이 바닥을 짚던 내 손등을 짓밟았다.
아팠다.
오랫동안 아픔에 익숙했던 몸은, 테오를 만나며 아픔과 멀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통각이 에일 듯이 아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이 그녀의 명에 따라 뜨거운 찻주전자를 가져왔다.
뭘 하려는 거지……?
“자, 이브. 팔을 걷어.”
카타리나가 생긋 웃으며 찻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 * *
이브 로웰린이 이상해졌다.
그것은 카타리나가 말에 오르다가 넘어져 다친 그 이튿날, 테오도르가 느낀 감상이었다.
언제나 반짝이던 녹색 눈동자에 빛깔이 사라졌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질척거릴 정도로 애정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보던 여자였다.
그 여자의 무심한 시선은 아까부터 자꾸만 저를 비껴가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지……?
테오도르는 그녀의 무심한 태도가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고 기분이 좋질 않았다.
그래서 돌연 일어난 심술에 들고 있던 만년필을 바닥에 툭 던졌다.
데구루루-
신성력을 담은 만년필은 그녀의 발치까지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그녀의 발끝에 닿고는 툭 멈추었다.
그것을 발견한 이브 로웰린이 소리 없이 몸을 숙이더니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테오도르에게 가지고 왔다.
그 일련의 동작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테오도르는 문득 그녀의 손목의 움직임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잠깐, 너……!”
테오도르는 책상 위에 만년필을 올리고 돌아서는 이브의 팔을 그대로 붙잡더니, 그녀의 손목을 확 걷었다.
“……!”
그리고 드러난 팔을 보며, 그는 놀라 잠시간 말을 잃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깨끗했던 그녀의 손목과 팔에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상처들이 보였다.
순간 테오도르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하필이면 이보네의 얼굴을 하고서, 그녀의 약점이었던 상처를 손목에 갖고 있는 여자라니…….
탁-!
이때, 그녀가 제게서 팔을 빼냈다.
“어쩌다 다친 거지?”
“…….”
이브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은은한 녹색 눈동자에 이보네가 생각이 났다.
‘아냐. 이보네는 저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지 않았어. 이보네가 아니야.’
테오도르는 이브 로웰린과 이보네를 겹쳐보지 않기 위해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씩 마음속으로 곱씹어야 했다.
“실수로 찻물을 쏟았습니다.”
이브는 담백하게 대답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에 테오도르는 이상하게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오늘은 그냥 가서 쉬어.”
“괜찮습니다.”
“내 말을 이해 못 하나? 팔 하나도 간수하지 못하는 모습이 꼴 보기 싫으니까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아…….”
그러자 이브가 느리게 두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눈꺼풀에 매달린 촘촘한 속눈썹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모습에 테오도르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네, 그럼.”
이브는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하고 돌아나갔다.
너무나 쉽게 물러나는 그 뒷모습을 보는 테오도르는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하여 그는 이브가 눈앞에서 사라진 뒤에도 하루 종일 그녀를 생각했다.
결국 참다못한 테오도르는 그 저녁에 이브 로웰린의 숙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그보다 먼저 그녀를 찾은 손님이 있었다.
다름 아닌 눈엣가시 같은 이복동생 에른스트였다.
“에른스트? 네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아, 테오도르 형님.”
어릴 적부터 테오도르를 무서워했던 에른스트는 그의 등장에 화들짝 일어났다.
그러며 은근히 이브를 제 뒤로 감추는 모양에 테오도르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이브가 다쳐서, 약을 가져다주러 왔어요.”
“약?”
뒤늦게 에른스트이 손에 들려 있는 작은 약병이 보였다.
테오도르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흘렸다.
뜨거운 찻물을 흘렸으면 곧바로 의사를 찾아 치료를 했어야지.
지금도 의사를 찾기는커녕 저런 하잘것없어 보이는 연고나 바르려 하다니.
이미 자리 잡은 흉터는 사라지기 힘들 것이다.
“멍청하긴. 이따위 연고나 발라서 나을 상처가 아니야.”
테오도르는 에른스트의 약병을 그대로 빼앗아 바닥에 버렸다.
“의사를 부르면 되는 걸, 왜 안 부르고 방치했지? 바보같이 찻물이나 쏟는 실수를 하고.”
그의 빈정거림에 에른스트가 소심하게 발끈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형님? 형님의 약혼녀가 그런 거잖아요.”
“뭐?”
“황제의 이름으로 징벌을 받는 중에 생긴 상천데…… 황궁의 어떤 의사가 그 상처를 치료하겠어요.”
옅은 원망이 묻어나는 에른스트의 목소리에 테오도르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실수로 찻물을 쏟았습니다.]담담하게 답하던 이브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몰랐다.
카타리나, 그 영악한 여자가 이런 방법으로 체벌을 했을 줄은.
“…….”
“…….”
테오도르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이브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심한 녹색 눈동자가 저를 힐긋 보더니 다시 비껴갔다.
‘나 때문에…… 다쳤다고.’
미안하다는 말이 목구멍 아래에서 맴돌았으나 나오지 않았다.
하여 그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퉁명스럽게 말했다.
“팔을 이리 줘 봐. 내가 치료할 수 있어. 의사에게 보이는 것보다 나을 거야.”
“괜찮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두 번째 ‘괜찮습니다’에 테오도르는 발끈 역정을 냈다.
“당장 그 팔을 이리 내 보라고 하잖아!”
“혀, 형님, 그렇게 말하면 이브가 놀라…….”
“이브? 언제부터 황제의 측근 호위를 그따위 격 없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거지?”
“네…… 네……? 아, 그, 그게…….”
그의 날 선 눈빛에 에른스트가 어깨를 움츠렸다.
“바보 같긴.”
피식. 테오도르는 그런 에른스트를 비웃었다.
“이 여자는 네가 어릴 적 같이 놀았던 이보네 체르니시아가 아니야.”
“……!”
그 말에 에른스트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갔다.
“아…… 어…… 음…….”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테오도르와 이브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
“멍청하게도 이 여자를 다른 이와 착각하는 것 같은데.”
테오도르는 이보네와 저 여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에른스트가 정말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할 만도 하겠지. 나조차도 현혹시킬 만큼 이보네와 닮았으니까.’
대체 저 여자는 몇 명의 남자를 괴롭히는 거지?
테오도르는 이브 로웰린에게 홀려 버린 어리석은 이복 아우가 안쓰러웠고, 동시에 동질감을 느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불쾌했다.
“여자의 몸으로 황제의 측근 호위가 된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십거리지. 공연히 너까지 추문에 휩싸이지 말고 돌아가라.”
“아…… 네…….”
에른스트는 이브를 계속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돌아갔다.
이브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찾을 수가 없었다.
울컥한 기분을 억누르며, 테오도르는 나름 친절한 말투로 다시 말을 건넸다.
“다시 팔을 줘. 내가 치료해 줄게.”
그러자 그녀가 그를 쳐다보며 툭 말했다.
“저보다는 카타리나 양에게 가 보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뭐?”
“그쪽은 드레스를 새로 맞춰야 한다고 울상이던데.”
“갑자기 그 여자 이야기는…….”
“저는 어차피 검을 잡는 몸이라 상처 같은 거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
애써 호의를 베풀었건만 담담하게 거절하는 그녀로 인해 테오도르는 화가 치솟았다.
“별 같잖은 게 이제 와서…….”
홰액-!
그가 그녀의 멱살을 강하게 움켜잡으며 쏘아붙였다.
“내가 내 주변에서 꺼지라고 했는데, 꺼지지 않고 맴돈 건 너잖아?”
“폐하?”
“그렇게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했는데도, 네가 알짱거렸으면서……! 그런데, 왜! 왜 네가……!”
이렇게 신경 쓰이게 만들고서, 이제는 저를 본체만체하는 그녀에게 화가 났다.
이렇게 화를 낼 일인가 싶을 만큼 화가 났다.
더 이상 귀찮게 알짱거릴 일 없으니, 옳다구나 내쫓으면 되는 일 아닌가?
혹 저도 지금 이복동생처럼 그녀를 이보네와 겹쳐 보고 있는 걸까?
애써 부정하였는데도, 결국 이 얼굴에 넘어가 버린 걸까?
아닌데.
이 여자는 이보네가 아닌데.
카타리나가 보낸 편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어쩌면 루돌프 페르디난트와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이보네를 해쳤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이브 로웰린은…….
잡힐 듯 말 듯 한 이보네의 종적. 그녀를 찾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런데, 왜 자꾸 난 이보네를 흉내 낸 수상한 여자를 신경 쓰고 있는 거지?
혹 이것도 흑마법의 힘인가?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내게 암시를 걸었나?
이브 로웰린.
이 여자는 대체 무엇을 노리고 내 주위를 맴돌았던 거지?
대체, 무엇을…….
홰액-
테오도르는 그대로 이브 로웰린의 고개를 당겨 예고 없이 입을 맞추었다.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녀가 놀라 파르륵거렸다.
그 와중에도 코끝이 부딪치지 않도록 고개를 살짝 비트는 품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사람들 앞에서 입 맞추는 시늉만 하였지, 이게 진짜 첫 키스인 자신과 달리 이 여자는 키스도 많이 해 본 것 같았다. 그래서 테오도르는 더 화가 났다.
거칠게 입을 맞추다가 입술을 확 떼어 내자, 그녀가 붉어진 눈가를 하고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
“…….”
그녀는 굉장히 애틋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테오도르는 몹시 이상한 기분으로 숨을 헐떡였다.
그녀가 제게 손을 뻗었다.
손목의 상처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그녀의 손끝이 제 눈가를 더듬고, 까칠한 뺨을 쓸고, 축축한 입술을 매만졌다.
“테오…….”
그러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테오도르는 정신이 확 깼다.
“젠장.”
테오도르는 나직한 욕설을 뇌까리며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녀가 두 팔을 벌려 그의 목에 매달렸다.
보다 더 제게 호응하는 그녀의 모습과 그 와중에도 너무나 능숙하게 느껴지는 그녀로 인해 테오도르는 혼란스러웠다.
“이브 로웰린.”
그리고 그 입맞춤 끝에 그는 그녀를 밀어내며 비릿하게 웃었다.
“여자인 걸 숨기고서 내 옆을 맴돌았던 게, 이런 걸 바란 것이었나?”
“테오……?”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아, 그런 게 아니…….”
“황제의 정부라도 되고 싶었나 보지? 주제에 감히 황후 자리를 바란 것은 아닐 테고.”
그의 조롱에 이브의 입술이 다시 꾹 다물렸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기억을 잃은 내가 왜 너 같은 걸 곁에 내버려 뒀는지. 그런 눈빛으로 나를 현혹했나?”
테오도르는 서걱서걱 가라앉는 그녀의 눈동자와 조금 전까지 자신과 입을 맞추었던 그 뽀얀 입술을 가만히 훑었다.
“하지만 어떡하지. 네게 줄 화대는 동전 한 닢도 아까워서.”
“…….”
“……더럽고 추악해.”
그리고 이내 경멸의 시선을 던지며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실상 그가 경멸하는 것은 그녀가 아닌 그 자신이었다.
이보네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흥분한 자신이 더러웠다.
카타리나는 한동안 황궁에 오지 않았다.
그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은 기뻤으나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이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
테오도르를 호위하는 내 기분은 여전히 저조했다.
내 숙소에 불쑥 찾아왔던 그날 이후, 그는 날 괴롭히는 것을 조금 멈추었다. 그러나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시선을 슥 피해 버리곤 한다.
처음 그가 불현듯 내게 입을 맞추었을 때, 나는 그가 기억을 되찾은 것인 줄 알았다.
혹은 내가 이보네라는 사실을 벼락처럼 깨달았다거나.
그게 아니라면 그가 내게 입을 맞출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는 이보네 체르니시아가 아닌 이브 로웰린을 끔찍하게 싫어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어진 것은 나를 헤픈 여자 취급하는 경멸 어린 시선이었다.
나의 사랑은 언제부터 더럽고 추악한 것이 되었을까.
그의 약혼식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이제 일주일 뒤면 그가 다른 여자와 약혼을 한다.
결혼이 아니니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걸까?
그는 자신의 약혼녀로부터 도착한 편지를 천천히 읽어 내리고 있었다.
“아…….”
중간중간 작게 앓는 소리와 함께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 갔다.
마치 아주 그리운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가.
꼭 울 것 같기도 한 그 표정은 내가 사랑했던 테오도르의 얼굴과 비슷했다.
“이브 로웰린.”
한동안 의식적으로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 같던 그가 나를 불렀다.
“페르디난트가로 가라.”
“네?”
“카타리나 양에게 사과를 하고 와. 너 때문에 아직도 화가 많이 난 것 같거든.”
“사과를…… 하라고요?”
나는 이미 그녀에게 과한 징벌을 받은 터였다.
그런데 또 사과를 하라고?
“반드시 그녀를 만나 사과를 하고 그녀가 전하는 게 있거든 받아 와야 해, 꼭.”
심술이 싹 빠진 진지한 말투였다.
나는 그의 명에 따라 페르디난트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타며 생각했다.
테오도르.
너는 정말로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구나.
만약 네가 기억을 찾으면, 그때의 너는 어떡할 거야?
기억을 잃기 전 나를 사랑했던 너와, 기억을 잃은 후 카타리나를 사랑하는 너 사이에서 방황할까?
그럼 나는…….
나는 어떡해야 하지…….
혹 네가 기억을 찾는 게 너무 늦어져 그 여자와 결혼을 한 뒤라면, 그때의 나는 또 어떻게 되는 걸까?
너를 혼란스럽고 방황하게 만드는 존재로 남게 되겠지.
이건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우울한 가정이다.
그렇지만 그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조금만 더…… 그 곁에 있어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나는 갈 곳도 없고…….
그렇게 고민하던 사이 끔뻑끔뻑 잠이 들고 말았다.
“도착했습니다, 기사님.”
마부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사이, 유독 졸음이 많아졌다.
우울한 감정이 몸으로 나타나는 걸까?
좋아하던 음식을 보아도 속이 메슥거리고 구토감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잦았다.
돌아가면 의사를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페르디난트 저택에 도착한 나는 그 닫힌 문 앞에서 한참 동안 망설였다.
여전히 내게는 싫은 곳이었다.
이 문을 넘는 순간 다시 그 우울한 여자아이가 될 것 같았다.
“에휴.”
짧은 한숨을 내쉬고,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디난트의 사용인이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이브…… 로웰린?”
“카타리나 양을 찾아왔어요.”
나를 알아본 사용인에게 용건만 짤막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나를 카타리나의 별채 앞으로 안내했다.
“잠시만 기다려.”
나는 카타리나의 별채 앞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과 달리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난 뒤에도 그녀는 나를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테오도르가 내게 사과를 하고 오라 지시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각오하던 바였다.
상대를 문 앞에 세워 두는 건 귀족가의 레이디들이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다는 완곡한 표현이기도 했으니까.
‘그냥 돌아가면, 분명 또 테오가 화를 낼 텐데.’
그나마 미리 예상한 덕에 얇은 옷을 겹겹이 입고 와서 다행이었다.
나는 그렇게 차가운 공기 속에서 조금 더 그녀를 기다려 보았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할 때까지.
차츰 내리는 눈이 어깨 위에 쌓일 무렵, 문득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리자 그곳에는 축축한 백발의 미남이 나를 보고 있었다.
“벤야민.”
그가 손을 뻗어 내 머리와 어깨 위에 쌓인 눈을 털어 주었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추워, 이브. 나랑 들어가자.”
“안 돼, 황명이야.”
“입술이 파래졌어.”
그가 내 얼굴을 빤히 보며 손을 뻗었다.
“얼굴도, 차갑고.”
그의 손등이 내 뺨을 스쳤다.
“테오도르 황제가 너를 함부로 대해?”
그가 제 아랫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내게 화가 난 표정을 보이는 벤야민은 처음이었다.
그건 아니라고 답해야 하는데, 그냥 지금 그가 조금 아파서 이상해진 거라고 말해야 하는데, 쉽게 말이 나오질 않았다.
“페르디난트로 다시 돌아와, 이브. 카타리나 때문에 페르디난트가 싫다면 그 여자를 없애 버릴게. 저택에 남은 옛 기억이 싫은 거라면, 건물을 모두 허물게. 지나치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기 싫다면, 사용인도 모두 갈아 치울게.”
“…….”
“네 기억 속 음울하던 페르디난트는 내 손으로 무너뜨릴 테니, 그러니까 이브.”
이상하게도 절절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나는 피시식 웃고 말았다.
“고마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그가 곧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