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eighbours RAW novel - chapter 131
“깼어?”
“응….”
몸에서 익숙한 꽃향기가 났다. 기절하듯 잠든 틈에 몸을 씻기고 바디로션까지 발라 준 모양이었다.
“깰까 봐 드라이기 못 썼는데. 빨리 말려 줄게,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그는 그녀를 아기처럼 안아 들고 드레스룸 소파에 앉혔다. 편안하게 있으라고 스툴까지 가져와 두 발을 올리자 정신이 좀 더 명료해졌다.
의식은 또렷했지만 몸은 그렇지가 못했다. 오랜만에 혹사당한 근육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 댔다. 그렇게 몸은 노곤했지만, 머리카락에 와 닿는 훈풍은 따뜻하고 기분 좋았다. 그는 물기 하나 없이 머리를 바짝 말린 후, 그녀를 다시 번쩍 안아 들고 침대에 옮겼다.
시종이 따로 없단 생각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진 빠지게 만드는 당사자도 연우재니까.
“우재 씨, 나 물 좀….”
“응. 잠깐만.”
이내 돌아온 연우재의 손에는 물잔, 그리고 작은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그게 뭐예요?”
의미심장한 미소에 호기심이 더욱 커졌다. 보석에 관심 없는 걸 아니까 맨해튼에서 뭔가 사 왔을 린 없는데.
“아까 네가 예쁘다고 했던 거.”
연우재는 직접 보라는 듯 케이스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이건 아까….”
사과 축제에서 구경했던 터키석 반지가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건 또 언제 샀을까. 그냥 예뻐서 잠깐 구경했을 뿐인데 기어이….
“깜짝 선물이에요? 장난감이라 해 놓곤….”
살풋 웃었지만 연우재의 얼굴엔 장난기 하나 없었다. 그는 약혼반지를 빼 둔 그녀의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약지에 반지를 천천히 끼웠다.
“은효야, 나랑 결혼해 줘.”
뜬금없는 청혼에 고개를 들었다. 이미 2년 전 프러포즈도 받았고, 약혼반지도 매일 끼고 다니는데 새삼 무슨 소리지. 게다가 졸업까진 아직 더 남았는데….
“다시 정식으로 청혼하는 거야. 사실은 맨해튼 집에 주문해 둔 게 있는데 깜빡 잊고 안 가져왔어. 그래서 아쉬운 김에 대체품이긴 하지만….”
그때 뇌리를 스치는 뭔가가 있었다.
“혹시… 혼인 신고 얘기예요?”
연우재는 반지를 머금은 약지 손톱 끝에 입을 맞췄다. 대답이나 다름없는 몸짓에, 은효는 한숨을 삼켰다.
그녀의 학업이 완전히 끝나고 영구 귀국할 때까지 결혼을 미루기로 했었다. 약혼, 그리고 미국으로 나란히 날아와 일주일에 한 번씩 맨해튼과 이타카를 오가며 동거하는 것만으로도 둘 사이의 결속은 이미 끈끈하다 믿었다.
“알아, 우린 이미 부부나 다름없지. 그래도 그게 말야… 서류상 남이라는 게 싫더라고.”
“…….”
“식은 5년 후, 아니, 10년 후도 상관없어.”
“네, 그래요.”
은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그럼.”
안 된다고 할 이유가 없다. 이미 부부나 다름없이 지내고 있는 데다, 연우재는 저를 위해 뉴욕으로 함께 날아왔다. 어떻게든 주말만은 같이 보내겠다고 기어이 여기까지 또 날아오지 않았나.
“정말로? 정말 그래도 돼?”
그가 뛸듯이 기뻐하며 은효의 두 손을 꼭 맞잡았다. 그녀는 응응, 고개를 크게 끄덕여 주었다.
“네. 안 될 이유가 없으니까….”
연우재는 그녀에게 모든 걸 맞춰 주고 양보해 왔다. 지금까지 쭉. 그가 져 주지 않는 건 어젯밤처럼 침대 위에서, 제 욕망을 통제하지 못해 날뛸 때뿐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게 제일 문제기도 하지만.
후우,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자 기쁨으로 형형하던 연우재의 낯빛이 조금 변했다. 그 짧은 순간 생각이 비관적으로 바뀐 건 아닌지 불안해하는 눈빛이다.
“대신, 오늘은 이만해요. 나 좀 자야 될 것 같아.”
힘없이 웃어 보이자 그의 낯이 다시 활짝 펴졌다.
“그래, 어서 자자!”
우리 애기. 그가 그녀의 머리 아래 베개를 똑바로 고쳐 주며 옆으로 누웠다. 이불을 목까지 덮어 주는 손길이 너무 다정해 어제의 그 짐승과 정말 동일 인물일까, 새삼스러운 의구심마저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과제 마저 끝내게 정오까진 서재에 들어오지 말고요.”
“알았어. 대신 아침은 같이 먹자.”
“응. 헬렌 아주머니 주말에는 안 오시니까 내가 만들….”
노골노골, 눈이 솔솔 감겼다. 그러자 실내등이 하나씩 꺼지고 침실 바로 옆 스탠드 하나만 남겨졌다.
“내가 만들게. 너 좋아하는 맨해튼 한식당에서 잔뜩 가져왔어.”
정확히는 그가 가져온 게 아니라 새벽부터 비서들이 바리바리 싸서 보내 놓은 반조리 음식들이다. 데우고 다시 끓이기만 하면 되는 밀키트라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미소가 배시시 새어 나왔다. 은효는 고마워요, 잠꼬대처럼 중얼거리곤 그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이불 너머로도 전해지는 연우재의 온기, 익숙한 체취에 수마가 축복처럼 밀려들었다.
잘 자. 은효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휘감았다.
사랑해.
지난했던 시간의 아픔, 그 모든 시련을 무(無)로 만드는 한마디였다. 그 한마디가 있는 한, 그녀는 과거를 딛고 앞만 바라보며 나아갈 수 있었다.
더 이상 홀로 걸을 필요도 없었다. 그가 늘 함께할 미래엔 한 점 어둠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든, 동이 트면 어김없이 환히 밝아질 하늘처럼.
외전 마침.