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6_5
“어서 이보네 님께 이 기쁜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
테오도르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지금 이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테오도르는 아주 잠시 자신이 무언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보네 님은 어디 계십니까? 항상 같이 계셨으면서…….”
그러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린든은 분명, 제게 ‘이보네’를 찾고 있었다.
“왜 이보네를 이곳에서 찾는 거지?”
“네? 아니, 그게…… 무슨…….”
린든은 저보다 더 당혹스러워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 페르디난트에서 이보네 님을 찾아 데려오신 이후에, 이보네 님을 위해 체르니시아의 다른 생존자를 제게 찾아오라 하셨잖습니까.”
“이보네를…… 페르디난트에서 데려왔다고?”
“네, 지난여름에…… 폐하께서 친히…….”
“……!”
테오도르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린든을 보았다.
내가, 이보네를 데려왔다고?
아니, 아니다.
지난여름, 제가 페르디난트에서 데려온 건…… 이브였다.
그래, 린든이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금 마음이 평안해졌다.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데려온 건 이보네가 아니야. 이브였어.”
“네……?”
이번에는 린든이 잠시간 두 눈을 끔뻑이며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이보네 님의 가명이…… 이브 로웰린이지 않습니까?”
“뭐……?”
얼마 전, 에른스트가 테오도르를 찾아와 제게 이보네를 내어 달라 했다.
테오도르는 이브와 이보네도 구분하지 못하는 그 한심한 이복형제를 쫓아 버렸다.
그런데 린든이 에른스트와 같은 말을 한다.
이브가 이보네라고…….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문득 엄습하는 불길한 예감을 부정하며 목소리를 높이려던 순간이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를 아시죠?]돌연 희미한 잔상과 함께 꼭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브가 저를 향해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애달프고 서러운 표정으로…….
[계속 찾았잖아요. 내가…….]지끈-!
강한 두통이 그의 머리를 옥죄었다.
[내가…….]“윽…….”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한 통증에, 테오도르는 양손으로 머리를 싸매며 바닥으로 엎어졌다.
[내가 이보네예요…….]“크으윽…….”
[내가 이보네예요. 반년 전에 폐하가 페르디난트에 왔을 때…….]“폐하! 폐하……! 의사를……!”
호들갑스러운 린든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져 갔다.
[어떡하지.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 같은데.] [아르민, 네가 대답해. 이건 뭐지?] [페르디난트의 망령은 모두 지워 냈으니, 이제 너를 사랑해도 될까?] [황제의 정부라도 되고 싶었나 보지? 주제에 감히 황후 자리를 바란 것은 아닐 테고.] [너도 나를 사랑해 줄래?] [네게 줄 화대는 동전 한 닢도 아까워서.] [사랑해, 이브.] [더럽고 추악해.] [이-브.]기억 잃기 전과 잃은 후의 기억들이 난잡하게 섞여 떠올랐다.
쏟아지는 기억의 파랑에서 그를 건져 낸 것은 열린 창을 타고 들어오는 작은 종소리였다.
뎅- 뎅-
오후 두 시를 알리는 시계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것은…….
머리 위에서 하늘하늘 떨어져 내린 초록 이파리 하나와…….
[안녕. 이름이 뭐야?]푸르른 녹음 사이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 토끼처럼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어여쁜 이보네.
그리고……
[……이브 로웰린입니다.]홀린 듯이 저를 쳐다보며 속삭이는, 사랑스러운 목소리.
그녀와 저의 재회였다.
그래, 우리는 다시 만났었다.
지난여름, 페르디난트 저택의 어느 나무 위에서. 오후 두 시, 그 약속의 시간에.
[사랑하는 여자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 [사실은 조금 더 천천히 다가가려고 했는데, 날 보는 네 눈이 너무 예뻐서 참을 수가 없었어.] [사랑해, 이브.]술식이 깨지며, 기억이 살아났다.
잃어버린 반년의 기억이.
* * *
10여 년 전.
체르니시아가 반역에 휩쓸려 몰락하고, 그 막내딸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어린 테오도르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미쳐 버렸다.
그리고 그때에 이어 두 번째로 접하는 그녀의 죽음이 그를 완벽히 미쳐 버리게 만들었다.
과거와 지금에 다른 점이 있다면…….
어쩌면 그녀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이나마 있었던 그때와 달리, 이제는 아주 작은 희망조차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브…….”
테오도르는 눈물 젖은 예쁜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이보네…….”
그러나 그 부름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이곳에 없었다.
“보고 싶어, 이브……. 이브…… 이보네…….”
제가, 제 손으로 떠나보내지 않았던가.
생각해 보면 제가 낙마를 하고 기억을 잃은 직후, 이보네는 늘 저를 보며 무언가 대화를 하고 싶어 했다.
[폐하,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 주위를 물려 주신다면…….]하지만 그녀의 간절한 대화 요구를 거부해 온 것은 자신이었다.
어느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제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지치고 무감각한 눈으로 저를 스윽 쳐다보고 말 뿐이었다.
저를 담으며 반짝이던 애정의 빛깔이 사라진 그 눈동자를 보며, 괜히 화를 냈었다.
게다가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제가 이보네를 찾겠다며 손을 잡았던 그 여자는…….
[너구나.]이보네를 학대한 주체였다. 다시 만난 이보네의 새하얀 팔뚝 안쪽 곳곳에 남아 있던 분명한 학대의 흔적들.
테오도르는 카타리나를 본 순간 그 악랄한 짓거리의 원흉이 그 여자란 것을 알아보았다.
하여 그 여자를 위협하고 이보네를 구출해 냈다.
그랬는데, 그래 놓고서, 이보네의 앞에서 그 여자와…….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여자와 벌인 짓거리들을 떠올리자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거짓 놀음을 벌인 것은 약한 축에 속했다. 그 또한 그녀에게 크나큰 상처였음을 알지만, 그보다 더한 과오들이 줄지어 생각이 났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제가 사랑하였던 어린 날의 소녀는 퍽 불우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감추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언제나 그녀의 어린 날의 상처들을 치유해 주길 소망해 왔다.
하여, 다시 만난 그녀의 손목에 남은 상흔을 지워 주었으면서 그 팔뚝에 그 여자가 다시 상처를 남기는 것을 묵과했다.
이보네에게 그 짧은 머리카락이 어떤 과거의 상처인지 알기에 다시 길러 보자 설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그 여자의 앞에서 잘라 냈다.
그 여자에게 주겠다며, 그녀에게 한 번 주었던 제 사랑의 징표를 빼앗으며.
더 이상 체르니시아로 살아가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가문의 복권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검을 들게 될 날은, 온전한 체르니시아의 이름을 되찾은 뒤일 거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보네…… 이브는 그 여자를 위해 다시 검을 들어야 했고, 그 여자를 지키려다가 암살자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죽기 전날 밤에도 보았던 그 미묘한 태도가 생각이 났다.
그렇게 말할 적에 저를 보던 그녀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더라.
[저는 폐하의 정부가 되고 싶지 않아요. 하룻밤 여자가 될 생각은 더더욱 없고요.]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의 저는…….
[카타리나 양은 폐하의 아이를 가졌어요.]그녀의 목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어떤 눈으로 저를 보는지,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니까.
오직, 그 순간 제 안을 가득 채운 열망에만 몰두하는 중이었으니까.
“하, 하하!”
테오도르는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하!”
황제의 그 광기 서린 웃음소리에 모두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죽였어.”
그러나 테오도르는 제 주변의 이들이 어떤 얼굴로 저를 보든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이보네를 죽인 거야.”
가슴이 쥐어뜯기듯 아파 왔다. 테오도르는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면서도 읊조림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이보네를 죽이고, 이브도 죽였어.”
오직 그 하나의 명제만이 세상의 오롯한 진실이라는 듯, 그는 하염없이 그 말만을 읊조렸다.
“내가, 내가 그녀를 죽였어.”
그러다 문득 시계를 보았다.
어느덧 시곗바늘이 오후 두 시를 지나 있었다.
“안 돼, 두 시가…….”
그녀와 만나기로 했던 시각이 지나 있었다.
“두 시가 지났어. 늦으면 안 돼. 이브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벌떡 일어난 그가 헐레벌떡 뛰쳐나갔다. 이제는 10년도 더 된 오랜 약속의 장소를 향해.
기실, 그는 이보네를 잃어버렸던 지난 10년 동안 매일같이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지난여름 다시 그녀를 되찾은 이후로는 발길을 뚝 끊었던 곳이기도 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지.
기억을 잃은 직후에는 어째서 그곳에 다시 찾아갈 생각을 못 했을까?
10여 년간의 습관이 반년 사이 뚝 끊겼는데, 어째서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걸까?
“하, 하아…….”
테오도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약속의 나무를 쳐다보았다.
[안녕.] [아, 안녕……!]새빨개진 얼굴로 말을 더듬으며 인사하는 어여쁜 어린 이보네의 잔상이 흐릿하게 눈앞을 스쳐 갔다.
수십 번을 곱씹어도 어여쁜 그 잔상을 담고서, 테오도르의 두 눈이 서럽게 휘었다.
“안녕……. 안녕, 이보네…….”
그러나 그가 입을 여는 순간 그녀의 잔상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테오도르의 얼굴 위로 떠올라 있던 그 몽글한 미소 또한 파스스 소리 없이 사라졌다.
너무 늦었다.
그녀는 이곳에 없었다.
제가 늦어 버려서, 너무 늦어 버려서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없는 것이다.
“이보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테오도르는 그녀를 찾아 불렀다.
“이보네…….”
감히 제가 담아도 될까,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목이 콱 막혀 왔다.
아프도록 목이 멨다.
그 목 맺힌 목소리로 테오도르는 하염없이 끝내 닿지 못할 소리를 짜내었다.
“보고 싶었어. 네가, 네가 정말 보고 싶었는데…….”
파르르 떨며 뻗어 나간 손끝이 까칠한 나무 기둥을 더듬었다.
“미안해…….”
이미 늦은 사과는 죽은 그녀에게 무엇도 될 수 없음을 알기에.
하여 더욱 처절한 슬픔이 그의 안에서 아우성쳤다.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주인 잃은 사과가 허망하게 주위를 맴돌다가 덧없이 흩어졌다.
마치, 검은 재가 되어 버린 되살릴 수 없는 그의 사랑처럼.
“이브…….”
툭-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 한 방울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윽고, 한 방울의 눈물은 두 방울, 세 방울…… 점차 셀 수 없이 많은 양이 되어 바닥을 적셨다.
이보네를, 그리고 이브를 잃은 그의 세상이 온통 축축하게 내려앉았다.
무너진 세계 속에서 테오도르는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머물렀다.
그의 눈동자를 닮은 찬란한 금빛 태양이 저물고, 그녀를 닮은 창백한 은색의 달이 떠오를 때까지. 쭉 같은 자리에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움직였다.
빛을 잃은 황금색 눈동자에 불현듯 작은 종잇조각 하나가 들어왔다.
테오도르는 천천히 손을 뻗어 종잇조각을 쥐었다.
누군가 고이 접어 숨겨 둔 하얀 종이를 펼치자, 눈물이 나도록 사랑스러운 서체로 적힌 글자들이 빼곡히 그를 반겼다.
이보네의…… 편지였다.
* * *
테오도르의 기억을 가리던 술식이 깨졌다.
“크윽…… 젠장, 젠장……!”
그와 동시에 카타리나의 몸에 반작용이 찾아왔다.
“다 실패했어! 이게 다 이브 로웰린, 그 여자 때문, 쿨럭…… 처음부터 제거했어야…… 쿨럭, 커헉, 크윽…….”
차가운 바닥에 엎어진 카타리나는 피를 토하며 이브 로웰린을 저주했다.
[이제 가치를 다했으니 너를 살려 둘 필요는 없겠지.]그 언젠가 벤야민이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벤야민이 그동안 저를 살려 둔 건 이브 로웰린을 곁에 붙들기 위함이었고, 그는 이제 그 뜻을 이뤘다.
그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눈이 반쯤 돌아 있는 작자이니, 그 잔인하고 악랄한 마법사는 거리낌 없이 저를 죽이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벤야민으로부터 유일하게 저를 지켜 줄 힘을 가지고 있는 테오도르 황제는 더 이상 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 또한 벤야민이 저를 죽이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제가 기억을 잃게 만든 것을 알아차리고서 저를 죽이겠다 길길이 날뛰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벤야민이 그 여자에게 반쯤 돌아 있다면 테오도르 황제는 완벽하게 한 바퀴 돈 자니까.
“젠장, 이렇게…… 이렇게 죽을 수는……! 쿨럭…….”
이러나저러나 죽을 운명이 된 카타리나가 절망에 휩싸여 울부짖을 때였다.
차박, 차박…….
이곳에서 들릴 리 없는 나붓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의 주인은 카타리나의 앞에서 멈추었다.
흰 바지 밑단과 광이 나는 구두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카타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테오도르 황제……?’
순간 테오도르인가 싶었다.
알브레히트 제국에서 검은 머리를 가진 이는 테오도르 황제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어른거리는 시야에 들어온 남자의 얼굴은 자세히 보니 테오도르와 확연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타리나는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당신이…… 왜, 어떻게 이곳에……?”
무료한 시선으로 낡은 방 안을 둘러보던 남자가, 힐긋 시선을 내려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는 둥글게 눈을 휘며 물었다.
“날 부른 게 너야?”
흠칫.
목소리를 듣게 된 순간, 카타리나는 눈앞의 남자가 자신이 기억하는 황궁의 그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름 끼치도록 낮고 고독한 미성.
이건……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위험하고 아름다운 존재를, 카타리나는 오랜 문헌에서 본 적이 있었다.
알브레히트 제국에서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온 존재.
짙은 심연처럼 검은 머리카락에 흐르는 선혈처럼 붉은 눈을 한 고대의 사도.
어둠의 집행관, 테네브리스.
“……!”
남자의 존재를 깨달은 카타리나는 온몸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너한테서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남자는 카타리나의 속을 꿰뚫을 듯 첨예한 눈동자로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카타리나는 숨을 삼키는 소리마저 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이 결계를 만든 것도 너야?”
카타리나는 단박에 고개를 내저었다.
“흐음. 그러게, 너는…… 나를 부활시키기엔 부족해.”
남자는 카타리나의 마력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질도, 양도 한참 부족했다.
“베, 벤야민 페르디난트! 그자가……!”
카타리나가 벤야민의 이름을 언급하던 때였다.
“……페르디난트?”
내내 나른하던 남자의 기운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일렁거렸다.
“그 빌어먹을 새끼의 후손이라고?”
“허억……!
남자의 붉은 눈동자에 기이한 광채가 서렸다.
그 아름다움마저 모두 가릴 만큼 으스스한 눈빛에, 카타리나는 공포에 질려 달달 떨었다.
“페르디난트, 페르디난트…….”
한참 동안 자신의 분노에 잠식되어 있던 남자가 문득 카타리나를 돌아봤다.
살기등등한 그 시선에 카타리나가 히끅 놀라 몸을 움츠렸다.
“너, 살고 싶어?”
목소리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꼭 이런 음산한 음색일 것만 같았다.
“……네, 네!”
카타리나는 죽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좋아, 그럼 거래를 하지.”
남자가 느른한 웃음기를 머금으며 카타리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침 적당한 팔다리가 되어 줄 인간이 필요했다. 아직 그를 담고 있는 그릇은 너무나 불안정했으니까.
남자의 손가락이 카타리나의 이마 위로 닿은 순간.
“흐윽…….”
그의 손가락 끝에서 피어난 검은 연기가 일렁거리며 카타리나의 몸을 삼켰다.
“아아아아아아악!”
카타리나는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다가 힘없이 툭 쓰러졌다.
남자는 그 모습을 무감각한 시선으로 지켜보다가 걸음을 돌렸다.
밖으로 나와 어둠 속을 걷는 남자의 기분이 썩 저조했다.
“페르디난트, 라…….”
하필이면 깨어나자마자 듣는 게 그 이름이라니.
남자는 과거 자신의 곁에 있었던 동료들의 이름을 하나씩 곱씹어 보았다.
페르디난트.
레오브란테.
그리고…… 체르니시아.
“체르니시아…….”
오랜만에 읊조리는 이름자였다.
문득 그녀의 잔상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달빛을 담아낸 길고 곱슬곱슬한 은색의 머리카락과 대지를 닮은 싱그러운 녹색 눈동자.
땅의 인도자, 체르니시아.
그녀가 웃을 때면 온 대지가 싱그러운 녹색 빛깔로 물들곤 했다.
“…….”
망연한 그리움이 밀려오는 순간, 남자는 곧바로 눈앞의 잔상을 지워 냈다.
붉은 눈동자가 다시금 무감하게 가라앉았다.
* * *
한편, 이보네는 남쪽의 어느 섬에서 아주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완벽했다.
따뜻한 날씨, 상냥한 사용인들,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풍경.
그녀의 삶에 누려 본 적 없는 호사였다.
배가 슬슬 불러 온 탓에 그녀의 취미인 나무 위에 올라가 낮잠 자기는 할 수 없었지만, 그것 외에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이보네는 페르디난트 소유의 따뜻한 휴양지에서 태교 여행을 하고 몇 달 만에 돌아왔다.
벤야민은 수도로 돌아온 이보네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그사이, 저택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사용인들은 벤야민이 어느 날 데려온 임신한 여자를 보며 숙덕거렸다.
이보네가 없는 사이 사용인을 모두 갈아 치웠던 까닭에 누구도 그녀를 알지 못했다.
여자는 한번 보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예쁜 미인이었으며, 화려한 드레스 장식으로도 감출 수 없는 부푼 아랫배는 누가 보아도 임신을 한 상태였다.
‘설마 가주님의…….’
‘하지만 출신도 불분명한데…….’
사람들은 낯선 여자를 보며 벤야민의 애인이라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보네와 함께 있는 벤야민의 표정이 아주 꿀이 떨어질 것처럼 달콤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사랑이 뚝뚝 묻어나는 그런 눈빛이었다.
“어서 와, 이브.”
벤야민이 막 마차에서 내리려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며 생긋 웃었다.
나는 그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런 식의 에스코트는 카타리나 같은 여자들이나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서 그 여자를 향해 다정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던 테오도르의 잔상이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테오……!] [저런, 피앙세. 조심해. 그렇게 뛰다가 넘어지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