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5_4
“특별히 아꼈다고만 했어. 페르디난트의 가주가, 이브 로웰린을.”
“아아, 네, 분명 그랬지요.”
오묘한 미소가 카타리나의 입가에 피어났다.
“그러니까 그 두 사람의 관계가……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일방적인 마음을 보냈던 게 아니라…….”
“벤야민은 그 여자를 아꼈고, 그 여자도 그걸 즐겼지요.”
카타리나는 꼿꼿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브 로웰린은 황제의 곁에 두기에 위험한 여자였다.
혹시나 테오도르가 그녀에게 어떤 호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 전에 싹을 잘라 내야 했다.
“제가 봤어요. 이브 로웰린이 매일 밤 벤야민의 침실에서 나오는 걸.”
순간 테오도르는 기분이 무척 가라앉았다.
이브 로웰린.
이보네를 흉내 낸 그 여자가 누구와 어떤 관계이든 저와는 상관없지 않나.
‘그런데 왜 이렇게 화가 날 것 같지?’
테오도르는 테이블 아래로 보이지 않는 두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매일 밤 그 남자의 침실에서 나왔다고?’
상상을 하는 순간, 거센 욕지기가 목구멍 아래까지 치밀어 올랐다.
당장 그 여자를 찾아가 따지고 싶었다.
네가 정말 벤야민 페르디난트와 그런 관계가 맞냐고.
감히 나를 그런 눈으로 보아놓고서, 뒤로는 정숙하지 못하게…….
‘아니야. 그 여자는 이보네가 아니야. 화를 낼 필요도, 흥분할 필요도 없어.’
테오도르는 울컥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깊은숨을 내쉬었다.
카타리나가 그런 그의 동요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약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제 나흘만 지나면 두 사람의 약혼식이었다.
“그렇지만, 명심해. 황후 자리는 네 것이 아니야.”
“하지만 폐하께서도 약속을 지켜 주셔야 해요.”
“그래서, 벤야민을 어떻게 몰아낼 건지 생각해 두었나?”
“이건 저도 정말 생각지 못한 수확이었는데…….”
테오도르의 물음에 카타리나가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살인 마법의 흔적이 있었어요. 폐하께 드릴 수정구를 확인하던 중에 그것이 깨졌어요. 가장 지독하고 음습한 흑마법이 페르디난트의 안뜰에서 시현되었어요.”
그 순간 테오도르의 미간이 천천히 구겨졌다.
살인 마법은 흑마법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동시에 절대적으로 금지되는 마법이었다.
“제가 아는 한, 그 어려운 술식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에요. 죽은 루돌프와 벤야민.”
위험한 마법인 만큼 발동 조건이 까다롭고 난해했다. 페르디난트의 가주쯤은 되어야 시현할 수 있을 만큼.
“술식을 찾아낼 수 있는 건 오직 강한 신성력뿐이니까, 신전에 연락을 해서…….”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테오도르가 카타리나의 말을 단호하게 끊으며 말했다.
“내가 직접 확인하러 가지.”
“폐하께서요?”
“내가 아는 자 중에 강한 신성력을 지닌 자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폐하라 하셔도 저택 안뜰에 걸음 하시는 건…….”
“뭐가 문제지?”
테오도르는 짧게 코웃음을 쳤다.
“약혼녀를 만나러 왔다 하면 아무도 막지는 못하겠지.”
“아무 때나 접근할 수 없어요. 괜히 오셨다가 위험해지실 거예요.”
“감히, 누가 나를 위협한다고?”
“페르디난트의 금제가 걸려 있어요. 가주의 허락을 받은 자만 드나들 수 있는.”
“젠장.”
테오도르는 욕설을 뇌까렸다.
살인 마법의 흔적이 있다는 말에 조금 초조해졌다.
카타리나와의 약속을 이행하여 벤야민을 몰아 내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 여자가 페르디난트의 주인이 되든 말든 그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카타리나가 생각했던 것처럼 테오도르는 신의 따위 헌신짝처럼 내다 버릴 수 있는 썩을 인성의 소유자였다.
다만 그가 걱정한 것은 혹시나 그 살인 마법이 이보네에게…….
‘아니야.’
테오도르는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어떻게 그걸 확인하겠다고?”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강한 신성력을 가진 자를 저택 안뜰로 부를 수 있는 방법이.”
“……?”
“저택 안뜰에 커다란 수목이 있어요. 대대로 페르디난트가의 사람들은 임신을 하면 그곳에서 신관의 축복을 받았지요.”
테오도르의 두 눈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임신?”
“네, 임신이요.”
카타리나는 붉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생긋 웃었다.
* * *
“임신입니다.”
그 한마디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방금, 뭐라고?”
나보다 더 놀라 하며 의사에게 물은 이는 다름 아닌 에른스트였다.
[이브……!]의식을 잃기 직전 내가 들은 목소리는 다름 아닌 에른스트의 것이었다.
마침 내게 전할 말이 있어 찾아오던 그가 맞은편에서 쓰러지던 나를 발견하고 황자궁에 데려와 의사를 불러 준 것이다.
다행히도 빠른 처치로 의식을 되찾았으나, 여전히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혼미하던 와중에 의사가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며 다시 진찰을 해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물었고, 나는 열에 들끓어 몽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이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몇 가지 문답을 했다.
[혹 최근에 입맛이 없다거나, 음식을 앞에 두고 구토감이 치밀었다거나…….] [잠이 쏟아진 적은…….]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달거리가 끊긴 것은 언제인지…….]그리고 그 끝에 그가 말했다.
“틀림없는 임신입니다.”
내가, 아이를 가졌다고.
“그게 무슨……!”
에른스트는 기겁을 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순간 머리가 울려서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는 금세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다시 얌전히 앉았다.
나는 잠잠히 테오도르와의 마지막 관계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그가 기억을 잃기 전, 아직 그가 다정한 나의 테오였을 때.
“확실한가요?”
“네.”
간신히 입술을 떼며 묻자 의사는 재고의 여지 없이 단호히 말했다.
잠시간 방 안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의사는 몇 가지 처방과 함께 주의해야 할 점을 일러 주었으나,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멍하니 넋을 놓고 고개만 끄덕이는 나를 대신해서 에른스트가 열심히 주의 사항을 전해 들었다.
마침내 의사가 나가고 방 안에 나와 에른스트만 남게 되었을 때.
“이, 이브, 이, 이, 임신이라니, 이게 도대체…….”
에른스트는 목소리를 달달 떨며 말을 더듬었다.
그만큼이나 그에게는 나의 임신이 충격적인 모양이다.
하긴, 그는 나와 테오의 정확한 관계를 몰랐으니까.
“그럼, 그럼 아기의 아버지는…….”
“…….”
내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자 그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더니 돌연 안색이 새하얘져서 물었다.
“설마 테…….”
“닥쳐, 에른스트.”
“…….”
힘없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살벌한 욕설에 에른스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 미안.”
나는 뒤늦게 내가 욕을 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깜짝 놀랐지, 아기야? 나쁜 말을 써서 미안해.”
“…….”
옆에서 에른스트가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왜?”
“아니, 그냥…….”
“할 말이 있으면 말해.”
“나는 걱정이 돼서…….”
나는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납작한 나의 아랫배를 빤히 쳐다보았다.
임신…….
그러니까, 이 배 속에 아기가 있다.
나와 테오의 아기가…….
의사에게 그 말을 전해 듣는 순간, 놀라움과 함께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슴이 두근- 뛰었다.
한 번도 어머니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내 배 속에 생명이 생겼다는 두려움과 당혹감이 이내 놀라우리만큼 큰 애정과 사랑으로 바뀌는 것은 정말 한순간이었다.
‘내게 가족이 생긴 거야.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진짜 가족…….’
나는 잠시 아기의 아버지인 나의 테오를 떠올려 보았다.
그 순간 조금 전까지 몰아쳤던 기쁨과 환희가 금세 쪼그라들었다.
내 아기의 아버지는 나흘 뒤에 다른 여자와 약혼을 한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나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며 몸을 일으켰다.
“이브? 어, 어딜 가려고?”
에른스트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부축했으나, 나는 그를 밀어내며 거절했다.
“괜찮아. 이제 혼자 걸을 수 있어.”
아까만큼 머리가 어지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맑아졌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테오도르를 만나야 했다.
그가 막 기억을 잃었을 당시, 수차례 대화를 시도해 보고자 하였으나 그의 철벽과도 같은 수비 속에서 매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마지막 시도는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그의 침실에 몰래 침입했던 그 밤,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그를 보고서 나도 모르게 도망쳐 버렸고…….
그 이후 과거의 기억을 건드릴 때면 두통에 시달리는 그를 알게 되어…….
‘내가 이보네라는 사실은 알리지 못하더라도, 아기의 존재만은 알려야 해.’
나는 허리에 매단 검을 가만히 집어 보았다.
임신을 하였으니 검기는 사용하지 못할 테지. 그렇지만 검기를 사용하지 못한다 하여 나의 검술이 영 엉터리인 것은 아니었다.
이래 봬도 체르니시아의 딸이었으며, 밥을 먹고 숨을 쉬듯 검을 배웠다.
오늘은 기필코 테오도르를 검으로 두들겨 패서라도 대화를 해 보리라.
혹 지난번처럼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면 미련하게 당황하지 말고, 그 여자도 아프게 때려서 쫓아 버려야지.
어차피 그와 함께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여자는 카타리나밖에 없으니까, 아프게 때리겠다는 결심에 어떤 죄책감도 없었다.
그가 나를 믿어 줄까.
확률은 낮았다. 여전히 나와의 대화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았고, 내 말을 믿어 줄 가능성은 그보다 훨씬 더 낮았다.
그렇지만 배 속의 아기를 생각해서라도 주춤거리며 물러날 수는 없었다.
결심을 굳힌 나는 씩씩하게 그의 궁전을 찾아갔다.
여전히 핏기가 없는 내 얼굴을 보고 다들 의사는 만나 본 거냐며 한마디씩 던졌으나, 나는 아주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폐하께서는 어디 계시지?”
“아, 그게…… 오늘은 일찍 일정을 마치시고 방에서 휴식 중이신데…….”
일상적인 물음이었는데도 다들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오늘따라 아주 화끈하셔서.”
“……?”
“영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야.”
“폐하가 기분이 좋으시다고?”
“응.”
그가 기분이 좋다는 말에 나는 마음이 조금 더 안정되었다.
아무래도 기분이 좋으면 조금 더 기꺼운 마음으로 나의 대화 시도를 받아 줄 것이 아닌가.
차츰 경쾌해져 가는 걸음을 내딛던 나는, 문득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여자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여자 또한 나를 발견하고 멈추어 서더니, 이내 나른하게 웃었다.
“안녕, 이브 경.”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내 앞에서 벌벌 기던 카타리나가 마치 승리자의 미소를 입가에 띠며 즐거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잘 부탁해.”
“……?”
“내 약혼식 날 말이야.”
내게 한 발짝 다가온 그녀가 귓가에 대고 자그맣게 속닥거렸다.
“무려 체르니시아의 검에게 호위를 받다니, 정말 굉장하잖아.”
“무슨 소리를…….”
내가 그녀의 호위를 맡기로 한 것은 사냥 대회 때였다.
그것도 그녀가 테오도르에게 보란 듯이 나를 콕 집어서 칭얼거린 것 때문에 그날 하루만 억지로 그녀를 호위하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약혼식 날을 부탁하겠다니.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던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그녀의 목덜미에 테오도르의 것이 분명한 흔적이 남아 있던 것이다.
내가 잠시 굳어 있는 사이 카타리나는 깔깔 웃으며 멀어져갔다.
문득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으나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었다. 빨리 테오도르를 만나야 했다.
불안하게 쿵쿵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테오도르의 방에 도착했을 때.
“폐하, 드릴 말씀이…….”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걸음 했던 나는 다시 한번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나를 발견한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봤다.
보란 듯이 묻어난 여자의 화장품 흔적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아…….”
잠시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는데, 그가 먼저 나를 불렀다.
“마침 잘 왔다, 이브 로웰린.”
그가 웬일로 나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나흘 뒤 약혼식 날, 네가 해 주어야 할 일이 있어.”
기억을 잃은 이후로, 그가 나를 향해 이처럼 다정하게 말을 건넨 건 처음이었다.
“카타리나 양이 내 아이를 가졌다. 마땅히 황족으로 대우하며 각별히 그녀의 호위를 맡아야 할 거야.”
순간 나의 표정이 무너졌다.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카타리나가…… 테오도르의 아이를 가졌다고?
“그러니 네가 나흘 뒤에…….”
“…….”
“이브 로웰린?”
멍하니 선 채로 대답이 없자 테오도르가 재차 나를 불렀다.
“이브 로웰린, 내 말을 듣고 있는 건가?”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테오도르는 이맛살을 미미하게 찌푸린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카타리나, 나흘 뒤에 테오도르의 약혼녀가 되는 여자가 그의 아이를 가졌다고…….
나는 자신의 약혼녀가 아이를 가졌노라 말하는 내 아이의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만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뒤에서 테오도르가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으나,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정처 없이 달리다 보니,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눈앞에 보였다. 오후 두 시의 약속의 나무였다.
그 앞에 선 나는 밀려오는 헛구역질에 욱, 욱 토악질을 했다.
차가운 밤공기가 살갗을 스치며, 차츰 머릿속이 정리되어 갔다.
카타리나가 테오도르의 아이를 가졌다.
그리고 그 둘은 나흘 뒤에 약혼식을 거행할 것이다.
‘그럼 내 아이는…….’
나는 조심스럽게 아랫배를 감쌌다.
‘황제의 사생아가 되는 거야.’
문득 모골이 송연해졌다.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존재를 만약 들킨다면…….
‘카타리나는 분명 아이를 죽이려고 할 거야. 나뿐만이 아니라 아이까지 위험해져.’
오래전부터 황후가 되길 꿈꿔 왔던 카타리나가 제 아이의 황권을 위협할 황제의 사생아를 살려 둘 리 없었다.
‘안 돼. 아이를, 지켜야 해.’
테오도르에게 내가 이보네라는 사실과 배 속에 그의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했으나, 카타리나의 임신 소식이 그런 나의 결심을 무너뜨렸다.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한 새로운 결심이 섰다.
그를 떠날 결심이.
* * *
한편, 테오도르는 이브 로웰린의 새하얘진 안색에 걱정이 되었다.
“측근 호위라는 작자가 쓸데없이 몸이 약해서는, 쯧.”
그는 이브가 뛰쳐나간 문 쪽을 쳐다보며 혀를 찼다.
그러다 뒤늦게 자신이 카타리나를 만나러 가기 직전 그녀의 상태가 심상찮았단 게 생각이 났다.
“의사를 만나지 않은 건가?”
테오도르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오늘 아침,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는 썩 아파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어쩌다 그리 앓은 건지 짐작이 갔다.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때문이겠지.’
유독 날이 추웠던 어제는 눈이 왔다고 했다.
카타리나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그녀에게 사과를 하라는 명목으로 이브 로웰린을 페르디난트로 보냈다.
상대를 밖에 서 있게 하는 건 귀족 아가씨들이 화가 났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카타리나가 곧바로 그녀를 안으로 들이지 않았을 테니, 저 약해 빠진 호위는 몇 시간을 그렇게 차가운 바깥에서 눈을 맞으며 기다렸으리라.
그 성질 나쁜 여자가 그러리란 걸 알면서도 보냈다.
이브 로웰린을 위해 자신과 협력 관계인 카타리나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이브 로웰린은 그래도 되는 여자였으니까. 제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으니까.
눈치 빠른 테오도르는 이브 로웰린이 자신을 좋아한단 사실을 알았다. 그렇지만 굳이 여자란 사실을 숨겨 가면서까지 제 호위가 된 것은 그 여자이질 않나.
제가 그 여자에게 좋아해 달라 말한 것도 아니고…….
[아파, 너무 아파. 너무 아파…….]그러니 자꾸만 떠오르는 그 여자의 아픈 얼굴과 애달픈 목소리, 뜨거웠던 체온 따위는 잊어야 한다.
실제로도, 한순간 잊었었고.
이브 로웰린이 제 옷깃을 붙잡으며 아프다고 울먹이던 순간, 저에게 더 중요한 것은 카타리나가 가져온 소식이었다.
10년을 넘게 찾아온 이보네의 종적이 끊긴 지점. 그리고 같은 자리에서 발견된 살인 마법의 흔적.
어쩌면 페르디난트의 것들이 이보네를 해쳤을지도 모른단 생각 때문에 무엇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제가 폐하의 아이를 임신한 것으로 알려요. 그러면 벤야민도 어쩔 수 없이 우리를 그곳에 출입시켜 줄 거예요.] [고작 그런 이유로?] [페르디난트의 전통이니까요. 마르가라테 황후도 에른스트 황자를 가진 뒤 그곳을 찾았었고요.] […….]퍽 내키는 제안은 아니었으나, 이보네의 흔적을 좇기 위한 일이었다.
하여 테오도르는 카타리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부러 요란하게 애정 행각을 벌였다.
임신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거짓으로 페르디난트의 눈을 가리고 그곳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어떤 위험천만한 흑마법이 이루어졌는지 확인해야 했다.
신관은 필요 없었다. 제가 갖고 있는 신성력이 어지간한 신관들의 것보다 훨씬 더 나을 테니까.
그곳에 가면, 뭐든 알게 되지 않을까.
이보네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래, 제게 중요한 것은 오직 이보네뿐이었다.
이브 로웰린, 그 불쾌한 여자에 대한 생각은 이만 거두는 게 옳았다.
어떻게 해야 이보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 골몰하기에도 아까운 시간이었다.
게다가 그 여자는…….
[어찌 되었든 조심하세요. 흑마법과 관련이 있는 데다가, 무려 벤야민의 숨은 연인이니…….]흑마법의 흔적을 갖고 있었다.
어쩌면 이보네를 해친 이들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지 모르는 수상한 여자였다. 마땅히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여자였다.
“그런데 왜 자꾸…… 그 여자가 생각나는 거지.”
테오도르는 불쾌한 듯 중얼거렸다.
자꾸만 그 여자에게 신경이 쓰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저를 담고 애처로이 휘던 그 예쁜 눈동자 때문에?
혹은 저를 움켜쥐던 뜨겁고 연약한 손길 때문에?
그도 아니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만 같은 목소리로 저를 부르던 그 순간의 기이한 공기 때문에?
어찌 되었든 그 가냘픈 애원을 테오도르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이보네의 실종과 관련되었을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느끼는 이 양가적인 감정은…… 이보네에 대한 배반이 아닌가.
그러니 제가 그 여자에게 느껴야 하는 것은 이 미약한 죄의식이 아니라 온당한 경각심과 거부감이어야 했다.
“그래. 내가 그 여자에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 또한 없어.”
테오도르는 구태여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마치 스스로를 설득하듯이.
* * *
생각을 차분히 정리한 나는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꼽아 보았다.
‘일단은 테오도르를 피해야 해.’
내가 자신의 사생아를 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의 반응을 짐작할 수 없었으나, 결코 평탄하지 않으리란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카타리나야 얼마 전에 겁을 주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테오도르는 달랐다.
아직 세간에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테오도르는 강한 신성력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동시에 알브레히트의 가장 큰 권력을 틀어쥔 황제였다.
온전히 내 힘만으로 그를 피할 수 있을까?
‘아니, 그건 불가능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나는 검기도 함부로 방출하지 못하고, 그의 말 한마디에도 언제든 목이 잘릴 수 있는 그런 처지였다.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당장 생각나는 건 두 사람이었다.
[이보네……. 많이 힘들면 나랑 같이 나갈래?] [너를 힘들게 하는 게 있다면 내가 도울게. 나를 이용해도 좋아.]벤야민과 에른스트. 상냥한 나의 두 친구들.
그렇지만 에른스트는 테오도르에 비해 힘이 약했다. 그를 따라 황궁을 나갔다가 혹여나 테오도르가 내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이후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의 가주인 벤야민이라면, 나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선택지가 정해진 후, 나는 곧바로 황궁의 담을 넘어 벤야민을 찾아갔다.
“도와줘, 벤야민.”
밤늦은 시각이었지만, 그는 갑작스럽게 방문한 나를 향해 느른한 눈웃음을 지었다.
“말해, 뭐든.”
“황궁을 떠날 수 있게 도와줘.”
나는 그의 옷깃을 붙잡으며 대뜸 말했다.
“황궁을?”
“응. 그리고…….”
단순히 황궁을 떠나는 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테오도르와 카타리나가 사라진 나를 다시 찾을 생각도 하지 못하도록, 약간의 장치가 필요했다.
“죽음을 위장해 줘.”
“그래.”
벤야민은 이유도 묻지 않고 흔쾌히 답했다.
그런 그가 고마워서, 나는 카타리나의 임신 소식을 들은 뒤 처음으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우리는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누며 세밀한 계획을 짰다.
내가 떠나는 날은 카타리나의 약혼식 직전이 될 것이다.
어느덧 동이 틀 시각이 가까워져 갔다.
이대로 황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욕구가 불쑥 치솟았으나, 그럴 수 없었다.
완벽한 죽음을 위장하기 위해 다시 황궁으로 돌아와야 했다.
습관처럼 발걸음이 테오도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딜 다녀온 거야, 이브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