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6_2
기사들은 고개를 들어 기척의 주인을 보았다. 에른스트 2황자였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에른스트가 걸음을 우뚝 멈추어 그들을 빤히 응시했다. 웃음기 하나 없는 그의 얼굴은 일견 차가웠다.
에른스트 2황자 또한 이브 로웰린의 죽음 이후 조금 이상해졌다.
언제나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용히 없는 듯 살아가던 황자였는데, 최근 들어 그에 관한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다.
황자궁의 사용인 몇몇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갔다더라. 그리고 모두가 쉬쉬하지만, 사용인의 무고한 죽음에는 다름 아닌 황자의 개입이 있었다.
일전에도 딱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 황자의 생모인 마르가라테 황후와 외삼촌인 루돌프 페르디난트가 죽던 날.
자그마한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것 같았던 햇살 같은 2황자 전하께서는 그날 황자궁에 피바람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어머니와 외삼촌을 동시에 잃은 그가 한순간 정신을 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엔 대체 왜…….’
이브 로웰린의 죽음 이후, 그는 매일 같이 이곳에 찾아와 황제를 만나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만나 주지 않았다. 에른스트뿐만 아니라, 자신을 찾아온 그 모두를.
때문에 그의 보좌관인 아르민만 괴로워했다.
“폐하를 만나러 왔다.”
에른스트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닫힌 문을 노려보며
“죄송합니다, 전하. 폐하께서는 누구도 만나길 거부하고 계십니다.”
“그럼 대체 언제 만날 수 있지?”
“그건 저희도…….”
“…….”
에른스트는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그가 테오도르의 침실을 한창 노려볼 때였다.
끼이익-
긴 시간 닫혀 있던 문이 돌연 열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테오도르가 길쭉한 다리를 내밀었다.
모두가 숨을 꼴깍 삼켰다.
테오도르는 본 적 없는 인상으로 복도에 나왔다.
“왜 소란스럽지?”
원래도 성격이 나빴는데, 지금은 유독 심하게 나빠 보였다. 분명 입꼬리에 야트막한 미소 비슷한 것을 띠고 있었는데도 그러했다.
괜히 잘못 건드리는 순간 사달이 날 것이라는 걸 모두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런데 에른스트 2황자는 그런 테오도르가 무섭지도 않은지, 대뜸 그의 앞으로 걸어가 말했다.
“이브를, 이보네를 돌려줘요.”
천천히 제 아우를 향해 시선을 돌린 테오도르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뭔 개소리야?”
“당신이 이보네의 시체를 가지고 있잖아.”
테오도르의 두 눈을 가늘게 좁혀졌다.
“이브 로웰린과 이보네는 다른 사람이다.”
“당신만 모르고 있어! 이보네는……!”
“당장, 쫓아내.”
테오도르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에른스트를 쫓아냈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기사들이 에른스트의 양팔을 각기 붙들고 끌고 갔다. 에른스트의 강한 저항으로 인해 약간의 소동이 있었으나, 금세 복도는 조용해졌다.
“저 자식 때문에 이브가 깨 버렸잖아.”
테오도르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눈가를 찡그렸다.
“폐하…….”
그 고요한 틈을 타 아르민이 테오도르에게 다가왔다.
며칠 만에 보는 황제인지 모르겠다.
이제 정신을 조금 차리신 건가 싶어 그의 몰골을 슬쩍 살피는데, 여전히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다.
가령, 눈 밑에 거뭇거뭇한 피부라든가. 혹은 유독 피곤해 보이는 낯빛이라든가.
그러나 그런 것과 달리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저…… 그동안 밀린 정무가…….”
아르민은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을 붙였다.
“가져와.”
“네?”
“가져오라고, 이리로.”
“폐하의 침실로요?”
아르민이 당황하여 되물었다.
테오도르는 언제나 일과 휴식의 구분이 철저한 사람이라서, 한 번도 침실로 일을 가져간 적이 없었다.
“그래. 이브랑 같이 볼 거야.”
“……?”
“내가 자리를 비우면 이브가 슬퍼할 테니까.”
테오도르는 빙긋 웃으며 활짝 열린 방 안쪽을 쳐다보았다.
“그렇지, 이-브?”
‘이-브’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꿀처럼 달콤했다.
그 기괴함에 아르민은 오싹한 마음을 감추고 테오도르의 침실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어지간해서는 집무실에서만 테오도르를 만나왔기에, 가장 최근에 이곳에 방문한 건 그가 낙마한 직후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침실이 그때와 구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황제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낡고 수수한 가구들이 그의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모두 이브 로웰린의 숙소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그러다 침대 위에 정갈하게 누워 있는 이브의 시신을 발견한 아르민은 ‘헉!’ 하고 놀랐다.
“폐, 폐하……! 이게 어, 어떻게……!”
“성력을 썼어. 지금도 나의 냄새로 물들어 가고 있지.”
테오도르는 퍽 뿌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니, 그런 걸 여쭌 게 아니라…….”
황제가 이브 로웰린의 시신을 침실로 가져갔다는 소문은 알음알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신을 마치 고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침대 위에 눕혀두고 애지중지 다루며 성력까지 쏟아부을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테오도르는 외가인 레오브란테에서 받은 그 힘을 퍽 드러내기 싫어했었다.
그리고 항상 말하지 않았던가. 그 힘은, 오직 한 사람을 위해서만 사용될 힘이라고.
“이브 경을 싫어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성력까지 사용해 가며…….”
사아악.
표정을 굳힌 테오도르가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아르민을 보며 물었다.
“내가, 이브 로웰린을 싫어한다고?”
“……네. 분명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항상 괴롭혀서 쫓아낼 궁리를 하셨잖아요.”
“내가, 내가 이브 로웰린을 싫어했다고…….”
테오도르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음산하게 중얼거리더니,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아르민 마이어, 너도 에른스트에게 개소리가 옮았나?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데.”
사랑, 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적에,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이 변하였다.
아르민은 못 들을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온몸에 털이 쭈뼛 돋았다.
“그렇지, 이브?”
그가 한 번도 지은 적 없는 포근한 눈웃음을 띤 채로 이브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 괴상하고 기이한 모습을 본 아르민은 속으로 생각했다.
‘폐하께서 정말로 미쳐 버리셨구나.’
그러나 아르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런데 왜? 대체 왜? 이브 경의 죽음이 충격적이었나?’
황제는 그녀의 이름만 들려도 치를 떨며 싫어하지 않았나?
제 곁에서 쫓아내겠다며 박박 벼르며 못되게 괴롭히기까지 했었다.
‘그럼, 이제까지 그렇게 거부해 왔으면서. 사실은 좋아했다고?’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허…….”
이미 죽은 이의 앞에서 뒤늦게 마음을 깨달았다 한들, 죽은 이는 더 이상 뒤늦은 마음을 알아주지 못할 텐데.
아니, 설사 죽은 이브 로웰린이 그의 마음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문제이다.
내내 줄곧 저를 못살게 괴롭혀온 이가 사실은 저를 좋아하고 있었다?
제가 그녀였더라면 무덤에서도 발딱 일어나 원혼이 되어 이제껏 괴롭힘당해 온 것들을 갚아 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심지어 무덤이 아닌 테오도르의 침실에 있었으니, 그에게 복수하기 딱 좋은 처지가 아닌가.
‘어쩌면 폐하가 미쳐 버린 건 이브 경의 저주일지도 모르지.’
어둡고 음침한 방 안에 시체와 대화하는 테오도르는, 누가 보아도 저주받기 딱 좋아 보이는 모습이었으니까.
아르민은 쓸데없는 생각들을 치우며, 이브 로웰린이 살아생전 사용하던 작은 책상 위에 들고 온 서류를 내려놓았다.
“급한 안건들만 먼저 가져왔습니다. 일단은 그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취소된 폐하의 약혼식을 어떻게 할지가 가장 급한 문제인데…….”
그러고는 그중 맨 위의 것을 들어 설명했다.
“카타리나 양은 그날의 일로 충격을 받아 요양 중이라 하고, 페르디난트를 습격한 암살자들을 지하 고문실에 붙잡아 두었으나 모두 자결하여…….”
“모두, 자결해?”
문득 테오도르가 아르민의 말을 끊어 내며 중얼거렸다.
“네, 애석하게도 배후를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자들의 시신은 지금은 어디 있지?”
아르민은 혹여나 테오도르가 그 시신들까지 이곳으로 데려오고자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일단은 폐하께서 나오시면 말씀을 드리려고, 지하에 두었습니다만…….”
“그럼 그곳에 계속 둬. 내가 다시 확인하지.”
그러나 다행히도 테오도르는 그 정도까지 미쳐 버리진 않았나 보다.
“네, 폐하. 그런데 카타리나 양에게 가 보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누구?”
테오도르가 마치 모르던 이의 이름을 듣는 것처럼 두 눈을 깜빡였다.
“폐하의 약혼녀가 되실 분 말입니다.”
아르민은 손수건을 꺼내 식은땀을 닦아 내며 대답했다.
“그래도 카타리나 양은 폐하의 아기를 임신했고…….”
“아, 그래.”
아르민의 설명에 테오도르가 그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 비식 웃었다.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카타리나의 이름을 읊조리는 테오도르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이 났다.
“그 여자 때문에 이브가 다쳤어. 그 여자를 지키려다가…… 이브가…….”
그는 눈앞에 아르민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사람처럼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나의 이브가 그 여자를 지켜야 했을까?”
그러던 중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목소리 한 자락이 있었다.
[카타리나 양이 내 아이를 가졌다. 마땅히 황족으로 대우하며 각별히 그녀의 호위를 맡아야 할 거야.]바로 자신의 목소리였다.
“아, 그래. 내가…….”
테오도르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내가 이브에게 명령을 했어. 그 여자를 지키라고.”
그 잔인한 명령에 온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던 그녀가 생각이 났다.
“그때 이브는 몸도 좋지 않았는데.”
심지어 그녀는 그날 제 앞에서 쓰러질 뻔하지 않았던가.
“젠장, 내가. 내가…….”
테오도르는 스스로를 향한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불가합니다. 저는 폐하의 호위입니다.]이브는 처음부터 그 여자의 호위를 하기 싫다고 했었다. 그 말에 제가 무어라 답했던가.
[카타리나 양은 나의 약혼녀이니 나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돼.]상처받은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고는 상처받은 그녀를 내버려 두고, 제 팔에 매달리는 카타리나와 함께 다정한 연인처럼 산책을 하러 나갔다.
그 뒤로 끈덕지게 따라붙는 그녀의 눈길을 무시한 채.
모두, 제가 벌인 짓이었다.
“이브는 나와 함께 있고 싶다 했는데, 내가 그 여자한테 보낸 거야.”
그녀의 죽음에 과거의 자신이 기여했다는 것을 깨달은 테오도르는 살짝 맛이 간 눈동자로 거울 속의 자신을 노려보며, 흉흉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이브를 그 여자한테 보낸 과거의 나 새끼를 죽여 버려야 해.”
아르민은 테오도르가 시간을 돌릴 수 없음에 감사해야 했다.
만약 그게 가능했더라면, 그는 당장 과거의 자신을 찾아가 뱃가죽에 칼을 찔러 넣었을 것이다.
거울 속 자신을 노려보는 테오도르는 그만큼이나 스산하고 오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폐하, 지, 진정하십시오. 시간을 돌리는 건 불가능하고…… 일단은 해결해야 할 일들부터 먼저…….”
“…….”
그 말에 테오도르가 눈동자를 스르륵 굴렸다.
그래, 과거의 자신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자신을 죽일 순 없었다.
‘내가 없으면…… 이브는…….’
테오도르는 침대 위의 이브의 시체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도 간신히 저의 성력으로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 사랑스러운 몸이 썩어 땅에 파묻힐 것을 생각하니, 제 심장을 조각내 버리고만 싶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내가 흑마법에라도 걸린 게 아닐까?’
테오도르는 저처럼 사랑스러운 그녀를 박대하였던 과거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그녀에 대해 안 좋은 말들을 끊임없이 속삭였던 카타리나를 떠올렸다.
‘그래, 카타리나, 그 교활한 여자가 나와 이브의 사이를 이간질한 거야.’
그러나 그 생각은 곧바로 무너졌다.
‘아니, 무슨 추한 생각이야? 이브를 의심하고 경계한 건 나잖아. 그 여자를 호위하기 싫다고 했는데도 부득불 보낸 건 나잖아. 그 여자는 부추기기만 했을 뿐이고.’
제가 어디 다른 이들의 말에 휘둘리는 사람이었던가. 그 모든 업보는 스스로가 쌓아 올린 죄악의 탑이었다.
“하하!”
돌연 그의 잇새로 차가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모두 내가 벌인 짓이야. 내가 널 죽인 거야, 이브.”
그 와중에도 그녀를 향한 눈동자는 애틋하기만 했다.
“그래서 날 안 쳐다봐 주는 거로군. 그래서 내게 눈을 떠 주지 않는 거야.”
“폐, 폐하……?”
아르민은 혼잣말을 하는 테오도르를 기괴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저…… 폐하, 일단 카타리나 양을…….”
“당연히 만나러 가야지. 나의 아기를 밴 사랑스러운 약혼녀가 아니신가.”
테오도르는 무섭게 웃으며 답했다.
그 눈빛에 도는 명명한 살의 때문에 아르민은 몹시 불안해졌다.
이러다 꼭 그가 큰 사고라도 칠 것 같아서…….
“다음으로 에른스트 전하의 거취 문제를 정해야 합니다.”
원래 에른스트 2황자는 테오도르의 약혼식 직후 황궁을 나가기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테오도르의 약혼식이 파토가 난 이후 그의 거취가 몹시 애매해졌다.
“에른스트?”
테오도르는 조금 전 저를 찾아와 따지던 에른스트를 떠올렸다.
뜬금없이 이보네를 찾던 그 멍청한 새끼.
이브와 이보네는 다른 사람인데…….
그런 것도 구분할 줄 모르면서, 감히 그딴 눈으로…… 그딴 목소리로…….
테오도르는 에른스트에게 화가 치솟았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아니, 정말 다른 사람일까?’
테오도르가 두 사람을 함께 떠올린 순간, 돌연 강한 두통이 일었다.
“윽…….”
테오도르는 양손으로 머리를 싸매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어지간한 고통에는 반응하지 않는 테오도르가 아파하는 모습에 아르민이 놀라 그를 부축했다.
“폐하! 괜찮으십……! 의사를……!”
“아냐. 부르지 마.”
낙마 이후 기억을 되짚으려 할 때마다 느껴지던 두통과 같은 것이었다.
이브와 함께 있을 때마다 느껴지던 두통이기도 했다.
이 두통 때문에, 테오도르는 그녀를 더욱 거부해 왔다. 그녀를 볼 때마다 머리가 아파서, 괜한 짜증을 내고 성질을 부렸다.
그런데 이제는…… 머리가 반으로 쪼개질 것 같은 이 두통으로 인해, 꼭 그녀가 옆에 있는 것 같았다.
“괜찮아.”
테오도르의 얼굴 위로 만연한 환희가 떠올랐다. 그가 황홀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건…… 이브가 내게 돌아온 거야.”
그는 그 고통마저 기꺼워 기쁘게 눈매를 휘었다. 어찌나 활짝 웃던지, 그 눈꼬리 끝에 작은 눈물방울마저 매달려 있었다.
그런 테오도르를 보며, 아르민은 탄식을 터뜨렸다.
폐하께서…… 정말로 미치셨다…….
* * *
카타리나는 약혼식 당일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사고로 졸지에 모든 걸 잃었다.
황제의 약혼녀가 되는 절호의 순간이었는데, 그 대단한 기회를 놓친 것이다.
난입한 자객들은 자신을 노렸다. 하지만 이상했다.
‘대체 왜 나를 노린 거지? 페르디난트의 세력을 견제하는 이들의 짓인가?’
아무튼 그 와중 이보네가 죽었다.
하필이면 자신을 구하려다가 죽은 게 찝찝하긴 하였으나, 그 여자가 죽은 건 잘된 일이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는 언제든 테오도르를 흔들 수 있는 여자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벤야민은 놀란 카타리나를 진정시키겠다는 이유로 요양을 빙자한 감금을 했다.
그것도, 저택의 가장 후미진 곳. 이 낡은 건물에, 마치 죄인을 다루듯.
‘이게 어떻게 요양이야? 감금이지!’
카타리나는 씩씩거리면서도 테오도르가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렸다.
황제는 이보네 체르니시아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라도, 분명 저를 찾으러 올 것이다.
그렇게 믿고 기다렸으나 생각보다 그의 방문이 늦어지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지?”
카타리나는 괜히 불안해졌다.
“설마, 이제 와 그 여자를 포기하려고?”
그러나 카타리나는 곧바로 불안감을 지워 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를 향한 테오도르의 집착을 익히 옆에서 보아 오지 않았던가.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리면 황제가 찾아와서 나를 꺼내 줄 거야.”
카타리나는 애써 그렇게 스스로를 자위했다. 테오도르의 방문이 부디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라며.
작금의 제 처지가 말도 아니었다.
옷도 제대로 된 것을 못 입었고, 이 낡은 방은 난방도 되지 않아 대낮에도 으슬으슬 한기가 돌았다.
식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며, 관리가 안 된 손톱은 거칠었다.
“내가 어떻게 얻은 기회였는데…….”
까득, 까드득…….
카타리나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반년 전, 이브 로웰린의 주종 문서를 테오도르 황제에게 빼앗긴 이후.
벤야민이 그간 방자하게 구는 자신을 내버려 둔 게 그 주종 문서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는 했으나, 그것을 잃자 박해하는 수준으로 자신을 멸시하고 구박하였다.
카타리나는 저를 핍박하는 벤야민에게 공포를 느끼며 달달 떨었다.
[이제 가치를 다했으니 너를 살려 둘 필요는 없겠지.] [가, 가치를 증명해 보일게요……!]카타리나는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어떻게? 테오도르 황제는 너를 더 이상 만날 생각도 없는데?] [분명 바, 방법이 틀림없이 있을…….] [그래. 네 말이 맞아.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지.]벤야민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테오도르 황제가 돌변한 지점. 그 이후의 시간을 없애는 거야.]시간을 없애는 게 가능할 리 없다. 대신 흑마법으로 기억을 없애는 것은 가능했다.
고난이도의 술식인 만큼 페르디난트의 피를 필요로 했으며, 술식이 깨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시전자에게 큰 무리가 갈 터였다.
벤야민은 언젠가 술식이 깨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이미 한 번, 죽은 루돌프의 술식을 깨뜨렸으니까.
그래서 그는 카타리나에게 흑마법의 서를 건네며 테오도르 황제의 시간을 없애라 종용했다.
카타리나는 울며 자신의 피로 술식을 그렸다.
얼마 뒤, 테오도르 황제의 낙마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만난 테오도르는 정말로 기억을 깨끗이 잃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성공적이었다.
결렬되었던 혼담이 다시 이어졌으며, 페르디난트를 두고서 황제와 거래를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순탄하게 흘러갔다.
이브 로웰린이 이보네 체르니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 과정의 부산물이었다.
그것 외에도 카타리나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가령…… 루돌프 페르디난트와 마르가라테 황후를 죽인 게 다름 아닌 벤야민의 소행이라든지…….
“벤야민…….”
카타리나는 까득, 까득 손톱을 깨물며 그 위험한 남자를 생각했다.
그 남자의 스산한 미소를 떠올리자, 오싹한 한기가 폐부 안 깊은 곳으로 밀려왔다.
* * *
황궁을 떠나 페르디난트 저택에 머물며, 나는 퍽 오랜만에 근사한 호사를 누렸다.
가주와 같은 층에 있는 가장 좋은 방에, 옷장을 가득 채운 좋은 옷과 끊임없이 제공되는 맛있는 음식들…….
내가 페르디난트의 견습 기사로서 이곳에 머물 때는 한 번도 누린 적 없던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럼에도 이 공간이 싫었다.
“어때, 이브?”
둥그런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벤야민이 내게 물었다.
“생활에 불편함은 없어?”
“전혀. 너무 좋은 호사라 과분할 정도야.”
“다행이네.”
그가 생긋 웃으며 뿌듯하게 말했다.
“사용인들을 닦달한 보람이 있어. 널 모시는데 조금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된다고 말했거든.”
나는 그런 그에게 고마우면서도 조금 부담스러웠다.
“나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 주지 않아도 돼. 조금 잠잠해지면 외국으로 떠날 거니까.”
그 말에 벤야민이 멈칫했다.
“떠난다고?”
“응, 일단은 외국으로 떠났다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며 앞에 놓인 푸딩을 한 스푼 떠 올릴 때였다.
“욱…….”
문득 밀려오는 구토감에 스푼을 놓고 헛구역질을 했다. 놀란 벤야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브? 괜찮아? 당장 의사를……!”
“괜찮아, 벤야민.”
나는 곧바로 뛰쳐나가 의사를 데려오려는 그의 팔을 붙잡으며 설명했다.
“그냥 입덧을 하는 거야.”
“입덧……?”
벤야민은 아주 생소한 단어를 듣는 것처럼 내 말을 한 번 따라 하더니, 이내 그 단어의 의미를 깨닫고 표정이 굳었다.
“너 설마…….”
그가 시선을 내려 아직은 납작한 내 아랫배를 쳐다보았다.
“누구의……? 설마, 테오도르 황제의?”
“아니, 내 아이야.”
“…….”
언제나 무감하던 벤야민의 표정이 아주 괴이하게 뒤틀렸다.
“벤야민?”
처음 보는 그 표정에 벤야민을 부르자, 그가 조금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너는 왜…… 이렇게 태평하지?”
“태평하면 안 되는 이유도 없잖아.”
나는 소심하게 항변했다.
“나에게도 드디어 가족이 생긴 거야.”
“…….”
이에 벤야민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네 가족을 지키는 걸 도울게.”
“응?”
“아이가 태어나 무사히 자라도록 페르디난트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게. 그러니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이곳에 더 머물러.”
페르디난트의 모든 것이라니……. 고맙지만 과한 호의였다.
“굳이 그렇게까진…….”
“난 친구잖아. 너의, 하나뿐인.”
그러나 벤야민은 애초에 내 거절은 생각지 않았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는 벤야민 말고도 친구가 더 있었지만, 벤야민은 어릴 때부터 ‘하나뿐인 친구’라는 것에 굉장히 집착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표현을 정정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