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8_2
그가 앉아 있는 책상 위에는 검은 거울이 놓여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것을 쳐다보며 짧은 심호흡을 했다.
‘또, 만났어.’
벌써 두 번째로 겪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서쪽 대륙의 온갖 고서들을 다 뒤져 보았지만, 관련된 이야기는 찾을 수 없었다.
테네브리스의 힘이라 하여도, 왜 하필이면 그 아이를 만난 걸까.
제가 찾는 이브가 아니라.
최근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그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왕자를 데리고 도망친 여자는 정말 나의 이브일까?
그렇다면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죽은 이브의 시체는 어떻게 된 걸까?
만약 그 여자가 정말 나의 이브라면, 어째서 왕자와 함께 달아난 걸까?
그리고 그 여자아이는 대체 뭐지.
자꾸만 내 앞에 나타나는 이브와 닮은 여자아이는 대체…….
테오도르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곧 알게 될 테니 조바심을 갖지 않아도 될 터이다.
조바심을 갖지 않아도…….
갖지 않아도…….
않아도…….
그러다 뒤늦게 자신이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젠장.’
결국 그는 욕설을 씹어 삼켜야 했다.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미친 것 같았다.
이브와 마주쳤던 그날 밤 이후로 그는 줄곧 이런 상태였다.
잠시도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죽은 이후로 이렇게까지 살아 있는 사람처럼 격한 감정을 느껴 보는 게 처음이라서.
테오도르는 이런 스스로가 낯설면서도 기꺼웠다.
“폐하, 브리안 체르니시아가 도착했습니다.”
린든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들여.”
곧바로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그 안으로 들어섰다.
“위대하신 알브레히트의 주인을 뵙습니다. 알브레히트에 영광을.”
테오도르는 제게 의례적인 인사말을 읊는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곱슬곱슬한 은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
‘체르니시아는 왜 다 저따구로 생겨 가지고…….’
남자는 이브와 닮았다.
“늦었군.”
테오도르는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짤막하게 대꾸했다.
비록 알브레히트 제국에서 서쪽 대륙까지는 거리가 멀었지만, 마법사들이 있으니 이동이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을 터이다.
“죄송합니다, 폐하. 마법진의 오작동으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는 사이, 습격이 있었습니다.”
“습격?”
“네, 다행히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레오브란테의 가주가 도움을 주어…….”
테오도르의 얼굴이 싸아악 굳었다.
“감히, 누가.”
표정이 굳은 것은 테오도르뿐만이 아니었다.
린든 또한 심각해진 얼굴로 빠드득 성을 냈다.
“황명을 받고 움직이는 이를 습격하다니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폐하!”
단순한 도적들의 소행이라면 차라리 나았다.
그러나 어느 겁 없는 도적패가 황명을 받고 움직이는 이를 습격한단 말인가.
게다가 마법진이 오작동했다니.
황궁의 마법사들은 이처럼 터무니없는 실수를 할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어쩌면…….
‘체르니시아의 복권을 막으려는 무리가 있다.’
테오도르는 그 일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린든을 향해 명령했다.
“아르민에게 전달해. 사람을 꾸려 조용히 조사하라고.”
“네, 폐하.”
린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테오도르가 다시 브리안을 돌아보았다.
“내가 그대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하고 있겠지.”
“체르니시아의 복권을 논하시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기억하나? 십수 년 전, 체르니시아가 몰락하던 때.”
테오도르는 잠시간 오래전 체르니시아가 반역죄로 몰락하던 시기를 떠올렸다.
황제였던 그의 아버지는 몸이 좋지 않아 늘 병석에 누워 있었고, 에른스트의 친모인 마르가라테 황후가 그 옆을 지켰다.
당시 황제의 병문안을 위해 찾아온 체르니시아의 가주가 돌연 황궁에서 칼부림을 부렸다.
군터는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검을 황제의 복부에 쑤셔 박았다. 수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목격한 이들이 많았고, 군터는 현행범으로 붙잡혀 즉결 처분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체르니시아 또한 역사서에서 이름을 지우게 되었다.
검에 찔려 생사를 오락가락하던 황제를 대신해 그것을 지휘한 이는 다름 아닌 마르가라테 황후였다.
마르가라테 황후는 아주 작은 자비도 없이 체르니시아를 몰락시켰다.
오랫동안 제국의 역사 속에서 알브레히트를 받쳐 온 3대 가문 중 하나가 멸문하였으나,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만큼, 군터의 죄목이 명확하였으니까.
“불명예를 지울 방도가 요원하였으나, 4년 전을 기점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그러나 4년 전, 마물들의 범람 이후로 고대의 세 영웅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체르니시아의 이름이 함께 대두된 것은 그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시기상으로 체르니시아의 복권을 논하기에 지금이 가장 좋은 때지.”
테오도르가 비스듬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했다.
잠자코 그의 말을 경청하던 브리안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하지만 폐하, 저는…… 검기를 발현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체르니시아는 과거 마물들로부터 대륙을 구한 영웅이었으나, 지금의 사람들이 원하는 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단순한 체르니시아의 이름이 아닌 마물을 물리쳐 줄 영웅입니다.”
그렇기에 검기를 발현하지 못한 체르니시아는 사람들이 원하는 체르니시아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이브가, 아니 이보네가 있으니까.”
“네……?”
“살아 있어, 이보네. 내가 봤어.”
“……!”
브리안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테오도르는 가늘게 떨리는 그의 녹색 눈동자를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대를 이곳까지 불렀다. 이보네를 찾기 위해 그대가 필요하니까.”
* * *
로라는 내게 저택으로 온 편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발신인에는 아르벨라 영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영주성에 방문할 날짜를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글을 읽어 내렸다.
그러다 그 아래 이어진 절망적인 내용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순간 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테오도르가 안 떠난다고?’
나는 테오도르를 잘 안다.
누구보다 잘 안다고는 못 하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보다는 잘 안다.
그날, 칼리고르 왕성의 복도에서 나를 보고 멈칫하며 커지던 황금색 눈동자.
분명 알아본 것이다.
로브 아래 숨겨진, 욕설이 난무한 편지를 남기고 도망친 이브 로웰린과 같은 얼굴을.
‘한번 의심이 생겼으니 확인하려 하겠지.’
나는 입 안의 여린 살을 질겅질겅 씹으며 표정을 굳혔다.
마침 영주성에서 온 소식이라기에 옆에서 기대에 찬 표정을 하던 프레데릭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 그런 표정입니까? 안 좋은 이야기라도 있는 겁니까?”
“황제가 떠나는 걸 미룬대요.”
“……!”
프레데릭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낑낑거렸다.
“왜, 왜요? 그 미친 황제가 왜 안 떠난대요?”
“…….”
나는 편지를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테오도르가 갑자기 떠나는 걸 미룬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도망친 왕자를 다시 붙잡아 가려고.
아니면, 나를 알아보고 잡아 죽이려고.
둘 중 어느 것이든 내겐 달갑지 않은 가정이었다.
그가 어떻게든 내 평화를 깨뜨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번 문 것은 놓치지 않는 테오도르의 성격으로 보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포기하게 만들어야지.’
죽음까지 위장하여 일군 평화였다.
그가 나의 평화를 망가뜨리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다 틀렸습니다. 그 미친 황제가 우릴 잡으려고 안 떠나는 게 틀림없어요.”
프레데릭은 바닥에 주저앉아 절망스럽게 한탄했다.
“아이고, 이제 우리는 어떡합니까.”
“정신 사나우니 조용히 좀 있어요.”
“어떻게 그래요? 우리 모두 죽게 생겼는데?”
“자꾸 시끄럽게 하면 당신 목을 걸고 황제와 거래를 할 겁니다.”
“…….”
사납게 몰아붙이자 그제야 프레데릭이 입을 다물었다.
내가 한참 테오도르로부터 내 평화를 지키기 위해 궁리할 때였다.
“어몬니!”
“어모니이!”
정원에 있던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내 얼굴 위로 떠올랐던 심각한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게 쪼르르 달려오는 아이들을 향해 팔을 벌렸다.
“에르, 리아. 옷이 엉망이 됐구나.”
여기저기 흙이 묻고 풀물이 든 것을 보니, 신나게 정원을 뒹군 모양이다.
그것이 귀여워 잔잔한 웃음기를 머금으며 물었다.
“정원에서 뭘 하다 온 거야?”
“리아 불 뿜꼬 하눌 날았어요. 지쨔루요.”
“그래?”
나는 쿡쿡 웃으며 오딜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구리고 도또리도 주워 왔어요.”
“도토리?”
고개를 갸웃하는 내게, 오딜리아가 도토리 일곱 개를 보여 주었다.
“어머, 정말 도토리네?”
아직 봄인데 웬 도토리지?
나는 신기한 마음을 감추며 작은 도토리 하나를 집어 보았다.
“이걸루 모꺼리(목걸이) 만들고 싶어요!”
“좋은 생각이네. 로라, 도토리 목걸이를 만들 수 있게 준비해 줄래?”
나란히 도토리 목걸이를 하고 있을 두 아이를 떠올리자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다음 마물 토벌일까지 남은 날짜를 머릿속으로 헤아리며, 아이들과 함께 도토리 목걸이를 만들었다.
“이고(이거)는 리아 꺼, 이고는 에르 꺼, 구리고 이고는 어몬니 꺼고…….”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신이 나서 재잘재잘 떠들었다.
아이들을 향한 프레데릭의 시선이 느껴졌다.
힐긋 쳐다보자 그가 변명하듯 두 손을 내저었다.
“나, 나쁜 뜻이 있어 쳐다본 게 아닙니다. 그, 그냥 아이들이 귀여워서…….”
그는 굳이 묻지 않았는데도 얼굴을 붉히며 덧붙였다.
“저도 곧 아버지가 되거든요.”
그럴 적에 그의 얼굴 위로 수줍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왕자님의 비공식적인 연인이신 루이젤 양께서 임신을…….]나는 마도사가 한 말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궁정 마도사라는 그 남자에게 들었어요. 연인분께서 임신 중이라고.”
“원래라면 지금쯤 루이젤의 임신 사실을 공표하고 결혼식을 올렸을 겁니다.”
프레데릭의 얼굴이 곧바로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아기를 위해 준비한 선물도 받아 보지 못했네요. 지금쯤 완성이 되었을 텐데…….”
프레데릭이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맞은편에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쪼물쪼물 도토리 목걸이를 만들던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조씨. 밀까루 아조씨. 슬포?”
“아조씨 도또리 줄까?”
“아, 고맙구나.”
프레데릭은 서둘러 표정을 추스르며 아이들이 건네주는 도토리 목걸이를 받았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왜 밀가루 아저씨라 부르는 거니?”
“구건 아조씨가…… 우웁? 엄몸닝?”
활짝 웃으며 설명하려는 에르빈의 입을 덥석 막았다.
나를 부르는 에르빈의 발음이 손바닥에 짓눌려 뭉개졌다.
“……?”
“아, 하하…….”
프레데릭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무마했다.
“에르, 리아. 잠시 어머니를 따라올래?”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와중, 나는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작은 방으로 끌고 갔다.
조금 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다시는 사람을 보고 밀가루라는 표현을 쓰지 않겠다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약속했다.
* * *
테오도르는 브리안과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눈 뒤 그를 내보냈다.
요 며칠 쌓인 옅은 피로감이 밀려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를 때였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칼리고르 국왕과 함께 도망친 시종장을 대신해 왕궁을 살피는 시종이었다.
“무슨 일이지?”
“아, 저어…… 폐하.”
난처한 얼굴을 한 남자가 테오도르의 눈치를 힐긋 살피며 아뢰었다.
“그…… 왕궁으로 물건이 도착하고 있어서…….”
“물건?”
테오도르가 고개를 까딱이자, 시종들이 트레이를 들고 들어왔다.
형형색색의 아기 옷과 앙증맞은 아기 신발, 폭신하고 귀여운 인형, 임산부에게 좋은 찻잎 따위가 그 안에 가득 실려 있었다.
“이게 무엇이냐?”
“……프레데릭 왕자님의 이름으로 온 물건들입니다.”
“프레데릭 왕자?”
그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테오도르의 얼굴 위로 불쾌한 빛깔이 떠올랐다.
“왕자님께서 계실 적에 주문하신 물건이 이제 도착한 모양입니다. 어떻게 처리할지…….”
“왕궁에는 아기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
테오도르가 아기 신발 하나를 집어 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 그게 왕궁 내에 암암리에 떠도는 소문이나…….”
“소문?”
“프레데릭 왕자님께서 몇 년 전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만나던 아가씨가 있는데, 최근 그 아가씨께서 임신을…….”
“…….”
“그래서 국왕 전하께서도 결국 결혼을 허가하셨다고…….”
테오도르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여, 연인입니다!] [왕자님께서는 그, 그저 연인과 사랑의 도피를 하신 것이니 부디 가엾게 여기시어…….]“어떻게 처리할까요?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들이라 저희가 함부로 버릴 수 없어 여쭙…… 흐익!”
화르르-
테오도르의 손끝에서 피어난 황금색 빛무리가 이내 새빨간 화염으로 변해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아기 신발을 흔적도 없이 태워 버렸다.
소리 없는 분노를 목도한 이들이 모두 그 자리에 뻣뻣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스르륵-
테오도르는 느리게 눈동자를 굴려 트레이 위에 담겨 있는 물건들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럴 리가 없지. 안 그래?”
“히끅.”
“뭐야. 왜 대답이 없어?”
“네, 넵, 넵!”
시종은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거세게 끄덕였다.
“폐,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일단은 황제의 비위를 맞출 심산으로 무조건 동의했다.
그제야 테오도르의 입꼬리가 만족스러운 듯 히죽 말려 올라갔다.
* * *
얼마 뒤.
아르벨라의 영주와 약속한 마물 토벌의 날이 다가왔다.
나는 약속된 날짜보다 하루 일찍 영주성을 찾아갔다.
“어서 오십시오, 이브 님.”
내가 온다는 소식에 영주가 친히 성문 앞으로 마중을 나왔다.
그의 옆에는 영주의 둘째 아들 데릭이 나를 향해 손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나는 데릭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서 영주의 안내를 받으며 성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브 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영주는 긴 복도를 함께 걸으며 내게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아르벨라 영주성 안쪽, 가장 깊고 은밀한 공간에 도착하자 그곳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칼리고르의 국왕 전하이십니다.”
테오도르를 피해 왕성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칼리고르의 국왕과 그를 따르는 이들이었다.
“오오, 그 소문의 마녀로군! 그런데 프레데릭은 어디에 있지?”
국왕이 내 뒤를 살피며 물었다.
내가 프레데릭과 함께 올 줄 알았나 보다.
“칼리고르의 궁정 마도사랑 계약한 내용이에요.”
나는 대뜸 마도사와 작성한 계약서를 내밀었다.
“프레데릭 왕자의 신병은 지금 제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약속대로 삼십억 골드를 지불하시면 왕자의 신병을 드리지요.”
“사, 삼십억 골드?”
칼리고르 국왕은 계약서에 적힌 금액을 보며 눈에 띄게 당황했다.
“삼십억 골드면 어지간한 영지 하나와 맞먹은 규모가 아닌가?”
“그렇죠.”
“금액이 조금 과, 과한 것 같은데…….”
“그래서, 못 주겠다는 건가요?”
잠자코 대답하던 내 눈썹이 삐뚜름히 치켜 올라갔다.
“십억 골드 정도로 하면 어떤가?”
“…….”
나는 말없이 국왕을 응시하다가, 계약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아쉽지만 계약은 결렬이군요.”
그러고는 홱 돌아섰다.
“자, 잠깐!”
그러자 국왕이 나를 붙잡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알았네. 이십억 골드…… 그래, 제기랄, 삼십억 골드를 내어 주지.”
그제야 나는 빙긋 웃으며 국왕을 돌아볼 수 있었다.
“좋아요.”
국왕의 신하들이 나를 보며 치를 떠는 게 보였다.
욕심 많은 여자라 욕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내 평화를 깨뜨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맺은 계약인데, 단 1골드도 양보할 수 없었다.
“이, 이 보석은 아리스베의 왕녀셨던 내 모친이 칼리고르 왕가로 시집올 때 가져온 지참금으로…….”
척 보기에도 값비싼 보석들과 패물들이 담긴 주머니를 내미는 국왕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것들을 모두 팔면 삼십억 골드는 족히 될 걸세.”
“방금 주신 것들이 정말로 삼십억 골드의 값어치가 되는지 확인하는 게 먼저예요. 그전에는 프레데릭 왕자의 신병을 넘길 수 없어요.”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하자, 국왕의 사람들이 나를 향해 무례하다며 발끈하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