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7_3
거센 항의가 이어졌으나, 셀린느는 흔들리지 않고 이어 말했다.
[테오도르 폐하의 서쪽 대륙 정복이 마무리되어 간다고 하니, 곧 귀환하시면 정식으로 말씀을 드릴 생각입니다. 그 이후의 판결은 폐하께 맡기지요.]마물들의 범람 이후 가문의 영광을 다시 이끈 젊은 셀린느 레오브란테는 테오도르의 외사촌이기도 했다.
성인이 된 이후 뒤늦게 성력을 발현하였다는 그녀는 브리안과 태중 약혼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브리안 체르니시아……. 난리 중 실종되었다더니, 그쪽으로 숨어들었던 건가.’
브리안의 생존 사실은 벤야민에게 퍽 기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벤야민은 이보네의 막내 오빠이기도 한 그 남자의 이름을 곱씹으며 눈가를 찡그렸다.
‘이브가 알아선 안 돼.’
제 가족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브는 틀림없이 그를 만나러 올 것이다.
그리고 복권된 체르니시아 가문의 일원이 되어 이곳에서 살아가겠지.
어쩌면 테오도르 황제와 다시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
벤야민은 그녀를 테오도르의 앞으로 다시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
지난 4년간 그녀는 딱히 테오도르를 그리워한다거나 하는 기색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따금 황제에 대한 소문이 들려오면 콧잔등을 찌푸리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더 이상 그 남자에게 아무런 마음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테오도르는 그녀의 아이들의 아버지였다.
그러잖아도 얼마 전 남자 보호자 운운하던 그녀가 아닌가.
‘또다시 황제에게 이브를 빼앗길 순 없어.’
벤야민은 주먹을 강하게 말아 쥐며 생각했다.
오랫동안 숨겨 온 그녀를 빼앗기는 것은 5년 전의 그때로 충분하다고.
벤야민은 일주일 전, 마지막으로 그녀와 만났던 때를 잠시 떠올려 보았다.
[너도 조심해, 이브. 마물들의 힘이 강해지고 있어.] [응, 뭐…… 조심할게.]그녀는 저의 충고를 한 귀로 흘려듣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는 마물 따위 검으로 때려눕히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벤야민이 정말 걱정하는 건 마물이 아니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체르니시아의 어린 검이었던 그녀가 고작 마물들 몇 마리를 상대하지 못할 리 없었다.
다만 그가 걱정하는 건…….
‘혹여나 테오도르 황제와 이브가 만나기라도 하면…….’
벤야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지금 황제가 정복하였다는 케르벨 왕국은 이보네가 머무는 칼리고르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칼리고르 왕국은 지도에서도 쉽게 찾기 힘들 만큼 작은 나라였고, 그중에서도 아르벨라는 가장 한적한 곳에 있는 시골 영지였다.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두 사람이 마주치는 일이 없겠지만…….
‘괜히 마물들을 상대한다고 검기를 사용했다가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면 곤란해질지도 몰라.’
물론 이브는 눈치가 없는 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 생각 없이 검기를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멍청한 마물들이 그녀의 아이들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벤야민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외면하며 한창 무어라 떠들고 있는 황제의 보좌관을 쳐다보았다.
이때였다.
벌컥,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였다.
“폐하의 부대에서 연통이 왔습니다!”
황제의 소식을 들고 온 남자의 말에 아르민이 화색을 지으며 물었다.
“오, 곧 귀환하신다던가?”
“아니요, 그게…….”
남자는 잠시 말을 더듬더니, 이어 답했다.
“폐하께서 칼리고르 왕국으로 향하신다고 합니다!”
“뭐?”
“이미 국경을 넘으셨고, 칼리고르의 수도를 함락하기 직전이라고 합니다!”
케르벨을 정복하면 귀환할 줄 알았더니 그새 또 다른 나라로 향했다는 소식에 아르민은 머리가 아팠으나, 이어 그 수도를 함락하기 직전이라는 소식에 그만 머리를 싸매고 주저앉았다.
“칼리고르? 그건 또 대체 어디야?”
“케르벨 옆에 붙어 있는 그 작은 나라 아닌가?”
“분명 조금 전에 케르벨을 정복하셨다고…….”
“허어…….”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회의장 안을 가득 메웠다.
그 와중 벤야민의 얼굴이 몹시 창백해졌다.
황제의 부재를 견뎌야 하는 아르민보다도 더욱 나쁜 안색이었다.
* * *
간신히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재웠다.
훌쩍훌쩍 울던 아이들은 금세 지쳐 잠들고 말았다.
시가지의 극장에서 의 공연만 보고 돌아가려던 원래의 계획과 달리, 호텔을 잡아 1박을 하게 되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어.”
나는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조금 전 광장에서 보았던 장면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선득했다.
영주의 기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마물이 나타났고, 광장을 덮쳤다.
마물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정확히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노리던 마물을 보는 순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마침 함께 있던 기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서 냅다 광장을 향해 달려가 마물의 몸을 베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거…… 분명히 검기였는데.’
나는 협탁 위에 놓인 다람쥐 인형과 장난감 단검을 힐긋 쳐다보았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코를 훌쩍이면서도 다람쥐 인형과 장난감 단검을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젤리꼬……!]오딜리아는 바닥에 굴러서 꼬질꼬질해진 다람쥐 인형을 꼬옥 끌어안으며 말했다.
[젤리꼬가 에르랑 리아 지켜 조써!] [마쟈! 젤리꼬가 몬생긴 개물 물리쳐써!] [젤리꼬는 지쨔 다람찌 욘사야!]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정말로 다람쥐 용사가 그들을 지켜 준 거라고 믿는 것 같았다.
‘하지만…….’
꼬질꼬질해진 다람쥐 인형과 단검을 응시하는 내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그건 분명 검기였어.’
난리 중에 제대로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나 또한 두 눈으로 정확히 본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직감적으로 검기를 느낄 수 있었다.
‘설마 에르가 검기를 발현한 걸까?’
내가 검기를 발현한 게 세 살이었으니 지금 에르빈의 나이와 딱 일치했다.
아이가 고대 사도의 가호를 발현하였으니 퍽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었으나…….
체르니시아의 보호 아래 자랐던 어린 시절의 나와 달리, 에르에게는 마땅히 아이를 보호해 줄 울타리가 빈약했다.
고대 사도의 힘은 마물들이 범람하는 이 세상에서 엄청난 권력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 큰 힘을 감당하기에 에르빈은 아직 어렸다.
누군가는 이용하려 들 것이고,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더 강한 힘을 틀어쥐고 있어야 한다.
아이가 자랄 때까지 내가 옆에서 울타리가 되어 주겠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영원한 울타리는 없다는 사실을, 나는 과거 체르니시아의 몰락과 테오도르의 변심으로 깨달았다.
나는, 그리고 아르벨라 영지의 작은 호수 저택은 에르빈의 힘을 보호하기에 너무 작았다.
‘우선은 저택으로 돌아가서 에르가 검기를 발현한 게 맞는지 다시 확인해 봐야겠어.’
나는 아이들의 잠자리를 한 번 더 살폈다.
이불을 제대로 덮어 주려는데, 오딜리아의 까진 무릎이 눈에 들어왔다.
깨끗한 무릎 위에 난 상처를 보자 속이 상했다.
‘흉터가 남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흉터, 하니 문득 예전에 내 손의 흉터를 치료해 주었던 테오도르가 생각이 났다.
무심결에 손목을 보자 그 후로 새로이 생겨난 상처가 희게 남아 있었다.
카타리나가 남긴 상처였으며, 동시에 테오도르가 묵인한 상처이기도 했다.
내 상처를 지워 주었던 남자는 내게 더 아픈 상처를 새로이 남겨 주었다.
“나쁜 새끼…….”
그때의 기억에 기분이 나빠지려는 찰나였다.
“죄, 죄송해요, 주인님.”
“아니야, 로라의 잘못이 아니잖아.”
나는 로라를 돌아보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방금…….”
로라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로 울먹였다.
그제야 그녀가 방금 내가 중얼거린 혼잣말을 들었다는 걸 깨닫고서, 민망한 마음에 머쓱하니 답했다.
“그건 로라에게 한 말이 아니야. 그리고 로라도 많이 놀랐을 텐데, 오늘은 먼저 쉬어.”
에르빈과 오딜리아, 그리고 로라까지 모두 재우고 나니 혼자 깨어 있는 방 안이 퍽 적적했다.
시간이 늦었으나 잠이 오지 않아 복도로 나왔다.
따뜻한 우유라도 마실 생각으로 층계 아래로 내려가는데, 1층 로비에 웅성웅성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앗, 마녀님이다!”
“어디? 어디?”
“오, 마녀님!”
나를 발견한 사람들이 이쪽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마녀님! 낮에 광장에서 활약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기사님들 대여섯 명이 겨우 상대하는 마물을 그렇게 손쉽게……!”
“아르벨라를 마물로부터 지켜 주세요!”
“아르벨라의 마녀님!”
떠드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 주자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 사람들이 ‘님’ 자만 붙이면 다인 줄 아나?
“내가 마녀라면서? 마녀가 그런 착한 일을 할 것 같아?”
심드렁한 목소리로 묻자 사람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이내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나를 향해 외쳤다.
“하지만 마녀님은 오늘 저희를 구해 주셨잖아요!”
“내가 언제?”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녀님. 저희가 다 봤다고요.”
“보긴 뭘…….”
“저희를 위해 마물을 단칼에 썰어 버리시던 그 멋진 모습…….”
“너희를 위한 게 아니…….”
“마녀님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큰 피해가 있었을 거예요.”
“…….”
딱히, 사람들을 수호한다느니 그런 거창한 의도는 없었다.
그저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구하기 위해 움직였던 것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무슨 반박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졸지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마녀님은 아르벨라의 수호자입니다!”
“기사님들보다도 더 믿음직스럽다고요!”
사람들은 주먹을 불끈 쥐며 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마치 다람쥐 용사 제리코의 이야기를 나누는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보는 것 같았다.
“선물을 받아 주세요, 마녀님.”
사람들이 내게 꽃이며, 빵이 든 바구니 따위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 들긴 했지만 이런다고 내가 저들의 말대로 아르벨라를 수호하는 영웅이 된다느니 하는 일은 결코 없을 터이다.
무엇보다도, 괜히 검기를 쓰는 여자가 아르벨라에 있다는 게 알려져서 좋을 일이 없었다.
이 시골까지 이따금씩 테오도르의 소문이 들려오는 것처럼, 내 소문이 테오도르에게 들리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최대한 자중하며 살아야 한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위해서라도.
“난 아르벨라를 수호한다느니 그런 거 할 생각 없어. 내일 날이 밝으면 바로 호수 저택으로 돌아갈 거야.”
나는 사람들을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아이가 둘이나 되어서 아이들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바쁘다고.”
그러자 사람들이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혼자서 세 살 난 아이를 둘이나 키운다는 나의 말에 차마 그들은 붙잡지 못했다.
내게 따라붙는 시선을 무시하며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
[알겠니, 이보네? 약자들을 보호하는 게 체르니시아의 의무란다.]문득 오래전 군터 할아버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해 주던 말이 생각이 났다.
군터 할아버지는 어린 내게 알려 주었다.
고대 마물로 뒤덮여 있던 세상을 구했던 땅의 인도자 체르니시아.
그리고 그녀의 유지를 이은 우리 가문에 대해.
[네가 체르니시아라는 사실을 언제든 잊으면 안 돼.]오랜만에 생각나는 군터 할아버지의 따스한 목소리에 왠지 울컥해졌다.
오스발트의 사생아였던 나는 약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체르니시아의 유지에 기대어 성장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체르니시아라는 사실이 언제나 자랑스러웠으며, 뛰어난 체르니시아가 되기 위해 정진을 다해 왔었다.
내 눈앞에서 체르니시아가 불타고 리하르트 오라버니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그렇지만 자랑스러운 나의 체르니시아는 말도 안 되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이제는 사라진 이름이 되었다.
언제나 정도를 지키며 약자를 지키고 보호하던 과거의 업적들도 더 이상 기억하는 이가 없었다.
새삼 그 사실이 서러웠다.
‘이제 난 체르니시아도 아닌데, 뭐.’
나는 삐딱한 마음을 품고서 속으로 다짐했다.
마물들이 나타나 아르벨라의 사람들을 위협하든 말든 딱히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내게 중요한 건 사랑스러운 나의 다람쥐 용사 꿈나무들과 호수가 보이는 저택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거니까.
그러나 바로 이튿날, 나의 다짐은 깨지고 말았다.
* * *
내 손에 들린 검이 허공 위로 긴 궤적을 그리며 움직였다.
쇄애액-!
그럴 때마다 수십 마리의 마물들이 검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꾸웩!
꾸웨에엑!
끼에에엑!
급기야 몇몇 마물들은 나를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달아나는 마물들을 향해 눈을 찡그리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젠장!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가 왜!’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날이 밝으면 아이들과 함께 호수 저택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괜히 따뜻한 물을 가지러 아래로 내려갔다가, 사람들의 숙덕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이 화근이었다.
[북문 바깥의 엘로리 숲에 지금 기사님들이 마물을 물리치러 갔는데, 고전하고 있나 봐.] [마녀님이 도와주시면 좋을 텐데…….] [하지만 마녀님은 바쁘시니까…….] [마녀님은 세 살배기 아기가 둘이나 있으시다고…….]사람들이 은근히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신경 쓰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 신경이 쓰였다.
하필이면 그 순간 다시 한번 떠올리고 만 군터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그들을 무시하려는 내 양심을 쿡쿡 찔러 왔다.
[알겠니, 이보네? 약자들을 보호하는 게 체르니시아의 의무란다.] [네가 체르니시아라는 사실을 언제든 잊으면 안 돼.]결국 나는 검을 들고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제대로 된 검이 없었다.
어제 마물을 물리친 것도 마침 함께 있던 기사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검기를 발현한 체르니시아에게 도구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제 에르빈이 다람쥐 용사 제리코의 장난감 단검으로 나무를 무너뜨린 것과 같은 이치였다.
나는 1층 로비 벽면에 걸려 있던 투박한 장식용 검을 빌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줄곧 지금과 같은 상태였다.
꾸웨에에에에에엑-!
꾸웨에에에에에에엑-!
시끄러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마물의 등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러자 마물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나는 재빨리 몸을 날려 마물의 위로 뛰어올라 검을 뽑았다.
그리고 이어 달아나는 마물 세 마리를 한 번에 베어 버렸다.
엘로리 숲을 시끄럽게 하던 마물들은 모두 죽은 시체가 되었다.
“와…….”
“굉장해…….”
“멋있어…….”
기사들이 입을 떡 벌리고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마물들의 사체를 발로 툭 차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던 기사들을 스쳐 지나갔다.
숲의 입구에서 아르벨라의 영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 마녀님! 마물들로부터 아르벨라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녀 아니에요.”
째릿 노려보자 영주가 재빨리 정정했다.
“아, 죄송합니다. 다들 당신을 그렇게 부르기에 그 호칭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브 님.”
영주는 내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작년 겨울에는 그의 둘째 아들인 데릭이 아르벨라가 떠들썩하도록 요란하게 내게 구애를 하지 않았나.
“이브 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우리 아르벨라에는 마물들을 진압할 병력이 부족합니다. 이브 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하지만 난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걸요.”
분명 저 영주는 데릭과 그의 형제들을 제 손으로 키우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그가 육아를 해 봤다면 지금 이 부탁이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 하기에 얼마나 염치없고 뻔뻔한 것인지 충분히 알 텐데.
“시가지의 치안은 이제까지처럼 영주성의 기사들이 돌볼 것입니다. 그저 이브 님께서 일주일…… 아니, 보름에 한 번만이라도 마물 토벌에 함께해 주시면…….”
영주의 간절한 목소리를 차마 무시하기가 힘들어 벗어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던 나는 보름에 한 번이라면 크게 무리가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수는요?”
“네?”
“설마 맨입으로 받아먹으려 했어요?”
“그, 그 말씀은……! 저희를 도와주시겠다는……!”
영주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렇지만 아주 많은 보수를 줘야 할 거예요.”
“오, 마땅히 합당한 보수를 드려야지요!”
마침 슬슬 돈이 떨어져 가던 중이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는 핑계로 꽤 오랫동안 노동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참에 용병 일이라도 해 볼까?’
문득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물들의 범람 이후로 용병들의 몸값이 많이 올랐으니, 조금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적잖은 돈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한 삼십억 골드 정도만 모으면 칼리고르를 벗어나서 케르벨 같은 큰 왕국의 귀족 신분을 살 수 있을 거야. 그럼 에르빈이 정말 검기를 발현했다 하더라도 지켜 줄 수 있는 울타리가 생기는 걸 테고…….’
그러다 나는 그게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큰돈을 고작 용병 일로 어떻게 모은단 말인가.
괜히 모으지도 못할 돈에 욕심을 부렸다가 공연히 나에 대한 소문만 퍼져서 테오도르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것을 떠올린 나는 재빨리 영주에게 조건을 달았다.
“그리고 조건이 있어요. 나에 대한 소문이 아르벨라 바깥으로 번지지 않게 막아 주세요.”
“그럼요, 그럼요! 무엇이든 말씀하시는 대로 이행하겠습니다!”
영주는 기뻐하며 미리 준비하기라도 한 듯이 곧바로 종이와 펜을 꺼내 계약서를 뚝딱 만들어 냈다.
나는 그곳에 서명을 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에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잠옷 차림의 에르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모니!”
문을 열자마자 저 안쪽에 있던 에르빈이 짧은 두 다리로 쪼르르 달려와 내게 포옥 안겼다.
“일찍 일어났네, 에르.”
나는 한 팔로 에르빈을 안아 들며 아이의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네, 구론데 진쨔 개물(괴물) 때려잡꼬 오신 거예요?
그렇게 묻는 에르빈의 두 눈이 초롱초롱했다.
나를 보며 ‘마녀님’이라 부르던 사람들의 시선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겠지?
“누가 그래?”
“로라가요! 진쨔 머싯써요, 어모니! 꼭 다랑지 욘짜(용사) 같아요!”
에르빈에게 ‘다람쥐 용사 같다’고 불리는 게 얼마나 큰 칭찬인지 알았기 때문에, 하하 웃고 말았다.
“그런데 리아는 어디 있니?”
“리아…… 어?”
에르빈이 뒤를 돌아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요기 이썬눈데?(여기 있었는데?)”
* * *
한편, 같은 시각.
이미 칼리고르의 수도를 함락한 테오도르는 칼리고르 왕국의 왕자에게 성물을 강탈하는 중이었다.
그가 케르벨의 옆에 붙어 있는 이 작은 나라의 왕성을 함락하는 데에 불과 사흘도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선조들의…… 크윽…….”
“그러기에 빨리 내놨으면 좋잖아.”
테오도르는 자신의 앞에 꿇린 칼리고르의 젊은 왕자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에는 ‘시간의 거울’이라 불리는, 퍽 평범한 이름과 달리 상당히 기괴한 외형을 지닌 강탈한 성물이 들려 있었다.
‘저주 의식에나 쓸 법하게 생겼군.’
테오도르는 반투명한 검은 유리판을 지닌 거울 위로 제 얼굴을 비춰 보았다.
이게 정말 성물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이번에도 가짠가?’
검은 거울에서 특별한 기운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였다.
얼핏 거울의 유리판 위로 이보네의 얼굴이 스쳤다.
‘이브……!’
테오도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거울 위로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이었다.
슈우욱-!
그의 몸이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털썩!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간 테오도르는 폭신한 풀밭 위로 떨어졌다.
애석하게도 통증은 없었다.
‘뭐지?’
풀밭 위에 드러누운 테오도르가 깨끗한 하늘을 올려다볼 때였다.
“잘샌긴 아조씨, 안넝.”
조금 전 거울 위로 얼핏 스쳤던 얼굴이 그의 앞에 휙 들이밀어졌다.
흰 피부, 곱슬거리는 은색 머리, 촘촘한 속눈썹 아래 반짝 빛나는 녹색 눈동자.
얼핏 사람이 아닌 것만 같은 요정처럼 사랑스러운 얼굴을 한…….
“아조씨는 누구야?”
……아주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이브……?’
테오도르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자아이를 멍하니 올려다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는 아주 잠시, 이번에야말로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온 것에 성공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눈앞의 작은 여자아이는 꼭 어린 날의 이보네를 보는 것처럼 그녀와 닮았으니까.
만약 정말 과거로 온 것이라면 조금 심각한 일이다.
눈앞에 보이는 여자아이는 대강 보기에도 서너 살가량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저는 칼리고르를 함락한 20대 중후반의 모습 그대로이고…….
이렇게까지 먼 과거로 와서야,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은가.
이때였다.
“아조씨 말 몬태(못해)?”
여자아이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두 눈을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