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7_6
저들을 상대하는 데 굳이 검기를 끌어낼 필요도 없을 성싶었다.
기척을 숨기고 살금살금 다가가 손날로 목덜미를 내리쳐 기절을 시켰다.
지키던 이들을 가볍게 제압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태평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왕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몸을 흔들어 보았으나 일어나지 않기에, 뺨을 찰싹찰싹 때려서 깨웠다.
“누, 누구…….”
“쉿.”
나는 재빨리 왕자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으며 바깥의 경계를 살폈다.
“당신네 궁정 마도사란 남자가 보냈어요. 시간이 없으니 조용히 따라와요.”
왕자는 내게 입이 틀어막힌 채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왕자를 데리고 복도로 나왔다.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날지 몰랐다.
나는 검을 뽑아 은은한 녹색의 검기를 두른 채로 조용히 움직였다.
들어온 길을 따라 다시 나가려 했더니, 기사들이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다른 나가는 길 알아요?”
“네, 네!”
“쉿, 목소리 낮춰요.”
“네…….”
왕자는 의기소침해져서 나가는 길을 안내했다.
그렇게 우리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둠 속에서 움직일 때였다.
사박, 사박-
지이이이이이직-
맞은편 모퉁이에서 누군가의 발소리와 함께 무언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순찰을 도는 기산가.’
나는 왕자를 내 뒤로 숨긴 채 정면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긴장이 되었다.
‘괜찮아. 모습을 드러내면 그 순간 바로 때려눕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잡은 손에 힘을 꽈악 주었다.
복도에 걸린 등불에 다가오는 상대의 그림자가 벽면 위로 일렁거렸다.
사박.
사박.
지이이이익.
사박.
사박.
지이이이이익.
사박.
사박.
사박-
마침내 상대가 모퉁이를 돌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큰 키와 어둠 속에 아른거리는 형체만으로도 느껴지는 흉흉한 분위기였다.
그의 오른손에는 찰랑이는 위스키병이 들려 있었고, 왼손에는…….
흠칫.
상대의 왼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나와 함께 이곳까지 왔던 마도사의 머리채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짧은 사이 마도사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마치 밤하늘을 생각나게 하는 칠흑처럼 새카만 머리카락과 느슨하게 휜 황금색 눈동자.
“웬 쥐새끼가 숨어들었나 했더니.”
한때 나를 설레게 하였던 그 낮고 고혹적인 목소리. 그리고…….
촤르륵-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술병이 비뚜름히 기울었다.
술병 입구에서 콸콸콸 쏟아진 액체가 피투성이가 된 마도사의 머리를 적셨다.
“끄흐으으으윽!”
처절한 비명 소리가 고통스럽게 울려 퍼졌다.
마지막 한 방울의 액체마저 모두 쏟아 낸 뒤에야,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술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유리가 부서졌다.
흡족한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느른하게 턱 끝을 젖힌 그가 나를 향해 사르르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쥐새끼야.”
몹시 상냥하고 나긋한 음색으로.
……변함없는 몹쓸 인성을 지닌 그는, 꿈에서도 저주하던 나의 테오도르였다.
테오도르는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끌어당기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쥐새끼가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그가 흥얼거리며 한 발짝씩 다가올 때마다, 그의 손에 붙잡힌 마도사의 머리채가 이리저리 뒤흔들렸다.
아까부터 들리던 바닥에 무언가 끌리는 기분 나쁜 소리의 정체가 그였나 보다.
나는 경악을 삼키며 손에 쥔 검에 힘을 바짝 주었다.
“…….”
긴장으로 땀이 차 손이 미끌거렸다.
‘하필이면.’
어쩌면 그와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수락한 일이었으나, 이렇게 정말로 그와 맞닥뜨릴 줄은 몰랐다.
어쩐지, 일렁이는 그림자가 유독 잘생겼더라니.
‘그래도 아직 나를 못 알아봤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로브 탓에 테오도르는 나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하다간 언제 들킬지 모른다.
문득 걸음을 멈추어 선 그가 손에 쥔 것을 내던졌다.
홰액-
너덜너덜해진 마도사의 몸이 우리 앞에 나뒹굴었다.
“흐이익! 로, 로덴!”
내 뒤에 숨어 있던 왕자가 화들짝 놀라며 내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방에서 생겨난 황금색 빛무리가 단검의 형체를 띠며 우리를 겨누었다.
“야밤에 쥐새끼 사냥이라니. 볼품없게.”
그가 무심하게 중얼거리며 우리를 향해 턱짓을 했다.
그러자 그가 성력으로 만들어 낸 단검들이 우리를 향해 일제히 날아들었다.
슈욱-!
슈욱-!
슈우욱-!
나는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쇄애액-!
내 검에 베인 단검들이 그대로 빛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나의 반격에 테오도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지?”
그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방금, 그건…….”
그러나 나는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곧바로 검을 한 번 더 휘둘렀다.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왕자가 알려 준 출구로 향하려면 테오도르를 지나쳐야 했으나, 지금 상황에선 불가했다.
그렇다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바로 방금 내가 깨부순 유리창.
나는 왕자의 손목을 움켜쥔 채 깨진 창을 향해 뛰었다.
“멈춰.”
홰액-!
테오도르가 곧바로 나를 막아섰다.
어느덧 황금색 빛무리는 길쭉한 검이 되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가 내게 검을 겨누며 무어라 말을 했다.
“너, 방금 보인 그 힘…….”
그리고 그 찰나, 나는 재빨리 검을 휘둘러 그의 검을 튕겨 냈다.
쿠과과과광!
검과 검이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맞닿은 쇠붙이 주위로 각기 일렁거리는 황금색과 초록색 빛무리가 충돌하고 있었다.
쉽사리 밀려나지 않아 이를 악물던 그때.
깨진 창을 타고 바람이 불어왔다.
펄럭-
뒤집어쓴 로브가 작게 펄럭이던 그 순간.
“……!”
테오도르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흔들리는 동공 속에 내 얼굴이 맺혔다.
그가 놀라 굳어 있는 사이, 나는 그의 검을 강하게 밀어냈다.
털썩-!
그 바람에 테오도르의 몸이 저 멀리 밀려났다.
“아래로 뛰어요!”
“여, 여기서 어떻게…….”
“잔말 말고 뛰어내려!”
그리고 나는 테오도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머뭇거리는 왕자를 2층 창문 아래로 던지고 나도 함께 뛰어내렸다.
‘젠장, 알아본 건가?’
풀밭에 엎어져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왕자를 일으켜 달렸다.
조금 전 나를 보고 멈칫 굳어 버리던 테오도르의 얼굴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그것에 매몰될 틈은 없었다.
일단은 뛰어야 했다.
* * *
“이브야…….”
테오도르는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분명 이브였어…….”
제국으로 귀환하기 직전 날 밤이었다.
테오도르는 커다란 나무 위에 올라 밤하늘을 힐긋 바라보며 술병을 기울이던 중이었다.
술을 마실 때면 늘 그렇듯 그녀를 생각하며.
그러다 성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쥐새끼를 발견했다.
몇 번 쥐어팬 끝에 쥐새끼가 칼리고르의 궁정 마도사라는 것을 알아챘다.
하필이면 그녀를 추억하던 시간을 방해받은 탓에 기분이 더욱 불쾌해졌다.
칼리고르의 궁정 마도사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테오도르는 곧바로 피투성이가 된 마도사의 머리채를 끌고서 왕자가 갇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복도 모퉁이에서 마주친 것이다.
이브를…….
갑작스러운 소란에 늦은 시각 깨어난 사람들이 복도를 치우고 정리하는 와중에도, 테오도르는 같은 자리에 붙박여 같은 곳만을 쳐다보았다.
“이브가…… 나를…….”
“폐하, 혹 잘못 보신 것은 아닐까요?”
조심스럽게 끼어드는 린든의 목소리에 테오도르가 말없이 그를 돌아보았다.
“…….”
“수, 술을 드시지 않으셨습니까아아…….”
노려보는 게 아니라 그냥 쳐다보는 건데도 그 시선이 왠지 무서워서, 린든은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실상 이 자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이는 다름 아닌 테오도르였다.
그는 느리게 손을 뻗어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조금 전 그녀의 공격에 밀려나던 때에, 그녀가 들고 있던 검날이 스쳐 간 자리였다.
그곳에서 핏물이 배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검기를 쓰는 사람이 이브 말고 있을 리가 없잖아.”
제 성력을 맞받아친 그 힘은 분명 검기였다.
그리고 그런 힘을 쓸 수 있는 건…… 오직 그녀뿐이었다.
스윽-
테오도르는 아주 천천히 손을 뗐다.
손끝에 아주 작은 핏물이 묻어나 있었다.
그것을 응시하는 테오도르의 두 눈이 깊어졌다.
테오도르는 그 손끝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와 폐부 깊숙이 향을 음미했다.
비릿한 혈 향 속,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그녀의 향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그래, 이건 틀림없이…… 나의 이브의 향이야.”
비죽 튀어나온 붉은 혀끝이 얇은 핏물을 핥아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뜨거운 희열이 감도는 앓는 소리가 잇새로 터져 나왔다.
“아아, 이브…….”
미치광이 같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린든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황제가 미쳤다는 소문에 반박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브 로웰린의 죽음 이후로 4년이나 지났지만, 황제는 그녀의 시체를 안고 살아가던 그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이따금은 밤중에 홀로 거닐며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걸 지켜볼 때면, 린든은 황제가 유령이라도 보는 건가 싶어 오싹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역시 가장 소름이 끼치는 건 테오도르가 테네브리스의 성물을 모은다는 것이었다.
‘뭐, 이곳에서는 성물이라고 부른다지만…….’
제국에서는 그것을 흉물이라고 불렀다.
과거 세상을 위협했던 고대 어둠이 남긴 흔적이니까.
최근에는 칼리고르에서 강탈한 그 저주 의식에나 쓰일 법하게 생긴 검은 거울을 한시도 옆에서 떼 놓지 않더니, 급기야 품에 끌어안고 잠들기까지 했다.
‘미친 게 맞지. 확실히 미치셨지.’
린든은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 * *
빌빌거리는 왕자 놈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날이 밝은 뒤였다.
“어몬니!”
“어모니!”
마침 이른 시각에 일어나 있던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나를 향해 뛰어왔다.
“이 아조씨는 누구예요?”
“인사해, 얘들아. 손님이야.”
아이들은 내 뒤를 따라 들어온 프레데릭 왕자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끔뻑였다.
“또 밀까루네…….”
“웅, 밀까루야…….”
미묘하게 실망한 듯한 목소리였다.
“미, 밀가루?”
프레데릭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밀가루’라는 말이 ‘밀가루 반죽을 빻은 것처럼 생겼다’는 뜻이란 걸 아는 나는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모른 척했다.
“하지만 어모니가 밀까루 낫다고 해써. 잘샌긴 거보다.”
“마쟈.”
에르빈의 말에 오딜리아가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조씨 젤리꼬 알아?”
“다람쥐 용사 제리코 말이니?”
프레데릭이 제리코를 정확하게 알자, 아이들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아조씨 젤리꼬 알아!”
“아조씨 차칸(착한) 편이야!”
나도 신기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제리코를 아는군요?”
그러자 프레데릭이 주위를 휙휙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 네, 그…… 이건 비밀인데 미친 황제가 그 다람쥐를 열성적으로 좋아합니다.”
테오도르가 제리코를 열성적으로 좋아한다고?
“칼리고르에 온 이후로 매일같이 그 다람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다람쥐 인형을 모으고…….”
나는 갑자기 제리코를 향해 없던 반감이 생겼다.
당장 집 안의 모든 제리코 인형과 제리코 동화책을 불태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동심을 위해 참기로 했다.
“미친 황제가 누구야?”
이때, 에르빈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지지야. 우리 에르는 그런 지지 몰라도 돼.”
나는 재빨리 에르빈의 관심을 차단했다.
“우웅. 지지구나.”
에르빈은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붙잡힌 칼리고르의 궁정 마도사 로덴은 감옥에 갇혀 심문을 당했다.
“함께 도망친 여자는, 어디에 있지?”
“모, 모릅…… 끄흑…….”
“말해. 네 주인과 함께 사라졌는데, 모를 리가 없잖아.”
그리고 그를 심문하는 이는 다름 아닌 테오도르였다.
“저, 정말 모릅니다. 제발 우리 와, 왕자님을, 제발, 놓아, 흑…….”
“여자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면.”
여자의 소재를 알릴 때까지, 황제는 결코 그만두지 않을 성싶었다.
저 이글이글한 눈빛을 보건대, 어떻게든 저희 왕자와 그 여자를 찾아내고 말리라.
찾아내면 두 사람 다 찢어 죽이고, 태워 죽이고, 때려죽일 것 같은 눈이었다.
“그럼 질문을 바꿔 볼까.”
테오도르가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 여자와 네 주인이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말해.”
“흡, 그것도 모, 모릅…….”
차마 왕자의 탈출을 위해 돈을 주기로 하고 일시적으로 고용한 여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자칫 잘못 말했다가 국왕 폐하의 위치까지 발각되면 큰일이니까.
“당장 말하지 않으면…….”
“여, 연인입니다!”
으스스한 위협에 로덴은 대뜸 거짓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우리 왕자님의 연인이십니다. 왕자님께서는 그, 그저 연인과 사랑의 도피를 하신 것이니 부디 가엾게 여기시어…….”
그 거짓말이 자신의 왕자에게 얼마나 큰 시련이 되어 닥칠지도 모르고…….
“…….”
“…….”
차가운 침묵이 감옥 안을 맴돌았다.
탁.
탁.
탁.
탁.
구두 굽이 바닥을 두드리며 규칙적인 마찰음을 냈다.
로덴은 그것이 꼭 자신의 남은 생명을 알리는 경고음인 것만 같아서 덜덜 몸을 떨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연인, 이라고?”
테오도르의 입술이 열리는가 싶더니, 돌연 웃음소리가 감옥 안을 울렸다.
“하하하!”
객관적으로 보아도, 주관적으로 보아도 결코 웃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공포스러운 웃음소리는 터져 나오던 때와 마찬가지로 난데없이 뚝 끊겼다.
“대체, 언제부터.”
회까닥 돌아 버린 눈을 한 테오도르가 누구 하나 찢어 죽일 듯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의 이브의 취향이 그따구로 변한 거지?”
심문을 마치고 나서는 테오도르의 얼굴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문득 걸음을 멈추어 선 그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연인……. 연인이라고…….”
테오도르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치미는 분노를 삼켰다.
인정할 수 없었다.
칼리고르의 왕자는 밀가루를 빻아 반죽한 것처럼 생긴 벤야민보다도 별로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그를 진흙을 빻아 만든 것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전 고문받던 남자의 실토를 들은 뒤 생각이 변했다.
칼리고르 왕자는 진흙이 아니라 오물을 반죽해서 만든 것처럼 못생겼다.
그렇게 못생긴 오물 같은 남자가 이브의 연인일 리가 없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그자가 무언가 잘못 알고 나불거린 것일 테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주억이며 자신의 뺨에 남은 상처를 매만졌다.
그녀가 남기고 간 상처는 실금처럼 얇아서, 금세 피가 멎어 버리고 말았다.
테오도르는 그 사실이 너무나 아쉬웠다.
“마도사의 처분은 네가 맡아라, 린든.”
테오도르가 뒤따르던 린든에게 명령했다.
이제 더 이상 그 마도사에게서 빼낼 정보는 없을 것 같았다.
“저, 폐하, 정말로 그 여자가 이브 님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이때, 린든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브 님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린든은 지난밤부터 내내 아뢰던 같은 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이브 님은 이미 한 번……. 이성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제발. 어쩌면 누군가 못된 술수를 부려 폐하를 음해하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
“차라리 제게 명을 내려 주시면, 칼리고르 왕자를 비롯하여 그 수상한 작자들을…….”
“…….”
테오도르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 온 뒤로 이상한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녀를 닮은 아이를 보았다.
테오도르는 그 하찮게 생긴 다람쥐를 조사하며, 아이가 과거도 미래도 아닌 같은 시간대를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제 눈앞에 나타난 그녀와 닮은 여자.
아니, 그걸 닮았다고 말할 수 있나.
완벽하게 같았다.
노려보는 눈동자도, 어여쁜 숨소리도, 사랑스러운 움직임도.
모두 제가 기억하는 그녀였다.
이브는 죽었다. 시체까지 확인했다.
그런데 그녀와 꼭 닮은, 그녀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여자가 나타났다.
혹시 모르지.
린든의 말처럼 누군가가 나를 현혹하려고 흑마법이라도…….
거기까지 생각하던 테오도르는 이내 이를 악물었다.
과거에도 그런 식으로 그녀에게 끌리는 자신의 마음을 수상하게 여겨 그녀를 의심하고 밀어냈다.
그 결과 그녀를 이미 한 번 영영 잃고 말았다.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그 덜떨어진 과거의 나 새끼가 벌인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흑마법이라도 좋아.”
그래서 테오도르는 이성이 아닌 자신의 감각을 믿기로 했다.
“기꺼울 정도야.”
지난밤부터 그의 감각이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
“내가 본 건 분명 살아 있는 이브였어.”
그녀라고.
그녀가 살아 있다고.
그러니 어서 그녀를 되찾아야 한다고.
쿵, 쿵, 쿵, 쿵-!
인정의 매듭을 짓는 순간, 심장의 울림이 거세졌다.
테오도르는 살갗을 뚫고 뛰쳐나올 것만 같은 심박을 느끼며 읊조렸다.
“제국으로 귀환은 보류다.”
“폐하……!”
린든의 얼굴이 끔찍한 소리를 들은 사람의 것처럼 변했다.
“내가 없는 사이, 브리안 체르니시아의 생존 사실이 알려졌다지?”
테오도르는 얼마 전 아르민으로부터 전해진 보고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가 황궁을 비운 지난 4년 동안 아르민이 알브레히트의 내정을 살폈다.
그러나 실상 제국의 내정을 움직이는 이는 이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는 테오도르였다.
아르민이 제국 내의 상황과 정례 회의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보고하면, 테오도르가 그걸 바탕으로 의사를 결정하여 통보하는 식이었다.
“브리안 체르니시아를, 이곳으로 불러.”
“네? 갑자기 그는 왜……. 폐하? 폐하?”
테오도르는 제 할 말만 내뱉고는 길쭉한 다리를 뻗어 성큼성큼 창가로 걸어갔다.
어느새 깨끗하게 치워진 창가에는 아직 새 유리가 들어오지 않아 바람이 훙훙 통했다.
‘정말 그 여자가 이브라면.’
테오도르는 두 손으로 창틀을 짚었다.
자신의 감각이 이번에도 그녀를 알아보고 반응하는 것이라면.
‘나를 피해 숨어 버린 이브를 다시 찾을 방법은.’
그녀를 떠올리는 테오도르의 황금색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오직 하나이지 않겠나.’
그의 입매가 비스듬히 말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