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6_6
테오도르는 카타리나가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곤 했었다.
그럴 때면 카타리나는 수줍게 웃으며 한때 나를 붙잡아 주던 그 단단한 손바닥 위에 손을 겹쳤고.
테오도르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이따금 그 잘 관리된 머릿결에 입을 맞추기도 하였다.
마치 모두에게 보란 듯 떠들썩한 그 애정 표현에, 나는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돌을 맞은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젠장.’
남쪽의 섬에서 휴양을 하며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기가 막히게 다시 그가 준 상처들이 생각이 났다.
이래서, 이곳에 오기 싫었는데.
“이브?”
딱딱하게 굳은 내 얼굴에 벤야민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혹시 몸이 불편한 건…….”
“아니야, 벤야민. 고마워.”
나는 재빨리 표정을 풀며 그의 손바닥 위로 살포시 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가 힘주어 내 손을 붙잡는 게 느껴졌다.
나는 벤야민을 따라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어때, 이브?”
벤야민이 다소 들뜬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뜯어고쳤어. 이제 완전히 새 저택이라 생각해도 좋아.”
나는 바뀐 저택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의 말마따나 건물 입구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오래전 가문의 몰락으로 숨어들었던 어린 체르니시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바뀐 저택이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벤야민은 마치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조금 낯설지? 하나씩 안내를 해 줄까?”
“아니야. 천천히 혼자 둘러볼게.”
어쩐지 부담스러운 그 호의에 나는 부드럽게 잘라 말했다.
그러나 그는 서운하다거나 실망한 기색 없이 빙긋 웃으며 물러났다.
“그래. 그럼 적당히 둘러보고 와.”
벤야민의 손바닥이 내 머리를 스윽 쓰다듬으며 물러났다.
나는 그가 이렇게 신나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저택을 둘러보는데, 멀리서 숙덕거리는 사용인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제 페르디난트에도 여주인이 생기는 건가?”
“카타리나 님은 성격이 아주 못돼서 예전에 일하던 사용인들이 정말 고생했다는데…….”
“새 여주인은 부디 상냥하신 분이셨으면 좋겠다.”
“너 새 여주인의 얼굴 못 봤어? 그렇게 요정처럼 예쁜 사람이 악독하게 우리를 괴롭힐 리 없잖아.”
그들이 주고받는 소리에 나는 고개가 절로 갸웃해졌다.
오랫동안 여주인이 없던 페르디난트 저택에서 여주인 노릇을 해 온 것은 카타리나였다.
그런데 ‘새 여주인’이라니.
설마…… 벤야민에게 연인이라도 생긴 걸까?
‘하긴. 벤야민도 충분히 그럴 나이가 지났지.’
이때, 이어 들려오는 소리가 내 귀를 사로잡았다.
“그런데 카타리나 님 말이야. 한때는 황제의 약혼녀였다는데…… 정말 안타깝게 됐지?”
“테오도르 황제도 약혼녀의 실종으로 미쳐 버렸다며.”
이게 무슨 소리지?
카타리나가 사라지고, 테오도르가 미쳐 버렸다고?
* * *
저택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벤야민과 함께 식사를 하던 중 불쑥 물었다.
“황제가 미쳤다며?”
“응?”
그 말에 벤야민이 식기를 움직이던 걸 멈추고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듯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아주 미쳐서 사람 행세를 못 한대.”
“……큰일이네.”
나도 그를 따라 무심하게 대꾸했다.
벤야민의 말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었다.
테오도르는 원래부터 사람이 아니라 개차반이었으니, 그가 사람 행세를 못 하는 것과 미쳐 버린 것에는 연관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의 오류를 굳이 지적해 주지 않았다.
그러다 조금 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카타리나는? 정말 실종된 거야?”
벤야민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응. 네가 남쪽으로 떠난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지만 카타리나는…… 황제의 아이를 갖고 있었잖아.”
“맞아. 덕분에 약혼식도 기약 없이 미뤄지게 되어서 참 난감하게 됐지.”
기분이 이상했다.
카타리나는 오래전부터 나를 괴롭힌 여자였다.
그리고…… 내 남자의 사랑을 가진 여자였고, 동시에 내 남자의 아이를 잉태하여 내 아이가 누릴 수 있었을 무수한 것들을 앗아 간 여자였다.
나는 나를 그렇게 괴롭히고 아프게 한 여자의 실종에 안타까워할 만큼 착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그 여자가 내 몸에 남긴 상처만 십수 개였다.
하나, 그렇다 하여 그 여자의 실종이 기쁘거나 통쾌한 것 또한 아니었다.
떨떠름하고 꺼림칙한 마음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카타리나의 실종에 테오도르가 미쳐 버렸다는 소식은,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넘어 불쾌하기까지 했다.
나와의 소중했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남자가, 이제는 다른 여자를 잃고 괴로워한다는 게 퍽이나…….
퍽이나 나를 울적하고 외롭게 만들었다.
나는 결국 그에게 스치는 인연조차 되지 못하고 잊혀졌으나, 카타리나는 이후로 영원토록 그에게 잊지 못할 인연이 되어 그의 기억을 지배할 터이다.
이를 깨달은 순간 느끼고 만 그 섧고도 큰 감정이 숨통을 가로막고 혈관을 옥죄었다.
참 아프게도…….
벤야민은 더 이상 이 주제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나는 서쪽 대륙의 칼리고르 왕국으로 갈 거야.”
“칼리고르 왕국?”
순간 벤야민이 들고 있던 포크를 아래로 뚝 떨어뜨렸다.
작은 쇳소리가 바닥에 부딪쳤다.
“응, 호수가 있는 작은 마을을 찾아볼 생각이야. 난 예전부터 호숫가에 살고 싶었거든.”
“왜……? 저택이 마음에 안 들어?”
창백해진 안색을 한 벤야민이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저택에 오자마자 떠나겠다고 하니 속상한 것이리라.
그의 말마따나 저택은 완벽하게 다른 공간이 된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역시 나는 이곳을 좋아하기 힘들 것 같아. 미안해, 벤야민.”
아무리 겉을 뒤집어 싼 껍데기를 바꾸었다 하더라도, 이곳은 여전히 내게 편안한 공간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숨만 쉬어도 테오도르와 카타리나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내 숨을 아프게 한다.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내가 이제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과 별개로.
“…….”
나와 벤야민 사이에 작은 침묵이 흘렀다.
한참 뒤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섣불리 움직이면 황제가 눈치챌 거야. 네가 황제를 속였다는 걸.”
움찔.
벤야민의 지적에 나는 몸을 떨었다.
그는 모르고 있지만, 나는 테오도르를 속였을 뿐만 아니라 험한 욕설까지 남기고 튀었다.
내가 사실은 살아 있고, 죽은 척 그를 속였다는 걸 테오도르가 알게 된다면…….
‘안 돼. 분명 나를 죽이려 들 거야.’
끔찍한 가정에 나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렇지만 벤야민, 네 힘이면 황제가 알지 못하게 제국을 떠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간절한 희망을 담고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벤야민의 표정이 몹시 어두워졌다.
“실은 네가 없는 사이 황제가 찾아왔었는데…….”
벤야민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몰랐는데, 황제가 성력을 쓰더라. 나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 강한 성력이었어.”
“…….”
“그리고 지금 황제는 안 그래도 카타리나가 사라진 일로 머리가 반쯤 돌아 있는데, 만약에 네가 발견되기라도 하면…….”
가뜩이나 그 인성 나쁜 테오도르가 마침 미쳐 있는 상태라니, 나를 발견하면 죽여도 곱게 죽이진 않을 것이리라.
선연한 공포에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찢어 죽이든가…… 태워 죽이든가…… 말려 죽이든가……. 어쩌면 세 가지를 동시에…….’
식은땀 한 줄기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당장 움직이는 건 위험해. 게다가 넌 홑몸도 아니잖아.”
“으응…….”
“그러니까 서쪽 대륙으로 가겠다느니 그런 소리는 하지 말고 당분간 태교에 집중하자, 이브.”
결국 알브레히트 제국을 벗어나려는 나의 계획은 잠정적으로 미뤄졌다.
* * *
항간에 흉흉하게 나도는 소문과 같이 알브레히트의 황제 테오도르는 완벽하게 미쳐 있었다.
매일 밤, 그는 죽은 자의 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를 아시죠?] [계속 찾았잖아요. 내가 이보네예요. 반년 전에 폐하가 페르디난트에 왔을 때…….]테오도르는 그 목소리가 언제인지 기억했다.
처음 희미하게 떠올랐던 기억은 점차 또렷해져서, 그를 미치게 했다.
그녀에게 사랑한다 말해 주지 못한 게 가장 후회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녀를 앞에 두고 알아보지 못한 제 자신이 가장 후회스럽고, 또 저주스러웠다.
[폐, 폐하의 두통이 너무 극심하셔서 이브 경에게 제가 따로 부탁을……. 죄, 죄송합니다, 폐하! 죽여 주십시오!]테오도르는 자신의 잘못이다 고하는 의사에게 아무런 질책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제 잘못이다.
그깟 두통 때문에 쓰러져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하다니.
“머리통이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었어야지.”
테오도르는 입술을 짓씹으며 중얼거렸다.
왜 하필 그녀를 잊어버렸을까.
다른 건 다 잊어도, 그녀만은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차라리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리지 그랬어, 멍청한 새끼.”
과거의 자신을 향한 참을 수 없는 분노에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졸랐다.
그녀를 잊어버린 주제에 이렇게 살아 숨을 쉬고 있는 제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그러나 미련한 몸뚱어리는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숨 쉴 구멍을 찾아 숨을 터뜨리고 만다.
결국 손이 풀린 테오도르는 책상 위에 이마를 부딪치며 엎어졌다.
주르륵-
그 바람에 찢긴 이마에서 발간 핏물이 흘러내렸다.
“젠장, 이브…….”
테오도르는 헐떡거리며 충혈된 눈동자를 들었다.
성력을 담아 영구 보존을 한 작은 종잇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보네가 남긴 마지막 편지였다.
“이브, 이브…….”
테오도르는 허겁지겁 손을 뻗어 그녀의 편지를 쥐었다.
그 편지에, 이보네는 끝끝내 자신이 이브라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이 저를 위한 배려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착한 이브는 걱정한 거겠지.
혹시나, 아주 혹시나 기억을 되찾지 못한 채로 제가 그 편지를 발견할까 봐.
그래서, 그 편지에 적힌 잃어버린 과거 이야기에 또다시 모자란 새끼처럼 정신을 잃을까 봐.
“이브…….”
굵은 눈물과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려 온 핏물이 작은 종잇장 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의 어느 것도 성력으로 영구 보존된 그녀의 편지를 더럽힐 수 없었다.
그것이 그가 유일하게 잘한 일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편지를 읽고, 읽고, 또 읽다가 날이 밝으면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멀끔한 자태로 앉아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세계에서 그녀가 사라진 이후로, 세상 모든 것들이 무료해졌다.
이따금은 일을 하다가도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 거지?’
그러다 문득 벼락과 같은 깨달음이 찾아올 때면, 그는 스산한 비소를 입가에 띠며 히죽 웃었다.
‘아, 그래, 맞아. 이브, 나의 이브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은 이후, 테오도르는 더 이상 페르디난트를 찾지 않았다.
그가 카타리나와 거래를 하고 페르디난트를 찾아가려 했던 것은 모두 이보네를 찾기 위해서였으며, 이브를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제 이보네와 이브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고, 더 이상 페르디난트에는 이브를 되살릴 고대 어둠의 흔적이 없었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그 빌어먹을 작자가 이브의 시체와 함께 그 고목까지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방법이 영 없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 그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고대의 어둠, 테네브리스의 흔적을.
알브레히트 제국에서는 금기시되어 온 이름이지만, 저 멀리 서쪽 대륙이라면 상황이 조금 다르다.
“아르민.”
테오도르는 손에 쥔 만년필을 내려놓으며 아르민을 불렀다.
마침 오늘 보고할 문건들을 한가득 들고 들어오던 아르민이 쭈뼛 얼어붙으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네, 폐하.”
아르민은 테오도르의 이마에 난 상처를 힐긋 훔쳐보았다.
물론 저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잘생긴 외모는 여전히 굉장했지만, 최근 들어 황제의 얼굴은 다른 의미로 굉장했다.
누구든 눈앞에서 거슬리기만 하면 눈빛으로 찢어 죽여 버릴 것만 같은 흉흉한 광채가 도는 황금안.
그리고 그 눈 아래 피부는 다소 거뭇거뭇하여 흉포한 기운을 더욱 짙게 만들어 주었고.
매일 밤 무슨 광포한 짓들을 벌이는지, 그의 살갗을 새롭게 장식하는 상흔들하며…….
게다가 무엇보다 무서운 건 바로 저 지독히도 낮고 으스스한 목소리……!
황제는 더 이상 예전처럼 험악한 비속어를 사용하지도, 웃으며 상대를 비꼬지도 않았다.
그저 아주 가끔씩, 정말 딱 필요할 때만 입을 열어 짤막한 몇 마디를 꺼내곤 말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한 번씩 입을 열 때마다 흘러나오는 그 목소리가 무척이나 음산하고 오싹하여 아르민은 몸을 떨어야 했다.
“케르벨 왕국에서, 답신은.”
제대로 된 문장이라고도 할 수 없는 짤막한 어절들에도 아르민은 곧바로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아, 그러잖아도 오늘 아침에 막 답신이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그러나 아르민의 목소리는 점차 흐릿하게 잦아들었다.
이에 내내 책상 위의 서류를 응시하던 테오도르가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서늘한 그 시선에 닿은 순간 아르민이 ‘히이익’ 소리를 삼키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불가, 불가하다고…….”
“불가하다?”
테오도르는 최근 서쪽 대륙의 강자인 케르벨 왕국에 다소 무리한 요구를 했다.
왕국의 국보인 테네브리스의 관을 내놓으라고.
그리고 당연하게도 케르벨 왕국에서는 거절을 해 왔다.
“네, 그, 어떤 막대한 보상을 준다 해도 불가하다고…….”
아르민이 테오도르의 눈치를 힐긋 살피며 그들을 대신해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 당연한 반응이지 않습니까! 무, 무려 왕국의 시조 왕이 남긴 국보인데…….”
피식.
그러나 테오도르의 잇새로 짧은 헛웃음이 흘러나오는 순간 아르민은 얼어붙고 말았다.
테오도르는 마치, 그들의 거절을 기다린 사람처럼 비뚜름히 웃고 있었다.
“참 안타깝군.”
“폐하?”
“되도록 평화롭게 해결하고 싶었는데.”
“평화롭게……? 그, 그게 무슨 뜻이온지…….”
“그쪽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내어 주지 않으니…….”
아르민은 덜컥 불안한 마음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의 그런 불안에 쐐기를 박듯, 테오도르가 나른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전쟁이라도 벌여야지 않겠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테오도르는 지금 그들의 거절을 기뻐하고 있었다!
아르민의 단정한 얼굴은 삽시간에 사색이 되어 버렸다.
“네, 네? 폐, 폐하! 자, 잠시만, 잠시만 제가 무언가 잘못 들은 것 같은……!”
“그쪽 왕한테 다시 편지를 보내.”
테오도르는 순식간에 얼굴 위에 웃음기를 싸악 지우며 말했다.
“알브레히트는 대륙의 평화를 원한다고.”
그렇게 말하는 테오도르는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평화의 파괴자 같았다.
그러나 아르민은 차마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울상이 되어 고개를 푹 수그렸다.
“네, 폐하……. 알겠습니다…….”
설마, 정말로 전쟁을 일으키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만 테오도르는 언제나 ‘설마’ 하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상관이질 않나.
한숨이 푹푹 새 나왔다.
보조 책상 위의 서류를 하나씩 정리하던 아르민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아 참, 폐하.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는 만나 보지 않을 겁니까?”
“…….”
순간 아르민은 이 방에 발을 들인 이후 처음으로 테오도르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본 것 같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던 듯, 테오도르는 어느새 평소와 다름없이 완벽한 자태로 처리할 서류들을 살폈다.
사락, 사라락-
종잇장 넘어가는 소리만이 고요한 집무실의 적막을 드문드문 깨뜨렸다.
“폐하……?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는…….”
“미룬다.”
아르민이 재차 묻자, 그제야 테오도르가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선은 여전히 서류 위에 고정한 채로.
“네, 알겠습니다.”
아르민은 몇 가지 보고를 더 하고서 집무실을 나갔다.
달칵.
마침내 혼자 남은 테오도르는 아르민이 옆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심하게 서류철을 넘기다가 불현듯 들고 있던 만년필을 손에서 놓쳤다.
툭, 데구루루-
“…….”
테오도르는 한참 동안 말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웠다.
나릿한 숨결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살아 있는 그녀의 가족.
이전이라면 제일 먼저 불러들였을 터이지만…….
“나중에, 조금 더 나중에…….”
테오도르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괴롭게 중얼거렸다.
아직은 그녀의 가족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너를 찾을 방도를 손에 넣은 그 뒤에…….”
* * *
해가 저물고 밤이 되면, 그녀의 목소리는 어김없이 사방에서 밀려와 그를 잠 못 들게 만들었다.
[조금 많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좋아했습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더러운 감정은 아니었어요.] [당신의 경멸이 서러울 만큼, 애틋하고 소중한 감정이었습니다. 폐하를, 참 많이 좋아했어요. 정말 많이 사랑했어요.]저를 사랑했다고 고백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이다지도 냉랭하여서, 아주 작은 애정 한 톨 찾을 수 없었다.
[더 이상 폐하를 좋아하지도 않고,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더러운 눈으로 폐하를 보지도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그러나 테오도르는 그 차가운 목소리마저 기꺼워서, 흐리게 웃으며 밤의 황궁을 걸어 다녔다.
[저는 폐하 안 좋아합니다.]“하지만 나는 널 좋아하는데.”
[저는 폐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요.]“상관없어. 내가 널 좋아하니까.”
[만나서 X같았고, 다신 보지 맙시다.]“미안해. 내가 아무리 X같아도 한 번만 봐줘. 네 말대로 나는 X같은 새끼라서 네가 싫다 해도 널 다시 만나러 갈 거야.”
[부디 유병장수하시길.]“그럴게. 네 말대로 오래오래 살 테니까, 너의 X같은 테오도르가 어떤 꼴로 살아가는지 봐 줘. 이브…….”
중얼중얼 혼잣말을 읊조리며 어둠 속을 헤매는 모양새가 퍽 괴기스러웠다.
하여 황궁의 사용인들은 일찌감치 황제의 주위를 피해 있는 터였다.
공연히 미친 황제의 눈에 띄었다가 무슨 사달이 날지 몰랐으니까.
“안녕하세요, 형님.”
문득 부드러운 목소리 한 자락이 테오도르의 평온한 고요를 깨뜨렸다.
고개를 들자 달빛을 받아 화사한 백금발을 불어오는 실바람에 흩트린 에른스트의 모습이 보였다.
“고대의 어둠이 남긴 성물을 찾고 있다면서요?”
에른스트는 온화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물었다.
그런 에른스트의 분위기가 평소와 조금 달랐다.
그러고 보니 이브가 죽은 이후로 그가 조금 달라졌다.
테오도르는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으나 이내 신경을 껐다.
에른스트 따위에게 신경을 쏟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시간이었다.
테오도르의 밤은 온전히 그녀의 소리로만 가득 찬 시간이었기에.
스윽-
테오도르는 대꾸 없이 그대로 에른스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에른스트는 그를 붙잡는 대신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테오도르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차박, 차박, 차박, 차박-
어느덧 테오도르의 걸음이 닿은 곳은 어린 날 이보네와 함께 노닐었던 약속의 나무 앞이었다.
[앞으로 매일 오후 두 시 정각에 이곳에서 만나는 거야. 에른스트 몰래, 너와 나 둘이.]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테오도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이브, 나는 너를 살릴 거야.”
그가 꺼칠꺼칠한 나뭇결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거야.”
고대의 어둠이 남긴 성물은 흑마법의 산물이기도 했다.
‘브리힘 신의 가호’라고도 일컬어지는 고대의 사도들이 남긴 네 가지 힘.
그것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마법과 흑마법은 본디 같은 원리를 지녔다.
한 가지 다른 것이라면, 페르디난트의 술법과 달리 테네브리스의 흑마법은 세상의 섭리를 어긴다는 것.
참 우스운 소리다.
그 섭리라는 것도 결국, 테네브리스의 패배로 인해 정해진 질서이니.
“조금만 기다려, 이브. 세상의 섭리를 거슬러서라도, 너를 살리러 갈 테니까.”
테오도르는 아무도 없는 나뭇가지 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나를 미워하고 욕해도 좋아. 냉대하고 외면해도 좋아. 그러니까…… 네가 숨 쉬는 모습만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줘.”
최근 테오도르가 테네브리스의 흔적을 좇는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다.
덕분에 아주 과거에 나돌았던, 황제가 고대 어둠의 현신이라는 소문에 신빙성이 더해지고 있었으나 테오도르는 그저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아주 어렸던 때부터도 그딴 것에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었다.
“보고 싶어, 나의 이-브.”
축축한 목소리가 애정을 담뿍 담은 채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 * *
일주일 뒤.
테오도르는 서쪽 대륙을 향해 전쟁을 일으켰다.
약혼녀를 잃고 미쳐 버린 황제가 결국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온 대륙을 휩쓸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페르디난트 저택에서 숨죽이고 있던 나는 그 기회를 틈타 외국으로 몸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