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7_5
쉬지 않고 전쟁을 일으키던 황제가 돌연 출전을 멈추었다.
근 4년 만에 처음이었다. 황제가 전장을 누비지 않고 건물 안에 틀어박힌 것은.
서쪽 대륙의 작은 왕국 칼리고르를 정복한 테오도르는 왕국의 고서들이 모인 서고에 틀어박혀 아침부터 밤까지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를 연구하는 듯 열중하고 있는 그의 앞에는 얼마 전 칼리고르의 왕자로부터 강탈한 검은 거울이 놓여 있었다.
탁-
테오도르는 읽고 있던 마지막 서책을 소리 나게 덮었다.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자 창밖으로 어두워진 밤하늘이 보였다.
밤하늘을 보며, 테오도르는 두 개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밤하늘처럼 예쁜 머리 색인걸요.] [아조씨 머리카랑 에뻐. 밤하눌이야.]참 기이한 일이다.
이제까지 만난 이들 중 제 머리카락을 두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딱 둘뿐이었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 여자아이는 대체 뭐지.’
시공을 초월한 듯한 공간 속에서 이브와 닮은 작은 여자아이를 만났다.
갑작스럽던 아이와의 만남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그 이후로 여러 번 거울을 들여다보았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브를 닮았던 그 작은 여자아이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
인상을 찌푸린 테오도르가 검은 거울을 들고서 서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 서 있던 린든이 그런 테오도르의 뒤를 따랐다.
테오도르가 향한 곳은 칼리고르의 왕자 프레데릭이 갇혀 있는 방이었다.
진흙을 빻아 만든 것처럼 생긴 칼리고르의 왕자는 미리 왕성을 빠져나간 칼리고르의 국왕이 다시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올 때를 대비하여 붙잡아 둔 인질이었다.
“흐익!”
테오도르의 등장에 방 안에 갇혀 있던 프레데릭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테오도르는 프레데릭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러고는 프레데릭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
“…….”
두 사람 사이에 으스스한 침묵이 돌았다.
테오도르는 그저 말없이 프레데릭을 응시했고, 프레데릭은 테오도르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여전히.”
천천히, 테오도르의 입술이 열렸다.
“이것에 대해 생각나는 게 없나.”
테오도르가 들고 있던 거울을 탁탁 흔들며 물었다.
그것이 마치 대답하지 않으면 거울로 때려 죽이겠다는 위협처럼 보여서, 프레데릭은 ‘힉!’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그, 그런데 저는 정말 아는 게 없어요.”
급기야 프레데릭이 훌쩍이며 대답했다.
그는 날마다 같은 시간에 찾아와 같은 것을 물어보는 테오도르 때문에 괴로웠다.
“……정말 쓸모없는 놈이군.”
“죄송, 죄송, 흐윽…….”
프레데릭을 응시하는 테오도르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저놈의 이름이 프레데릭이었나.’
왠지 불쾌한 이름이었다.
보면 볼수록 기분이 나빠서 테오도르는 고개를 돌렸다.
“린든.”
“네, 폐하.”
“사흘 뒤, 알브레히트로 돌아갈 것이다. 환궁 준비를 하라.”
“폐하!”
린든이 기뻐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지금 바로 사람들에게 알릴까요?”
“…….”
테오도르는 대답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는 조금 전에 막 칼리고르의 서고를 뒤져 찾아낸 고대 성물과 관련된 마지막 문헌을 딱 스무 번째로 정독한 참이었다.
이제 이곳에서 더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을 것이다.
제국으로 돌아가 다시 연구를 재개하는 편이 더 나을 테다. 그곳엔 아직 확인하지 못한 고대의 기록서가 보관되어 있을 테니까.
그리고 황궁으로 돌아가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이브, 그녀를 되찾을 방법을.
“4년 만이야, 이브.”
테오도르는 들고 있던 검은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추며 느른한 미소를 지었다.
“4년 만에 널 되찾을 실마리를 찾게 된 거야.”
진흙을 빻은 것처럼 생긴 프레데릭을 보다가 잘생긴 자신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더 기다려.”
그의 맞은편에 죄인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앉아 있던 프레데릭은 테오도르의 웃는 얼굴을 처음 보고 한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붙였다.
“저, 폐하…….”
왠지 황제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지금이 기회일지 모른다.
“그럼 저는 이만 풀어 주시면…….”
“…….”
그러나 호기롭게 말을 붙인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눈빛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프레데릭은 곧바로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숙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테오도르는 침실로 향했다.
왕성을 버리고 도망친 칼리고르 국왕이 사용하였던 침실은 알브레히트 황궁에 있는 것에 비하면 한참이나 작고 소박한 규모였다.
이제 이 침실에서 자는 것도 내일모레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아, 참. 폐하!”
사람들에게 환궁 소식을 알리고 돌아온 린든이 싱글벙글 미소를 띠며 그를 불렀다.
“말씀하신 것을 구해 왔습니다.”
린든이 다람쥐 인형을 테오도르에게 내밀었다.
“……?”
테오도르가 가늘게 뜬 눈으로 그것을 쳐다보자,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다람쥐 용사 제리코입니다.”
다갈색 털을 지닌 다람쥐 인형은 그의 손바닥만큼이나 작고 하찮았다.
“별 볼 것 없게 생겼군.”
테오도르는 제리코를 보며 무심하게 평했다.
다람쥐의 이름은 ‘젤리꼬’가 아니라 ‘제리코’였다.
테오도르는 아이들이 다람쥐 용사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드래곤도 아니고, 하찮은 다람쥐 같은 걸…….”
“아이고, 폐하. 요즘 거리에 나가서 그런 말 함부로 했다간 온 대륙의 어린이들에게 돌을 맞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다람쥐가 등장하는 연극이 올봄에 시작했다고…….”
테오도르는 기억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이브와 닮은 그 여자아이는 이 다람쥐를 알고 있었다.
아이가 이 다람쥐를 안다는 건…… 제가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간 것은 아니라는 터였다.
시간을 역행하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제가 만난 여자아이의 정체가 궁금했다.
이브는 분명 4년 전에 죽었는데, 이브와 닮은 그 여자아이는 대체 누구인지.
‘어쩌면, 아주 어쩌면.’
테오도르는 아이를 처음 본 순간 떠올렸던 가설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조금 전 살폈던 칼리고르 왕국의 문헌 속에 그 저주받은 것처럼 생긴 검은 거울을 통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는 단서가 담겨 있었다.
어쩌면 저는 끝내 과거로 역행하여 이브를 만나 그녀를 살린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곳에서 이브와 자신의 아이를…….
[리아 아뺘는 데릭이야!]그러나 곧바로 생각난 그 목소리에 두근거리던 기분이 파스스 흩어졌다.
딱, 딱, 따악…….
테오도르의 손끝이 불규칙적인 간격으로 책상 위를 두드렸다.
‘그 아이가 이브와 관련이 있든 없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설사 그 아이가 이브와 아주 작은 접점 하나 없는 아이라 하더라도,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내 기분이 이렇게 더럽다는 것만이 중요하지.’
테오도르는 치미는 불쾌감에 파스스 웃으며 린든을 불렀다.
“린든.”
“네, 폐하.”
“이 대륙에 데릭이란 이름을 가진 자가 얼마나 될까?”
“네?”
“셀 수 없이 많겠지? 아주 흔한 이름이니까.”
“네, 그렇지요……?”
뜬금없는 테오도르의 말에 린든은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어쩌면 데릭은 이름이 아니라 애칭일 수도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 이 대륙의 ‘데릭’은 더욱 많아지겠지.”
느슨하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 사이로 ‘후후후’ 하는 음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테오도르는 몹시 악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히익……!’
린든은 히죽 웃고 있는 테오도르와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회피해야 했다.
* * *
호수 저택으로 돌아오고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아이들이 낮잠을 자는 사이, 손님이 찾아왔다.
“마물을 때려잡는 여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찾아온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쓴 게 영 수상쩍은 몰골이었다.
“그런 사람 없어요.”
쾅.
문을 닫았다.
“자, 잠시만요! 아르벨라 영주로부터 소개를 받고 왔습니다! 제발, 제발 열어 주십시오!”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도, 도와주시면 합당한 보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합당한 보상이라고?”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자 남자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마물들도 때려잡는 당신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저희가 드리는 의뢰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거든요.”
“사람?”
마물이 아닌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라니, 검기를 끌어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남자의 제안에 솔깃해졌으나…….
“삼억 골드를 드리지요.”
“삼억 골드?”
“네, 이 돈이면…….”
“안 해요.”
그가 제안한 엄청난 액수에 나는 두 번 고민하지 않고 거절했다.
쾅.
다시 한번 문이 닫혔다.
“잠시만요, 마녀님! 마녀님!”
남자가 문을 두드리며 애타게 나를 불렀으나, 나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보, 보상이 부족하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워, 원하시는 만큼 더 드리겠습니다.”
흥, 나는 그 소릴 들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마물 한 마리의 목에 걸린 현상금이 십만 골드이다.
그런데, 삼억 골드라니.
척 보기에도 위험한 일이 아닌가.
“제발 부탁입니다.”
굳이 위험에 발을 들일 필요는…….
“오억 골드, 아, 아니, 십억 골드를 드리겠습니다!”
십억 골드라고?
“…….”
나는 잠시 말을 잃은 채 서 있다가 다시 문을 열었다.
“위험한 거 아니에요?”
“위, 위험한 건 맞지만…….”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는 생각으로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서 남자를 쳐다보았다.
“위험한 건 맞지만 마물들을 때려잡는 마녀님께는 재채기가 나올 만큼 쉬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테오도르 황제에게 붙잡힌 저희 왕자님을…….”
쾅-!
세 번째로 문이 닫혔다.
“잠깐만요, 마녀님? 마녀님? 잠시만 문을…….”
밖에서 남자가 쿵쿵 문을 두드리며 나를 찾았다.
흥, 내가 열어 줄까 보냐.
나는 씨근덕거리며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테오도르에게 붙잡힌 칼리고르의 왕자를 구출해 달라고?’
테오도르가 얼마 전 칼리고르 왕궁을 함락했다는 소식은 이곳 아르벨라까지도 전해졌다.
다행히 아르벨라는 수도와 거리가 먼 시골이라, 여기까지 전쟁의 여파가 밀려오지는 않았다.
알브레히트 제국군은 서쪽 대륙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그들의 군마가 밟는 곳은 오직 왕족들이 머무는 성채뿐이었다.
오랜 전쟁 중에도 민가를 불태운다든지, 약탈을 한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다.
일반적인 전쟁과 달리 평민들의 삶에 피해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왕족과 귀족들을 제외하고는 그를 비난하는 이들이 없었다.
다만 미친놈이라고 수군댔을 뿐.
아무튼 이 시골 영지에 숨어든 내가 그와 엮일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마음을 놓고 있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곳을 떠나왔는데.’
나는 테오도르와 어떤 방식으로든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알브레히트 황궁을 떠나던 그 순간부터, 그는 내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 잊었다고 여겼음에도 이따금 가슴이 욱신거리며 생각날 때가 있었다.
그가 그리워서 그런 건 아니다.
그를 그리워하기엔 그가 내게 준 상처가 너무나 지독했다.
그가 에르와 리아의 아빠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도 모르게 떠올리는 것이다.
얼마 전 오딜리아가 그런 말을 했다.
[이찌요, 어몬니. 잘샌긴 아조씨가 리아 아뺘래요. 구론데 젤리꼬 모르는 아조씨 리아 아뺘 아냐.]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어쩌면 리아가 아빠의 빈자리를 그리워해서 상상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르와 리아는 한 번도 내게 아빠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고, 나는 아빠 없이 아이들을 잘 키웠다고 자부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그날 오딜리아의 말이 가슴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따끔따끔 아팠다.
다행히 그 이후로 오딜리아는 ‘잘생긴 아저씨’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심미안 높은 리아의 상상 속 그 ‘잘생긴 아저씨’가 대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긴 했다.
‘애들 아빠가 잘생기긴 했지.’
나는 잠시 테오도르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지워 냈다.
“제발 부탁입니다, 마녀님. 한 번만, 딱 한 번만 도와주세요.”
나는 아직도 가지 않고 문을 두드리는 남자의 끈질긴 노력에 혀를 찼다.
“그 미친 황제를 내가 어떻게 이겨요? 황제가 미친놈이란 거 못 들었어요?”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급기야 문밖의 남자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흑흑, 테오도르 황제가 우리 왕자님을 제국으로 데려가려고 한답니다. 방금 말씀하셨듯 그 황제가 얼마나 미친놈인지 마녀님께서도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우리 왕자님 이제 그 미친 황제에게 온갖 괴상한 실험을 당하다 죽을지도 모릅니다. 흐윽, 흑…….”
“참 안타깝네요.”
이렇게 대꾸하니 내가 꼭 테오도르처럼 인성 파탄 난 사람 같지만…….
‘어쩔 수 없어.’
내게는 왕자의 목숨보다도 에르와 리아의 평화가 더 소중했다.
‘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리 애들은 어떡해.’
우리 아기들은 이제 겨우 세 살이다.
엉성한 발음으로 다람쥐와 드래곤이 되고 싶어 하는, 아직 보호가 필요한 작은 아기들이란 말이다.
‘나는 에르와 리아의 유일한 보호자야. 그러니까 아기들이 소중한 만큼, 내 몸도 소중히 여겨야 해.’
누군가 냉정하다고 손가락질한다 하여도,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꿈쩍 않고 있자, 남자가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배, 배 속에 아기가 있습니다!”
“당신이요?”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혀 뜨며 남자를 훑어보자, 남자가 두 손을 휘휘 내저으며 펄쩍 뛰었다.
“아, 아니요. 제가 아니라 왕자님의 비공식적인 연인이신 루이젤 양께서 임신을…….”
“축하드릴 일이군요.”
“그러니 인정을 베풀어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아버지 없이 태어날 아기님이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멈칫.
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부러 더 차가운 목소리로 바깥을 향해 쏘아붙였다.
“아버지가 없다고 모두가 불쌍한 건 아니에요.”
불쌍하다니.
그런 동정은 아버지 없이 태어난 모든 아기들에 대한 모독이다.
나는 친부의 존재를 모른 채 태어났고, 후에 생모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지만 스스로를 불쌍하다 여긴 적 없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없던 게 나았던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랬기 때문에 테오도르를 떠나는 데에 더욱 확고한 결심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는, 소중한 내 아기들에게 없느니만 못한 존재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지만…….’
만약 테오도르가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그가 내가 알던 선량하고 올바르며, 온전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남자였더라면.
그래서 에르와 리아도 아버지를 갖고 태어났다면.
‘그랬다면 아주 조금은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지.’
문득 장면 하나가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테오!] [저런, 조심히 와야지, 나의 피앙세. 그러다 배 속의 아기가 놀라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지만 우리 아기가 어서 빨리 아빠를 보고 싶다고 보채는걸요.]카타리나의 아랫배를 향해 “안녕, 아기야.” 하고 나긋하게 인사를 건네던 테오도르의 목소리와 그 다정한 미소가 생각이 났다.
나는 주먹을 꾸욱 말아 쥐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 아기들이 불행한 건 아니야.’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굳게 입술을 다문 채로 문을 노려보았다.
눈물과 인정에 호소하는데도 내가 반응이 없자 결국 남자가 새로운 협상 조건을 내밀었다.
“사, 삼십억 골드!”
“……?”
“이 돈이면 어지간한 영지 하나와 맞먹는 규모입니다!”
“삼십억 골드를 주겠다고?”
“네, 그러니…….”
그 이후의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삼십억 골드라니.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그 돈이면…….
‘케르벨 같은 큰 왕국에서 귀족 신분을 살 수 있어.’
저택에 돌아온 이튿날, 에르빈이 검기를 발현한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더욱 생각이 많아졌다.
우선은 에르빈에게 검을 가르쳐 주면서도, 그 힘을 최대한 감출 방도를 모색했다.
그러나 동시에 과연 에르빈이 어른이 될 때까지 감출 수 있을지 걱정이 깊어졌다.
아직 어린 세 살짜리 평민 신분의 남자아이가 갖고 있기엔 너무나 큰 힘이었으니까.
나쁜 마음을 품고 다가오는 이들을 나 혼자만의 힘으로 온전히 쳐 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새 신분을 사서 천천히 힘을 기르면 돼. 그것만으로도 어중간한 이들이 나쁜 마음을 품고 다가오는 걸 막을 수 있을 거야.’
물론 그 또한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
체르니시아만큼 단단한 울타리를 만들 자신은 없었다.
그렇지만 남자가 말한 삼십억 골드는 아이들을 위해 적당히 커다랗고 적당히 단단한 울타리를 만드는 기틀이 되어 줄 것이다.
끼이익-
문을 열자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드디어 제안을 수락할 생각이 드신 겁니까!”
“그런데, 삼십억 골드를 마련할 수는 있고?”
칼리고르는 아주 작은 왕국이지 않은가.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국왕 전하께서 왕성을 버리고 도망치셨을 때, 보물을 가득 챙기셨습니다.”
“…….”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말하는 남자의 말에 나는 흡사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황제가 노리는 건 왕족들뿐이고, 우리 전하께서도 살아남으셔야 하니…….”
나는 남자가 하는 말을 흘려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테오도르를 이길 수 있을까?’
그와 겨뤄 본 적이 없으니 알 수 없었다.
‘일단은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지.’
나는 캄캄한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남자와 함께 움직였다.
* * *
내게 왕자의 구출을 의뢰한 남자는 칼리고르 왕국의 궁정 마도사라고 했다.
마도사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들의 근원이 되는 테네브리스의 힘은 제국에서는 금지된 힘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제국에서 ‘흑마법’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힘 말이다.
고대 브리힘 신의 가호를 받은 네 명의 사도가 지닌 힘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강한 검기를 발현한 자는 마찬가지로 연마 끝에 강한 흑마법 또한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이론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아직까지 두 가지 이상의 힘을 사용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 자가 있었더라면 진즉 역사서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테네브리스를 ‘악’으로 규정한 제국과 달리, 서쪽 대륙에서는 테네브리스의 유지를 이어받은 이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마도사면, 흑마법 같은 걸 써서 왕자를 구출하면 되는 거 아니야?”
“아휴, 혹여나 흑마법을 사용했다가 제국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 납니다.”
“왕자를 구하는 일이잖아.”
“흑마법을 사용한 걸 들키게 되면 지도 위에서 나라 이름이 지워질지도 몰라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왕자님을 포기하는 쪽을…….”
그렇지만 제국에서 금지한 힘을 당당하게 시전할 자신은 없었기에, ‘마도사’라는 이름의 명맥만 유지할 뿐.
정작 그들이 사용하는 힘은 페르디난트의 술법과 동일했다.
‘결국엔 마도사가 아니라 마법사네.’
칼리고르의 궁정 마도사의 술법으로 우리는 곧바로 수도의 왕성 앞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벤야민이 비슷한 술법을 쓰는 것을 여러 번 보았기에 특별히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도사는 그것을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다.
“역시 마녀님이십니다. 순간 이동을 하는데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시고…….”
마도사가 수풀가에 숨으며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거기서 뭐 해? 안 들어갈 거야?”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같이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
“괜히 들어갔다가 황제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그럼 나는?”
“그래서 마녀님은 위험수당으로 삼십억 골드를 받잖아요.”
뺀질뺀질하게 받아치는 게 영 얄미웠다.
그러나 그의 말마따나 왕자를 빼내는 건 내 몫이었다.
그에게서 건네받은 로브 하나로 몸을 가린 나는 군말 않고 왕궁 안으로 혼자 잠입했다.
왕자가 갇혀 있다는 본성의 2층 복도로 향하자, 병사들이 늦은 시간에 잠도 자지 않고 지키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쓸데없이 부지런하네.’
나는 혀를 쯧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