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5_5
“응, 그냥. 폐하께선?”
“집무실에.”
“집무실? 아직 동이 트지도 않았는데, 벌써 일어나신 거야?”
“밤을 새우신 것 같아. 너도 들었지? 카타리나 양의 임신 소식. 그것 때문에 들뜨셨나 봐.”
“…….”
주절주절 떠드는 동료 기사의 이야기를 뒤로하고, 나는 테오도르의 집무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황궁을 뛰쳐나가기 직전에 본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하고 있던 테오도르가 나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의사는 찾아갔나?”
“……?”
대뜸 묻는 말에 영문을 몰라 하자 그가 헛기침을 하며 덧붙였다.
“몸이 여전히 안 좋던 것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낮에도 그의 앞에서 쓰러질 뻔했었다. 하루 종일 정신이 없어 잊고 있던 것이 다시 생각났다.
내가 아픈데도, 아프다고 붙잡는데도 카타리나에게 가던 그의 뒷모습이…….
“의사도 찾아가지 않고 어딜 다녀온 거지?”
그가 내게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냥, 잠시…….”
나는 말끝을 흐리며 정확한 답을 피했다.
그에게 널 속이고 도망치기 위해 벤야민과 작당을 하러 갔다고 말해 줄 순 없었으니까.
“이브 로웰린.”
이때, 테오도르가 문득 내게 한 발짝 다가서더니 내 손목을 낚아챘다.
홰액-!
순간 멈칫하려는 찰나, 그가 내 손목에 코끝을 파묻으며 냄새를 맡았다.
“……페르디난트의 냄새가 나는군.”
내 손목을 움켜쥔 테오도르의 손아귀에 아플 만큼 힘이 들어갔다.
“설마, 벤야민 페르디난트를 만나고 온 건가?”
하여튼, 눈치는 참 빠르다.
“네.”
순순히 대답하자 테오도르가 화를 짓씹어 참는 듯한 목소리로 사납게 물었다.
“이 시간에, 내게 말도 없이 그 남자를 만나고 왔다고?”
나는 그가 왜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을 잃은 테오도르는 나를 보기만 하면 화를 냈다. 나는 그게 참 서럽고,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왜 화를 내세요?”
“…….”
그러자 그가 어금니를 바드득 갈며 나를 노려보았다.
예의 그 경멸 어린 눈동자와 비슷하였으나, 무언가 조금 다른 빛깔이 머물러 있었다.
“한 가지만 해. 나를 좋아하든지, 벤야민 페르디난트를 만나든지.”
“네?”
“더럽게 이리저리 몸 굴리고 다니지 말고.”
나는 내게 독설을 내뱉는 테오도르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더 이상 내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없는 남자의 얼굴은, 이 와중에도 참 더럽게 잘생겼다.
“폐하.”
그가 왜 갑자기 벤야민의 이름을 꺼내며 화를 내는지 모르겠지만, 이젠 확실히 해야 할 때였다.
“저는 폐하 안 좋아합니다.”
“넌 정조도 없…… 뭐?”
그는 계속해서 내게 쏘아붙이다가 뒤늦게 멈칫했다.
“저는 폐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이내 그의 얼굴이 더욱 험악하게 변해 갔다.
“허튼소리 지껄이지 마. 그딴 더러운 눈으로 나를 봤으면서, 이제 와서 뭐? 나를 안 좋아해?”
“더러운 눈으로 폐하를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담담하게 사실을 답했다.
“우스운 소리 하지 마. 너 분명…….”
“네, 폐하를 좋아하긴 했지요.”
멈칫.
이번에야말로 정말 굳어 버린 테오도르가 내내 쥐고 있던 내 손목을 놓쳤다.
“조금 많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좋아했습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더러운 감정은 아니었어요.”
“…….”
“당신의 경멸이 서러울 만큼, 애틋하고 소중한 감정이었습니다. 폐하를, 참 많이 좋아했어요. 정말 많이 사랑했어요.”
“…….”
감정이 실리지 않은 나의 고백에 그의 입술이 느리게 벌어졌다.
“그런데 이제는 아닙니다.”
내 고백이 시작된 이후로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나를 쳐다보던 테오도르가, 그제야 거칠어진 목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었다.
“아니……라니?”
“더 이상 폐하를 좋아하지도 않고,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더러운 눈으로 폐하를 보지도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게, 무슨…….”
테오도르는 꼭 고장 난 사람처럼 말을 잘하지 못했다. 무언가에 충격을 받은 사람 같기도 했다.
왜 그런 반응이지?
내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하긴, 제 잘난 맛에 사는 남자니까…….’
나는 곧바로 수긍했다.
테오도르는 상대가 그렇게 끔찍하게 싫어하는 이브 로웰린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참 테오도르답다는 생각이 들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밤을 새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조금이나마 눈을 붙이는 게 좋지 않으시겠습니까? 사흘, 아니 이틀 뒤면 약혼식도 있으신 분께서.”
그의 건강을 걱정하며 무심하게 고하는데, 그는 다른 것을 지적했다.
“……왜 웃지?”
“네?”
내가 웃었나?
머쓱해져 나도 모르게 입가를 만져 보았다. 그러자 내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 있는 게 느껴졌다.
뭐, 웃었나 보다.
그렇지만 고귀하신 황제께서 내 웃는 얼굴을 보기 싫다니, 다시 표정을 굳혀 주었다.
“하!”
돌연 테오도르가 차가운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 사랑은 정말 값싼 애정인가 보군.”
그러더니 공연히 내 사랑을 매도하기 시작했다.
“내가 좋다고 달라붙더니, 다른 여자와 약혼한다는 말에 곧바로 벤야민 페르디난트를 찾아간 건가? 그러고는 이제, 꼴 보기 싫으니까 썩 침대 구석으로 꺼져 버리라고?”
그의 과대한 해석에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왜 그렇게 해석하세요?”
“네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잖아. 이젠,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아니, 카타리나가 제 아이를 가졌다며?
그런데도 내가 자신을 계속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그런 감정을 최대한 꾹꾹 누르며 물었다.
“제가 더 이상 폐하를 좋아하지 않는 게 폐하께도, 카타리나 양에게도 좋은 거 아닙니까?”
“어리석긴. 내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다면, 난 그 남자를 죽여서라도 내 사랑을 쟁취할 거야.”
그 말에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죽여요?”
“그래. 그게 진정한 사랑이다.”
테오도르는 장난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니까 넌 날 사랑한 게 아니야.”
그는 몇 번이나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돌연 나를 내쫓고 문을 쾅 닫았다.
복도에 남겨진 나는 닫힌 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뭐야, 진짜……. 인성 파탄자…… 또라이 새끼…….”
왠지 카타리나가 불쌍하게 여겨졌다.
* * *
쾅!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동시에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참을 수 없이 분출했다.
“저건 사랑이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흔들릴 필요도 없어.”
기분이 나쁘고, 불쾌했다.
“나를 정말 좋아했다면, 응당 카타리나 페르디난트를 제거하고 내 옆에 있어야지.”
그래, 자신이라면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만약 이보네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더라면, 제일 먼저 그 남자를 해쳤을 것이다.
어린 날, 그녀가 알지 못하게 에른스트를 겁주어 쫓아 버렸던 것처럼.
그러니까 자신을 사랑했다고 주장하는 이브 로웰린의 말은 거짓인 것이다.
그녀의 사랑은, 그만큼이나 빈궁하고 조악한 것이었다.
그딴 여자의 말에 이렇게나 제 마음이 휘둘릴 필요도, 동요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 그딴 게 사랑일 리 없어.”
테오도르는 고개를 주억이며 중얼거렸다.
“벤야민 페르디난트와 무슨 작당을 벌여 놓고서, 내 옆에 붙어 있던 핑곗거리를 찾느라 사랑이라는 이유를 갖다 붙인 걸 테지. 가증스럽게도.”
……하지만 정말 다른 꿍꿍이를 가진 거였더라면, 날 보던 그 눈빛은 뭘까.
분명, 날 좋아하던 그 눈빛은…….
지금은 더 이상 보여 주지 않는 눈빛은…….
테오도르는 그 눈동자를 다시 한번만 더 보고 싶었다.
이따금 애틋하고, 서럽기도 하였던, 이보네를 닮은 그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
그 눈동자 또한 거짓이었던 걸까?
나를 현혹하기 위한?
이브 로웰린이 꿍꿍이를 숨기고 제게 접근했다 생각하니 기분이 나빴다.
차라리 자신을 좋아해서 곁을 맴돌았다고 믿는 게 더 기꺼울 만큼.
“망할 여자 같으니.”
그렇게 한참 씩씩거리던 테오도르는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뒤에야 마침내 평온을 되찾았다.
“동요할 필요 없어. 그 여자가 정말 많이 수상하다는 걸 알았으니 옆에 두고 지켜보면 되는 거야.”
그래. 벤야민 페르디난트와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매일 같이 제 옆에 찰싹 붙여둘 것이다.
“되도록 황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단속을 해야겠군.”
벤야민과 만나지 못하게 하는 데에 딱히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두 사람이 만나 못된 작당이라도 하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내 옆에 있다 보면 그 여자도 보다 확실히 알게 되겠지. 벤야민 페르디난트 같은 쭉정이에 비해 내가 얼마나 괜찮은 남자인지.”
구겨진 얼굴을 편 그는 못 잔 수면 시간을 보충하는 대신 시종을 불러 따뜻한 차를 내오게 했다.
창가에 서서 차츰 밝아지는 하늘을 감상하며 찻물을 음미하던 그는 문득 드는 의문에 찻잔에서 입술을 뗐다.
“그런데 왜…… 나는 벤야민 페르디난트를 죽여 버리고 싶을까?”
반쯤 기울어진 찻잔에서 찻물이 흘러내려 그의 구두코를 적셨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찻잔을 더욱 기울였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끝내 들고 있던 찻잔마저 바닥으로 떨어뜨린 그가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새벽이슬을 맞으며 돌아온 이브 로웰린에게서는 분명 그 남자의 냄새가 났다.
그 야심한 시각에, 마땅히 자신을 호위해야 하는 임무조차 제쳐 두고 나가서 그자와 밤새 뭘 한 걸까?
몸도 좋지 않았으면서, 그자를 만나러 간 걸까?
차츰 그의 눈가가 가늘게 일그러졌다.
“하…….”
테오도르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창가에서 돌아섰다.
“대체 내가 왜 그딴 여자를 신경 쓰는 거야.”
이보네의 흔적을 찾기에도 모자랄 시간이었다.
역시 그 얼굴 탓이다.
빌어먹게도 이보네를 떠올리게 하는 그 얼굴 때문에, 이다지도 그 여자를 신경 쓰고 마는 것이다.
그 여자는 이보네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젠장.”
테오도르는 욕설을 짓씹어 삼켰다.
* * *
떠나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나는 겉보기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제 테오도르의 약혼식은 이틀이 남았다.
내 손으로 카타리나를 호위할 생각은 없으므로, 그 이전에 황궁을 뜰 참이다.
이왕이면 재수 없는 카타리나의 약혼식도 조금 망쳐주고.
“괜찮아, 아기야.”
나는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배 속의 아기에게 속삭였다.
“다 괜찮을 거야.”
종이와 만년필을 꺼내 테오도르를 향해 마지막 편지를 작성했다. 이것은 나의 유서가 될 터이다.
내내 하고 싶었던 말들이 예쁘게 쓰여진 것을 보니 마음이 조금 후련해졌다.
이어서 사직서를 쓴 뒤, 유서는 책상 서랍 안쪽에 숨겨 두었다.
나는 사직서만 들고서 아르민 마이어를 찾아갔다.
“마이어 공.”
“무슨 일입니까, 이브 경?”
마침 복도에 있던 그를 불러 세워 사직서를 건넸다.
“사직서입니다.”
“네, 사직서를 가져오셨……. 네? 사직서요?”
아르민이 세상을 모두 잃은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아니, 이브 경! 왜 갑자기……!”
당황한 그가 내 손을 붙들고 절망스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소란에 다른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뭐? 이브 경이 떠난다고?”
“안 돼, 이브 경! 그대가 떠나면 우린 어떡해!”
“맞아. 폐하의 성질을 감당할 수 있는 건 그대밖에 없는걸.”
“최근에 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폐하가 그대를 박해했나?”
간절한 시선들이 일제히 나를 향했지만, 나는 가뿐하게 그 눈빛을 무시하며 답했다.
“그냥, 몸이 안 좋아서. 다들 알잖아, 최근에 나 쓰러진 거.”
“그런 거라면 차라리 폐하께 휴가를 받아 내서…….”
이때였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차가운 목소리 한 자락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아, 폐하…….”
테오도르였다.
“그게…….”
모두가 입을 꾹 다물고 테오도르를 원망의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누구도 대답을 않자 테오도르의 한쪽 눈썹이 꿈틀 치솟았다.
그런 그의 기색을 재빠르게 알아챈 아르민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이브 로웰린 경이 몸이 안 좋아서 폐하의 호위직을 그만두겠다고 합니다.”
“뭐?”
테오도르의 표정이 사아악 굳었다.
“그러니 폐하께서 어서 이브 경을 좀 말려 주십시오.”
“네, 이브 경은 저희 기사단에 없어서는 안 되는 귀한 인재가 아닙니까, 하하.”
“마침 폐하께도 내일 경사가 있으시니, 이참에 휴가도 좀 내어 주시고…….”
주위에서 나를 비호하는 말들이 이어졌다. ‘굳이 그럴 필욘 없는데.’ 하고 생각할 때였다.
“사직은 불가하다.”
아르민의 손에서 사직서를 낚아채 간 테오도르가 딱 잘라 말했다.
그 단호한 거절에 발끈한 내가 물었다.
“어째서요?”
“너는 카타리나 양의 호위를 맡기로 하지 않았나. 설마 내 약혼식을 망칠 셈인가?”
“하하, 폐하. 일단 내일모레 카타리나 양의 호위는 벤트 경이 맡고, 이브 경에게는 휴식을 조금…….”
“번복은 없다. 내 아이를 가진 여자가 이브 로웰린을 호위로 원해. 그렇다면 응당 그에 따라야지.”
테오도르는 몸이 안 좋다는 나에게 자신의 약혼녀의 호위를 부득불 밀어붙였다.
마땅한 이유도 없이, 그저 그 여자가 나를 지목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쓰레기 보듯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 중 하나는 바로 내 것이었다.
‘내가 몸이 안 좋다는데도 카타리나만 신경 쓰여?’
심지어 그는 내가 그를 좋아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니 그 말이 내게 상처가 될 것이란 걸 알면서도 그러했다.
내가 그에게 마음을 고백했다고 해서 그가 날 좋아해 주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감 능력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쓰레기…….”
나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주위가 조용했던 탓에 그 소리가 모두에게 들렸나 보다. 나를 둘러싸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테오도르가 험악하게 한쪽 눈썹을 치켜뜬 순간 모두들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사직은 불가능해.”
테오도르는 사직서를 쭉쭉 찢어서 버렸다.
“농땡이 부릴 생각 말고 일이나 해라. 따라와.”
어차피 쉽게 사직서가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쫓았다.
“테오!”
저 멀리 마차에서 내린 카타리나가 환하게 웃으며 뛰어와 그의 품에 안겨 들었다.
“저런, 조심히 와야지, 나의 피앙세. 그러다 배 속의 아기가 놀라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테오도르는 다정하게 그녀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나를 볼 때와는 달리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우리 아기가 어서 빨리 아빠를 보고 싶다고 보채는걸요.”
테오도르의 팔에 매달려 애교를 부리는 카타리나는 몹시 행복해 보였다.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인 테오도르가 카타리나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아기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것을 쳐다보며 힐끔 내 아랫배를 보았다. 하필이면 내 배 속에서 생명을 틔우고 만, 사생아밖에 될 수 없는 내 아이가 가엾었다.
‘괜찮아, 아기야. 너는 엄마가 많이 사랑해 줄게.’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내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삼켰다.
속으로 삼켜 낸 말이 아기에게 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다짐했다.
‘비록 아버지는 없어도…… 내가 그만큼 더 많이 사랑하고 아껴 줄게.’
그러니 내 아기는 행복할 것이다. 저 인성 파탄자들의 아기보다도, 더.
‘생각해 봐.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테오도르고 어머니가 카타리나라니. 정말 끔찍하잖아?’
내가 그들의 아기로 태어난다면, 분명 태어나자마자 죽고 싶어질 것이다.
‘분명 아기도 내 아기로 태어나서 더 기쁠 거야.’
나는 애써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기운을 냈다.
그사이 마차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온 벤야민이 테오도르에게 인사를 했다.
“위대하신 알브레히트의 주인을 뵙습니다. 알브레히트에 영광을.”
그러고는 테오도르의 뒤편에 있던 나를 향해 슬쩍 눈인사를 건넸다. 내가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화답하려는 때였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그대가 온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테오도르가 삐딱한 목소리로 벤야민에게 시비를 걸었다.
“약혼식 준비를 위해 페르디난트의 가주로서 함께 왔습니다.”
“네가 없어도 충분해.”
“하지만 카타리나가 폐하의 아이도 가졌으니까요. 혼자 보내기엔 걱정이 되어서요.”
“…….”
아무래도 테오도르는 카타리나와 둘만의 시간을 기대했으나 벤야민이 함께 온 것으로 불쾌해진 모양이다.
이제는 꼭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 그는 나와의 시간을 방해받을 때면 늘 저런 반응을 보이곤 했었다.
테오도르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짓더니 돌연 나를 홰액 노려보았다.
“이브 로웰린. 주방을 찾아가 오늘 오찬에 벤야민 페르디난트도 합석할 것이라 알려라.”
갑자기 불똥이 나에게 튀었다. 굳이 나를 콕 집어 보낼 일이 아니었는데도 나를 지목한 걸 보니, 괜한 심술일 게 뻔했다.
그러나 나는 당장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에 기뻐하며 몸을 돌렸다.
* * *
벤야민은 성큼 다가온 약혼식과 관련하여 테오도르와 함께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던 중 슬쩍 자리를 떴다.
그러고는 곧바로 이보네를 찾아갔다.
전날 페르디난트를 찾아온 그녀에게 술식을 새겨 두었기에 곧바로 그녀가 있는 곳으로 이동이 가능했다.
벤야민이 도착한 곳은 황궁의 정원, 커다란 나무 앞이었다.
“이브.”
나른한 목소리로 부르자 나무 위에서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왔네, 벤야민.”
그녀가 나무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황제와는, 어떻게 됐어?”
“사직서를 내려고 했는데 거부당했어.”
“역시 조용히 떠나는 건 불가능하겠네.”
“응. 그렇다면 역시 방법은…….”
벤야민의 오늘 방문은 지난밤에 세운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함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테오도르 황제는 이보네를 놓지 않으려 했다. 그녀를 새까맣게 잊은 주제에, 참 우스운 집착이었다.
벤야민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이보네의 손목을 힐긋 보았다.
술식을 새겨 놓은 손목에서 자신의 향이 나는 것 같았다. 벤야민은 그 사실이 너무나 기껍고 좋았다.
“네가 저택에 돌아오면…….”
벤야민의 손이 이브의 머리카락을 스윽 건드렸다.
“저택을 온통 네가 좋아하는 것들로 꾸밀 거야. 정원에는 아름드리나무를 심고, 늦은 시간에도 네가 홀로 산책할 수 있도록 이곳저곳에 마력으로 주위를 밝히는 등불을 달 거야. 너는 사색을 좋아하는 편이니까 네가 산책을 할 땐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끔…….”
살랑살랑 흔들리던 은색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에 돌돌 감겼다. 벤야민은 그 머리카락 위로 코끝을 묻었다.
“그러니까, 이브. 나는 네가 그곳을 조금 더 편하게 생각했으면 좋겠어. 우리의 보금자리로…….”
“…….”
그녀가 무언가 대답을 하고자 할 때였다.
“이브 로웰린.”
불쑥 끼어든 차가운 목소리에 이보네와 벤야민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곳엔 지금쯤 카타리나와 함께 있어야 할 테오도르가 두 사람을 흉흉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주방에, 찾아가라고 하지 않았나.”
테오도르가 어금니를 악물며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다녀왔습니다. 그러다 마침 벤야민 님을 마주쳐서요.”
“우연히, 마주친 거라고?”
이보네의 답에 테오도르는 코웃음을 쳤다.
“장난하나.”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게 거슬려서 이브 로웰린을 멀리 치워 버린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벤야민이 자리를 뜨자, 테오도르는 그 순간부터 묘한 불안감에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하여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찾아왔건만…….
두 사람이 발견된 곳은 심부름을 보낸 곳과 한참 떨어져 있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우연히 마주쳤다기엔 정말 말도 안 되는 장소였다.
[벤야민이 그 애를 특별히 아꼈지요.] [저는 정말로 벤야민이 그 출신 모를 여자애를 정부로 앉힐까 봐 걱정했거든요.] [제가 봤어요. 이브 로웰린이 매일 밤 벤야민의 침실에서 나오는 걸.]카타리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두 사람이 밀회를 벌여 놓고 자신을 속이려 드는 게 분명했다.
[무려 벤야민의 숨은 연인이니…….]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한 것은 귀로 듣고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최악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이브 로웰린의 눈동자는 왜 이렇게 담담한지.
[더 이상 폐하를 좋아하지도 않고,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더러운 눈으로 폐하를 보지도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이제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진짜로?
테오도르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으나,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전과 달리 자신을 향한 애틋함이 사라진 그녀의 눈동자.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전 그녀와 함께하는 일상을 그리던 벤야민의 말을 듣고 말았기에.
그 얼토당토않은 말을 잠잠히 경청하던 그녀를 보고 말았기에.
자신을 좋아했다면서,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만 이브 로웰린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테오도르는 사나운 목소리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뻔한 거짓말은 집어치워. 내가 이딴 허술한 개소리에 넘어갈 것 같나? 둘이서 지금, 몰래 만난 거잖아.”
“…….”
이보네는 잠시간 대답을 않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더니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라, 이곳에서 벤야민 님과 밀회를 나눈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둘이서 내 눈을 피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