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5_3
“벤야민……?”
“너를 힘들게 하는 게 있다면 내가 도울게. 나를 이용해도 좋아.”
“응……?”
물론 최근 들어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매우 많았다. 그렇지만 조금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페르디난트의 가주를, 네 멋대로 이용해도 좋다고, 이브.”
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따뜻하게 녹아내렸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나는, 그가 마법을 사용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너를 괴롭히는 게 무엇이든, 내 힘이 널 도울 수 있을 거야. 틀림없이.”
“네 힘이라면…….”
벤야민 페르디난트.
제국을 수호하는 양대 가문 중 하나인 페르디난트의 수장.
그의 힘이 날 도울 수 있다고?
“마법을 말하는 거야?”
그는 대답 대신 내 손목을 당겼다. 그러고는 가만히 소매를 걷어 올렸다.
테오도르의 치료를 거부한 탓에, 그곳에는 얼마 전 카타리나가 남긴 우울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벤야민이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약점이…… 다시 생겼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나의 상처 위로 닿으려던 때였다.
문득 과거 테오도르가 내게 해 주었던 말이 생각이 났다.
[신성력과 술법은 본질적으로 같은 근원에서 시작되지.] [모두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에서 기인해.] [다른 점이 있다면 페르디난트의 술법이 약점을 파고드는 것과 달리, 레오브란테의 신성력은 아픔을 치유한다는 거야.]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페르디난트의 술법…….
그리고 내 손목 위로 술식을 그리던 루돌프와, 같은 부근에 입을 맞추며 저주를 해제하던 테오도르.
그러니까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나의 친부가 내게 남겼던 손목의 상처는 나의 가장 큰 약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같은 자리에 새로이 남은 이 상처도…….
홰액-!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황급히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그러고는 반사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벤야민을 쳐다보았다.
“왜 그래, 이브?”
경계하는 나의 눈빛에 벤야민이 두 눈을 순진하게 끔뻑였다.
“너야말로 방금 뭘 하려고…….”
내가 그에게 미심쩍어하며 물으려던 때였다.
“이브 로웰린.”
내내 나를 차가운 공기 속에 세워 둔 여자의 목소리에 나와 벤야민은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벤야민 님께서도 함께 계셨군요. 여전히 두 사람은 사이가 참 좋아요. 질투가 날 정도로.”
“…….”
어느덧 내 옆에 선 벤야민이 그녀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예전과 달리 주춤하지 않고 생긋 웃었다.
무엇이 그녀를 저토록 당당하게 만들었을까.
어쩌면 저 당당함은 테오도르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건지도 모른다.
왜냐면, 나도 그랬으니까.
테오도르의 사랑을 받았던 지난 반년간, 항상 당당하고 밝게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웃음은 내가 아닌 카타리나의 것이겠지.
새삼 상기한 처지에 입꼬리가 축 늘어졌다.
“들어와.”
카타리나는 짤막하게 말하고서 몸을 돌렸다. 나는 벤야민과 대화를 매듭짓지 못하고 그녀를 뒤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별채의 구조가 익숙했다. 복도를 따라 들어간 그녀의 방에서, 카타리나는 모두를 내보내고 나와 단둘이 남았다.
“참 굉장하지, 우리 테오? 너 때문에 기분이 울적하다는 말에, 단박에 너를 이리로 보내 주고.”
카타리나는 깔깔 웃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눈에 젖은 내 몰골은 영 엉망일 것이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그녀와 달리.
“있지 말이야, 이브. 내가 정말 굉장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카타리나가 내 귓가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그게 너야?”
“……!”
순간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카타리나가 그 이름을 어떻게……?
놀라 커지는 나의 눈을 보며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발뺌해도 소용없어. 이미 다 조사했으니까. 10년 전에 사라진 역적 가문의 딸이라니.”
“…….”
“그럼 설마, 테오도 그걸 알고서 너를 황궁에 데려갔던 거니? 반역자의 자식을?”
그녀가 대놓고 나를 조롱했다.
“하, 정말 기가 차고 말도 안 나오는 일이네.”
“…….”
나는 가만히 카타리나를 쳐다보았다. 점점 내 안에서 의문 하나가 싹텄다.
내가 왜 이 듣기 싫은 소리를 계속 듣고 있어야 하는 거지?
그러잖아도 최근 들어 감정 기복이 들쑥날쑥했던 차에, 확 짜증이 치밀었다.
“이브, 네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고 테오와 어떤 관계였는지 더 이상 묻지 않을게. 그냥 멀리 떠나.”
“내가 왜?”
그리고 순간 뒤틀린 감정을 이기지 못한 나는 그녀에게 사과를 하고 오라던 황명도 잊고 불쑥 쏘아붙였다.
“뭐, 뭐?”
경어를 거두고 대꾸하자 카타리나가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너 지금 나한테 감히……!”
웃음기를 싹 거둔 카타리나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텁-
그러나 허공을 가르며 휘두르려던 그녀의 못된 손은 내게 곧바로 붙잡혔다.
“내가 누군지 이제 알았다며.”
나는 그 손을 휙 놓으며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그럼 그것도 알겠네. 체르니시아의 어린 검이 세 살 때부터 검기를 다뤘다고.”
테이블 위에는 가시 돋친 말린 꽃송이들이 꽂힌 화병이 있었다.
나는 그 안에서 가장 키가 큰 꽃송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가느다란 초록 줄기에 뾰족뾰족 돋아 있는 가시를 훑는 내 얼굴 위로 나른한 미소가 피어났다.
잠시간 그것을 쳐다보던 나는 아주 오랫동안 스스로 봉인하였던 검기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무형의 기운이 넘실거리며 꽃송이를 휘감았다.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뭐, 뭐야, 이 기운은……?”
카타리나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감지한 것인지 불안해하며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그녀 또한 어렸을 때부터 페르디난트의 사람이 되겠다며 마법에 몰두하던 때가 있었으니, 어느 정도 나의 검기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던 게 무엇 덕분이라 생각해?”
“이, 이브 로웰린?”
겁먹은 카타리나가 나를 피해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으며 느긋하게 도망치는 그녀를 감상했다.
“루돌프가 강제로 지장을 찍게 한 그 빌어먹을 계약서가 아니었더라면, 너는 진작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야.”
쯧, 혀를 치자 카타리나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질려갔다.
시시각각 변해 가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나는 스산하게 웃었다.
“어디, 한 번만 더 말해 봐.”
내가 요 며칠 참았던 것은 모두 테오도르 때문이었다.
그가 아프니까. 그가 나을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고 결심했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참아 주었던 대상은 테오도르였지, 카타리나가 아니었다.
마침 이곳에는 테오도르도 없었고, 다른 지켜보는 눈도 없었으며, 카타리나와 나 둘뿐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카타리나의 입막음만 제대로 한다면 내가 이곳에서 무슨 짓을 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소리였다.
어차피 그녀는 내가 이보네 체르니시아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들킬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 사실을 깨달은 내 얼굴 위로 아주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배우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잘했다. 어렸을 적 군터 할아버지도 그런 나를 칭찬했었다.
그리고 나는 최근 테오도르의 곁에서 그의 흉한 인성을 온몸으로 체득한 터였다.
“나에 대해 다 조사했다면서, 왜 그렇게 함부로 입을 놀려.”
손에 든 꽃송이를 마치 다트처럼 집어 든 나는, 테오도르가 아랫사람들을 괴롭힐 때 그러하듯이 예쁘게 생긋 웃으며 카타리나를 향해 꽃을 던졌다.
쇄애액-!
검기가 담긴 꽃송이는 카타리나를 스치고 날아가 반대편 벽에 박혔다.
“꺄아악!”
그것을 본 카타리나가 놀라 동공을 잘게 흔들며 말을 더듬었다.
“벼, 벽을…….”
“자, 더 말해 봐. 카타리나.”
꽃송이의 초록 줄기가 벽을 뚫고 박힌 게 여간 신기한가 보다.
나는 그런 카타리나를 향해 협박하듯 한 번 더 웃어 주며, 화병에 남은 것 중 그다음으로 큰 꽃송이를 집었다.
“으음……. 꽃꽂이를 하려면 가시는 잘라 내지 그랬어. 취향도 독특해라.”
“아, 아아…….”
겁에 질려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통쾌했다.
다른 이의 공포를 보며 즐거워하다니, 내가 테오도르도 아니고…….
그렇게 아주 잠시 나의 인성에 대해 되돌아보며 반성하던 때였다.
“너, 너 때문에 테오가 힘들었다는 건 알아?”
카타리나가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흠칫 어깨를 떨며 눈치를 봤다.
“테오가, 나 때문에 힘들었다고?”
“체, 체르니시아를 복권하겠다며 한바탕 황궁에 일었던 난리를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순간 나는 멈칫하며 검기를 거두었다.
그러자 내가 그 말에 주눅이 들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다시 자신감을 되찾은 카타리나는 턱 끝을 젖히며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박하게, 몸으로 그를 유혹해서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고.”
“…….”
“그래서 테오도 너를 잊어버린 거야. 너는 테오에게 해악만 되는 존재니까.”
“닥쳐.”
도무지 짜증이 나서 더 들어 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검기를 실어 꽃송이를 날렸다.
이번에는 꽃송이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날아갔다.
검기가 스쳐 간 자리, 그녀의 머리카락이 우수수 베이며 바닥에 떨어졌다.
“너, 너, 이, 이 무슨……!”
한쪽 머리카락만 우스꽝스럽게 한 움큼 싹둑 베인 그녀의 몰골을 보자 조금 전까지 치솟았던 짜증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테오도르에게 고자질할 생각은 하지 마. 그랬다간 다음번엔 머리카락이 아니라 네 머리를 벨 거야.”
무슨 짓이냐고 항의하려던 그녀는 이어진 나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 * *
카타리나가 공포에 질린 덕에 그녀와의 대화는 30분도 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몇 시간 동안 추위에 떨며 밖에서 기다린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나는 카타리나가 내게 준 나무 상자를 들고 마차에 올라탔다.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나는 황궁으로 돌아가는 내내, 마차 벽에 기대어 몸을 움츠렸다.
물론 그녀의 머리를 베겠다는 것은 허세였다.
사람을 죽이다니, 그것은 살인이 아닌가.
내가 테오도르 같은 인성 파탄자도 아니고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아…….”
나는 어느새 내가 그를 인성 파탄자라고 여기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모두가 테오도르 황제는 알브레히트 역사에 다시없을 개차반이라고, 분리수거도 되지 않는 예쁜 쓰레기라며 그 얼굴에 속지 말라고 했을 때 한 귀로 흘려들었는데.
하지만 누구든 나와 같은 상황이었더라면 그에게 속고 말았으리라.
마치 신이 조각한 것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그토록 예쁘게 내숭을 부리는데, 어떻게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나는 그가 그 예쁜 얼굴로 훌쩍이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받아 줄 용의가 있다.
그래, 아직까지는…….
욱신-
“아얏.”
순간 저릿한 느낌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검기를 사용했던 손끝에서부터 심장까지 이어진 혈관이 조일 듯 괴롭게 아파 왔다.
너무 오래 봉인되어 있던 힘을 사용해 미숙해서 그런 걸까.
꼭 군터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검기의 반작용 같았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나는 두 눈을 끔뻑이며 다시 저릿한 손바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오랫동안 힘을 안 쓰다가 쓴다고 해서 반작용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물론 검기를 사용하면 위험한 상황이 몇 있긴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는 건…….
[임신한 상태에서는 특히 검기를 사용하면 안 된단다, 이보네. 태내의 아기가 검기에 놀라 다치지 않도록 임신한 몸이 스스로를 방어하며 반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지.]설마……?
나는 느리게 시선을 내려 내 아랫배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어휴, 내가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아무래도 황궁에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의사도 찾아가고…… 검기의 반작용에 대해서도 조사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 * *
황궁에 돌아왔을 때, 테오도르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인상을 대뜸 험악하게 구겼다.
“왜 이렇게 늦었지?”
“죄송합니다, 폐하.”
“카타리나 양이 전한 물건은?”
나는 카타리나가 테오도르에게 전해 달라던 나무 함을 그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테오도르는 그것을 받아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 있는 것을 보더니, 돌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를 담은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뭐지?
물건을 잘못 받아 온 건가?
내가 무슨 실수라도?
“……나가 봐.”
내쫓는 목소리가 기이하게 뒤틀려 있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하며 밖으로 나갔다.
이미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돌아오면 곧장 의사를 만나 보려고 했는데, 카타리나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너무 오래 지체해 버렸다.
밤이 깊었으니 오늘은 이만 자고 내일 일찍 일어나 의사를 만나 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머리가 무겁고 귀가 먹먹했다.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고 일어났는데, 영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콜록, 콜록.”
아무래도 어제 차가운 곳에서 눈을 맞은 게 문제인 듯했다.
일단 출근을 한 뒤에 몸이 아프다고 말할 심산이었다.
“세상에, 이브 경. 안색이 왜 그래?”
그의 집무실까지 걸어가는 길에 동료 기사들일 나를 보며 걱정의 말을 한마디씩 던졌다.
“가벼운 감기예요.”
말을 할 때마다 목이 까끌까끌했다.
잔뜩 쉰 목소리에 동료들이 짐짓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오늘은 쉬어야 하는 거 아냐?”
“안 그래도 폐하께 말씀드리고 의사를 만나러 가 보려고요.”
그들이 보기에도 내 꼴이 영 좋지 않나 보다.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내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있는 테오도르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잠잠히 일에 집중하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보았다.
몸이 좋지 않아 그런 걸까.
유독 그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서걱서걱 아팠다.
“폐하.”
갈라진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힐끗 보았다.
“뭐지?”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오늘은 쉬어야 할 것 같습, 콜록! 콜록!”
제대로 말을 끝맺지 못하고 기침을 하자, 나를 보는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죄송합…… 아…….”
그것을 보는 순간 핑-! 하고 현기증이 밀려왔다.
덥석-!
휘청거리며 넘어지려는 순간, 그가 나의 한쪽 팔을 움켜잡았다.
“아, 감사…….”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려는 순간, 머리 위에서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상관이고, 누가 호위인지.”
짜증스러운 그의 목소리가 먹먹한 귓가에 맺혔다.
전과 같았더라면 아주 작은 기침 한 번에도 걱정해 주었을 남자인데.
어느새 그의 불친절에 익숙해진 것만 같아 흐릿한 웃음이 번졌다.
그러고 보면 그는, 대체 얼마나 열심히 본성을 감추고 내숭을 부렸던 걸까.
참 힘들었겠다, 테오.
네가 날…… 참 많이 좋아했었구나.
이보네를 참 많이 사랑해 줬구나, 네가.
뿌연 시야 사이로 이제는 나를 향해 웃어 주지 않는 그의 얼굴을 보며 피식피식 웃고 있는데, 돌연 그가 멈칫했다.
“너…….”
그가 한 손으론 여전히 내 팔을 붙잡은 채로, 다른 한 손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몸이 너무 뜨거운데.”
누구나 해 줄 수 있는 그저 그런 흔한 걱정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이곳까지 오는 길에도 동료 기사들로부터 무수한 그런 걱정을 들었다.
그런데 유독 그의 걱정에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났다.
“테오…….”
어쩌면 나는 열에 취한 건지도 모른다.
“나, 너무…… 아파…….”
열이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입 밖으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 너무 아파서…… 그래서…….”
“많이 아픈 건가?”
미간을 좁히는 그의 얼굴 위로, 감기게 걸린 나를 걱정하며 일주일 내내 밤새 간호해 주던 다정한 그의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아까부터 눈가에 아롱아롱 차올랐던 울음이 그대로 툭- 떨어졌다.
“아파, 너무 아파. 너무 아파…….”
나는 그의 옷깃을 붙잡고서 아프다고 훌쩍거렸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속, 그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일 때였다.
“폐하, 카타리나 양이 방문했습니다. 일단 응접실로 모셨는데, 어떡할까요?”
“아…….”
순간 그의 얼굴 위로 화색이 돌았다.
스르륵-
내 팔을 움켜쥐던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의 옷깃을 붙잡던 나의 손도 맥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내가 가지.”
그가 나를 두고 문밖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나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싫어, 가지 마.
그 말이 목구멍까지 꾹 밀려왔다.
내가 마음속으로 외치던 말이 그에게 닿은 걸까?
문밖으로 한 발짝 내딛던 그가 멈칫하더니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의사를 찾아가도록 해. 오늘은 더 이상 호위를 하지 않아도 된다.”
다시 내 쪽으로 오는 걸까, 짧은 기대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테오도르는 나를 그곳에 두고 카타리나에게 가 버렸다.
남겨진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가, 어서 의사를 찾아가 보라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차츰 식은땀이 올라오며, 호흡이 가빠졌다.
젠장…….
눈앞이 핑글 도는 순간, 나는 그대로 발을 헛디디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브……!”
누군가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상대를 확인하지 못하고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 * *
한편, 이보네가 쓰러진 시간.
테오도르는 막 응접실에서 카타리나와 마주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물린 채였다.
카타리나는 전날 이보네와 있었던 일로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결국 잘라 내고, 가발을 썼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그녀의 바뀐 머리카락을 힐긋 보고 말 뿐이었다.
“어떻게 됐지?”
가벼운 인사도 없이 대뜸 묻는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절박했다.
“찾았나?”
“죄송하게도 찾으시는 사람은 더 이상 페르디난트에 없었어요.”
“아…….”
그 말에 테오도르가 앓는 소리를 내며 괴로워했다.
카타리나는 이보네가 이브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결코 그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이보네를 찾고 나면 더 이상 자신을 옆에 두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테오도르는 그녀가 페르디난트의 가주가 되는 것을 돕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인성 더러운 테오도르 황제가 신의 같은 것을 지킬 리 없지 않나.
그리고 카타리나 그녀 역시 테오도르 못지않게 신의가 없는 사람이었다.
왜곡된 이야기로 증거를 조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제 제가 보내 드린 것은 확인하셨나요?”
“…….”
그 말에 테오도르가 멈칫하며 카타리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 위로 드러난 가느다란 실금을 보며, 카타리나는 속으로 짧게 코웃음을 쳤다.
“어땠나요?”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역시나, 흑마법이네요.”
“그 수정구가 잘못된 건…….”
“오, 결코 아니에요. 걱정되신다면 흑마법사를 찾아 실험해 보셔도 좋아요. 확실히 흑마법에만 반응하게 되어 있는 것이니까요.”
그녀가 테오도르에게 보낸 나무 함에는 작은 수정구가 하나 들어 있었다.
흑마법의 흔적과 반응하여 색이 새까매지는 수정구였다.
그리고 그 수정구는 어제 그것이 담긴 함을 운반한 이브 로웰린에게 반응하여 색이 검어졌다.
그러니까, 이브 로웰린에게 흑마법의 흔적이 남아 있던 것이다.
이브 로웰린이 수상하다고, 내내 그렇게 의심해 왔던 테오도르이지만 막상 눈앞에서 그 확증을 얻으니 마음이 더욱 가라앉았다.
“흑마법의 시전자는 틀림없이 벤야민일 테지요. 이브 로웰린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무슨 종류의 술식을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폐하께선 이상한 점을 못 느끼셨나요?”
“…….”
이상한 점이라면 너무나 많았다.
일단 그녀는…… 처음 본 순간 제가 착각할 정도로 이보네와 닮아 있었다.
만약 어린 날 제가 남긴 신성력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를 이보네라 믿었을 정도로.
단순히 얼굴만 닮은 것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불쑥불쑥 이보네를 생각나게 할 때가 있었다.
테오도르의 기억 속 이보네는 열 살 무렵의 어린아이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조금 전만 해도 그렇다.
그 여자가 열에 취해 헛소리를 중얼거리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다.
평소의 그였더라면 아랫사람이 아프든 말든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테오도르는 본래 인정 따위 없는 황제였으니까.
휘청거리던 그 여자를 저도 모르게 붙잡았다.
그리고 느껴지는 뜨거운 기운에 하마터면 그대로 안아 들고 의사를 찾아갈 뻔했다.
카타리나의 방문 소식에 정신을 차리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폐하께서도 이상한 점을 느낀 거로군요. 그렇지요?”
“…….”
테오도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여자가 자신을 현혹하기 위해 온 것 같다고.
“어찌 되었든 조심하세요. 흑마법과 관련이 있는 데다가, 무려 벤야민의 숨은 연인이니…….”
“잠깐.”
잠잠히 생각에 잠겨 있던 테오도르가 불쑥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브 로웰린이 벤야민 페르디난트의 연인이라고? 처음 듣는 소린데?”
“어머, 제가 이 이야기는 하지 않았던가요?”
카타리나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