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an's humanity is a little weird RAW novel - Chapter 8_4
‘마물들도 테오도르 황제를 피해 달아난다더니…….’
다시 한번 테오도르의 공격이 벤야민을 스쳐 지나갔다.
슈우욱- 콰앙!
그 바람에 벤야민의 오른쪽 어깨가 찢어지며 피가 흘렀다.
“윽…….”
정말로 죽일 기세로 쏟아지는 무자비한 공격을 피해, 벤야민은 재빨리 이동 마법을 펼쳤다.
이윽고 벤야민의 몸이 사라졌다.
테오도르는 서늘한 눈으로 벤야민이 도망친 자리를 쳐다보았다.
그가 달아난 자리에 남은 것은 찢어진 어깨에서 뚝뚝 떨어진 붉은 선혈뿐이었다.
“쳇.”
테오도르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그냥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이곳에 나타난 그를 보며, 테오도르는 더욱 확신했다.
이브는 살아 있다.
그리고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그녀와 함께 수상한 작당질을 벌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작자가 뜬금없이 이 먼 서쪽 대륙에 나타날 이유가 없지 않나.
“죽음을 둔갑하기라도 한 건가.”
테오도르는 제 겉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단순히 죽음을 둔갑했다기엔, 제가 끌어안고 돌아온 것은 분명한 죽은 이의 시신이었다.
“아, 혹시.”
퍼뜩, 그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죽은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유독 강한 페르디난트의 냄새.
어쩌면 그가 죽은 그녀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녀가 아닌 다른 것이었는지도.
“설마.”
테오도르는 고대 문헌 속에서 테네브리스의 흔적을 찾으며 이와 비슷한 것에 대해 본 적이 있었다.
“흑마법에라도 손을 댄 건가.”
주인 없는 핏자국을 응시하는 테오도르의 눈동자 위로 스산한 기운이 머물렀다.
* * *
데릭의 도움으로 퍼뜨린 소문은 테오도르를 호수 저택으로 유인해 줄 것이다.
그사이, 나는 아르벨라를 훌쩍 떠났다.
항상 생각했었다.
언젠가 아르벨라의 호수 저택에서 쌓아 온 나의 평화가 흔들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혹시나 그런 날이 왔을 때 당황하지 않도록 항상 생각하고 대비를 해 왔다.
그 덕에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아르벨라를 떠날 수 있었다.
‘벤야민에겐 미안하게 됐지만.’
말도 없이 사라져서 놀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위한 편지 같은 건 남길 수가 없었다. 혹시나 테오도르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로라와 함께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저택을 정리하며 몇 안 되는 사용인들에게 두둑한 퇴직금을 쥐여 주며 미리 내보냈으나, 로라만큼은 한사코 나를 따라오겠다고 주장했다.
[세상에 매정하시기도 하지! 이렇게 저를 버리고 칼리고르를 떠나시려고요?] [하지만, 너는 원래 칼리고르 사람이고…….] [저는 어차피 남은 가족도, 연고도 없는걸요! 게다가 주인님 혼자서 도련님과 아가씨를 보살피는 건, 두 분 아기님들께 너무 가혹한 일이에요!] [나한테 가혹한 일이 아니라?]내심 그간 정이 많이 들었던 로라와 헤어지기 싫었던 나는, 그녀의 강경한 주장에 져 주는 척을 하며 함께 떠나기로 했다.
나는 아이들을 로라에게 맡기고서, 칼리고르 왕국을 떠나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프레데릭의 신병을 넘기고 새로운 정착 자금도 챙겼겠다, 이주할 곳도 이미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배를 타고 테오도르의 소식이 아예 전해져 오지 않을 만큼 먼 곳으로 떠나 버릴 생각이다.
배를 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항구가 있는 수도까지 와야 했다.
테오도르가 수도를 비우고 아르벨라 쪽으로 향했다는 소식까지 접한 뒤에야 움직일 수 있었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이곳을 뜨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철그렁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알브레히트 제국군의 복색을 갖춘 기사들이 맞은편에서 지나가는 게 보였다.
나는 공연히 쓰고 있던 모자의 챙을 눌러 얼굴을 가렸다.
그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던 찰나.
‘어?’
문득 저 멀리 지나가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내 눈동자가 화들짝 커졌다.
내가 익히 잘 알고, 또 그리워하던 얼굴이었다.
‘브리안……?’
곱슬기가 도는 짧은 은색 머리카락.
여름을 담은 듯 싱그러운 빛깔의 개구진 녹색 눈동자.
브리안이었다.
터울이 얼마 안 되는 남매였던 브리안 오빠와 나는, 사실 어머니가 다른 이복 남매이다.
그럼에도 꼭 닮은 우리의 얼굴은 친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말도 안 돼. 정말 브리안이야.’
[황제가 이곳에서 무슨 사람을 찾았다더군요. 체르니시안가 뭔가 하는, 아무튼 대단한 가문의 생존자를요.] [그 생존자의 이름이 뭔데요?] [브리안 체르니시아, 라고 한답니다.]뒤늦게 그것이 뜬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게 사실이었어.’
브리안은 알브레히트 제국군의 엄호를 받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였으나, 거리가 있어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브리안이 왜 이곳에…….’
나는 홀린 듯이 브리안을 향해 시선을 떼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러다 브리안이 일행들과 멀어져 홀로 인적 드문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
나는 잽싸게 그 뒤를 후다닥 따라 들어갔다.
기척을 느낀 브리안이 무심결에 나를 돌아보았다.
“어……?”
눈이 마주치고, 브리안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ㅂ……!”
그리고 나는 그대로 그를 덮치며 그의 뒷목을 손날로 내리쳤다.
퍼억-!
기절한 브리안의 몸이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나는 쪼그려 앉아 그를 살폈다.
‘진짜 브리안이야.’
정말로, 내가 기억하는 그 브리안이 맞았다.
흑마법이라거나 이상한 장난질이 아닌, 진짜 살아 있는 브리안이었다.
‘브리안이 어떻게…….’
그러나 생각을 이어 갈 틈이 없었다.
바로 이 골목 바깥에 조금 전까지 브리안을 호위하던 알브레히트 제국군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의 행색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썩 수상쩍었다.
‘사람들의 눈이 모이기 전에 일단 자리를 옮겨야 해.’
그렇게 나는 의도치 않게 브리안을 납치해 버렸다.
* * *
막상 자리를 옮기려 하자, 낯선 칼리고르의 수도에서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로라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호텔 방 외에는…….
“어머, 주인님! 서, 설마, 사, 사, 사람을 죽……!”
로라가 내 등에 실려 온 브리안을 보고 기겁을 했다.
“죽인 거 아냐. 기절시킨 거야.”
“휴, 다행이에요. 저는 주인님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신 줄 알고 깜짝 놀랐지 뭐예요.”
로라는 나를 도와 브리안을 침대 위로 눕혔다.
“그럼 기절을 시켜 납치를 해 온 건가요?”
“납치라니. 그냥 의식 불명 상태로 만들어서 데려온 거라고.”
“그게 납치잖아요.”
“…….”
쓸데없이 예리한 로라의 지적에 마땅히 답할 거리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인형을 가지고 놀던 에르빈이 침대맡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어모니, 이 아조씨 누구야요?”
“삼촌이야.”
“삼쫀?”
에르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구럼 어모니가 삼쫀 죽인 거예요?”
“죽인 게 아니라 기절시켜서 납치를 해 온 거래요, 에르빈 도련님.”
“납찌(납치)?”
“리아, 납찌 알아!”
에르빈이 이쪽으로 온 사이 혼자서 인형들을 독차지하던 오딜리아가 활짝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다람찌 용짜에서 뚜래고(드래곤)가 곤준님(공주님) 데꼬가자나! 구게 납찌야!”
“우웅? 구럼 삼쫀이 어모니 부인이야?”
“아냐. 어모니 아조씨랑 결혼 몬 태. 납찌는 나쁜 거라서 젤리꼬가 이 아조씨 구하러 올 꺼야.”
“구럼 삼쫀이랑 젤리꼬 결혼해?”
“아아니, 젤리꼬는 곤준님이랑 결혼해짜나.”
“곤주하고도 결혼하고 삼쫀하고도 결혼하몬 되지.”
에르빈이 두 눈을 끔뻑이며 말하자, 오딜리아가 두 눈을 가늘게 좁혀 뜨며 손가락을 까딱까딱 저었다.
“안 대, 안 대. 그건 지지(쓰레기)야, 지지.”
“왜 안 대? 에르는 어모니하고도 결혼하고, 리아하고도 결혼하고, 로라하고도 결혼할 건데.”
에르빈이 여전히 오딜리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사이, 오딜리아의 관심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브리안에게로 옮겨 갔다.
“우아, 신기해. 아조씨 머리카랑 어몬니랑 또까타(똑같아)!”
“아조씨 아니야, 리아. 삼쫀이야. 어모니가 삼쫀이래써.”
“구리고 아조씨 머리카랑 에르랑도 또까타!”
“아이참, 아조씨가 아니라 삼쫀이라니까.”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툭탁거리는 와중에도 브리안을 향해 눈을 떼지 못했다.
나와 닮은 브리안이 신기한 모양이다.
“어? 아조씨 눈 깜빡해써!”
이때, 오딜리아가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외쳤다.
“지쨔(진짜)! 삼쫀 눈 움직여!”
에르빈 또한 오딜리아와 마찬가지로 흥분하여 소리쳤다.
이윽고 브리안이 슬며시 눈을 떴다.
“어…….”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던 그는 이내 화들짝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이, 이보네!”
브리안은 침대맡에 서 있는 오딜리아를 보며 외쳤다.
그러자 오딜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 이본네 아닌데. 나 이름 리안데.”
“아…….”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브리안이 멍청한 탄성을 터뜨렸다.
“이본네가 누구야?”
에르빈이 고개를 불쑥 내밀며 물었다.
“흐익?”
당황한 브리안은 똑같이 생긴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멀찍이서 그 모습을 한심하게 지켜보다가 그를 불렀다.
“안녕, 브리안 오빠.”
“……!”
브리안이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나를 발견한 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이, 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는 그를 향해 입꼬리를 느슨하게 말아 올렸다.
“이보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가 내게 뛰어왔다.
그러고는 두 팔을 벌려, 덥석! 나를 끌어안았다.
“정말, 정말 살아 있었어! 황제의 말이 맞았어. 네가, 살아 있었어……!”
“자, 잠깐, 읍…….”
어찌나 격하게 끌어안던지, 숨을 쉬기 불편할 정도였다.
콜록대며 브리안의 팔을 찰싹찰싹 때리자, 지켜보던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오도도 뛰어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비켜, 이 악땅! 우리 어몬니 개로피지(괴롭히지) 마!”
“어모니가 아야 하잖아!”
씩씩거리며 무섭게 위협하는 에르빈과 오딜리아 덕분에, 나는 간신히 브리안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참 든든하기도 하지.
“어모니!”
“어몬니이!”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그 틈을 타 내게 쪼르르 안겼다.
“이보네, 이 아이들은…….”
브리안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와 아이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 아이들이야.”
“……?”
“내 배로 낳은 내 아이들. 오빠한텐 조카들이 되는 거고.”
“……!”
내 말을 이해한 브리안의 얼굴 위로 점착 경악의 빛깔이 떠올랐다.
“대체, 누구의……!”
“그보다.”
그는 궁금한 게 몹시 많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의문을 슬며시 옆으로 치우며 물었다.
“우리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방을 옮길래?”
“……그래.”
브리안은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테오도르는 한동안 호수 저택에 홀로 남아 이브의 흔적을 더듬었다.
집주인이 급하게 떠난 바람에 이리저리 어지러운 저택에는 그녀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이를테면 저택 내부에서 발견된, 그녀의 체구에 꼭 맞을 것 같은 미처 챙기지 못한 의복이라든가.
그녀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침대 위에서 발견한 은사 같은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라든가.
혹은 지금 그가 올라 있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나무라든가.
[있지, 테오도르. 다음엔 네가 체르니시아에 놀러 올래? 언니들에게 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려 줄 거야!]오래전, 어린 날의 그녀가 황궁에 한 달여간 머물다 간 적이 있었다.
황궁을 떠나기 직전, 어린 이보네는 체르니시아 저택으로 그를 초대하겠다며 종달새처럼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재잘재잘 떠들었다.
[체르니시아 저택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어.] [호수?] [응응! 호수 앞에 있는 나무 위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오리도 볼 수 있고 물고기도 볼 수 있어!]이보네는 손뼉을 치며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체르니시아 저택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보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워 보였다.
테오도르는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체르니시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아주 커다란 황금색 물고기가 있는데, 꼭 네 눈동자처럼 예뻐. 그래서 돌아가면 그 물고기한테 테오라고 이름 붙여 줄 거야.] [내가 물고기가 되는 거야?]고개를 갸웃하는 테오도르를 향해 이보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이, 그게 아니라…….]그러더니 이내 두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예쁘게 접으며 말했다.
[가장 크고 예쁜 물고기란 말야. 꼭 너처럼.]그 말에 테오도르는 잠시간 말을 잃고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배시시 웃는 그 예쁜 얼굴에 한순간 홀려 버렸던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테오도르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좋아. 꼭 초대장을 보내 줘, 이보네.]그리고 그것은 끝내 지켜지지 못한 약속이 되고 말았다.
“여기도, 호수가 보이네.”
테오도르는 그 시절보다 훨씬 더 크고 굵어진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여 보았다.
제게 얽히던 자그마한 손가락의 온기가 유독 그리워, 가슴 위로 시큰한 바람이 불었다.
아르벨라의 마녀가 머물렀다는 호수 저택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 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가까이 펼쳐진 호숫가에 오리도 보이고 물고기도 보였다.
테오도르는 황금색 물고기를 찾으려고 눈에 힘을 주었으나, 보이지 않았다.
“왜 황금색 물고기는 없지.”
테오도르는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년 전, 이곳에 막 정착한 이보네가 황금색 물고기를 발견하자마자 작살로 낚아 로라와 함께 구워 먹었다는 사실은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폐하!”
아래에서 그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린든을 비롯한 황제의 호위단원들이 뒤늦게 그를 찾아 호수 저택에 당도했다.
테오도르는 무심한 눈빛으로 그들을 힐긋 내려다보았다.
“늦었군.”
그러더니 다시 시선을 들었다.
그는 아까부터 손에 쥐고 굴리던 작은 열매를 쳐다보았다.
갈색의 작고 단단한 열매는 다름 아닌 도토리였다.
이 계절에는 결코 날 리 없는.
그러나, 그가 불과 며칠 전에 보았던.
조금 전 이 저택에서 그가 주운 것이었다.
도토리 열매에는 작은 구멍을 통해 실 한 가닥이 꿰여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나 만들 법한 목걸이 모양으로.
[이거 바 바. 도또리야.]제게 도토리를 보이며 종알거리던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생각난 순간, 그의 마음속에 확신이 피어났다.
“이곳에 이브가 있었어.”
테오도르는 속삭이듯 읊조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그 아이도.”
이브와 함께 있었을, 그 아이는 누굴까.
[이브가 죽기 전에 아이를 가지고 있었단 건 알아요?]일순 테오도르의 잘생긴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에른스트는 심약한 겁쟁이였지만, 거짓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테오도르는 그 말을 온전히 외면할 수 없었다.
이따금씩 생각이 날 때면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따끔따끔 거슬렸다.
정말로, 이브가 아이를 가졌던 걸까?
그리고…… 이곳에서 아이를 낳고 길렀던 걸까?
어쩌면 제가 보았던 그 작은 여자아이가, 그녀의…….
‘그래서, 자꾸 내 앞에 나타나는 건가? 이브의 아이라서?’
나름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그런 거라면…….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지?’
으레 뒤따를 수밖에 없는 질문이 그를 더욱 아프게 괴롭혔다.
에른스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브가 아이를 가진 건 4년 전 겨울이다.
그리고 열 달을 그녀의 배 속에서 버티다가 태어났을 아이는, 지금쯤 세 살가량이 되었을 테지.
테오도르는 이브를 꼭 닮았던 오딜리아를 떠올려 보았다.
‘말을 꽤 잘했는데.’
테오도르는 평소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몇 번 마주친 것으로는 이브를 닮은 그 작은 아이의 나이 따위를 추정하기 어려웠다.
‘그만하면 세 살 정도 된 건가.’
그러니 혼자 고민하여도 답이 나올 리 없는 자문이었다.
에른스트의 말이 정말이라면…….
‘내 아이인 걸까.’
어쩌면 나와 이브의 아이일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하니 한순간 가슴이 벅차오르다가 곧바로 바람 빠진 공처럼 음울하게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